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의록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들뢰즈의 감각은 정독적이며 지각적이다. 이는 예술이 된다. 정동은 나가 없는 상태로 우리 인식으로는 포착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레고리 잠자가 바퀴벌레가 되듯 이러한 되어가기는 나와 관련 없는 2개가 되어가는 것을 지각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은 이와는 다른 정동과 지각을 보유한다. 영혼과 플록은 논리적이고, 수사적이며, 이성적이다. 마치 탐정소설과 같다. 시작과 중간과 끝이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하나의 유닛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개연성은 그럴싸 하게 만든 개연성이 존재한다. 
          칸트는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맞딱드릴 때의 느낌을 숭고라고 하였다. 이러한 숭고심은 언어적이다. 하나의 장은 막과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작동원리 및 매카니즘을 지닌다. 그 나름의 주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은, 현대극에서의 목표없는 극 중 연극과는 대조로 배우가 목표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존재로서 있음이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최초로 분과 학문을 나눈 사람이다. 내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바라봄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이 추상적이고 절대 순수형식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이고 관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에서 주인공은 자만하고 이는 비극적 결함이 된다. 희극은 명령과 질서와 주문으로 권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경계지어진다. 연민과 공포를 순환하기 위한 카타르시스가 극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관객은 연극을 보면서 생기는 생리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회복되어가는 과정과 모습에서 말이다. 목적과 질서와 지각이 발현한다고 하였으며 모름에서 앎과 함께 실천이 동반되어 진다고 하였다. 개연성은 인간 존재 작동원리이며 메카니즘이다. 이는 되어가는 과정이다. 생성변화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플라통의 그림자 세계에서의 예술 모방과는 대조적이다. 모방은 인간의 삶을 모방하는 모방을 말한다. 
          비극에서의 플롯은 사건의 배열과 유기적인 관계에서 존재한다.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인과적 필연성으로 쓰여진다. 비극의 고결함은 질것을 알면서 맞서는 것과같다. 저항성이 담겨있으며 죽음이 내포된다. 즉 무다. 시간은 절대 가시화 할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미는 질서에서 아름다움이 있다. 비극의 줄거리에서나 기하학적 문장구조에서 말이다. 거짓말 자체는 허구지만 쾌감이 있다. 문학으로서 인정된다. 진리보다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정신분석에서 말의 지배는 무의식의 지배다. 이점이 최근 오이디푸스 요소를 읽게 만드는 하나의 사유다. 소포클래스는 인간 주체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운명의 비극을 헤겔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운명이 필연의 변증법으로 인간이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그 자체가 운명 실행의 매개체로서 해석한다. 오이디푸스의 세계는 무질서를 몰고 다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죽을 줄 알면서 맞서는 비극적 고결함이 있다. 구조적 시스템에 대해 대항하면서 비극적이다. 의도적으로 비극을 선택하는 주인공이다. 죽는 다는 사실을 이미 주인공은 알고 있다. 내 속에는 죽음이 들어있고 죽음과 산다. 모순적 행동과 삶을 지닌채 말이다. 맞서 싸우는 인간의 삶 자체는 어찌보면 비극적이다. 까뮈는 삶 그 자체가 저항성이라고 하였다. 타자는 죽음이 있다. 무자에게서 죽음을 본다는 레비나스 적 시각도 취할 수 있다. 사실을 사실로 보지 못한 것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눈을 찌르는 것이다. 도시의 위기는 무질서다. 왜냐하면 왕의 무질서 즉, 근친상간으로 부모와 자식의 등급이 같게 되기 때문이다. 비극의 핵심은 질서의 회복이다. 근친상간에서 관계의 무화, 차이의 무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수치의 발달은 곧 우리 문명, 제도의 시스템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다. 지라드는 욕망은 삼각관계이며 다른 사람 욕망해서욕망을 취한다고 한다. 같다는 것은 싫어하는데 말이다. 오이디푸스는 희생양일 수도 있다. 폭력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본성이다. 성폭력이 너무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라고 주장하였다. 주체적 폭력과 시스템적 폭력은 법이라는 이름의 구조적 폭력에 위치한다. 또는 상징적 폭력일 수도 있다. 부르드외는 보이지 않지만 지각적인 폭력이라고 하였고 지젝은 미학적 규범, 내가 만드는 상징, 상징화 시키는 폭력 혹은 개인을 사물화 또는 상징화라고 저으이하였다. 의미를 부여해서 폭력을 취하는 것도 이와 같다.  십자가가 그 예다. 푸코는 양심이라는 수치를 끊임없이 주어서 스스로 내려놓게 했다고 말한다. 수치는 외부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나의 수치심으로 느끼도록 마음 속에 존재하다는 것이다. 이를 감시라고 한다. 수치는 오이디푸스를 파멸로 몰아가게 한 것이다.

사무엘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
          작가의 정답이 없고 질문만 던져주는 작이다. 나뭇잎이 바람에 마치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암시하게 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의미가 없다. 반복될 뿐이다. 어제 그리고 오늘도 비슷하다. 단순하며 허우하고 지루하며 반복적이다. 마치 인생과 같다. 인간의 조건을 기다림으로서 표형하였다. 마치 카뮈처럼 부조리가 조리처럼 진행된다. 어떠한 개연성도 없으며 목표도 없다. 행위에 대한 논리적 근거 마저 없으며 지향점도 없다. 고도는 충실한 재현만 할 뿐이다. 기다림은 관객에게 가능성만 제시한다. 목적이 없는 기다림은 나와는 상관없지만 던져난 존재 그리고 좋은 기다림 아니면 나쁜 기다림이 있을 것이다. 있음 그대로 그것이 있는것, 그것이 기다림을 느낀다. 시간위에 처해 있을때 말이다. 이는 지루하다. 시간을 죽이지 않는다. 시간의 흘러감을 지루함을 통해 거꾸로 느껴진다. 오이디푸스 왕과는 다른 억지로 끼워 맞추는 서사적 요소도 전혀 없다. 동일자의 논리로 하나씩 포섭할 수 없는 인물이 많다. 모자 쓸지 않쓸지 마저도 알 수 없듯이 말이다. 행위 자체는 알 수없고 이유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유를 댈 수 없다. 실존주의의 배경은 2차 대전 이후이다. 인간이 인간 같이 않을 때 부조리가 느껴지고 여기서 실존주의가 등장하였다. 제임스딘의 이유없는 반항 또는 비키니 섬의 거북처럼 원폭 투하에 대한 장님거북은 방향성이 없는 미트세대를 대변한다.  
          희극의 탈을 쓴 비극이다. 비극적 코미디이며 블랙 코미디이다. 샤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라고 하였다. 평가하고 가치매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늙은 자들의 이야기 처럼 삶의 무의미를 논하고 기억이 흐릿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뭔가 갈피가 없는 그 무언가와 유사하다. 연결사가 빠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베켓이 말하길 레지스탕스에서 지하 생활 2년에서 가장 힘든 것이 권태라고 하였다. 시간이 길게 느껴질때, 할일이 없을때 오래 사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오랜 시간은 시간이 길다는 것에 대한 향수가 있고 가고자 하는 무엇을 스스로 철학하기가 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레비나스는 있음을 그대로 있음으로서 말했다. 유결무이성 그 자체 홀로있음으로 말이다. 벌거멋음은 인간의 벌거 벗은 그 자체다. 상처받기 쉬운 존재다. 죽음을 가진 조재라고 하였다. 환영으로, 환상으로 보는게 아닌 있는 그대로를 우리는 연극을 통해 보는 것이다. 타자는 나의 완전히 다른 수수한 다른 그 자체다. 얼굴은 사람의 드러내는 행위 그자체다. 얼굴을 본다가 아니라 판단하고 비교하는 것이다. 타자를 바라봄으로서 폭력이 없어진다. 명령은 나를 나에게 하여금 반응을 보이게 하니까 책임생기고 사랑한다고 하였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가 살게 만드는 것은 이들이 삶 생산 자체가 생의 자체이다. 타자가 진정한 순수로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권태로인한 불안으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였다.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인것이다. 부조리의 기분은 부조리속에 처함으로서 발생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 의미가 없다. 단지 던져있는 상태다. 나의 결단과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벗어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실존하기가 해결책이다. 새로운 자기로서 산다는 것을 하는 것 그 뿐이다. 인생은 지루하고 반복적이다. 그래서 이 극은 정치성을 지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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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ong Rak, Park

Byung Eon, Jung

Postmodern Drama and Performance, EL71629

29 December 2011

테이레시아스의  예언 분석[1]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신 아폴론의 예언을 통해 오이디푸스에게 그의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자이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자 체이레시아스의 예언을 부정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운명을 피하려고 노력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러하지 못하고 신이 정해놓은 운명에 굴복하게 된다.

           신화에서 나오는 예언자들 대부분은 예언이 빗겨나는 법이 없고 정확하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예언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은 예언에 그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자신의 운명을 자기 의지대로 개척하거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노력의 정당한 대가에 대한 보람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하지 못해 비극이 생기는 것이다. 신화에서 나오는 예언은 받는 사람이나 주변사람들 모두 공포를 몰고 간다. 그만큼 태풍과도 같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영향을 지니고 있다. 예언자가 뭐라고 하던지 간에 거기에 대한 운명은 사실 들으나 마나 이뤄지기 때문에, 차라리 가만히 예언 진행에 조용히 받아들이면서 그날이 오길 기다리는 종말론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테이레시아스 같은 예언자가 신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는 이야기가 바로 카산드라 신화다. 아폴론이 카산드라를 사랑하자, 그녀는 아폴론을 이용하여 자신은 예언의 능력을 얻게 되는데, 아폴론이 다시 그녀에게 저주를 내리게 된다. 카산드라는 예언을 하지만 들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무시하게 되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전체적인 예언자와 예언 받는 상황은 두 신화가 서로 유사하다. 카산드라의 신화를 통해 테레이시아스를 고찰해 본다면, 예언을 하는 능력을 갖게 되지만 완벽한 인간이 아닌 개인 스스로가 불행한 존재라는 점, 자신의 예언은 정확하고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점, 예언 받는 사람에게 무시 당하는 점이다. 코스믹 호러 같이 인간은 거대한 우주의 질서와 예언을 동반하는 무시무시한 운명이라는 공포를 맞게 된다. 예언을 좀더 넓게 생각하면 우리 인간들 그 자체가 이미 정해진 방향대로 움직이고 있는 불쌍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만 알 뿐인 것이고 알아도 신화의 신들처럼 미리 알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는 카산드라 신화에 나오는 이에아스의 운명을 통해, 더욱더 극명하게 보여준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처절한 줄거리를 흘러가게 하려면 여러 우연성들과 개연성 등을 필연성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며, 이것을 원활 하게 하는 장치가 예언이다. 다소 여러 억지스러운 부분과 무언가 줄거리 흐름이 맞지 않는 의문들을 관객들에게 해소시켜 주는 방법이자, 줄거리 그 자체를 만들게 하는 사건의 떡밥이며 운명이라는 장벽 앞에 고뇌하고 갈등하는 극의 문제 심화기능을 예언은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당시 시대상,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 과정과 그리스 연극 경연 대회식 전후 과정, 이 정도만이라도 알게 된다면 코러스 기능과 함께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기 위한 정치적인 장치가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언이라는 것이 단치 미래에 대한 예측이라기 보단 오히려 인간의 종말론에 가깝다. 예언이라는 것이 마치 나의 심리 유형 맞추기 같은 예측과는 달리, 인간의 삶과 개인의 성격만 충분히 파악만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보편적인 진리들을 나열하는 것과는 다르게 독특한 특수성에 대한 운명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언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 정해진 운명을 알려줌으로써, 그 알려주는 그 자체 만으로도 목적을 지니고 상대방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한다.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재현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는 가에 대한 관객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그 답이 바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있는 것이다.



[1] www.gedanke.wo.tc 통해 다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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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실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런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그 이유는 관객이 자기 자신도 그럴 가능성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쁜 것을 내보내고 건강하게 하려고 할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운명과 자유 의지를 보인다. 그는 투사 기질을 지닌다. 이에 대한 가치는 타고난 것을 바꿀 수 있다는 마음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너무 극단적인 운명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결정론 유무말이다. 내가 두손을로 찔렀다라고 한 그의 말에서, 나가 실행 했음을 강조 했다. 자유의지인것이다. 운명이지만 나의 선택이었다. 프로이트 문화론과 예술론에 따르면 이러한 사적인 영역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고 한다.
 코러스는 인물과 대화 가능하다. 등장인물 분장시 시간을 매우기도 한다. 구조적으로는 파로도스라고 하여 들어가는 곳이 있었다. 이러한 코러스 기능은 축소가 되면서 그리스 전성기가 넘어가게 된다. 공동체가 공유했던 가치의 문제에 대해 공감하는 것이 중요했다. 추상, 처벌, 저항 없이 오이디푸스가 행한다. 코러스가 비극의 핵심적 내용을 잘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개인의 비극과 비극이 속한 사회인 공동체를 주장했다. 절대적이고 다양성이 허용되고 있지 않았다. 이들 비극과 사회 사이의 가치 측면에 있어서 불일치가 발현되지는 않았는데, 그것이 비극 형성의 원인이었다. 언젠가는 신의 말씀에 작아져라라고 오이디푸스도 몰락하는데, 라고 시민들에게 충고하는 것이다. 정화되어야할 해로운 관점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위대성과 함께 참여함으로서 받는 고양된 느낌을 느끼게 한다. 파멸하는 과정에서 비인간의 경지를 감내하는 오이디푸스는 비극적이면서 미학적이다.
 스스로 느낌으로서 배설하고 건전한 시민으로의 복귀를 고차원적 통치 철학으로 보여주고 있다. 왜 들뢰즈가 안티오이디푸스라고 했을까? 
 최근 상반되고 있는 부조화 를 주목하자. 완전한 구조에 암시하는 코스믹 오더가 있다. 하나의 개인보다 하나의 역할이 가깝다. 크레온의 상반된 행동은 포괄적이다. 인간과 왕사이의 역할극인것이다. 하데스의 법과 크레온의 법과의 대립은 평소에는 조화를 이룬 상태 였다. 코러스의 표적은 아니토네가 아니라 크레온이다. 이작품의 주인공인가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판단의 잘못, 주인공 성격 결함에서 오는 비극적 결함이 있을 것이다. 오만함의 관점도 말이다. 크레온에 대한 연민과 공포 그리고 이에 대립되는 배신자인 안티고네에 대한 연민과 공포가 존재 된다. 여러 비극 인물들 대상으로 연극 기법을 낳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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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의 이상 세계를 위한 통제 장치

박 형 락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흐름도 한해 흘러 갈수록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유행은 반복되는 것이겠지만, 대중문화의 흐름만큼은 이 명언은 사용하기에는 너무 섣부를 발언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MC 체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상황 극을 펼치거나 공익을 기반으로 하는 감동의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가하면, 사실인지 아닌지 비판 없이 자신이 있었던 일들을 폭로하면서 서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토크쇼도 유행을 했었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개인의 사생활 뿐 아니라 진실과 거짓은 네티즌들의 수사망에서는 절대로 벗어 날 수 없기에 이전의 예능은 최소한, 거짓이라면 거짓이라는 상황을 강조하거나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소위 리얼을 표방해야만 한다. 그리고 항상 연출가는 대중과 소통하면서 그 비판이 고상하던 가볍던지 간에 무시할 수 없고 항상 제작하는데 긴장을 해야만 한다. 요즘, 예능 프로그램의 판도는 리얼그리고 서바이버로 함축할 수 있다. 국민 시청률을 보유하고 있는 12의 경우는 대본과 설정의 요소는 분명 있지만, 어떻게든 연출가의 구조를 벗어나려고 하고 그것을 표방한다. 그런데, 한국의 공영방송은 케이블에 비해 예능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특징이 있다. 바로, 공익성이다.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거나 지나치고 과장된 선정성은 배제시킨다는 점이다. 심지어 요즘 나오는 코미디 프로그램마저 하나정도는 사회를 풍자하거나 고상한 영역까지 건드리고 있다는 점, 문화방송의 김태호 연출자는 자막을 이용하여 웃긴 연출 속에 정치적 패러디를 집어넣고 있다. 최근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프로그램인 나는 가수다는 대중문화가 어떻게 고상함의 영역으로 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문학이라는 장르 안에서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것처럼, 대중문화 안에서 저급함과 고상함 사이를 네티즌 뿐 아니라 문화 평론가들 사이에서 설전을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유명한 사건 중 하나인, 옥주현과 김건모 사건이 그 하나의 예이다. 둘 다, 가수라는 영역에서 넘어서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심각한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영역에 대한 경계는 그 누구도 선을 그은 적이 없지만 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사건 이 후의 이야기다. 계속되는 언론플레이와 자막에서 말이다. 김영희 연출자는 김건모 사건 이후 재 경연 도중에, 손을 떠는 것을 기표로 내새우고 음악평론가의 그를 옹호하는 평을 내새웠다. 그 뒤, 대부분 김건모에 대한 심각한 논란이 사그라지게 되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 기표라는 것들, , 연출자의 의도된 기표가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간파되는 순간 비난이 생기는데, 이는 스타킹의 강호동에서 알 수 있다. 강호동은 소위말해서 억지감동이라는 코드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호불호 평을 받고 있다. 과장된 표현과 몸짓 그리고 웃음과 감동을 그는 이용한다. 그런 방식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대로 그의 웃음 속에 빨려드러가, 마치 진짜 그의 의도라는 환상에 빠져버리게 된다. 지금 현재 우리가 즐기고 있는 희극들이 먼 미래에는 어떻게 평가 받을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오락적인 대중문화는 시대를 거슬러 가면, 지금 우리의 고상함과 연결된다. 물론, 이런 고상함은 낭만주의 시대 때는 귀족의 전유물이었지만 말이다. 이 당시 희곡은 발전에 대한 논쟁으로 벌여질 수 있다. 대중 속에 많이 상연된 것과 대가가 써야하는 공연 사이에서 말이다. 고대 그리스 시절의 가장 유명했고 유행했던 문화는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고상하다는 철학자들과 문예 이론가들 사이에서 사용하고 있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통해, 그가 관객들에게 자신이 의도대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마련하는 무대 장치를 분석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가 사용하는 희곡 속에 존재하는 기표의 법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도록 하고, 이에 영향을 받은 현대 예술 희곡에 대해서도 언급하도록 하겠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장치들이 무대 밖을 벗어나 어떻게 영향을 끼치게 하는지 소포클레스의 생각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교과서대로 그리스는 지정학상 지중해에 위치한 해상국이지만 산이 많이 도시 곳곳이 독립성이 강한 곳이다. 트로이 전쟁으로 이후 기근과 도리아인들의 침략으로 폴리스로서 간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금의 이란인 페르시아의 힘이 커지자 지중해의 세력을 놓고 폴리스는 연합을 구성하여 페르시아의 그리스 지중해 진출을 막아내게 된다. 여기서 아테네는 큰 성장을 하기 된다. 아테네는 재해 권을 가지고 다른 폴리스의 상업을 위협했다 (박현모 150). 결정적인 것은 바로 스파르타의 국내 문제에서 둘을 갈라놓게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승리 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동맹들은 이 기회로 확장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런데 스파르타에서는 국내의 문제가 심각했다. 바로 스파르타의 구조상, 헤일로타이라는 민족이자 노예들이 전체인구의 대다수였고 사실상 이들이 스파르타의 원주민이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이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통치를 하였는데 아테네를 따라 대외정책을 계속 펼치면 국내의 힘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골이 깊어질 때는 아테네이서 페리클레스가 집권했을 때부터다. 그는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고 추방된 헤일로타이 반란군을 받아들이면서 스파르타 동맹국인 코린토스를 견제한 것이다. , 이는 스파르타를 견제하겠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것으로 27년간 전개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96년에서 406년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삶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함께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함으로써 사실상 아테네 뿐 아니라 그리스 전체가 쇠퇴를 맞게 된다. 아테네는 3자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오만했다고 한다. 특히, 델로스를 점령했을 때는 시민들을 전부 살해시키거나 노예로 팔았다고 한다. 그 뒤로부터 사실상 아테네는 몰락했다고 보면 된다. 이때가 전쟁 중반 무렵에 들어서면서 부터다. 2차 시칠리아 전투에서 스파르타 동맹에게 대패하게 된다. 펠로폰네스 전쟁사에서 큰 실수를 범한 것이다. 이때 소포클레스는 국가적 위기에서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그의 국민적 신망과 권위가 필요로 국가최고위원이 되었다 (천병희 85). 그를 서술했던 여러 자료들을 나열해 보자면, 높은 관직에 자주 취임했고, 여러 왕들이 하는 초청에는 일절 응하지 않았고 (천병희 84), “애국심이 강하고 경건한 자로서 많은 업적을 이루어졌고” (전혜신 154), “신앙심이 두터웠다” (앙드레 보나르 151) 라고 적혀있다.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그는 실질적인 정치적인 능력은 없지만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는 선망을 받는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관직에 머물렀으며, 신앙심과 애국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어릴 적부터 코러스의 일원으로 합창 단원을 했었고 연극을 개회할 당시 상당히 파격적으로 코러스의 숫자를 늘렸다는 점이다. 그가 쓴 비극의 주요 배경은 특이하게도 테베로 되어 있다. 이 테베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와는 다른 행보로 갔던 도시이다. 아니, 페르시아와의 전쟁 때부터 아테네가 멸망할 때 까지 테베는 이리저리 기회를 엿보고 중립적인 행동을 취한 나라였다. 그러다가 친 스파르타 정책을 펼치기도 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에는 아테네를 끌어들여 스파르타를 침공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말년에 잡은 도시였다.

소포클레스의 대표 저작 오이디푸스 왕,안티고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고민이 복합적으로 담겨있다. 신이 정해놓은 운명 속에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인간은 운명이라는 굴레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탈주하려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운명의 비극적 기제는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델포이 신전에 적혀있는 너 누군지 아느냐?’ 라는 물음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고 의도적으로 의도한 것도 아닌데 신의 의도에 걸려, 이미 굴레 속에 억압되어 있는 그 압축되어진 기억들이 언젠가는 돌아와 버리면서 비극 되어져 버린다. 이러한 비극을 민주적 성향의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공연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에 따라, 소포클레스도 궁극적인 목표는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몰입이었다. 왜냐하면 비극 속에는 연민과 공포가 있기 때문이고 단순히 나만의 일이 아닌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벌여진 이 비극은 상당히 정치적이었음은 틀림없다. 아테네인 시민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관람이 가능했었다. 아테네의 정치 구조와 비극 상연 문화를 비교해 보면 그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민회나 법정 연설이 주로 교육받은 이를 중심으로 행해졌던데 비해서, 비극이 상연되던 극장은 상대적으로 보다 민주적이었으며, 민회보다 비극은 거의 1/2의 시민이 참석하였다는 점에서도 극장의 흡인력이 더 강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최혜영 109). 따라서 비극은 오늘날 우리들이 대중매체를 접하고 서로 생각을 공유하는 장이었을 정도로 파급력이 있었다. 소포클레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만큼 정치적으로 영향을 가졌음은 틀림없다. 비극은 아테네에서는 상당히 정치성을 띄었다. “극이 상연되기를 원하는 작가들은 미리 그 대본을 아르콘에서 넘겨서 심사를 받아야 했다” (최혜영 110). 따라서 정치적 검열을 거쳐야지만 이 비극을 공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가들의 성향에 맞게끔 작성되어야만 했다. 극장은 폴리스 정책의 효과적인 선전장이었다 (최혜영 110). 마치 히틀러가 연설할 때 고조되는 연극 같은 무대 장치 그리고 그 전에 있는 장엄하고 어마어마한 행진을 통해 비판 없는 민주적 군중 심리를 낳듯이, 이 연극이 행해지기 전 아테네시가 제공한 병기로 중무장하여 행진해 들어오는 의식을 치른다 (최혜영 111). 그리고 그 소포클레스의 비극 주 무대는 반 아테네의 성향을 지닌 테베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이전부터 점점 개혁되어 온 것이었지만 소포클레스가 코러스라는 기능을 잘 살린 인물 중 하나이다. 합창단 출신이었던 그는 극중에 갈등이 발생 시 코러스를 집어넣는다. 코러스는 오이디푸스 왕,안티고네에서는 테베의 연장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정되어 있고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콜로노스의 연장자로 구성되어있다. 세 작품 전부다 상당히 주관성이 강하다. 영웅을 찬양하기도 하고, 중간 중간 사건에 개입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한다. , 이 극의 사건 전개를 코러스가 유도한다는 것이다.

 

코러스 : , 왕이시여! 이 일은 우리를 몹시 두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진 마십시오. 적어도 그 일을 목격한 사람으로부터 자세한 것을 알게 될 때 까지는. (소포클레스 54)

 

코러스는 마치 한 영웅을 찬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안위에 대해서 걱정하고 신에 대한 분노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작용하기에 신의 운명이 그대로 유지되어 진다. 오이디푸스가 갈등할 때 라이오스 왕의 살해 사실을 어떻게 밝혀내는지 그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점점 가면 갈수록 그들의 보이지 않는 흑막이 존재하는 것이다. 심지어 관객들과 계속 추적하는 것을 막으려는 이오카스테에게 까지 신을 빌미로 경고를 한다 (천병희 111).

 

코러스 : . . . 라이오스 오아에 대한 예언은 빛을 잃어 사람들이 잊은 지 이미 오래고 어디서도 아폴론 신의 영광을 찬미하지 않는다. 신들에 대한 신앙은 점점 시들어 가고 있다. (소포클레스 57)

 

이러한 코러스의 만행은 이오카스테에게 오이디푸스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죽이도록 내버려두고, 관객들에게 흥미를 유발시키게 하려고 오이디푸스 자손은 누군지 궁금해 하게 만든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도 역시 이와 유사하지만, 테베인들 과는 다르게 좀 더 주관적인 경향을 띄고 극의 참여에 실질적인 개입은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왕이 콜로노스의 성스러운 숲 속에 진입할 때, 들어가지 마라고 막고 그의 정체를 알자 떠나라고 명령이나 간곡함보다는 호소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또한 신에 대한 규율을 어긴 나그네지만, 신들의 노여움을 해결해주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는 친절함까지 보인다. 이런 친절함은 크레온이 오이디푸스를 강제로 끌려가려고 할 때, 신에게 기도까지 드려 버린다. 중립적인 탄식과 한탄 같은 것은 없다. 그의 운명에 대해 제사장 인 마냥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콜로노스는 아테네의 교외에 위치한 소포클레스가 태어난 곳이다. 테베의 코러스와 콜로노스의 코러스는 그의 진행하는데 있어서 거시적으로는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사건개입의 중요 부분 즉, 신과 주인공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주느냐에 대해서는 상반된 행동을 취하고 있다고 판단 할 수 있다. 이는, 신에 대한 운명에 신의 입으로서 운명을 이끌어 갈수록 기재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기도를 통해 영웅의 위기를 좋은 운명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신에게 호소하느냐의 차이다. 안티고네의 경우에는 위의 두 코러스를 소포클레스의 구미에 맞춰서 종합시켜놓았다. 형식적으로 당연히 왕을 찬미하기는 하나 실제 사건이 발생되면 신의 편에 들어서 심판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향력은 없고 단지 이들의 대화와 노래는 관객들에게 호소하고 비판의 떡밥을 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안티고네의 무사안일을 신에게 기원하기는 하지만 이미 안티고네는 죽은 상태다. 모든 것이 후회만 남길 때, 코러스가 관객들과 하고 싶은 말들을 털어놓으면서 끝나게 된다.

 

코러스 : 지혜야말로 최고의 행복. 신들에 대한 존경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오만한 자의 호언장담은 언제든 큰 타격을 받고, 벌 받은 자는 늙어서야 현병해진다. (소포클레스 221)

이러한 코러스의 역할들은 관객으로부터 공포와 연민을 경고로서 제시한다. 코러스는 그들 삶의 심판자이자 제사장이다. 신의 뜻, 즉 소포클레스와 아테네 정치인들의 이데올로기를 거스를 수 없도록 하고 설득하고 있다. 브레히트의 조치같은 경우에도 공산주의 심판원으로서, 중간 중간 등장으로 인한 몰입 방해로 관객들에게 현 사회의 비판의식과 참여의식을 스스로 키워 나가게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당시 사회의 이데올로기의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함이 브레히트의 목적인데, 그 목적 자체가 브레히트의 이데올로기를 다시 재생산시키는 것 밖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희곡의 수잔 로리 팍스의 핏빛으로 쓴 주홍 글씨처럼 처음 프롤로그에 연출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등장인물들이 코러스로서 설명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결국은 코러스라는 장치가 중재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기 보다는 연출자의 법에 의도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나 다 우상은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보았을 땐 자신의 큰 이상 속의 역할 모델이 될 수 도 있다. 또는 자신의 다른 자신 일 수도 있다. 한 도시를 대표하는 왕이고 스핑크스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사람이 오이디푸스이다. 가장 지혜롭고 용감하면서 한 나라의 모범이 되었기에 그를 찬미하고 추종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연스레 사회에서 국가 전체의 구성원으로서는 영웅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이자 선망의 존재가 된다. 영웅은 비범하지만 신 앞에서는 평범한 존재일 뿐이다. 아무리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고해도 소용없는 모습을 관객이 보게 된다. 오히려, 신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서 비극이 종결된다. 관객들은 영웅의 행동 덕분에 인류의 한계를 실감하게 된다 (앙드레 보나르 14). 자신들의 위대한 모델이었던 영웅의 추락을 보게 되면서 자기 자신들과 영웅과 동일시하게 만들도록 소포클레스는 세 가지 장치를 만들었다. 코러스, 예언자, 신이 바로 그것이다. 극에 참여하고 있는 코러스는 관객과 연극의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는 존재다. 연극 속의 비극들에 대한 모든 상황을 코러스는 관객에게 전이시키고 있다. 신이라는 존재는 예언자와 때로는 코러스를 통해서 운명을 예언하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살펴보면, 신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오이디푸스에게 괴롭힐 때는 언제고 그를 구원하면서, 아테네 교외 콜로노스를 그로 인해 구원자로서 행하게 한다. “신들은 그가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 때문에 그를 선택해서 영예롭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앙드레 보나르 201). 테베는 운명적으로 신들에 의해 파멸을 맞는다. 라이오스 시절부터 크레온 집권까지 계속해서 불운이 끝이지 않는다. 단지 영웅의 자손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안티고네처럼 영웅을 오랜 세월동안 함께 방랑 했으면서도 정작 안티고네에게는 돌아가는 게 전혀 없다. 오직 아테네 백성들에게만 신들에게 복을 받는 다. 안티고네는 단지 신의 법을 따랐을 뿐이고 크레온은 통치자로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선택한 것이다. 그게 신의 법이든, 인간의 법이든지 간에 결국은 전부 테베 인들은 불행하게 되지 않는 가? 영웅은 신의 뜻을 거스르려고 엄청 노력했었다. 결국 운명의 길로 빠져 버리자 눈을 찌르고 저주받은 자로 낙인 찍혔다. 그 후에는 신의 뜻을 따르면서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어디서 죽어서 그곳의 복을 심어다 줄지, 신의 하인 노릇을 한다. 신이 인간을 다스리는 세계 속에서 영웅은 아주 잠깐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억울함이 잠시 그의 입 밖에 드러낸다.

 

오이디푸스 : . . . 나는 다만 나에게 부당한 짓을 한 사람에게 보복을 했을 뿐이니까. 설사 내가 잘 알고 그런 짓을 했다 하더라도 나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고. 그러나 알다시피 나는 전혀 모르고 그런 짓을 했던 거요. (소포클레스 99)

 

관객들은 그의 비극 세 작품을 본다면, 현실과는 동떨어질 정도로 내용 구성상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영웅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라면 그 정도 가혹한 운명에 불만을 털어 놓는 게 당연한데, 그런 행동은 없고 계속 신의 찬미만 내용전체가 이뤄지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관객들은 영웅과 인간이라는 존재를 서로 동일시하지 않고 다른 타자로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와 저 세계와는 서로 병렬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 할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일반 사람들의 삶처럼 구성하게끔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증상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증상은 억압된 것이다. 자신들의 삶을 비추어 볼 때, 당연히 극 안에서 생기는 모순은 언젠가는 관객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소포클레스는 자신의 극이 현실이게끔 혹은 빠져들게끔 하기위해 일부러 그 모순을 관객에게 고백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은 스파르타 동맹국인 테베의 플라타이아 침공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테베는 아테네를 열렬히 사랑한 소포클레스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테베는 스파르타 동맹국이기도 하면서 페르시아 전쟁 때는 중립을 구사하기도 하다가 친 페르시아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테베왕국은 오랫동안 아테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만 놓고 보더라도 힘을 잃은 아테네를 이용하여 전쟁후 라이벌이 되어버린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된다.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놓고 보더라도 그리스인으로서는 테베는 힘이 강한 나라면서도 그리스인사이에서 상당히 기회주의적인 나라였음은 틀림없다. 소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테베의 만행은 외상임이 틀림없다. 비록 그것이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영웅이 될지라도, 테베의 왕으로서가 아닌 아테네의 수호자가 아닌 이상, 신의 천벌을 받을 존재였던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시칠리아 전투를 통해 아테네인은 216척의 함선과 4만의 군사를 잃었다. 소포클레스가 죽은 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말은 사실상 아테네로서의 민주정은 끝이 나게 된다. 이렇게 페르시아 전쟁이후 찬란했던 아테네의 번영은 그가 사는 동안 27년간의 전쟁에서는 시민들에게 전쟁 아니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불안과 공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통해 끊임없이 절반이 넘는 축제 참석자를 위해 재교육 할 수밖에 없었다. 관객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호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가 진정으로 아테네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게 하려했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그가 살아생전 공연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고, 그가 사후에 손자에 의해 뒤늦게 아테네가 쇠퇴된 상태에서 공연을 했다. 연극 연출가이자 정치가 였던 소포클레스의 이데올로기는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기표로서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우리에게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어떤 외상 적이고 실재적인 중핵으로부터의 도피처로 제공하는 것이다” (지젝 89). 관객들에게 환상으로서 그의 비극은 국가 이데올로기의 구성요소다. 이데올로기가 없어질 수 없다. 이데올로기가 없어지면 그 자체로서 상징 계는 무너져 버린다. 기존의 상징계의 모순들이 실재계를 통해 상징계가 무너져 내린다면, 또 다른 상징 기표들이 무수히 쏟아져 내릴 것이다.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 은하영웅 전설에서 나오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국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에 끊임없이 휘둘리는 존재이다. 그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얼마나 숭엄한지,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가든 나쁜 방향으로 가든, 민주자본주의의 모순에 대중들의 힘을 얻어 왕권을 확립한 폭군 루톨프 대재라든지 그의 폭정에 못 이겨 민중들을 이끌고 행성을 탈출하여 민주정을 일으킨 하이네센과 그의 동지들이라던지 순수한 자본주의 사회라든지 중세 가톨릭처럼 종교에 심취시켜 신을 앞세워 하나로 만들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세력이 모두다 모순이 항상 생기며 서로 대립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의 지지는 왔다 갔다 하고 대표하는 사람만 바뀔 뿐, 모두 우매한 존재로서 인간은 끊임없이 모순 속에 테제와 안티테제의 반복 속에, 진정한 진리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아무리 노력해도 알지 못한 채 삶과 죽음을 가지고 장난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삶의 존재자인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은 이상적인 공화주의를 잠시 동안 이끌고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순수한 청년 양웬리와 이상적인 왕권정치를 잠시 동안 이끌고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순수한 청년 라인하르트가 서로의 이상을 인정하고 화해와 평화를 위해 만나려고 하는 것을, 반대파들의 공작에 죽음으로써, 사실상 실재하는 잉여 없는 등가세상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이 있다. 소포클레스는 관객들을 위해 그 당시 불쌍한 운명을 지닌 자에게 다른 여럿 것들을 생각해도 중요한 어느 한 이데올로기만큼은 벗어날 수 없게끔, 환상에 빠지게 하고 공포를 주는 마취제를 놓아준 셈이다.

부산대학교

인 용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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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영미희곡 연구 수업에서 윤화영 교수님의 강의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참고바랍니다.
 동물되기는 더나아가 분자되기의 과정이다. 이는 결연, 계약으로 배치되며 변용태의 순화 n이다. 탕영토화는 재영토화로 실패하고 실패 또한 판의 일부이다. 기본적으로 여성되기, 아이되기,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를 들 수 있으며 이것이 되기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존재의 내재성을 주장하였다. 큰 물방을이 바다를 이루는 것과 같다. 박물학은 풍성한 다양성을 지닌다. 구조주의는 관계들을 일치시켜 환원, 축소시킨다. 이렇듯, 계열과 구조로 파악하지만 그렇다고 구조주의의 구조는 아니다. 항들이 구분될 수 없을 정도로 공존하는 생성은 지속된다고 베르그송을 말한다. 작가되기는 작가 자체가 변용태를 주는 것이다. 개인적인 느낌이 아니라 무리의 실행이다. 내정유사성을 넘어 대적상증으로 간다. 구조주의의 구조분석이다. 축소지향적인데, 현재라는 선을 긋고나서, 거기에 있는 현재의 지점은 수많은 생성들의 블록드 에 절단면ㄴ을 그어 그 현실 그 자체가 모두 포함됨을 보는 것을 말한다. 나라는 것이 아닌 순간순간의 이것인 것이다. 반 오이디푸스로서 동물되기는 무리에 해당되기 때문에 결연을 통한 리좀적이다. 특정한 순간에 무리를 구성하는 모든 다른 선들이나 차원들을 고려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의 문제는 어떻게 존재를 규정하는 건가의 문제와 같다. 자아란 규정된 것이 아니라 진동들의 문ㅌ턱과 같다. 고정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무는 신적인 것이며 지각 불가능 하게 되기다. 한스라는 개체가 여러가지 관계속에서 다른 개체의 부분이 될 수 있다. 각개체가 하나의 무한한 한 개체이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다양체이다. 실제 이미지는 그 이미지 자체도 있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변용태, 즉 외연적인 부분들로 이루어 특정한 관계를 같는다. 위로는 내포적이다. 외연은 겉보기의 연장이다. 경도와 위도는 계속 변화하고 통과한다. 그 순간 순간 마다. 스피노자의 이것이다. 한스는 힘들의 차이 즉 자기안에서 외적으로의 관계 즉 배치안에서서서, 지도를 계속 변화시킨다. 인생 파도 처럼 말이다. 신적인 것 즉, 없음이라는 것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이다.
 철학은 문학이다. 내가 지각하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 그것은 비개인적인 지각과 정서다. 지각은 대상에서, 나에게서 느끼는 것이다. 문학과 철학의 공통점은 삶의 문제를 다룬다. 문화의 병, 진단, 징후 역할 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이다. 치료가 가능하다. 유한 양태에 대한 분석이다. 스피노자는 선과 악은 없다고 하였다. 수동과 능동에서, 수동은 종속이나 예속의 상태를 말한다. 진단을 통해 되기의 활동과정이야 말로 윤리적 과업이다. 미래에 달쳐올 악마적인 힘, 예를들어 스탈리즘, 파시즘 같은 것을 진단하고 치료해야한다. 스피노자는 기존 신학이 하나님을 왜곡했다고 한다. 인간과 자연 그 정당한 상태로 회복을 주장하였다. 오이디푸스, 즉 자본주의로 부터의 자유를 말하기도 한다. 없이는 질서가 없다. 체계 없이는 불가능 하다. 이를 편집증적 사고ㅎ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분열증 적인 욕망이 있다. 이 둘이 함께 작동한다. 그리고 창조를 한다. 체계는 탈주하고 창조한다. 억압으로 부터 벗어난 창조를 통해 서로 보완해나간다. 탈주는 탈 편집 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산업혁며으이 상품들이 우리를 유혹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산업 혁명이후 만국 박람회를 예로, 문화의 겉모습을 보장하여 합법적 유혹을 벌이는 것이다. 백화점이 그 예다. 유기체는 형태이다. 고정된 주체인 것이다. 고착화된 것은 되기의 상태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낳는 것은 차이다. 본질적인 차이의 시간으로 잠재적인 차이와 세계를 포착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적으로 함께 흔들리는 그 시간을 생각해야만 한다. 모든 가능한 분지점들의 하나의 세계속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의 상처가 잠재적 상태에 있다. 영화에서 클로즈업을 생각해 보자. 평소 전체의 세계를 본다. 하지만 클로즈업이 되면, 표정, 윤곽을 지울때, 눈물이 하나의 눈물이 아니라 고난이 될수 있음을 상징한다. 비개인적 정서로, 주체가 사라진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아담이 사과를 따는 순간이 실제라고 했다. 하나의 삶을 구성하는 내재적 요소, 양태들로서 하나의 실체는 존재의 일의성 구성하는 실체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내재적 요소인 지각과 정서는 자유롭고 존재적 일의성을 지닌다. 오이디푸스의 억압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다. 함께 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은 모든것이 공존하는  실재와 상반되는 가상에서 순수사건 시간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는 부분 충동 성향들이 상당히 통합한다라고 했다. 독자적 욕망으로 말이다. 신체가 외적인 형태는 해체되고 힘들이 출현하는 부분들이 있다. 신체의 해체는 외형을 가진 기관이 없는 것이다. 기관없는 신체는 개개의 신체를 기관의 힘 즉 강도들로 보았다. 강도적 실체로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강도적 힘들로서의 기관들이 되기이다. 자아와 비 자아 그리고 인간과 자연 혹은 내부와 외부. 더 이상 구분 안되는 지점까지 되기해야 한다. 순수한 강도를 느끼는 것은 분열증 적이다.
 왜 들뢰즞는 문학을 보았는가? 주체의 해체, 세계의 해체, 정치의 소수화, 안티오이디푸스 프로젝트와 연관이 있다. 베켓은 증인 즉 청중과 비전을 증언하는 그것을 이미지로 부여준다. 하나의 시간의 연쇄를 따르는 게 아니다. 고전문학의 경우 전체적으로는 아니다. 순수사건의 문학은 가상의 문학이다. 생의 힘들이 통과하는 것이지 생의 과거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 되기의 문체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것을 가상화 하는 것이다. 형태로 사유하기의 반대 개념이다. 페미니즘의 기획이 또 하나의 여성의 고정된 정복한 상태로 군림 할 수 있다. 이를 데리다는 폭력적 서열이라고 말한다. 여성 되기가 아니라 끊없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강도가 단지 지나가는 것이다. the가 아닌 a 부정관사는 비개인적인것, 즉 이것의 되기를 말하는 것이다. the 라는 형식적 특징을 버리는 것. 예를들어 백경에서 모비딕과 선장은 되기의 상태를 이룬다. 선장 한 개인이 아니라 모비딕이라는 흰 빛이라는 벽 그것과의 되기과정이다. 사물속의 생을 드러내기 위해서 창조되기 위한 필연적 우회로다. 때린아버지와 맞은 아들은 결국 오이디푸스 삼각형 구도를 지닌다. 베르그 송은 자아를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무규정적인 것을 통한 비전 그리고 되기를 말한다. 문학은 개인 기록이 아니다. 새로운 비전 즉, 세계의 기억과 비개인적인 기억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혁명적 되기에 서로 잡혀야한다. 새로운 세상을 지배위한 요청이 아니라 언제나 소수 영원히 마이너한 문학을 추구해야한다. 아드리안 케네디의 작품을 예로 들수 있겠다. 실제 삶에 서는 오이디푸스적 이다. 따라서 정신 착란적 문학 즉, 건강한 문학을 창조해야한다. 편집즉적 억압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생의 가능성을 지닌다. 탈주와 탈영토화는 영토에서 탈영토하는 것이다.
 포인트는 욕망의 흐름이다. 차기가 맞음으로써 성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마조히즘적이라고 한다. 욕망의 과정 그 자체가 중단이다. 영원히 정착하지 않는 결여 있는 상태이다.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적인 것이다.
 절대적인 것은 여러가지 양태들이 된다. 특정한 시공간에서 말이다. 문장 자체를 길게하거나 싹을 틔운다. 이를 시공간적 인터벌을 창조한다로 할 수 있겠다. 타자들의 관계를 창안해야한다.
 베르그송은 실제 오브젝트는 항상 잠재적 이미지 라고 하였다. 설계도와 DNA가 그것이다. 가상은 변화한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가상은 실제와 함께 하는것이다. 서로 낳고 낳는다. 항상 같지 않다. 변한다. 잠재가 현실을 낳는데 1:1 대응이 아니다. 현실화가 잠대와 같은 것은 하니다. 시간관자체는 시간 즉, 과거, 연재, 미래가 아니라 순수과거를 말한다. 이는 잠재 자체이다. 베르그 송은 지속을 중요시 하였다. 부정사의 상태는 특이점의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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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가지고 강의한 수업을 토대로 쓴 글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의 개념을 생각해보자. 질료는 재료이며, 형상은 재료를 가지고 형상부리로 사람을 만든다. 영혼이 되돌아 온다는 것은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차이들에 의해 되돌아 온다고 했다. 이 세상의 존재는 프라톤의 이데아에 따르면 어떤 결과는 모방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내려와 창조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오차적으로는 복사다. 저 멀리 이념이 있는 것이다. 인신록에서는 인간은 개념화 한다고 하였다ㅓ. 존재자들의 존재란 존재의 본질은 존재자들의 본질이다. 초원적인 것은 이데아이며 형상이다. 데리다는 이를 배격한다. 차이를 그 이념이며 차이 그 자체가 차이보다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신의 형상과 인간들의 형상 사이에는 초월이 있다. 저건 나무다 라고 안보고 말 할 수는 없다. 지각을 한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다. 개념을 만든다. 이는 보고 아는 것이다. 존재라는 것은 기원, 동일성, 근원이다. 니체는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차이로 돌안온다고 했다. 예컨데, DNA와 DNA가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DNA를 창조하지만 이 DNA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차이들 밖에 없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있다와 없다의 구분이 없다. 공에서 시가해서 공으로끝난다. 다만 그것의 형식은 존재하너다. 영원한 것은 있다. 실체는 없다. 그러나 형식은 있다. 감각도 중요하다. 거시적 지각과 미시적 지각이 있다. 배고픔을 느끼고 배고픔을 안다. 그러나 미시적으로는 배고픔이 느끼기 직전에 이미 배고픔을 몸은 알고 있다. 이는 외연적 크기와 강조적 크기로 설명된다. 강도적 크기는 좀더 쉬운 예를 들자면 설탕을 넣어도 처음에는 모르다가 자꾸 넣다보면 어느센가 느껴진다. 그 어떤 최대한 긴장하는 본질 그 장소는 0에 근접한 놀이와 유희에 가깝다. 모든 삶 , 즉 본질은 End game 이다. 시작되고 끝나고 다시 끝나고 시작된다. 유령이다. 강도적 크기의 출현으로 삶을 보면 힘의 출현은 시시각각 변이하고 변화하는 연속체다.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삶에 대하여 선, 악에 대한 판단기준은 없다. 예를들어 재판을 하는데 반성문을 쓴다. 잉여 쾌락이 발생한다. 재판은 단지 판결의 권리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강도적 크기의 판단기준은 +-다. 강도기준에 따라 0과 이것이 결정된다. 서정적인 개념과 발생이 아니라 차이들 사이의 상호규정에서 앞의 일에 대해 크거나 작거나 하는 것이다. 배고픈거에 비하면 그 이전에 배고픈것과 비교하면 별거아니다. 이는 이전과 이후가 공존한다. 서로 이전의 배고픔과 이후의 배고픔이 서로 비교 차이가 발생하면서 결정된다. 원인에서 결과는 인간이다. 신은 초월하고 인간은 결과물이다. 이들은 내재적인 것이 된다. 대상의 힘은 시시각각 변화를 말한다. 양태는 존재하는 것이다. 소산이란 생산된 것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다가 나는 의심할 수 없다라고 한다. 존재론에서 본질적 물음은 나는 누구냐? 이다. 대상의 힘의 출현 뿐 아니라 주체도 관점이 바뀐다. 대상이 어떤 형태를 정의하지는 않는다. 이미 이렇게 되넋은 형성되는 과정, 즉 힘의 발생에 의해서 생긴다. 단지 실재를 대상으로 바라보는게 아니다. 대상을 힘의 출현으로 본다. 고정된 어떤 형태를 시간을 주입하면 그 고정된 형태는 변할 수 밖에없다. 수간과정들의 규정들이 들어 있다. 생성과정으로 보는 차이는 오이디푸스와 대립되는 내용이다. 무의식은 미세지각으로 있다가 거시적 지각으로 드러난다. 순수지각과 수수한 정서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순수지각은 의식은 못하지만 초록에 존재있게 하는 것은 노랑과 파랑이다. 감성의 중요이다. 모든 경험상의 지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환각적이다. 라이프니츠는 환각에서는 현존한다고 했다. 예를들어, 고집하지 마라 확신하는데 아닐 수 있다. 조심해라. 원래 아줌마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 경험되는 것은 분잦적 감각 지각 뿐이다. 겉모습 몇번 만 알고 판단하면 안된다. 지각하는거에 오히려 본질적이다. 지각 불가능 하게 되기와 같다. 두힘의 조우가 잘 드러나는 백경을 보자. 선장과 모비딕이 맞 붙으면서 외적 지각 불가능한 생성이 일어난다. 생성의 모든 과정 힌들과 힘들의 만남과 조우는 거기서 생겨나는 생성이 있다. 미시적 지각들의 생성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다. 재현적 모방 즉 미메시스는 상상적이고 동일시는 아니다. 선장인지 모비딕인지 식별 불가능한 대도 들어간다. 고래에게 작살을 던진 것은 자신에게 던진 것이나 다를바 없다. 선장이 동물에 속박되지만 동물 또한 다른 것이 된다. 지각과 정서에서 우리가 인간적 혹은 고래적 차원에서 지각 할수 없는 순수한 흰색이었다. 바로 그 고비는 별이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고래가 사람, 사람이 고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각가의 힘은 다른 하나를 조우한다. 그들 사이 또는 그 둘 밖의 어떤 무엇이다. 이 무엇은 순수한 정서이며, 지각이다. 비개인적인 것이고 변별적인 관계들, 덩어리들이다. 이는 주관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이념차원은 시간 공존의 차원이다. 모든 요소있고 변별적 관계도 있고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6시와 7시는 변별적 관계에 의해서 경험가능한 잠재성이 있는 것이다. 경험 차원은 현실태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반복할 수 있다. 복사는 차이에서 나온다. 이를 니체적 차이라고 한다. 이념적 시간은 과거, 연체, 미래이다. 하나의 고정된 주체는 없고 우발적으로 변동한다. 대상은 본질적 형상은 아니라, 순수한 감수성에 얻게된다. 연속체다. 무지개는 여러색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합치게 되면 빛은 희색이고 물감은 검은색으로 된다. 그속에 무지개 여러개 색이 담겨 있다. 차이자체란 무지개 색깔 하나 하나가 차이들이다. 차이들이 모여서 무엇을 만든다. 이 무엇은 선험적 조건속에서 차이를 생산하는 것이다. 
 트라우마 구성하는 사건들도 차이들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정리가 가능하다. 텅빈 구멍으로서의 모든 것들을 넣는 무의식들의 흔적이다. 따라서 하나가 아닌 둘이상의 차이들로서 계열과 의미가 발생된다. 한번도 현존한 적 없는 과거를 순수과거라고 한다. 현재라는 선속에 있는 그 지점이 과거의 덩어리다. 과거 없이는 현재가 없다. 현재가 지나가기 위해선 과거가 있어야 한다. 사건이 기원적이라면 시간순이다. 이와 상반되게 사후적이라는 것은 과거는 정말 현존했던건가?에 대한 의문이다. 모든 사건들과 뒤섞여서 현상 혹은 양태를 만들어 낸다. 원초적 사건인거 같으나 사건이 없이는 의미가 즉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는다. 사후성의 논리에서 트라우마는 차이들을 낳는 혹은 발생기키는 그 차이 그 자체다. 내용은 없는 형식은 원초적 사건과 기원에 반대되는 논리다. 그 시간이다. 차이들이 현실화된다. 이념적 시간인 중간 휴지의 시간은 현실적 시간 혹은 전후관계와는 상반된다. 엘리스의 이야기에서 선험적 근거로서의 차이 즉 시간 전후가 흔들린 상태를 설명할 수 있다. 엘리스가 커졌을 때, 이전의 작은 엘리스를 떠올려야 자신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어두운 전조가 자이 자체다. 차이라는 것들 끼리 계열을 이루고 뒤늦게 본질이 끼어들어 어두운 전조를 있게 한다. 차이들이란 현실화는 되지 않지만 초월적 근원이 된다. 이상한 나라 엘리스에서 차이의 관점은 커졌다와 작아졌다이다. 작고 큰것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끊임 없이 작아진다면 작은것은 큰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사후성 논리가 의존하는 것이다. 이는 억압적이다. 과거의 원한에 사로잡혀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은 망각으로서 나아간다. 사후성의 논리는 부정된다. 힘의 보다 긍정적인 의지는 생산하려는 욕망이다. 들뢰즈와 니체의 이론이다. 초월인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로잡혀 있으면 재 활동이 된다. 억압된다. 미래를 생산하지 못한다. 기표의 기의는 끊임없이 생산한다. 많은 낱말 들이 대리보충된다. 이를 차연이라한다. 이 흔정과 지연이 있음에 근원적 의미를 지닌 절대적 기표가 아니라 끊임없는 연쇄와 글쓰기 보충이 있는 것이다.
 잠재적 차원에서는 차이가 공존한다. 태어나기전 잠재적 차원에서 포기한 것이다. 본질의 세계다. 현상적 세계가 아닌 영원한 본질의 세계 그속에서 나는 나의 아버지였고 나는 나의 아들이었다가 된다. 작가의 본질은 사실성이었다. 그러나 베켓의 이미지 출현은 힘의 출현에서의 대상이 된다. 욕망하는 생산은 힘의 의지인것이다.생산하는 자연은 속성들의 일의성으로 생산되는 자연이 된다. 본질은 내재해있다.영혼회귀는 함의 의지다. 생성만이 존재함을 긍정한다. 내재성과 초재적은 상반된다. 존재는 일의적이다.
 말하는 주체와 말해진 것 안에서의 나 즉 주체는 언표하는 주체가 언표의 주체를 말한다. 어떤 한 개인이 발화한다 하더라도 사회의 집단적 발화가 있다. 카프카의 작품은 파시스트, 전체주의 속에서 두욕망의 동시 존재하였다.  분열증적 욕망은 탈주하려 한다. 편집증적 욕망은 이것으로 부터 탈영토화한다. 스피노자는 행하는 그가 정당화 된다고 했다. 그라는 것은 신이 아닌 다른 신 혹은 우리 스스로를 말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를 일끌어가고 생산한다. 결여는 단순 결여가 아니라 범신론적 사고의 스피노자적 해석이다. 분열증적 욕망들이 자리잡고 있다. 애초에 욕망하지만 발화 될 수 없는것. 따라서 대체물을 찾아서 욕망을 찾는다. 끊임없이 연쇄될 뿐이다. 충족되면 다시 부족된 것을 찾기 시작한다. 결핍은 계속 결핍의 반복이다. 태어난 존재의 이유는 내가 하고 있는게 아니라 당하고 있는 것이다. 희극에서 반복적인 대사 그 자체가 만족이다. 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존재 그자체 근원적 결핍이다. 이는 애초의 결여다. 왜냐면 궁극적 목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상 a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욕망의 기계의 본질은 힘이다. 생명은 곧 기계이며 들어오면 빠는 것이다. 신의 의지를 배재하고 운명을 배재한 것이 기계다. 편집증적 법 없이 사회는 없다. 욕망하는 기계는 생산하는 경제 형태를 지닌다. 힘의 변용은 리비도다. 연결로서 종합의 형식을 이어나간다. 스피노자의 개념은 속석이며 라캉의 부분 충동이라 할 수 있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등록을 하는 경제 형태를 취하지만, 리비도가 부분 변모하여 누멘이 된다. 그리고 속성이 분리하여 이접이 된다. 실체라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 이는 칸트의 실재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독신 기계는 소비를 하며 기관없는 신체의 일부분인 볼룹타스가 힘의 변용이다. 연접을 하고 계속적인 변용들 즉 되기의 과정으로 양태한다. 분열증적 주체와 부분적 주체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다 의 계속적, 횡단적 연접인 것이다. 참된 욕망은 분열증적 욕망이다. 베켓은 삶 그자체가 End game이라고 했다. 근본적으로 Endgame은 다른 것으로서의 다른 Endgame으로의 과정이다. 계속적인 흐름 속에서 주체가 그때 그때 출현하여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분열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거짓말을 통해서 진리를 찾는다. 기호를 하여금 대상을 다가가게 하는 이미지다. 아직은 모르는 상태에서 경험을 통해 아는 것. 사유의 양태는 무의식이다. 사유의 자동기계는 우리의 의식을 뛰어넘는 부분이 사유다. 사유의 양태에 관한 부분이다. 완전성과 기쁨을 위한 결합의 철학. 그것이 바로 우리가 초월하려는 그 철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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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깡 세미나 7에 있는 THE ESSENCE OF TRAGEDY : A commentary on Sophocles's Antigone 에서 윤화영 교수님 강의 내용을 요약한 것임.
 오이디푸스가 숙명적 무지와 숙명적 무모함의 소유자라면 안티고네는 아버지의 운명을 그대로 따르는 인물이다. 신이나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여 죄를 범하게 한다. 평소에는 공존했었다. 법을 따르고 죽은자를 묻는일.
 S인 주체는 태어났을 때 그 상태는 자연적인 존재일 뿐이지 주체인 상태는 아니다. 그런데 집단속에서 나는 나로써 타자와 나 사이에 개별됨으로써 주체는 어떤 식으로는 나를 표시되어진다. 이를 상징계의 과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거세된다. 빗금이 쳐진다. 자연적 존재일때 아무것도 자신의 욕망을 하면 되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젠 각각의 개인의 욕망을 사회가 적절히 대타자가 억압을 하는 것이다. 상징화에 의해 포기해야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일정 정도 포기해야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나와 대타자사이에서 언어적 시스템이 나온다. 하나의 자연적 존재에서 주체적 존재로 변모해나간다. 주체, S는 내가 내가 말할게 없고 남이 누군가 말할 수 없는 상태이고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완전하고 온전한 상태이다. 빗금 그여진 주체는 자연적 탄생이 아닌 주체로서 탄생됨인데. 결국 주체의 죽음으로서 이 사회에 태어난 것이다. 우리는 빗금 그여진 상태로 죽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S로서 탄생하기 위해 빗금그어진 상태를 죽이는 것을 두개의 죽음이라고 한다. Sade는 S가 빗금그여진 주체로 되는 것은 무언가에 작동되니까 그렇게 된것이다.
 안티고네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모르겠다고 끝까지 버티면서 고문을 버텼다. 대타자 입장에서 모델이 될 가능성은 저항하는 안티고네이다. 그러나 끝까지 버티면 주어야 한다. 추상적 개념으로서 말이다. 산채로 무덤에 간다는 것은 상징적 죽음이다. 주체의 표지를 뺏음이다. 살아있는데 무적자인 셈이다. 즉, 사회적인 죽음이다. 상징적 죽음이란 폭군이 죽으면 그의 모든 기록을 없애는 것과 같다. 욕망 발생 자체 매커니즘을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대타자가 주는 보상의 지위는 욕망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이유는 항상 욕망은 항상 성취하면 충족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그러나 항상 결핍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결핍, 대상을 가지지 않고 주이상으로 감으로써 자기 향유를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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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KBS 고전아카데미 김석 교수님의 강의를 청강하고 작성한 감상문;; 정도 되겠다;;
 성이라는 것은 생명활동의 일환이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성이 아니다. 상상 상징 정도로 생각하자. 본능은 말그대로 프로그램화 되었다고 생각하면된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중요시 여긴것은 성 즉 충동을 말하는 것이지 본능은 아니다. 구순기를 예로 들어보자~ 구순기에서 구는 입이라는 뜻으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입은 외부세계로 부터 접촉 가능하게 하는 통로역할 을 한다. 먹는 것 이 자체만으로도 본능이다. 그런데 아이가 배가 불러도 혹은 젖을 떼어도 끊임없이 빠는 행동을 한다. 그래서 손가락을 빤다거나 부모님이 젖꼭지 장난감을 물려주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충동이다. 이것인 집착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셩격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다음이 항문기라고 할 수 있겠다. 배설을 하는데~ 완전 간난아이는 배설을 하면 부모님이 치워준다. 그러나, 아이가 어느정도가 되면 스스로 특정 지점에 배설을 해야한다. 부모가 가르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이는 처음으로 정해진 방식대로 처리해야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재재가 시작되는 것이다. 규율이라고 하며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배설을 방출하는 것은 몸안에 있는 노폐물을 밖으로 내면서 쾌감을 느낀다. 단지 자신의 쾌감을 규율에 어기고 아무대나 싼다면;;; 사회성이 없을 것이다. 인색과 완고함이 결정된다.
 그리고 남근기가 시작된느데 이때는 자신이 남근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팔루스 정도로 생각하면된다. 풍요의 의미를 상징하는 팔루스에 대해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아이들이 성에대해 뭣도 모르면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 ㅈㅈ 만지니까 느낌 오네 정도로 생각하지;; ㅈㅈ 하면서 여성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ㅋ
 그다음;; 잠복기~ 그러다가 진짜 성에 눈을 뜨는 성기기로 간다~
 정신분석이라는 것은 운명과 관련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고 하는건 우리가 바로 프로이트라고 연상될 것이다. 이 오이디푸스에서 나오는 니가 누군지 아느냐? 는 굉장히 중요하다~ 정신분석에서 내가 진짜 누군지 아느냐? 정도??? 그러니까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무의식이라고 한다. 은유라고하는데~ 어머니와의 관계, 아버지의 살해~~ 이런 것들이 사실 오이디푸스는 일부러 그런게 아니다;; 신의 운명이 그렇게 타고난거 아닌가?? 오이디푸스는 어떻게는 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어릴적부터 버려지고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되는가~~ 델포이 신전에서 너 누군지 아니냐? 라는 질문과 자신의 신탁을 듣고 아버지를 죽일까바`(실재로는 양아버지) 다른 나라로 간건데;; 그때 살해한 인물이;; 친아버지;;; 결국 정신분석의 핵심은 언젠가는 되돌아 온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대해 들어가면 히스테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문제다. 의식과 무의식의 기재를 살펴보자면.. 우리는 마음에 기본적으로 모든 의식들이 집합되어있다. 이는 전부다 우리들의 행동이 사회생활에 다 드러낸다면 큰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의식에 의해서 그 의식들을 억압한다. 그래서 드러내지 않는데, 문제는 꿈에서는 드러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꿈속에서 마저도 우리가 그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들이 드러내게 되면 놀라서 깨기 때문에~ 꿈속 마저도 그것을 왜곡하게 된다.
 이러한 꿈은 여러가지로 압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압축이란, 여러이미지가 압축되어저 있는 상태다. 무의식은 억압된 기억이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바로 이 무의식을 끄집어내는거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트라우마라고 하는게 있는데 이렇한 외상성 증후군을 포착해야한다. 한 예로 프로이트의 꿈을 보자~ 프로이트는 서점에서 식물을 봤다;; 이게 끝이다. 그런데 이 식물이라는 의미는 .. 예전 코카인 연구로인해 피실험자의 죽음, 아내, 잘나가고 싶은 욕망이 예전 이 식물이라는 단어와 연관되는 것이다. 전치도 있는데~ 전치는 이미지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표상과 정서를 합친 기억을 포착해야한다. 압축과 전치로 꿈은 변형된다.
 무의식은 도덕에 의해 드러내지 못한다. 정의식으로 검열당해서 의식만 할 수 있는 그 의식만이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은 의식으로 드러내기 위해 압축, 전치하는 ㄱ덧이다.
 이드는 무의식의 저장고다. 본능적 욕구, 성적인것, 공격성, 쾌락을 역동적으로 드러내려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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