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세계 - 이자성에게 신세계란

2014. 1. 18. 23:55Review/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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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신세계를 처음 봤을 땐, 단순히 영화 무간도의 아류작 정도로 생각하고 영화를 감상했다. 그러나 필자의 짧은 생각과는 다르게 영화 신세계는 선악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없는 사회 생활에서 개인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면서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다양한 시각에서 깊이있게 설명하고 있다.


          1. 관리 - 강형철 과장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정의라는 이름하에 악을 관리하고자 하는 욕망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체제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중세시대의 폭력과는 다르게 상대방을 관리를 통해서 관리자는 조직을 이끈다. 선으로서 관리를 위해 때때로는 악을 이용하기도 하며 악 마저 자신의 관리로 이끈다. 따라서 다양한 생각을 하는 개인의 주체들을 통제하는데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자신의 길로 이끌어 나가야한다. 그래야만 자신 역시 관리자로서 생존하게 된다. 관리자로서 관리를 실패하게 되면 모가지다~ 관리자는 한 구성원의 리더로서 언제나 외롭고 서글프다. 썩고 고인물처럼 자신의 이상향에 한편으로는 보수 처럼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다양한 생각들을 받아들이기에는 체계는 개개인마다 요구를 다 들어주는 파라다이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리를 받는 사람입장에서는 관리자에게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2. 명예 - 이중구

           사실 이중구가 2시간 이상의 영화에서 출연하는 분량은 고작 20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관객들은 이중구의 카리스마에 조연이 마치 제 4의 주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의 강한 포스는 영화 내용에서도 마찬가지로 잘 보여준다. 이중구라는 캐릭터는 순수한 악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악이 처음에는 중립 혹은 조폭으로서의 이미지로 보인다면 끝무렵에 그의 최후를 본 관객이라면 악이 마치 악으로서 정의?롭게 자신의 명예를 지키며 죽음을 당했다. 언제 어디서 위기의 순간에서나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악의 이미지를 끝까지 유지하려는 그의 모습은 실로 장엄하기 까지 한다. 그 명예는 결국 죽음을 그에게 선사했다. 명예만으로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완전하다. 마치 이중구의 아지트가 마련된 공사현장처럼 끝까지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다.

 

          3. 이중성 - 정청

           정청은 이중성의 상징이다. 웃기지만 잔인하고, 가벼우면서 무겁다. 그래서 강형철 과장은 정청에게 전략적으로 신세계 프로젝트 실패를 맛보게 된다. 정청은 바보같아보이지만 관리자들 마저 한 수 위의 정보력을 앞세워 잔인하게 빨때들을 처단한다. 그렇지만 빨때들을 다 처단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잔인성과 함께 또다른 뭔가가 있어서다. 이자성을 살려두는 것은 그가 이루는 꿈이 우리 자본주의 삶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서다. 그는 다른 회장 후보자들과는 다르게 동료애가 있으며 자신이 리더로서 그들을 끌어안고 간다. 하지만 그는 이중적이다. 평범하지 않게 그는 또다른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이상은 리더라기 보다는 리더를 만들어주는 역할 하기다. 그는 이자성이 빨대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짝퉁! 시계를 몰래 선물하려고 금고에 집어 넣었다. 그가 살게되면 이자성을 죽여하하기 때문에 자신은 죽는다. 그리고 그를 그룹의 회장자리에 오르게 하는 조언자가 된다. 그의 이미지는 다시한번 말하건데 이중성을 지닌다. 그래서 그의 미래는 알 수 없다. 미래의 행동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를 이렇게 알고봤더니 이미 저렇게 알고 심지어 등뒤의 칼까지 준비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삶에서 모든 사람들은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나 모두가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그것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상대가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상대를 경계하거나 조심한다. 우리 무의식 속에 이중성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렵고 무섭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현실이고 자본주의의 삶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 놓은 사람은 정청 밖에 없다.

 

          4. 주체성 - 이자성

           주체의식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는 사실 거부감이 들 것이다. 필자 역시 이 주체라는 말이 그 주체가 아니라고 먼저 말하고 싶다. 이자성은 끊임 없이 자신의 주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관리는 관리대로 당하고 이중성은 이중성 때문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두렵고 불안하고 어디로 튈지 몰라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늘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본주의 사회 역시 마치 우리들의 삶은 민주 시민처럼 의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혼자 살 수 없고 다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같이 살 수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에 나의 주체를 포기해야 한다라고 한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있는가? 쉽게 말해서 야구팀이 있는데 나는 투수를 하고 싶다. 하지만 남들은 나를 포수하길 원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포수를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짤리거나 동료들과의 불화가 생길 것이고 팀 역시 마이너스 요소를 얻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기서 떠나면 나는 먹고 살수 없다. 바로 요런거... 이자성에게 주체성은 결국 실현시키지 못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또 다른 삶을 선택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그는 늘 그늘을 지닐 수 밖에 없다. 그가 가는 길은 그가 선택했고 그가 마련하고 완벽하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얻었을지 몰라도, 그가 결정적으로 이러한 삶을 선택한 계기는 오랜 시절 만나서 신세계 프로젝트에 뛰어 들고 계속 시행해 오게 했던 힘인 관리자(강과장)와 독하게 생존하기 위해 조력을 준 이중성(정청)에서 우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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