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레시아스의 예언 분석

2012. 1. 20. 11:37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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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ong Rak, Park

Byung Eon, Jung

Postmodern Drama and Performance, EL71629

29 December 2011

테이레시아스의  예언 분석[1]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신 아폴론의 예언을 통해 오이디푸스에게 그의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자이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자 체이레시아스의 예언을 부정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운명을 피하려고 노력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러하지 못하고 신이 정해놓은 운명에 굴복하게 된다.

           신화에서 나오는 예언자들 대부분은 예언이 빗겨나는 법이 없고 정확하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예언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은 예언에 그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자신의 운명을 자기 의지대로 개척하거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노력의 정당한 대가에 대한 보람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하지 못해 비극이 생기는 것이다. 신화에서 나오는 예언은 받는 사람이나 주변사람들 모두 공포를 몰고 간다. 그만큼 태풍과도 같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영향을 지니고 있다. 예언자가 뭐라고 하던지 간에 거기에 대한 운명은 사실 들으나 마나 이뤄지기 때문에, 차라리 가만히 예언 진행에 조용히 받아들이면서 그날이 오길 기다리는 종말론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테이레시아스 같은 예언자가 신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는 이야기가 바로 카산드라 신화다. 아폴론이 카산드라를 사랑하자, 그녀는 아폴론을 이용하여 자신은 예언의 능력을 얻게 되는데, 아폴론이 다시 그녀에게 저주를 내리게 된다. 카산드라는 예언을 하지만 들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무시하게 되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전체적인 예언자와 예언 받는 상황은 두 신화가 서로 유사하다. 카산드라의 신화를 통해 테레이시아스를 고찰해 본다면, 예언을 하는 능력을 갖게 되지만 완벽한 인간이 아닌 개인 스스로가 불행한 존재라는 점, 자신의 예언은 정확하고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점, 예언 받는 사람에게 무시 당하는 점이다. 코스믹 호러 같이 인간은 거대한 우주의 질서와 예언을 동반하는 무시무시한 운명이라는 공포를 맞게 된다. 예언을 좀더 넓게 생각하면 우리 인간들 그 자체가 이미 정해진 방향대로 움직이고 있는 불쌍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만 알 뿐인 것이고 알아도 신화의 신들처럼 미리 알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는 카산드라 신화에 나오는 이에아스의 운명을 통해, 더욱더 극명하게 보여준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처절한 줄거리를 흘러가게 하려면 여러 우연성들과 개연성 등을 필연성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며, 이것을 원활 하게 하는 장치가 예언이다. 다소 여러 억지스러운 부분과 무언가 줄거리 흐름이 맞지 않는 의문들을 관객들에게 해소시켜 주는 방법이자, 줄거리 그 자체를 만들게 하는 사건의 떡밥이며 운명이라는 장벽 앞에 고뇌하고 갈등하는 극의 문제 심화기능을 예언은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당시 시대상,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 과정과 그리스 연극 경연 대회식 전후 과정, 이 정도만이라도 알게 된다면 코러스 기능과 함께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기 위한 정치적인 장치가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언이라는 것이 단치 미래에 대한 예측이라기 보단 오히려 인간의 종말론에 가깝다. 예언이라는 것이 마치 나의 심리 유형 맞추기 같은 예측과는 달리, 인간의 삶과 개인의 성격만 충분히 파악만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보편적인 진리들을 나열하는 것과는 다르게 독특한 특수성에 대한 운명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언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 정해진 운명을 알려줌으로써, 그 알려주는 그 자체 만으로도 목적을 지니고 상대방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한다.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재현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는 가에 대한 관객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그 답이 바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있는 것이다.



[1] www.gedanke.wo.tc 통해 다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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