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리안 케네디의 니그로의 요술집

2012. 1. 24. 14:09Literatur/English

반응형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은 가지고 있어도, 소수자로서의 공간을 지니고 있는 것을, 임계적 공간이라고 말한다. 임계성은 저항성을 지니고 있다. 이 공간은 소수자 중에서도 더 소수일 수도 있다. 작품에 나오는 혼혈인은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다. 공간이 혼재되어 있는 인물이다. 즉, 임계적 공간에 위치해 있는 자는 혼혈인인 것이다. 이 곳도 저곳도 더이상 정착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아무리 얼굴이 백인처럼 되어도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로 인해 임계적 공강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마치 아버지의 노크는 그녀의 유전자의 일부분과 같다.
          백인임을 인식하고 싶지만 흑인인 그녀는, 거울을 통해 그녀는 동일시하고 있다. 하지만 사라는 왜곡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문화의 거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식민성을 지니고 있다. 정신의 식민성을 말이다. 인식적 지도 그리기가 제대로 잡지 못하고 타자가 나를 부정하면서 나의 주체는 자꾸 변한다. 그래서 변신을 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인 문화권에서 자신이 응답하는 것은 호명에 의해서다. 구성되어 가는 것과 구성물이 되어가는 것은 유동적이게 된다. 
          로라 멀비의 말처럼 남성주의적 시각이 보는 사회처럼, 백인 중심적 시각으로 연극이 진행되고 있다. 화면이 거울이다. 스크린은 나다. 주인공은 나다. 관객이 뿌듯하다. 이 모든 말들은 동일시로 엮여진다. 상상계에서 말이다. 주인공의 시선으로 관객들이 본다. 백인과 흑인간의 끝임없는 경계넘기를 지리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버틀러는 노예는 근원적인 것이 없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노예의 행위가 결정 될 뿐이지 자신이 노예의 구원은 아니다. 행동하는 것 뿐이라고 하였다. 얼굴의 역할은 레비나스의 견해를 통해서 본다면, 타자를 드러내는 그 무엇의 얼굴로 거기에 대답을 한다고 하였다. 
          주인공의 성격은 끊임 없이 변신한다. 다중인격, 정신분열 환자이기 보다 한사회가 개인을 폭력하고 만든다. 게을러서 가난하다라는 말처럼 사회가 이데올로기화 시키는 것이다. 상상계적 욕망을 배경으로 그대로 드러낸다. 사회가면은 주변에서 나에게 부르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나와 상관없이 틀에 정해져있다. 가면대로 사는 것이 주인공이다. 마음의 상태들을 나타내는 극이 바로 이 극이다.
          경계를 넘다들면 평등해진다. 가족이데올로기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근친상간이 발생시 위계질서는 무너진다. 기억은 과거를 현재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극은 이 모든 것들이 변신하면서 주인공의 시도들이 위와 같은 지점으로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