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이론

2010. 10. 11. 10:43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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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의미)

 벤야민이 살았던 시기에는 세계 1차대전 이후 파시즘의 등장과 함께, 파시즘의 선전 선동에 예술이 이용되는 정치의 예술화가 전면화 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은 벤야민이 아우라 개념을 도입해 기술복제시대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벤야민은 박람회를 통해 전세계 최고 기술들이 밀집된 공간을 목격했다. 이에 그는 충격을 얻었다. 박람회는 당대 일류가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해준다. 자본과 권력이 집중된 공간이고 먼 훗날 소비자는 이러한 기술의 방향에 종속되어 있음을 알아내었다. 반자본주의 입장에서 적은 자본주의 산물인데 이러한 자본주의 산물을 구원의 대상으로 벤야민은 보았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시대적인 생산 양식이 변화하면서 예술의 의미가 변한다. 오늘날의 생산조건은 기술 발전에 의한 복제시대 즉 생산력을 갖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예술을 복제하면 기존예술에 존재했던 어느 한가지 요소가 빠지게 되는데 그 요소는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일회적 현존성이다.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대에 기술이 발달하여서 복제가 가능해지고 그럼으로 해서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예술이 마술적 의식과 종교적 의식의 의미를 담당하였다. 복제기술이 기생적인 기능 즉 종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기 때문에 벤야민은 복제기술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파악하였다. 현대사회에서 복제품의 대량생산과 복제품의 현재화는 전통의 동요를 야기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런 어떤 진품성이 사라짐은 정보 민주주의와 공유에 있어 큰 공헌을 할 수 있다. 사진의 경우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포착하여 보여준다. 사진에 제목을 붙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사진을 어떻게 봐야하는 지에 대한 지침을 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의 숨겨진 세부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같이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공간을 확보해주고 있는 것이다. 배우는 연극배우와 달리 일련의 촬영을 탈피한 방법으로 촬영을 해서 그 역할과 일치할 수 없다. 일련의 촬영이 아닌 영화는 장면이 변함에 따라 받아들이는 우리가 그 영화속 에 완전히 몰입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몰입과 감정이입은 자신의 자아를 읽어버려 거짓된 위조와 가상을 주는데 이를 막아준다. 벤야민에게 있어서 영화는 원래 감정이입이 될 수 없는 장르로 보았고 정신 분열적 장르로 보았다.

 

기술복제 시대의 긍정과 부정의 의미 (아도르노의 시선)

 아도르노의 경우 이러한 기술복제 시대가 권력과 민중이 아닌 예술가를 위한 새로운 장치라고 했다. 도구적이성을 강조하면서 계몽을 주시 하였다. 이러한 계몽에 필요한 것은 이성인데 이성이 도구가 되어 합리화가 되면 비판적 기능이 멈추게 되고 합리를 포기하고 적당한 합리만을 찾게 된다. 이에 비판적 기능을 가진 합리적 이성으로 계몽해야 한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합리화된 사회로 발전되며 부정적인 것들이 우리 삶을 구속하게 된다. 기술과 합리성 증대는 서구 사물화된 사회가 오히려 우리 인간을 공격한다고 주장한 막스 베버의 기본적 조건이기도 하다. 합리화된 사회가 물화와 관료화로 되면서 점점 발전해가지만 오히려 비합리성을 증대시킨다. 서구의 역사는 신화와 계몽으로 나누어진다. 신화 즉 절대적 가치체계가 탈 주술화로인해 지속화 되지 않는 계몽이 이루어지다가 다시 주술화 되어 다시 신화를 만들게 되고 이는 계속 해서 되풀이 되어진다.

 서구 문명은 인간을 종속시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타락의 역사이다. 서구사회의 특징은 같지 않은 것을 갖게 한다. 또한 경제적 원칙을 우선시 요구하는 합리화와 개별적인 것이 특수한 것들을 무의미 하게하는 사물화를 지닌다. 즉 서구화는 개체와 전체의 사회 즉 개체를 지배하고 전체를 억압하는 부득이한 사회이다. 이는 개체와 전체 속에서 모순점이 서구의 토대화가 되었다. 이는 개별적이고 특성한 것들을 무시하여 동일화와 교환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사회적 일관적인 것들을 극단화 되어가서 통일시켜 나간다. 이로 인해 한 국가나 개인은 체제와 종속 속에서 불안을 느끼게 되며 비관적이게 된다. 그리고 불안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대체적 존재가 되어 개성상실과 메커니즘 종속 존재가 된다. 우리의 세계는 관리 되어지는 사회이며 소수의 사람이 관리하지 않고 소수조차도 절대적 권력을 부여받지 못하게 된다. 관리되는 사회가 객체되어지는 것은 문화산업이 공범이 되는 것으로 시장에 종속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극단화 되어지는 서구 사회에서 찾아볼수 있다.

 예술은 사회의 잘못된 점을 부정하고 비판하며 개선하려는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참된 것이란 개념이나 논리를 통해서는 인식되어 질수 없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정의 내리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논리와 이성으로는 불가능 하다. 예술 속에서 같게 되는 인식이 곧 참된 것이다. 예술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합리화된 사회가 비합리성을 만드는 것에 예술적 합리성으로 폭로하고 고발한다. 사회가 부정적인 성격이 되어 가면 갈수록 예술은 사회와는 다른 모습을 점점 보여는 성격을 갖게 된다. 이는 타락의 문명사를 부정하고 성찰하여 세계를 구하는 역할을 한다.

 

알튀세르 (이데올로기 과정 기술, 상상력과 관계)

 사회 구성체는 사회가 형성됨을 보여주는 산물이다. 사회 구성체 속에서 생산력과 생산수단의 관계를 전제로 계속해서 사회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생산이 필요하면 끊임없이 유지 위해 확대 재생산을 가진다. 사회와 정치와 이데올로기와 경제가 유기적으로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서로의 영역들이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이러한 사회 속에 서 유지하는 국가 권력과 국가 장치는 상호교환적이다. 지배적 사상과 이념이 억압적이고 이데올로기 적인 장치를 통해 재생산된다. 이러한 장치는 사상주의 설득 및 의식화를 통한 권력유지의 수단이다. 국가권력 장치를 잘 활용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통한 국가 권력이 재생산된다. 즉 이데올로기 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데올로기란 진리와 무관한 각각의 사회적 실천영역 즉 허위의식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은 자신이 이데올로기라 생각 못하게 끔 숨기게 하는 것이다.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모두가 승인할 수 있는 진리를 가지게 끔 만든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주체로 호명한다. 개인의 경우 한 단위로 자기자신 속에 복수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주체는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의 주체와 주체 속에서 서로 모순되는 주체가 일어난다. 즉 개인 안에서 주체끼리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행동 반경은 결국 정해져 있다. 왜냐하면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대치와 행동양식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사회에 대한 기대치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 이를 비추어 볼 때 주체에 따라 행동 반경이 정해져 있으며 주체간 협력하고 형성하면서 이데올로기 기구가 협력과 충동을 통해 개인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미 언제나 주어진 것이 즉 이데올로기다. 이미 사회에 조직되어저 있고 태초부터 이데올로기는 존재한 것이다. 따라서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복종 해야한다. 그리고 주체와 개인과의 관계는 상상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사고 체계 뿐 만 아니라 정서와 사고 등이 종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서와 양심과 죄의식 전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상적이라는 것은 개인이 사회와 실질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가 아니며 개인이 사회와 만날 때 투명한 것이 아닌 어떤 것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날조와 허구가 아니며 뭔가 비추고 있으면서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마치 거울 에 살짝 깨지거나 비틀리거나 왜곡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활용과 이용과 변화 되어 진다. 이데올로기는 항상 감추어 오고 있으며 작동하려면 이데올로기가 아닌 척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영역에서 착취와 모순과 억압을 감추어야만이 이데올로기가 동작한다. 지배 이데 올로기는 결국 반드시 드러난다. 모든 억압된 것은 다시 되돌아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저절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며 반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이 모순과 은폐를 드러내게 함으로써 드러낸다. 이러한 드러냄은 더 나은 인식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고 더 나은 투쟁으로 지배이데올로기를 전복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감추고 드러나고 감추고 드러나고의 반복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이라는 것은 당데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문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내적 거리 두기가 가능해야 한다. 이데올로기를 볼수 있으면서 이데올로기로서 알수 있게 하지 않는 것이라 할 것이다. 문학의 삶과 사상을 보여줌으로써 길게 된 역사를 짧게 보여주고 이를 통해 알 수 없는 이데올로기를 보여주게 한다. 과거의 작품은 당대 이데올로기를 얼마나 잘 알려주는가에 평가를 받고 과거사회와 현재 작품에 대한 현대사회와 관통하는 어떤 일관성을 보여준다.

 

역사가 없다의 의미

 이데올로기는 그 형태가 어떠하든 항상 계급입장을 표현하는 특수한 이데올로기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일반의 이론에 관한 계획을 근거 짓지는 않더라고 최소한 정당화 시켜주는 원리의 이유를 해명하기 위한 말이다. 이데올로기들은 그 자신의 역사를 갖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 일반은 역사를 갖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모든 시간적 역사에 대한 초월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에 걸쳐 어디서나 나타나고 역사를 관통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형태에 있어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영원하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

 구조주의의 기본은 기표와 기의가 결합하여 기호가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체계인 랑그가 개인적인 발화를 가진 빠롤과는 달리 연구하면서 찾아낸다. 이를 통해 표현되는 기표와 기호화되어 개념되어 지는 기의가 대응하면서 기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자의적이며 단지 약속일뿐 필연적 관계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와 의미를 통해서 관계를 가지는 변별성은 지닌다. 구조주의는 법칙으로서 랑그를 본다. 즉 과학적이고 시스템으로 보는 것이다. 언어체계는 다른 기표들간의 관계에서 의미를 생성한다. 기호내의 다른 배열에 따라 사회체계가 달라지며 의미가 달라진다. 의미보다 기호체계게가 그러므로 중요하며 기호들만의 관계가 중요한것이다. 현상을 개별해 보면 의미가 없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접근법은 합리적이고 종합적으로 본다. 개별적 요소는 의미가 없고 전체 요소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본다. 현상을 표층적에 벗어나 이면에서 심층적으로 과학적으로 파헤친다. 이러한 논리는 다양한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알튀세르는 구조주의적 마르크스를 주장했다. 기존의 상하구조에서 벗어나. Psei 라는 배열을 어떻게 이루르냐에 따라 실천능력이 달라진다고 했다. 그리고 탈구조주의는 개별요소에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주체 자유의지와 구조에 너무 집착하여 고유성과 반체제를 무시한다고 비난하였다. 기호학은 사회를 텍스트로 보고 하나의 기표로 본다.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며 텍스트를 통해 단지 안ㄹ아낼 뿐이다. 텍스트 분석에 작가의 의도를 배제한다. 이러한 구조주의는 시간적 흐름에 대체로 무관심하다.

 

기호의 자의성과 변별성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아무런 자연적 혹은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고 소쉬르는 주장한다. 사람들이 서로 합의를 하며 이를 통해 사물을 지시 할 수 있다. 그 이외 어떤 것도 동의만 한다면 기표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언어가 기본요소로 자의적인 기호를 갖는다. 게다가 각 언어는 기호를 조합하는 다양한 과정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언어의 본질과 그 기본적 구성요소는 바꾸지 않으며 기호가 자의적이라는 뜻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 아무런 본질적인 연관이 없다. 또한 한 언어의 기의는 다른 언어의 기의와는 크게 달라질수 있다. 각 언어는 세상의 사물 혹은 개념을 각각 다르게 발음하고 또 조직한다는 것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에 붙여진 일련의 어휘목록이라면 언어가 역사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그 개념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야한다. 하지만 사실은 개념 자체도 변한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언어는 어휘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의는 언어보다 먼저 존재했던 개념이 아니며 언어의 상태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이고도 부수적인 개념이다. 반드시 개념이 기표와 결합해야하는 법도 없기 때문에 시니피에 그 자체도 자의적이고 시니피앙 그 자체도 자의적인 것 이된다. 결국 그 당시 사용했던 언어 뜻이 옛날에는 또 다른 뜻으로 변했거나 축소 또는 확대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쉬르는 변별적인 것을 중시했다. 즉 관계를 중시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구분 되어지는 것이다. 체계내에서 어떻게 차별의 기능을 하느냐에 따라 정의가 내려지며 순전히 상대적인 동일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변별되어 진다. 단지 소리에 고유한 성질이 있다기 보다 관계됨으로 인해서 구분되어 지기 때문에 소리가 굳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청자는 그 의미를 명확히 전달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에는 고유한 방식으로 체계의 흐름을 분절한 결과이기 때문에 기호를 단순히 독립된 실체로 취급하지 않고 체계의 한 부분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의 성과와 한계

 구조주의는 단순히 텍스트 속에 독자가 들어가서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과 정신적 또는 인간적으로 교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떠나 문장 즉 텍스트를 뒤섞고 재결합하고 재배치 시키려고 하였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와 랑그와 파롤, 언어간의 관계, 등가 관계, 통시성과 공시성 구분을 통해 새롭고 참신한 비평을 선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과학을 중시하는 시대상에 맞춰서 랑그 즉 체계와 관계라는 면을 중시하면서 연구와 비평의 객관성과 과학성을 획득하였다. 이러한 텍스트를 재료로 사용하면서 구분을 통해 문학속의 특별한 문법을 찾고 문법의 의미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일상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시를 문맥속에서 비교하거나 대조해서 낱말들 사이의 관계를 찾고 일반언어와 문학언어 속의 의미를 구분하며 문학언어 만의 정보능력을 파헤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낱말들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찾는 다는 점에서 다른 것과 구별을 통해 의미를 찾아 등가관계, 비유, 비교 같은 여러 해석 방법을 시도 하였다. 즉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하나의 낱말의 의미가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그 낱말의 관계의 결과가 의미되어 지는 것이다. 이미 약속된 규칙 체계 즉 랑그를 찾음으로서 실제 텍스트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보이지 않은 어떤 패턴 즉 규칙이 있음을 분석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현실 반영과는 무관심하였고 주어진 언어체계와 연상적인 언어체계를 중시하였으며 언어와 현실이 언어의 자의성으로 본질적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 했었다.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은 문학 해석이 작가와 현실 배제 하고 전통적 문학과 비평 필요없이 문학 체계로 이해가능 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문학 내용보다 문학의 의미를 생성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기호와 지시대상과 단어와 사물의 자의적 관계가 연구되었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개인을 무시하고 문학의 신비에 임상적인 접근을 행하고 상식과 양립할 수 없으으로 인해 기존 문학계의 반감을 사는 반 역사주의적 태도를 가졌다. 그리고 내용과 의미라는 현상을 형식주의적 태도에 의해 소홀히 하였다. 또한 언어적 모델을 자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모든 형상을 언어로 환원하는 언어 결정론적 입장을 취했으며 비역사성과 공허한 보편성, 이중적 사고를 통한 제약과 복수적 중립 탈사물화들의 결점을 지녔다.

 

탈구조주의

 탈구조주의는 구조주의가 가지고 있어던 관념론 즉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탈구조주의는 형이상학의 내부를 비판하는 것을 목표한다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구조주의는 심층구조를 중시하면 표층구조를 무시하였다. 서구철학에서의 감성을 무시하였으며 시니피앙 중심이다. 기존의 서구적인 생각은 이분법 적이었다. 이성과 감정을 분해시키고 1차는 이성, 남성적 원리로 보았다면 2차는 감정과 여성적 원리도 분해 시킨것이다. 그런데 1차의 원리가 칸트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근거로 하였는 데 이 때문에 마치 서구의 생각은 2차와 1차간의 구분이 이성으로써 모순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의 기표는 기의를 붙잡지 못하고 계속 생기면서 연기되어 진다. 기표에 대한 기의는 계속 재생산 될 뿐이고 계속 구체화되어 진다. 기표들이 계속 분산됨으로써 결국 해체되어 지는 것이다. 이러한 계속 수집되고 해체되는 것은 결국 계속 말꼬리를 물뿐이고 결국 깊은 오해가 생긴다. 언어는 결국 불안정하며 계속 오해가 발생한다. 언어는 자기자신이 계속 해최된다. 결국 기의는 여러 기표들 속에 흩뿌려지며 기표들간의 서로 상보관계를 가진다. 그런데 기존 탈구조주의 이전의 서구 형이상학은 마치 확정되고 의미인양 이야기한다. 그 속에는 어떤 억압이 숨겨져 있으며 이것이 강제로 붙잡혀 있는 것이다. 이를 풀어주고 해체 시키는 것이 탈구조주의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의 특징인 닫혀있는 텍스트와 총체성과 명확한 의미를 탈구조주의는 거부한다.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위한 텍스트로서 상호텍스트 성을 강조한다. 결국 그들의 주장은 텍스트를 해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비평가 즉 텍스트 분석가가 할일이며 결국 해체작업은 그들의 이론 처럼 끊임 없는 작업이 될것이다. 왜냐하면 해체를 하면 또 해체를 해야하고 계속 배열됨으로써 모르고 알수 없는 의문이 지속되어 또 다시 해체를 하기 때문이다. 즉 해체는 끝이 없는 것이다. 탈구조주의는 음성중심적인 것을 부정하였다. 말이 글보다 우선이고 글은 의미를 명확히 부여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말이 우선이며 말에는 현존성이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을 부정하였다. 탈구조주의는 기존의 이차원적인 위계질서를 해체 시키고 냉전의 산물을 탈피하였다. 기존 철학을 인위적으로 나뉘어서는 특권으로 보았으며 해체를 통해 관계를 대립보다 상호관계로 분석하였다.

 

구조주의와의 관계

 소쉬르가 언어는 오나결되고 안정된 체계를 구성한다고 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의미작용이 본질적으로 불안정 하다는 데서 출발했다. 즉 언어의 분리와 분절의 과정이 한계지어지지 않고 무수히 많은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인식으로 탈 구조주의가 시작되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하나의 시니피에는 그것을 가리키는 시니피앙에 매치를 이루는 개념이라기 보다 시니피앙의 잠재적으로 무한한 활동의 파생물로 보았다.

 

서구형이상학비판과 현존성

 서양철학은 가치 결정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이분법이나 이항대립을 사용했다. 이렇게 중심을 가진, 특권을 지닌 것을 제 1원리 혹은 형이상학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제 1원리는 억압의 위치에 있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 이것은 쉽게 해체 될수 있고 번복 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것들을 우열이 아닌 상호 보충적 관계로 파악하여 그 둘 사이의 서열과 경계를 무너 뜨린다.

 

로고스

 로고스 중심주의 즉 음성중심주의는 글을 통해서 순수한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서양 철학의 전통은 글을 생명 없고 소외된 표현 형식이라고 하고 육성을 찬양해왔다. 글은 2차적인 의사소통 양식이고 육성의 착백하며 기계적인 기록이어서 항상 의식으로부터 한 촌수 떨어져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육성을 통해서 절대적인 진리 즉 모든 기호들의 근거의 구실을 하는 초월적인 것의 존재를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어의 분리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러나 기호 역시 씌어진 기호와 마찬가지로 구별과 분리의 과정에 의해 작용하기 때문에 글이 말의 2차적 형식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말도 글의 한 형식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모든 기호들의 근거를 이룬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분리의 과정을 거쳐서 절대적인 진리도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그러한 진리란 없다고 주장했다.

 

정신분석학 (유아 인성 형성과정)

 정신 분석학에서 작가는 무의식을 표현하고 무의적 욕망의 산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한다. 무의식은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덩어리이며 인간 정신에 있어서 의식보다 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정신분석은 인간 존재에 대한 사실을 언급한다. 최소한 5살까지 부모의존을 하는 인간은 그대로 방치할 경우 죽음을 맞이한다. 따라서 연약하기 때문에 보호가 필요한데 이에 유아는 심리적 강한 고착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고착은 가장 가까운 자신의 어머니를 성적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인간 문명속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에 대한 어떤 연민이 있다. 동물처럼 먹고 자고 섹스를 자기 자신이 원할 때 마음대로 할수 없는 억압이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원할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쾌락의 원리는 끊임 없이 유보된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은 현실원리가 쾌락의 원리를 밀어내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한가지 사회에서 가지는 어떤 법칙과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화를 하게 된다. 현실에서 허용할수 있는 어떤 틀의 쾌락을 추구하고 제어를 통해 어떤 이득을 얻음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쾌락은 아니지만 대용품으로서 얻을수 있다. 이러한 것은 유아와 어머니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대용품을 찾음으로서 깊은 애정을 통한 기준을 찾게 된다. 결국 인간은 계속 해서 대용품을 찾는 존재로 살아가게 되고 실질적으로 인간 자신의 목표는 부재된다. 문학도 작가가 생산한 텍스트는 승화된것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사회의 억압에 의에 표면에는 작가가 쓰고 싶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도가 숨겨져있다. 왜냐하면 현실 문명이 제어하기 때문이다. 표면에는 항상 이면이 있고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그것을 작가는 모른다. 작가는 무의식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의식을 아는 법은 비상식적이고 볼수는 없지만 결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꿈이다. 꿈은 의식이 놀고 있는 상태이며 휴식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억압되어 왔던 것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꿈은 무언가의 변장과 가면으로 응축되고 대칭되어 있는데 만약 그것을 꿈속에서 알게 된다면 의식이 놀라기 때문에 꿈에서 깬다. 꿈은 과거의 억압으로 숨겨진 것이 들러나는 것이며 미래가 아니고 자유연상으로 어느 과거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텍스트가 작가의 의식중 해석가능 하지만 무의식은 분석해야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무의식의 결정적 기제는 아버지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아버지는 사회의 문화정상적코드이다. 무의식적 욕망을 문명이 억압하는 기제다. 인간에게는 무의식이 있어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말할수 없고 해체적이고 하나로 해석할수 없는 슬픈존재인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내면속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살고 있다. 이러한 개인의 무의식은 억압된 채로 인성을 낳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의 무의식은 즉 쾌락원리다. 이러한 쾌락원리는 현실원리를 억압한다. 이는 승화를 통해 채워 넣을 수 없는 욕망을 극복한다. 무의식은 충족시킬수 없는 욕망을 떠안은 장소이며 자유연상, , 실수를 통해 표현한다. 꿈은 은유와 환유를 통해 가공되며 잠재내영은 꿈을 거친다. 이러한 꿈의 본질은 작업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유아기의 자신과 거울속의 이미지를 동일시 하는데 이를 깨뜨린다. 아버지의 등장은 아이와 어머니의 동일시를 깨뜨림으로써 차이와 부재를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부재와 결핍을 채우는 욕망 즉 아이는 무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꿈의 작동 기제

 욕망은 시니피앙의 형태로 꿈을 통해 나타낸다. 무의식의 욕망은 은유와 환유가 되며 시니피앙을 통에 시니피에가 된다. 꿈에 나타난 욕망의 형상은 은유나 환유를 거치게 되고 시니피앙의 형태로 띠는데 여러 정신의 시니피에가 나타난다. 무의식은 여러 시니피앙 운동과 활동을 나타 나며 시니피에는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다.

 

페미니즘 (작가의 자의식, Ink병을 던진 이유)

 천사는 여성적이고 수동적이며 희생적이고 유유 부단하며 순수하고 매력적이며 자기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낸다. 이는 남성들의 이상적인 여인상이다. 작가는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굴레가 내제 되어 있어 성에 있어서 의중잣대를 느낀다. 따라서 남성 작가 비난 시 공공의 적이 되기 때문에 망설인다. 작가가 괴롭힘을 결국 자의식 속에서 당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잉크 병을 던짐으로써 유령을 죽인다. 시간과 정신적 노력이 힘들고 많이 든다. 왜냐하면 천사 때문이다. 그녀의 자의식을 건드려 그녀의 의지를 말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차별에 연대가 중요하다. 차이와 차별을 상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잇다. 집단 지성의 시대로서 필요에 따라 민주적 행동양식을 취할 수 잇다. 페미니즘의 주작은 제도적으로 차별을 없애야 하고 이를 통해 인습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일차 목표이다.

 

천사

 천사는 가정의 살림을 꾸려나가며 일상의 삶에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이타적인 여성 즉 현모양처이다. 그러나 버지니아의 입장에서 천사는 작가로써 글을 쓰려고 할 때 끊임없이 방해하는 유령으로 허구적인 특성으로 인해 좀처럼 죽지 않는 존재이다. 당시의 여성작가에겐 집안의 천사를 죽이는 일이 해결해야할 과제중의 하나로 생각한다. 결국 집안의 천사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여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강한 압력에 의해 형성된 여성상이라 볼 수 있다. 여성작가들은 남성의 극단적인 인습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고 보며 전통적으로 내재되고 요구되었던 여성상에 대해 어느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입장에 있으며 집안의 천사를 둘러싼 거대하고도 집요한 무형의 이데올로기적 압박을 극복하고 여성의 육체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덕과 진실을 제시하려고 한다. 천사를 죽이는 것은 단순하고 평범한 대상 즉 한 젊은 여성을 남게 하기 위해서다. 천사는 가정 내에서 가족관계에 의해 정의되어지는 수동적인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이 전문직업인이 되기 위해서 혹은 하나의 주체적인 인간으로써 존재하기 위해서는 천사가 죽어야만한다. 페르시아 산 고양이를 통해 여성 자신만을 위해 돈을 쓰고 환영으로 사회가 억압하는 이대올로기를 작가는 적은 비용으로 경제적 독립을 이룰수 있는 자아실현, 자신의 방은 여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공간, 5백 파운드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주체가 될수있는 경제적 독립을 상징한다. 버지니아가 원하는 여성상은 여성이 사회적인 편견과 장애를 극복해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써 인식 할 때 전문 직업을 가지게 되고 그 결과 궁극적으로 자유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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