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국희곡연구 강의록 4

2011. 8. 1. 00:00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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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너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
 경계를 허무는 것은 우리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대단한 변화다. 다너 해러웨이는 Companion species manifesto (동반종선언문) 을 썼었다.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이보그는 포스트 휴머니즘, 포스트 구조주의를 표방하였다. 들뢰즈의 사유는 끝임없이 답이없는 투쟁을 해도 답을 찾지못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사이보그는 타자인 나와 나는 공유와 소통관계인 존재다. 존재로서의 인증이다. 관계 맺기같은거 말이다. 병균이라던지, 질병이라던지.. 개념성의 정체성을 통해 남자들 이야기를 싫어하고 기독교적 신화로 부정한다. 유기적 형성된 가족이라는 것을 부순다. 80년대는 당시 혁신적인 운동이었다. 실질적인 주장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다. 차이는 구별짓기다. 인간과 동물 구별을 없앤다. 인간과 동물과 기계구별을 없애는 것이다. 이는 권력 구조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고정된 사고방식 해체는 자의적 반대를 해체시키는 것이다. 정치제도를 전복시킨다. 사이보그의 메타포를 이글은 중시한다. 개념상에 있어서도 구별과 차이를 타파시킨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이해한다는 것은 기존의 자기보다 낫다는 사람에게 알게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지적 불평등하다. 목수는 목수로서 교수는 교수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으로 불평등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잘안다.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평가 하느냐에 따라 불평등은 달라진다. 부조리극에서 망각은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부조리에 들어가면 대상을 대상 그 자체로 본다. 너와 나는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언어, 시선 폭력에 비치는 시스템이 아니라고 했다. 그 자체로서 부름에 응답해 주는 것을 말한다.

 자크 랑캉의 거울단계
 상상계에서 나는 나를 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거울 속의 이미지 즉, 타자가 나의 주체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타자가 나의 주체를 주체로 결정하는 것이다. 나의 상관없는것, 즉 아이가 태어나면 조카가 된다. 이미 자신의 주체 행동 방향이 결정되어 있는 상태다. 행동 범주까지 결정된 상태인 것이다. 동일시는 백인의 문화, 행동 방식이 자기와 자기를 알지 못하게 자아를 형성함을 예로 들 수 있다. 자기는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것. 즉 소외인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 생각이 내생각이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나의 생각은 타자의 생각이다. 타자의 욕망이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인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존재 또는 생각해서이다. 무의식은 언어 처럼 구조되어 있다. 환유라고 말한다. 나르시시즘을 통한 거울은 나를 비치지만 타자인 것이다. 남성적 시각체계는 억압체계이다. 가부장질서에 작동하는 무의식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가? 보는 것의 즐거움은 응시를 통해 통제를 동일시한다. 영화관에서주인공이 칼을 찌르는 것을 관객들이 동일시하고 감정이입하는 것을 그 예로 들수 있다.  알튀세르는 남성적으로 지배시키는 재생산하는 억압기구라고 한다. 로라 멀비의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에서 보면, 시각적 쾌락은 남자가 주로 여성을 성적 쾌락과 여성통제를 중시한다.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것이다. 화면을 동일시화 한 거울이다. 남성의 시각적 쾌락에 기초를 하고 있다. 어린아이의 동일시는 어른의 대중문화 동일시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동일성은 타자의 행동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교육 받는다. 결국 네러티브가 아니라 아방가르드라는 것이다. 

 벨 훅스의 페미니즘 : 주변에서 중심으로 
 가부장제는 구조화된 성차별 주의다. 머리와 가슴에서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응한다. 성차별적 억압 그 자체가 사회화다. 뒤돌아가는 것은 저항하는 것이다. 제국에 대항해서 되받아 쓰는 기법을 중시한다. 

 샘 셰퍼드의 진짜 서부
 이성과 논리가 없다. 서부는 이미지화 되어버린 삶이다. 리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오스틴과는 대비되는 인물이다. 사울 키머의 선택은 메타드라마로써 리다. 선택했는 데 결국 활성 못하고 요구한다. 모하비사막은 비행기 버리는 곳이다. 머리가 생각하기전에 몸이 느낀다는 것은 즉자적이다. 레비나스는 하나의 개별자를 각자의 존재로 인정하는데, 그것이 개별자로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분리한다. 피카소는 앞모습, 뒷모습, 옆모습을 다 그려내었다. 이는 파편화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온다를 피카소의 사유를 통해 생각하면, 우리는 기다린다 하지만 오지 않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처럼 가자해도 가지 않는 것이다. 상상계를 건너 성징계를 가면 언어화된 세상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계이다. 여기서 기다리는 것이다. 공허함으로 권태와 불안을 낳는다. 종료시각 12시 40분에 매여있다. 하이데거는 빈 무대에 대본이 없다. 우리가 매워야한다라고 했다. 매우려면 시간을 주여야한다. 사실주의는 내가 있다고 생각해서 있는 것이다. 무대가 점점 어수선해진다는 것이 이 작품이다. 시기는 대중문화가 점점 주류가 되어가던 시기이다. 아도르노가 말하길 비판은 사회밖에서 비판이라고 했다. 예술은 타자로서 존재하고 비평한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젠더를 포함해서 생물학적 성도 인간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정신분석이론에서 언어는 중요하다. 언어 담론적 구성 때문이다. 환상과 내가 나인 것은 나가 정체성을 갖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다 가 아니라 나타나는 것은 담론적 구성물로 형성되어 있다. 푸코는 간수가 아니라 그 무엇이 나를 통제한다라고 했다. 감시카메라가 가짜라도 의식하는 것 처럼 말이다. 정신이 육체를 통제한다. 밖에 있는 것이 안에 있는 것이다. 즉, 영혼이 육체를 통제한다. 실재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브레이크를 밟는 것은, 외부의 규칙에 의해 정신적으로 육체를 통제하여 멈추게 한다. 실재의 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르다. 거울에 비쳐 나는 그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타자가 나에게 들어왔다. 즉 규범이 나에게 들어와서 통제 즉, 판타지를 갖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외부 것을 보고 정해진다. 정체성은 내면에 먼저 고착된다. 나는 남자다 라는 정신 고착 후 남자라고 행동하는 것이 그 예다. 나는 여자다. 규체 고착후 남자라고 통제된다. 그럼 남자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게이 또는 레즈비언 되기다. 불만이 생기고 성의 억압이 생겨서 발생된다. 이성애적 규제 즉 담론이 구성된다. 주체는 은폐되어 온거다. 외면과 내면 간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다. 거기에 따른 트러블이 생기는 것이다. 공연성은 자싱의 것이 아니면서 나인 걸로 역할을 한다. 남자 역할 하기 때문에 남자가 된다. 육체의 본질에 대해 행위를 하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몸 자체는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젠더와 성의 경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본질이 무엇인지 애매하게 된다. 드랙은 여장 남자다. 우리는 도덕적 질서에 의해 갖쳐있다. 개념과 지식의 질서에 억압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외연으로 부터 내면적인 것을 깨치게 한다라고 했다. 부조리극은 누군가가 선 또는 악인지 따질 수 없고 존재 개별 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개별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조리극들 통해 충격을 준다. 그리고 관객이 멍해지면서 개념 즉, 권력이 사라진다. 왜냐면 개념이 입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존재 모든 것들을 개별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월든에서 빈가슴속에 왔다 사라지는 방식. 숲을 걸을 때 내가 그것을 포착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숲이 의미를 저절로 불러 넣어주는 것이라 했다. 백남준은 A 와 B가 다름은 B 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타자성의 철학이다. 슈뢰딩거는 부조리는 우리 삶의 진정한 삶 그 자체가 부조리라고 했다. 자연을 새로운 시작으로 봤다. 인간이 보는데로 보는것은, 자연에는 원래 구조가 없는데 인간이 체계를 세운 것임을 말한다. 백남준은 다른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의 차이를 통해 다른 것과 다른것 그것은 모든 대상이 그 나름으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타인을 타인으로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이다.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
 지식과 권력이 야합을 하여 통제를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길, 존재자는 명사이다. 근대적 주체이며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지식을 포착한다고 하였다. 보편은 타자를 배재한 상태다. 지식이 형성되어 가고 지식의 고고학으로 변화된다. 데카르트에서의 나는 이에 억압되어 간다. 이성이 되고 자아가 되는 것이다. 이는 선과 악으로 구별되어 진다. 지식이 편협해 진다. 동일자는 보편적 의미이다. 목표가 같게 된다. 서로 경쟁하고 갈등을 불러 일으킨다. 이를 동일자의 철학이라고 한다. 규제, 금지, 강요, 우리 스스로 규제하게끔 한다. 스스로 폭력을 내면화 시킨다. 이와 다르게 차이의 다름은 스스로 인정해 줄때 생성된다. 물론 이는 평가제도와는 다른 것이다. 존재는 선과 악이 내재되어 있다. 조화를 이룬다. 불료는 일체 유심조라고 했다.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욕망이 그것이다. 사람은 말을 많이 해서 말에 맞게 진화하고 말은 달리고자 해서 닭을 쫓고자 하는 욕망을 말한다. 레비나스는 이 존재와 존재자를 한 통속으로 봤다. 존재에서 존재자다. 타자는 죽는다. 초라하다. 이는 나에게 명령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반복된다. 그리고 책임감으로 초월된다. 신이 있고 나에게 명령을 가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삶을 비가시화 시켰다. 계보학적 글쓰기는 과거의 과오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는 문화소다. 사소한 것이 거창하게 된다. 학문화와 체계화와 담론화가 된다. 이것이 악압 이용에 쓰이는 것이다.
 
 시카고의 성도착증과 공간
 Society of the spectacle 에서 spectacle 이 모여있고 우리는 그 일부로서 동질화되어 있다. 종교적인 환영과 환상을 물질적으로 변화시킨다. 권력이 자아 초상이다. 경제 시스템은 고립적이다. 외양을 중시한 것이다. 외로운 군중들을 생각할 수 있다. Space practice 는 Perceived life 다. 재현의 공간은 실천적 공간이자 인간을 위한 공간이다. 공간의 생성이다. 존재자적 삶은 핀 꽃으로 비유된다. 존재 그 자체는 기념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자가 존재해야만 한다.

 베스 헨리의 마음의 범죄
 고전적 잣대로서 큰 범죄는 프랑스 혁명이다. 레니는 질병에 대한 상대방의 분석을 가진다. 불결과 과거와 추측으로 은유로서의 질병을 가지고 있다. 할아버지에 의해서 주입에 의해서 내면화된 상태다. 질병에 대한 문제 담론화가 형성된 것이다. 재현의 문제가 발생된다. 재현은 나의 기준에 따라서 범주화 시킨다. 정의화 시킨다. 남부의 인종차별은 투포할때 발생된다고 한다. 아이 쥐에 물린 분포도로 삶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여성도 가부장 논리에 휩싸여서 질서에 순응 하였다. 인물들의 결정은 행위 자체가 우연성이고 비논리적이고 비 합리적이다. 랑시에르의 혁명의 기폭제인 셈이다. 랑시에르는 잘아는 사람은 체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와 반대로 알튀세르는 소비, 체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신 자유주의는 강한 진보성을 가진다. 미래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기대한다. 샤르트르는 타자의 눈에 우리가 행동하는 사회로서 타자의 눈 속에 경쟁과 신경이 있다고 한다. 노자는 질그릇과 빈그릇을 통해 아무것도 아닌것 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중요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학교 건물 세우고 모든 학생은 건물 안에 다 들어가야만 한다. 앨범은 정화하게 기록하고 담는다. 이는 남부여성의 삶을 온전히 담는 것이다. 리얼리즘의 기본 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의 현재화로 시간성과 평면화로 과거의 의미를 읽어낸다. 함께 모여 이야기 할 수 있는 삶이다. 거대 담론은 공식 역사만 증오한다. 사소한 이야기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아인식으로 전과 이후가 다르면서 파악된다고 했다. 내가 몰랐던 부분을 인식하고 변하는 것이다. 범죄는 새로운 세계와 변화의 시작이다. 레비나스는 이전과 이후를 다른 사람으로 변모시킨다고 했다. 이야기 뒷편에 작동하는 폭력과 억압이 산재한다. 전화는 일종의 감시 기능이다. 디카는 쉽게 지울 수 있다. 기록이 아닌 어떻게 잘 변화하나 지우나를 결정한다. 이는 삶의 양태이다. 이지라이더는 로드 무비다. 레드넥은 자신의 삶도 비천하면서 보수적인 인물을 말한다. 범죄는 법의 영역에서의 문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수직적 과 수평적
 수직적 <-> 수평적, 모더니즘 <-> 포스트모더니즘, 상징주의 <-> 다다이즘, 목적 <-> 유희, 통제/말중심 <-> 소모/침묵, 예술작품 완성적 <-> 과정과 우연, 총체적 <-> 해체적, 테제 <-> 안티테제, 현존 <-> 부제, 의미론 <-> 수사학, 배열관계 <-> 결합관계, 종속적 <-> 병렬적, 은유 ex) 내마음은 호수요 <-> 환유 ex) ATC->TAC->CTA ... 욕망의 환유 , 인과관계 <-> 지연, 확정성 <-> 불확정성, 초월 <-> 내재성, 현학적 <-> 아리러니, 신 <-> 유령, 편집증 <-> 신경증, 해석  <-> 비해석

 총론
 발터 벤야민은 기존에는 카타르시스를 지녔지만 서사보기는 거리두기를 지니고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유진오닐은 실험적 작가였다. 부조리하고 심리적으로 말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래 기다림을 그렸고 모든 사물은 어디론가 가고 자라는 욕망이 있다고 설명했다. 목적론적이다. 리얼리즘과 통하는 부분이다. 기존 질서를 그대로 복제하여 가장 유사한 소설인 탐정 소설과 같기 때문이다. 유진오닐의 소설 해양에서 winner take nothing 은 실존철학을 반영한다. 없음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맞서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비극적 고결함을 지닌다. 이길 수 없는 것에 맞서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ILE는 유진 오늘 초기 표현주의 와 환상을 지녔다. 막시스트 입장에서는 시대적 비판이라고 한다. 비극은 비극으로 인해서 새로운 인식이 생기는 것이다. 질서가 회복된다. 부조리극은 기다림이다. 없음은 거대한 임이다. 산업사회에서의 인간 존재는 우리가 제거할 수 없는 산업사회에 사는 존재인 것이다. 소시민도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루스 이리가리는 생리학적 기초, 여성쾌락은 남자 매개되지 않음을 주장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우리가 하는 판단력은 길들여져 있다고 했다. 사회자본, 학력자본, 상징 자본은 자본주의에서 문화적 영역을 연구함으로서 이를 생각할 수 있다.
 욕망은 삼각관계다. 희생제의 방식이다. 법의 보호속에서 법에 보호받지 못한자의 소외를 가리킨다.
 흉내는 흉내내면서 저항한다. 이는 비판적이고 비꼬는 것이다.
 남성적 사회시각은 리얼리즘에서는 남자가 바라는 시각으로 비춰진다.
 아감벤의 비미학에서 비미학은 마치 미학이 아닌것 같지만 자율성과 진리를 추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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