플라톤의 뤼시스 : 왜 사랑을 이야기하는가?

2011. 8. 17. 00:00Review/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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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고전아카데미 박만준 교수의 강의를 청강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말은 고칠 수 있다. 이 말은 돌려 말할 수 있고 보충 할 수도 있으며 예를 들어 설명할 수 도 있다. 하지만 글은 고칠 수가 없다. 기록된 것은 말이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며 죽은 말이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사물의 실체가 말이라고 하면 그림자는 글인 것이다. 직접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직 말인 것이다. 글은 질문해도 대답하지 않는다. 뤼시스는 그래서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플라톤은 왕족의 아들이다. 문학가의 꿈을 가진 청년이었다. 당시 문학은 서사시가 대새였다. 대중과 밀접했고 이것은 곧 정치였다. 서사시는 정치 교과서이기도 했으며 실용적이고 구체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장르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 죽음 이후에는 소신을 가지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올바른 길로 갈 수 없다고 생각을 했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서 철학의 길로 그는 걸어갔다.
 지식과 가치가 합쳐져야만이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치라는 기준은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좋고 나쁨의 기준에 의해서 생성된다. 글을 통해서는 안되며, 좋은 것이라고 판단되더라도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만나 이야기 한다고 한다.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 정치가는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대학을 세운뒤 수업 첫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었다. 대학 수업 방식은 심포지움이었다. 심포지아라고 해서 같이 마시는 것.. 즉, 이러한 학문 탐구가 잔치로 생각했었다. 그만큼 서로 즐겁게 토론하고 답을 구하는 자리였다. 학생들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글이 아닌 대화로 살아있는 영혼들이 모여, 서로 자신들이 모여 개념을 바꿀 수 있었던 장이 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두발이 달린 짐승을 처음에는 구했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게도 그의 제자들은 답을 구한뒤 우연히 길을 가다가 닭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털이 없는 이라는 정의를 덧붙였다. 그런데 이 대학과는 라이벌 관계인 고액 과외 학자들의 제자들에 의해 이 정의 마저도 깨져 버렸다. 털없는 병아리를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 플라톤이 직접 나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직접 내렸다. "큰 것이 잘 보이느냐, 작은 것이 잘 보니느냐" 라고 했다. 사람이 모이면 사회가 되고 더 크게 되면 국가가 된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면 가정이 되며, 이는 작은 사회다. 원리는 바로 사랑이다. 결국 이 사랑이라는 원리를 통해 국가가 점점 형성 되는 것이다. 수치라는 부끄러움이라는 것도 일단은 상대방이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전제하에 생상되는 감정이다. 사랑의 출발인 것이다. 사람을 진심으로 다가오는데 부끄러워 지는것이 아닌가? 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좋다. 좋은것인 것이다. 좋은사람, 좋은 가정, 좋은나라, 좋은 것. 있을 수가 있고 없는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들이 좋은 것은 좋고 나쁜 것은 나쁘다는 것을 명확히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준은 달라도 각자의 기준에 맞게 움직이는 것이다.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다. 가진다는 것은 소유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는 곁에 둔다는 것과 일치하다. 결국 사람과 사람은 합일이 이루어 진다. 사회가 이뤄지고 이것이 사회존재 목표로서 생겨나게 된다. 즉, 목표는 사람이다.
 필리아나 에로스는 결국 사랑이라는 과정 안에서는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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