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비판적, 임상적 에세이들 리뷰

2011. 6. 30. 22:21Literatur/English

반응형
 현대영미희곡 연구 수업에서 윤화영 교수님의 강의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참고바랍니다.
 동물되기는 더나아가 분자되기의 과정이다. 이는 결연, 계약으로 배치되며 변용태의 순화 n이다. 탕영토화는 재영토화로 실패하고 실패 또한 판의 일부이다. 기본적으로 여성되기, 아이되기,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를 들 수 있으며 이것이 되기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존재의 내재성을 주장하였다. 큰 물방을이 바다를 이루는 것과 같다. 박물학은 풍성한 다양성을 지닌다. 구조주의는 관계들을 일치시켜 환원, 축소시킨다. 이렇듯, 계열과 구조로 파악하지만 그렇다고 구조주의의 구조는 아니다. 항들이 구분될 수 없을 정도로 공존하는 생성은 지속된다고 베르그송을 말한다. 작가되기는 작가 자체가 변용태를 주는 것이다. 개인적인 느낌이 아니라 무리의 실행이다. 내정유사성을 넘어 대적상증으로 간다. 구조주의의 구조분석이다. 축소지향적인데, 현재라는 선을 긋고나서, 거기에 있는 현재의 지점은 수많은 생성들의 블록드 에 절단면ㄴ을 그어 그 현실 그 자체가 모두 포함됨을 보는 것을 말한다. 나라는 것이 아닌 순간순간의 이것인 것이다. 반 오이디푸스로서 동물되기는 무리에 해당되기 때문에 결연을 통한 리좀적이다. 특정한 순간에 무리를 구성하는 모든 다른 선들이나 차원들을 고려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의 문제는 어떻게 존재를 규정하는 건가의 문제와 같다. 자아란 규정된 것이 아니라 진동들의 문ㅌ턱과 같다. 고정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무는 신적인 것이며 지각 불가능 하게 되기다. 한스라는 개체가 여러가지 관계속에서 다른 개체의 부분이 될 수 있다. 각개체가 하나의 무한한 한 개체이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다양체이다. 실제 이미지는 그 이미지 자체도 있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변용태, 즉 외연적인 부분들로 이루어 특정한 관계를 같는다. 위로는 내포적이다. 외연은 겉보기의 연장이다. 경도와 위도는 계속 변화하고 통과한다. 그 순간 순간 마다. 스피노자의 이것이다. 한스는 힘들의 차이 즉 자기안에서 외적으로의 관계 즉 배치안에서서서, 지도를 계속 변화시킨다. 인생 파도 처럼 말이다. 신적인 것 즉, 없음이라는 것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이다.
 철학은 문학이다. 내가 지각하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 그것은 비개인적인 지각과 정서다. 지각은 대상에서, 나에게서 느끼는 것이다. 문학과 철학의 공통점은 삶의 문제를 다룬다. 문화의 병, 진단, 징후 역할 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이다. 치료가 가능하다. 유한 양태에 대한 분석이다. 스피노자는 선과 악은 없다고 하였다. 수동과 능동에서, 수동은 종속이나 예속의 상태를 말한다. 진단을 통해 되기의 활동과정이야 말로 윤리적 과업이다. 미래에 달쳐올 악마적인 힘, 예를들어 스탈리즘, 파시즘 같은 것을 진단하고 치료해야한다. 스피노자는 기존 신학이 하나님을 왜곡했다고 한다. 인간과 자연 그 정당한 상태로 회복을 주장하였다. 오이디푸스, 즉 자본주의로 부터의 자유를 말하기도 한다. 없이는 질서가 없다. 체계 없이는 불가능 하다. 이를 편집증적 사고ㅎ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분열증 적인 욕망이 있다. 이 둘이 함께 작동한다. 그리고 창조를 한다. 체계는 탈주하고 창조한다. 억압으로 부터 벗어난 창조를 통해 서로 보완해나간다. 탈주는 탈 편집 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산업혁며으이 상품들이 우리를 유혹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산업 혁명이후 만국 박람회를 예로, 문화의 겉모습을 보장하여 합법적 유혹을 벌이는 것이다. 백화점이 그 예다. 유기체는 형태이다. 고정된 주체인 것이다. 고착화된 것은 되기의 상태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낳는 것은 차이다. 본질적인 차이의 시간으로 잠재적인 차이와 세계를 포착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적으로 함께 흔들리는 그 시간을 생각해야만 한다. 모든 가능한 분지점들의 하나의 세계속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의 상처가 잠재적 상태에 있다. 영화에서 클로즈업을 생각해 보자. 평소 전체의 세계를 본다. 하지만 클로즈업이 되면, 표정, 윤곽을 지울때, 눈물이 하나의 눈물이 아니라 고난이 될수 있음을 상징한다. 비개인적 정서로, 주체가 사라진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아담이 사과를 따는 순간이 실제라고 했다. 하나의 삶을 구성하는 내재적 요소, 양태들로서 하나의 실체는 존재의 일의성 구성하는 실체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내재적 요소인 지각과 정서는 자유롭고 존재적 일의성을 지닌다. 오이디푸스의 억압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다. 함께 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은 모든것이 공존하는  실재와 상반되는 가상에서 순수사건 시간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는 부분 충동 성향들이 상당히 통합한다라고 했다. 독자적 욕망으로 말이다. 신체가 외적인 형태는 해체되고 힘들이 출현하는 부분들이 있다. 신체의 해체는 외형을 가진 기관이 없는 것이다. 기관없는 신체는 개개의 신체를 기관의 힘 즉 강도들로 보았다. 강도적 실체로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강도적 힘들로서의 기관들이 되기이다. 자아와 비 자아 그리고 인간과 자연 혹은 내부와 외부. 더 이상 구분 안되는 지점까지 되기해야 한다. 순수한 강도를 느끼는 것은 분열증 적이다.
 왜 들뢰즞는 문학을 보았는가? 주체의 해체, 세계의 해체, 정치의 소수화, 안티오이디푸스 프로젝트와 연관이 있다. 베켓은 증인 즉 청중과 비전을 증언하는 그것을 이미지로 부여준다. 하나의 시간의 연쇄를 따르는 게 아니다. 고전문학의 경우 전체적으로는 아니다. 순수사건의 문학은 가상의 문학이다. 생의 힘들이 통과하는 것이지 생의 과거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 되기의 문체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것을 가상화 하는 것이다. 형태로 사유하기의 반대 개념이다. 페미니즘의 기획이 또 하나의 여성의 고정된 정복한 상태로 군림 할 수 있다. 이를 데리다는 폭력적 서열이라고 말한다. 여성 되기가 아니라 끊없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강도가 단지 지나가는 것이다. the가 아닌 a 부정관사는 비개인적인것, 즉 이것의 되기를 말하는 것이다. the 라는 형식적 특징을 버리는 것. 예를들어 백경에서 모비딕과 선장은 되기의 상태를 이룬다. 선장 한 개인이 아니라 모비딕이라는 흰 빛이라는 벽 그것과의 되기과정이다. 사물속의 생을 드러내기 위해서 창조되기 위한 필연적 우회로다. 때린아버지와 맞은 아들은 결국 오이디푸스 삼각형 구도를 지닌다. 베르그 송은 자아를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무규정적인 것을 통한 비전 그리고 되기를 말한다. 문학은 개인 기록이 아니다. 새로운 비전 즉, 세계의 기억과 비개인적인 기억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혁명적 되기에 서로 잡혀야한다. 새로운 세상을 지배위한 요청이 아니라 언제나 소수 영원히 마이너한 문학을 추구해야한다. 아드리안 케네디의 작품을 예로 들수 있겠다. 실제 삶에 서는 오이디푸스적 이다. 따라서 정신 착란적 문학 즉, 건강한 문학을 창조해야한다. 편집즉적 억압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생의 가능성을 지닌다. 탈주와 탈영토화는 영토에서 탈영토하는 것이다.
 포인트는 욕망의 흐름이다. 차기가 맞음으로써 성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마조히즘적이라고 한다. 욕망의 과정 그 자체가 중단이다. 영원히 정착하지 않는 결여 있는 상태이다.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적인 것이다.
 절대적인 것은 여러가지 양태들이 된다. 특정한 시공간에서 말이다. 문장 자체를 길게하거나 싹을 틔운다. 이를 시공간적 인터벌을 창조한다로 할 수 있겠다. 타자들의 관계를 창안해야한다.
 베르그송은 실제 오브젝트는 항상 잠재적 이미지 라고 하였다. 설계도와 DNA가 그것이다. 가상은 변화한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가상은 실제와 함께 하는것이다. 서로 낳고 낳는다. 항상 같지 않다. 변한다. 잠재가 현실을 낳는데 1:1 대응이 아니다. 현실화가 잠대와 같은 것은 하니다. 시간관자체는 시간 즉, 과거, 연재, 미래가 아니라 순수과거를 말한다. 이는 잠재 자체이다. 베르그 송은 지속을 중요시 하였다. 부정사의 상태는 특이점의 상태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