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24블로그축제] 나의 한 뼘을 성장시킨다고? 그게 말이 되냐? 영화 '굿바이 레닌'

2011. 7. 8. 23:30Review/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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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이제 어느 덧, 20년이 지나가고 21주년을 바라보고 있는 독일입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반세기 분단국가로서 아픔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남북관계가 정치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상호간에 다가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지요. 근원적으로 보면 독일과 우리와의 근원적 분단은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으르렁거려서 나눠졌다거나 국제 냉전과 맞물리거나 하는 부분은 어느 정도 우리 한국과 공유하고 있습니다만, 뼈아픈 서로간의 전쟁은 잊지 못할 상처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항상 통일이 되면 어떨까? 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을 인터넷상에서나 텔레비전 혹은 신문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통일 이후만 놓고 보아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벌써부터 고민을 하고 있긴 합니다. 스탈린이 말하길 '한 사람이 죽으면 비극이지만, 다수가 죽으면 통계다.' 라는 말을 합니다. 그만큼 통일 문제 전후 사정을 미세하게 가까이서 들여다 보는 것과 멀리 보는 것과는 분명히 다를 겁니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그 유명한 독일 영화 '굿바이 레닌' 입니다. 아마, 한국인이라면 독일 관련 수업 혹은 독일에서 독일 문화 관련 수업을 듣게 되면, 적어도 1년에 한번 정도는 볼 정도로 지겹게 보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저는 독일 통일 20 주년이 되던 해에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교환학생들과 함께 이 영화를 7번째 보게 되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독일은 외국인 학생들에게 독일 문화를 소개 시켜주면 항상 이 영화를 틀어 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축제 속에 남아 있는 개인의 아픔

  바깥의 상처는 아물 수 있지만, 내면의 상처는 아물 수 없습니다. 독일 통일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무언가 앞으로 기대될 우리들의 미래 그리고 그 상처들이 공감되어 질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분단은 사실상 유럽 전체의 관심사 일 수 밖에 없습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였고 유럽인들에게는 아직도 내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이 아직도 일제치하 때의 고통을 상기하는 것처럼 말이죠. 유럽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독일의 과거 문제 이후, 냉전 시대로 인한 분단 그리고 나타나는 독일인들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독일은 서독의 '라인 강의 기적'을 이뤄내고 경제 대국으로 나서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동독은 소비에트 식 사회주의 국가를 유지하고 사회주의 체제로 90년까지 집권하게 됩니다. 서로 오랜 시간 동안 나눠지고 상호 교류 노력을 했지만, 막상 통일은 하니 크나큰 부작용이 생기죠. 같은 나라의 사람이었고 서로 통일을 원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자본주의 서독이 사회주의 동독을 흡수한 이후는 독일이라는 나라에게 크나큰 시련이 나타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말이죠. 그만큼 전쟁뿐만 아니라 우리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정말 신기하게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개인적으로 동작하고 있는 그 이데올로기에 대한 충돌에 대한 아픔은 누구에게나 공감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들과 독일의 사정뿐 아니라 지금도 아프리카 내전 이라던 지 이슬람 국가의 민주화 시위 라던지, 아니면 극단적으로 가장 가까운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 라던지 말이죠. 우리들은 단순히 여러 매체를 통해 멀리 보고 수치나 통계를 통해 보고 있지만, 개인의 아픔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 아픔을 영화 '굿바이 레닌'은 독일인들의 시각을 통해 국가 내의 시련에 담겨있는 어느 한 가족의 비극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통일 문제에 대한 개인적이면서 국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 사이

  탈북자 문제가 날이 가면 갈수록 증가 하고 있는 문제는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독일도 그랬습니다. 동서독 분단 후, 동독의 사람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려고 날이 가면 갈수록 증가 했답니다. 특히, 베를린은 심각했죠. 얼마나 많이 탈출했으면 장벽을 설치하고 감시도 강화 했겠습니까? 아직도 많은 독일인들이 탈출 하는 영상을 보면서 울고 있답니다. 얼마나 처참했냐 하면, 서독에서 누군가가 강한 연기가 나게 하여 주변 시야를 흐리게 하는 폭탄을 터뜨리면 그때 동독에 있는 시민들이 빠져 나가기도 했고요, 분단이 심각하기 전에는 장벽 부근에 건물이 가까이 있어서 건물 내에서 서독으로 그냥 뛰어 내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차 내부에 (여러분 차 운전하는 기어랑 액셀러레이터 있는 그곳을 개조해서!!) 숨어 탈출 하는 사람 있었습니다. 지식인들은 좀더 편하게 탈출 했는데요. 바로 세미나를 핑계 삼아 서독으로 간 후, 동독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영화의 주인공 알렉스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이죠. 어머니는 결국 비밀 경찰들에게 조사를 받게 됩니다. 어머니는 몹시 절망 할 수 밖에 없겠지만, 자신의 자녀, 알렉스와 아리안네를 위해 열혈 사회주의 당원이 됩니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 알 수 있듯이, 조금이라도 사상에 의심이 되는 인물은 비밀 경찰이 집요하게 감시 당하게 되죠. 하지만 알렉스가 청년이 되자 반 사회주의 운동을 하게 됩니다. 독일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니콜라이 교회를 시작으로 민주주의 집회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 사건이 점점 퍼져나가, 베를린에도 대규모 집회를 벌이게 되는데, 그때 알렉스도 참가를 하게 된 거죠. 집회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경찰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저항을 하면 다치죠.; 이 상황을 어머니가 우연히 보게 되고 쓰러지게 됩니다. 갑작스런 충격에 쓰러진 알렉스의 어머니는 집회에서 만난 병원 간호사인 라라와 알렉스와의 키스 도중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알렉스는 의사에게 어머니의 시한부 선고를 듣게 됩니다. 의사의 당부는, 어머니를 놀래 켜서는 안 된다, 였습니다. 알렉스는 어머니를 남은 생애 동안 편안하게 집에서 보내려고 노력을 해야 하죠. 어머니가 사경을 헤맬 때, 동서독 통일이 되었거든요.

개인적 문제에서 생기는 증상

  영화의 내용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 어머니를 위해 알렉스는 무슨 수를 동원해서 아직까지 분단된 척 하려고 노력을 하면서 겪게 되는 좌충우돌 영화겠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관객들에게 쉽게 감독의 의도를 알 수 있게 해주죠. 하지만 너무 영화에 몰입하다 보면 가슴 아픈 현실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어느 한 개인적인 아픔이 이대로 슬프지만 행복하게 끝날 거 같지 않은 게 영화가 아닌 현실에 일어날까 봐 두렵습니다. 영화감독이 독일인이 었기 때문에, 직접 처한 자신들의 숨겨진 문제들을 굳이 밝혀 내지 않아도 공감되는 몇몇 사실에는 영화 내용상 깊이 파고 들어가지 않은 부분이 있죠. 바로 서독인과 동독인과의 갈등 문제 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개인의 비극적이면서 유쾌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전반적인 배경은 통일 이후 동서독 갈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질서를 거부한다. - 개인의 탈주에 대한 문제

폐쇄적인 동독인들은 통일 전후로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나온 거처럼 서구 문화가 바로 그것이죠. 야한 비디오라던 지 짧은 치마는 기본입니다. 알렉스가 어머니의 통일에 대한 충격을 막기 위해 서구 문화 차단을 필 수 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알렉스와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의 오해를 알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머니는 애초에 열혈 사회주의 신봉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잠깐 재미있는 생각을 해볼까요?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우리 인간들의 사회는 항상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편리에 대한 발전은 있을 수 있지만 거기에는 항상 부작용을 낳죠. 몇몇 매체에는 지구 멸망에 대해서 예견하기도 합니다. 그럼 잠깐 생각해봐요. 지금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 한국에서 사회가 잘 작동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념. 이념이라는 말을 북한과 비교하면 자주 하잖아요. 문제가 있는 사회는 분명하지만 우리는 여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서 만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존재합니다. 사회부적응자라고 하죠. 한국의 사회부적응자는 한국에서 살기 힘듭니다. 한국에서 매끄럽게 살아가려면,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거기의 이념에 맞게 살아가야만 하죠. 문제 그 사실 조차 모르는 게 약일지도 모릅니다. 알렉스의 어머니, 크리스티아네는 비밀경찰의 감시 속에 아이들을 위해서 어쩔 수없이 공산당원의 교사가 된 겁니다. 애초에 서독으로 도망친 그녀의 남편과는 한동안 내통한 관계였었죠. 가족여행에서의 그녀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라라와 크리스티안네의 언쟁입니다. 이 부분은 한국에서 상영된 영화에서는 놓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번역을 하지 않았거든요.;;; 이 언쟁 속에는 라라가 크리스티안네에게 알렉스의 거짓을 이야기 해줍니다. 사람은 두 번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고요, 나머지 하나는 사회에서의 죽음입니다. 사람은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태어나자 마자 타인에게 이름 지어지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지요. 내가 내 마음대로 호명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태어나자 마자 공산당원이 될 수 있고 왕의 일개 백성이 될 수 있고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 되어있는 상태로 정해져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맞게 살아야죠. 만약 내가 그것을 반대한다면 그 사회의 일탈이 되는 겁니다. 그 사회에 낙인이 찍히게 되죠. 알렉스는 어머니의 환상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그게 두려웠던 거죠. 하지만 오해였습니다. 어머니는 사회에서 두 번 죽지 않기 위해 일부러 공산주의를 선택한 거뿐입니다. 라라는 알렉스와 마찬가지고 오해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 이데올로기가 무너졌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한, 크리스티안네의 사회질서 속을 깨뜨리고 실재의 혹은 진실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 겁니다. 우리 한국이 통일을 하게 된다면, 아니 꼭 굳이 통일 말고 다문화 문제만 놓고 본다면, 이방인에 대해 새로운 사회질서 혹은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해야 할까요? 우리 질서 속에서 상대의 문화를 존중하느냐 또는 억누르느냐 그것도 아니면 상대 문화자체 깨뜨리느냐의 문제 인 겁니다.

나가 바라보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시선 - 오씨와 베씨

동독 통일 20주년이 되는 해에 저는 동독여행을 갔다 왔습니다. 웬만한 관광객들이 꺼려한다는 그곳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레스 덴, 바이마르, 바르트부르크 같은 유명한 관광지는 물론 예외인 곳입니다. 하지만 진짜 동독 시골 가보시면 이방인에 대한 놀라움, 신기함 혹은 순수한 눈빛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한국인 신학 공부하시는 분들이 간다는 루터 도시에만 가도 머리를 깎으려고 하는데, 미용사가 아시아인 머리를 어떻게 깎아야 될지 몰라 적지 않게 당황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대개 동독의 인프라 구축은 잘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독과 상대적이라기보다, 우리가 상상했던 거만큼 발달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말인거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시 외곽으로 가면 동독의 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긴 하죠. 드레스덴에서 할레로 가는 지역기차를 타고 가더라도 그쪽 주변 지역들 보면 다른 곳과 상대적으로 열악한 역들과 주변 지역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동독에 대한 인프라는 정말 좋은 거 같다는 것은 절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 같은 경우 우연히 동독 지역 신문을 읽어 본적이 있었습니다. 동독지역 청소년들의 실업률이 꽤 높았습니다. 아직까지도 네오나치라고 불리는 극우 단체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집회에서 대학생들이 극우 단체들에 대항해서 드레스덴에 극우단체에 대항하는 집회를 벌이자고 홍보하는 것도 생각나네요. 장거 하우젠이라는 독일 마을에 가보면, 벽에 낙서가 있는데, 거기 보면 누가 나치 문양을 그리고 거기에 또 다시 누가 그 위에 X표를 그렸더군요. 그런 낙서가 많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외국인 때문이다. 그 이유는 외국인이 독일에 많이 살기 때문에 우리들 일자리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그들의 논리 입니다. 그만큼 동독의 경제 사정이 겉과는 다르게 속은 좋지 않은 상황을 말해주는 겁니다. 통일 이후 서독 사람들에게 골치 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세금문제였죠. 동독을 재건해야만 했습니다. 그만큼 동독의 경제 사정이 나빴던 거죠. 그 이유는 영화에서도 나옵니다. 동독은 자체적으로 생산했던 경쟁 없는 경제체재였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몇십년 동안 경쟁 속에 살아남은 대 기업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죠. 동서독 통일 이후 동서독 문제를 그리고 있는 정치 풍자 만화가들의 그림들은 대부분 이런 자본주의 사회가 기다렸다는 듯 동독으로 밀려가 다 잡아 먹으려는 그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그림대로 순식간에 동독의 기업들은 몰락했죠. 통일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동독의 제품을 구할 방법이 없을 정도 였죠. 자연스레 동독 실업률이 늘어나게 됩니다. 거기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회체제에 대한 적응이었죠. 한 순간에 달라져 버린 경제, 사회, 심지어 문화 체제에 빠른 변화가 필요 했던 겁니다. 변화에 빠른 젊은 사람과는 다르게 중장년이상 되시는 분들은 적응을 못하고 실업자가 되는 거죠.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 못하는 자는 옛 동독을 그리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디 서독만이 동독을 이렇게 휩쓸었겠습니까?? 코카콜라, 이케아 등등 다국적 기업들이 들어왔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동독에 투자를 하는 거죠. 동독 정착해 있던 사람들은 갈 곳을 잃은 겁니다. 취직해봐야 바로 새로 들어온 기업들에 새로운 출발을 해야 했고요. 공무원 같은 경우는 체제가 달라져 버리니 서독입장에서는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교육이 그렇죠. 동독인들은 서독 인들을 보면 돈 많고 살이 엄청 찐 모습을 생각하게 되고, 거꾸로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서 생활하는 시민답지 않게 순하고 게으르고 일도 열심히 안하고 서독인들 세금 가지고 먹고 사는 존재들로 생각하는 겁니다. 얼마 전 우리 한국도 통일 세에 대해서 한때 기사화 된 적 있었습니다. 독일의 경우 통일 세만 대략 7~8%정도 떼어갑니다. 통일 세만요. 한때 세계 2위 규모의 서독이었고 통일 이후 경제가 휘 청해도 겨우 지금의 경제 수준을 버티는 게 탄탄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인데, 우리나라는 통일을 하면 경제 문제로 과연 남한과 북한 사람들과의 서로에 대한 비하 구도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숭엄한 것이 무너지게 되면. 다른 사람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는 순간

중세 교회를 상상해 보세요. 교회외부는 마치 천상세계를 보는 것처럼 아래에는 다양만 만물 조각들이, 위로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고 꼭대기에는 천상으로 향해 가는 길을 묘사했죠. 내부에 들어가면 수많은 성경 관련 인물들과 신화화된 위대한 왕과 교황들의 모습도 있습니다. 곳곳에 유명한 그림도 있고요. 대부분 예수와 마리아에 대한 그림들 입니다. 이러한 여러 조각과 그림과 찬송가가 울펴퍼지는 가운데, 보물이 있지요. 우리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 그 보물에서 마치 나 같은 이는 건드릴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그러한 우상들이 그러한 신화들이 다 무너진다면 우리는 어떤 느낌을 가질 까요? 지그문트의 이야기 입니다. 알렉스가 동경했던 인물, 가까이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우상이 알렉스에게 우연히 나타납니다. 택시기사로요. 영화의 시작, 중간, , 곳곳에서 지그문트 이야기는 계속 삽입되어 있습니다. 동독의 자랑거리였고요, 아이들에겐 우주는 미래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꿈은 알렉스에겐 변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자신이 도달 할 수는 없어도 끊임없이 연관 지어지면서 상상을 하고 다른 방식으로 체험을 하지요. 하지만 변한 세상속에 그 실재를 보게 된겁니다. 마치 내가 만난 소개팅녀가 예쁜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나서 한가인을 보고 다시 아내를 보니 아닌거 라고나 할까요;;; 그 숭엄했던 존재가 숭엄하지 못하게 될 때, 알렉스는 무의식 속에 잠재 했던 꿈이라는 것을 잃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거기서 끝내지 않죠. 그 우상의 위대함을 어머니의 세계에서 실현 시키려고 한 겁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통해 다시 한번 로켓을 날리게 되죠. 개인의 문제든, 우리 국내의 문제든, 외국의 문제든지 간에, 결국은 나, 한 단체, 하나의 국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했고 매끄럽게 돌아간다는 질서가 무너지게 되면 다시 더 좋은 방향으로 재건하거나 새로 만들어 가야하는 거 아닙니까? 언젠가는 통일문제, 다문화 문제는 질서 자체를 위협하는 일이고 거기서 기존 정책들에 대한 기대했던 실재들과 어긋날 수 있다는 거죠. 영화는 그것을 우리가 아닌 그들을 통해서 해결해 나간 것입니다. 그들도 알고는 있지만

나가 성장하는 것 이상을 위해. 우리 아니냐?

  영화 굿바이 레닌은 앞으로 우리에게 맞닥 여러 문제를 간접적으로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주는 거 같습니다. 처음에 이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독일의 통일 뒤 이야기를 생각했었는데요. 막상 자꾸 보니 나라는 존재가 세상을 바라보고는 시각의 변화를 넘어 우리의 변화를 생각하게 하네요. 굿바이 레닌에서의 비극은, 어느 한 문제들이 개인으로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모든 문제들이 영화 장면, 장면 마다 스쳐지나가지만 그것을 개인이 해결할 방도는 없는 거죠. 그렇게 영화는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라면 해결 가능 합니다. 영화에서의 드러내지 않고 자꾸 강조한 부분 부분들을 이으면, 모순된 사회 속에서 생기는 슬픈 개인적 일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희망이 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나 하나 한 뼘 성장하는 것은 작지만 큰 일입니다. 나의 생애에서요. 그러나 나만의 문제냐 나 그 이상의 가치의 문제냐는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시각으로 현상을 보느냐, 어떤 가치를 가지고 현상을 보느냐에 따라 영화의 의미도 달라진 다고 봅니다. 독일 통일에 대한 문제도 그렇습니다. 단지 자본 그 방식 그대로, 일방적인 퍼주기 정책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정작 개인의 일은 골로 썩고 있었던 겁니다. 적어도 독일 통일 이후 문제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결한다는 것은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우리와 그들... 영화에서 나오는 알렉스와 그의 직장 친구가 만들어낸 합작품은 그래서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오씨와 배씨는 강제로 팀을 이룬 셈이지만, 각자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목표와 성장을 위해 함께 노력한 것입니다. 나의 성장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는 마치 꿈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거든요. 우리가 살고 있는 상상, 상징, 실재 이 모든 세계들이, 나만으로는 존재 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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