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기출 기반 요약 정리 자료

2019. 8. 7. 01:18Review/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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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국가의 사회 모습

1) 부여의 풍속에는 여고라는 제천 행삭 있었다. 이것은 수렵 사회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매년 12월에 열렸다. 이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죄수를 풀어주기도 했다.

2) 삼한의 지배자 중에서 세력이 큰 것은 신지, 작은 것은 읍차 등으로 불렸다.

3) 범금 8(8조법)는 고조선의 법으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등의 내용이다.

4)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있었는데, 소도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이를 통해 삼한이 제정 분리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5) 동예는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2. 고구려의 전성기

1) 고구려가 신라의 요청으로 왜를 격퇴한 것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이며, 이 내용은 광개토 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에 세워진 광개토 대왕릉비는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2) 충주 고구려비에는 대사자, 대형 등 고구려 관직 이름이 새겨져 있다.

3) 충주 고구려비의 비문에 고구려가 신라를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의 동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엿볼 수 있다.

4) 충주 고구려비는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비석으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5) 충주 고구려비가 한반도의 중부 지역인 남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것을 통해 당시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백제의 전성기

1)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에게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게 하여 강화된 왕권과 국가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2) 7세기 백제 무왕은 전북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였으며, 익산 지역으로 천도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3) 7세기 중엽 백제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을 비롯한 40여성을 빼앗았다.

4) 4세기 후반 백제 침류왕 때 동진의 마라난타가 와서 불법을 전하였다. 이에 백제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5) 6세기 전반 백제 성왕은 수도를 웅진에서 대외 진출의 여건이 좋은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로 바꾸었다.

 

4. 백제의 중흥 노력

1) 웅진 시기인 6세기 전반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백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참고로 현재 무령왕릉은 당시 웅진 지역이었던 충남 공주에 위치한다.

2) 사비로 수도를 옮긴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손을 잡고 551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겼다.

3) 한성 시기인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4) 한성 시기인 근초고왕 때 고흥이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였다.

 

5. 가야 연맹의 발전

1) 금관가야가 이끈 전기 가야 연맹은 5세기 무렵 신라를 지원해 온 고구려군(광개토 대왕)의 공격을 받아 쇠퇴했고, 5세기 후반 이후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형성되었다.

2) 전기 가야 연맹을 주도한 세력은 금관가야이다.

3) 신라는 초기에 박, ,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4)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 법흥와 때, 개가야는 562년 신라 진흥왕 때 신라에 복속되었다.

5) 이사금은 시라에서 사용된 지배자의 호칭이다. 신라는 초기에 박, , 김의 3부족이 연맹을 이루어 그 연맹장을 3부족에서 교대로 선출할 때에는 이사금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내물왕 때에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면서 왕권 강화를 위해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6. 삼국의 사회 모습

1) 고구려는 수도에 대학을 세워 귀족 자제들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고, 지방의 경당에서는 청소년들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2) 읍군, 삼로는 옥저와 동예의 군장이다.

3) 영고는 부여의 제천 행사이다.

4) 화백 회의는 신라의 귀족 회의체로 만장일치제를 통해 귀족의 단결을 꾀하였다.

5) 삼한에서는 종교적 지배자로 천군이 있었다. 천군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고, 신성 구역인 소도를 다스렸다.

 

7. 삼국 시대의 고분

1) 굴식 돌방무덤은 널방의 벽과 천장에 벽화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벽화를 통해 당시 사랍들의 생활 모습이나 사상 등을 파악할 수 있다.

2) 모줄임천장 구조는 네모난 여러 층의 천장을 엇걸리게 하여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들게 한 모습의 천장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무덤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3)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에도 굴식 돌방무덤이 제작되었는데, 봉분(봉토)의 둘레돌에 12지 신상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4) 황남대총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중에서 가장 큰 고분이다.

5)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는데, 백제의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다.

6) 백제가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이후에는 대체로 굴식 돌방무덤이나 벽돌무덤이 만들어졌다.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다.

7) 무령왕릉은 백제의 수도가 웅진이었던 시기에 축조되었다.

8) 통일 이후 신라의 고분은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규모가 작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고, 무덤의 봉토 주위에 12지신상을 조각한 둘레돌을 두르는 형태가 나타났다.

 

8. 백제의 문화유산

1) 백제 금동 대향로는 충청남도 부여군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2) 송산리 고분군 중, 6,7호분은 벽돌무덤으로,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제7호분은 지석이 발견되어 무령왕릉으로 밝혀졌다.

3)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웅진이었던 시기의 궁궐터에 해당한다.

4) 부소산성은 백제와 산성으로 왕궁의 배후 산성 역할을 하였다.

5)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금제 사리 봉안기가 발견되었다.

 

9. 삼국 시대의 탑

1) 통일 신라 때 만들어진 구례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이다.

2) 백제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목탑 양식의 석탑이다.

3) 통일 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경주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이다.

4) 통일 신라 때 만들어진 양양 진전사지 3층 석탑으로 기단과 탑신에 불상이 새겨진 것으로 유명한다.

5) 통일 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경주 감은사지 3층 석탑이다.

 

10. 삼국 시대의 비석

1) 6세기 신라의 진흥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통해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둘러보고 나서 북한산 순수비를 건립하였다. 한편, 19세기의 실학자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저술하여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을 밝혔다.

2) 5세기 고루려의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 대왕릉비다. 이 비에는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의 고아개토 대왕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3) 백제의 사택지적비이다. 이 비는 백제 귀족인 사택지적이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고 불당을 건립하며 세운 것이며,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한 내용은 도교적인 색채를 보여준다.

4) 고규려의 충주 고구려비다. 이 비는 장수왕의 업적을 기록한 것으ㅗ 당시 고구려가 한강 이남 지역가지 진출했음을 보여준다.

5) 신라의 단영 적성비이다. 이 비는 6세기 신라 진흥왕이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11. 통일 신라의 발전

1) 통일 신라 신문왕은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이는 강화된 왕권을 보좌하기 위해 유학 교육의 필요성이 커진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2) 신라 지증왕은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정벌하게 하여 신라에 복속시켰다.

3) 통일 신라의 경덕왕은 9주를 비롯한 군현의 이름과 중앙 관부의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4) 신라의 법흥왕은 병부를 설치하여 군권을 장악하였다.

5) 통일 신라의 원성왕이 관리 선발을 위해 도입한 독서삼품과는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12. 발해의 발전

1) 발해 무왕은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인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2) 발해 무왕은 당과 연결하여 발해를 견제하려는 흑수 말갈을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였다.

3) 발해 문왕은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기고, 이후 다시 동경 용원부로 옮겼다. 이후 성왕 때 다시 상경 용천부로 옮겨 멸망 때까지 수도로 삼았다.

4) 고구려 유민 출신의 대조영은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이끌고 지린 성의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5) 발해의 문왕은 당의 36부 제도를 수용하되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강력한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6) 7세기 말 거란의 반란을 계기로 당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이 틈을 타 대조영은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이끌고 지린 성의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7) 발해 무왕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또한, 돌권,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였다.

8) 발해는 선왕 때 51562주를 두었는데, 주에는 자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에 다시 현을 두고 현송을 파견하였다.

9) 발해는 선왕 때 전성기를 맞아 중국인들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13. 발해의 특징

1) 발해는 유학을 중시하여 이를 통치 이념에 반영하고, 유학 교육 기관인 주자감을 설치하여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2)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가 있었다. 골품에 따라 개인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은 물론 복색이나 주레 등 일상생활이 규제되었다.

3) 통일 신라 원성왕 때에는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를 등용하는 독서상품과를 마련하였지만, 진골 귀족의 반발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4) 일본과 정치적으로 가장 밀접했던 백제는 일본에 오경박사, 이박사, 역박사 등을 파견하여 유교와 의학, 천문, 역법 등을 전해 주었다.

5) 고조선에는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8조의 법률이 있었는데, 현재는 3개의 조항만 전해지고 있다.

 

14. 통일 신라의 불교

1) 의상은 관세음보살을 믿어 현세의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전파하였다.

2) 통일 신라의 설총은 이두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을 뿐 아니라 화왕계를 지어 유교적인 도덕 정치를 강조하였다. 참고로 설총은 원효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3) 황룡사 구층 목탑은 신라 선덕 여왕 때 자장의 건의로 건립하였고 백제 장인 아비지가 완성하였다.

4) 고려 고종 때 각훈은 삼국 시대 승려 30여 명의 전기를 모아 해동고승전을 저술하였다.

5) 신라의 승려 원효는 분파 의식을 극복하고자 화쟁 사상을 주장하였고, 그 사상을 담은 십문화쟁론을 저술하였다.

6) 선종은 개인의 정신세계를 중시하고, 참선과 좌선을 수행 방법으로 강조하였는데, 이를 불립문자라고 한다.

7) 인생 안정을 위해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 제사를 지내는 의례는 유교와 관련이 있다.

8) 천명사상은 민본 사상에 입각해 왕조 교체를 정당화하는 역성혁명의 논리로 유교와 관련이 있다.

9) 시경, 서경, 역경 등 5경은 유교의 주요 경전이다.

10) 노장 사상의 기반이 된 도가 사상은 신선 사상과 결합하여 불로장생의 현세 구복을 추구하는 도교로 발전하였다.

 

16. 남북국의 문화유산

1) 경주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불경으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2) 고려 시대에 제작된 평창 월정사 89층 석탑이다.

3) 백제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의 석탑이다.

4) 통일 신라의 경주 불국사 다보탑이다.

5) 신라 말에 제작된 양양 진전사지 3층 석탑이다. 기단과 탑신에 부조형식으로 좌불이 조각되어 있다.

6) 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으로, 팔각원당형의 구조로 된 이 승탑은 신라 하대 선종이 유행하던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7) 경주 불국사 다보탑이다. 이 탑은 불국사 경내에 석가탑과 함께 나란히 서 있으며, 매우 세련되고 화려해서 통일 신라 귀족 예술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8) 발해 석등이다. 석등은 절에 불을 밝히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발해 상경성에 대형 사찰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발해의 석등은 크고 강건한 기상을 보이며 연꽃무늬 등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볼 수 있다.

9)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국보 제12호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등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0) 평창 월정사 89층 석탑이다. 고려 초기에 송의 영향을 받아 평창 월정사 89층 석탑과 같은 다각 다층탑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11) 신라에서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화는 부서로 시정부가 설치되었으며, 특히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외사정이 파견되었다.

12) 발해는 9세기 전반 선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13) 발해의 중앙 정치 조직은 당의 36부를 받아들였으나, 운영 방식과 명칭은 독자적이었다. 정당성 아래 좌사정과 우사정을 두어 각각 3부를 나누어 관할하게 한 것과 충, , , , , 신부의 명칭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14) 발해는 대외 발전과 체제 정빌를 기반으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무왕 때 인안, 문왕 때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15) 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은 51562주로 조직되었으며, 도독과 자사 등의 관리를 파견하였다.

 

17. 고려의 지방 행정 조직

1) 고려 시대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북계와 동계를 두고 병마사를 파견하였다.

2) 조선 시대에는 유향소와 함께 경재소를 설치하여 정부와 유향소 사이의 연락 기능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이는 경재소를 통해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3) 조선 시대에는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향, 부곡, 소를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켰으며,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4) 통일 신라 시대에는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 세력을 일정기간 수도에 머무르게 하는 상쉬 제도를 시행하였다.

5) 통일 신라는 수도인 금성(경주)이 나라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군사, 행정의 요충지에 5소경을 설치하였다.

6) , 부곡, 소는 고려 시대의 특수 행정 구역이다. 향과 부곡의 거주민은 농업에 종사하였고, 소의 주민들은 주로 수공업 생산을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일반 군,현민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 , 부곡, 소는 조선시대에 점차 소멸되었다.

7) 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은 51562주로 조직되었으며, 도독과 자사 등의 관리를 파견하였다.

8) 고구려는 5부에 욕살을 파견하였고, 성에 처려근지를 파견하였다.

9) 통일 신라 시대에는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 세력을 일정기간 수도에 머무르게 하는 상수리 제도를 시행하였다.

10) 5소경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수도인 금성(경주)이 동남쪽에 치우친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18. 무신 정권의 변천

1)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최고 권력 기구로 삼고, 이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였다. 교정도감의 장관은 교정별감으로 최충헌을 비롯해 최씨 무신 정권의 최고 집권자가 차지하였다.

2) 정방은 구려 무신 집권기에 최우가 인사 관리를 위해 설치한 기구였는데 고려말 공민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방을 폐지하였다.

3) 고려 성종에게 시무 28조를 올린 인물은 최승로이다. 성종이 즉위한 직후 고위 관리들에게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올리게 하자,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올렸다.

4) 1270년 고려 정부의 개경 환도에 대항하여 배중손이 삼별초를 지휘하여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이동하여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김통정이 삼별초를 이끌었다.

5) 고려 말 공민왕은 신돈을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양인으로 회복시켰다.

 

19. 고려의 대외 관계

1) 살례탑이 처인성을 공격, 승려가 활을 쏘아 살례탑을 죽였다 등을 통해 13세기 몽골이 고려를 칩입하였을 때 김윤후가 처인성 전투에서 적장 살리타를 사살한 사건

2) 윤관, 여진에게 패배한 까닭, 별무반을 만들었다 등을 통해 12세기 윤관의 건의에 따라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구성된 특별 부대인 별무반이 편성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3) 거란주, 흥화진을 포위, 양규, 이수화 등이 굳게 지키며 등을 통해 11세기 초에 거란의 성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해 와 흥화진을 포위했을 때 양규 등이 이를 지켜낸 일과 관련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거란의 2차 침입).

4) 왜구, 연산의 개태사, 최영 등을 통해 14세기 후반 최영이 충청남도 연산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총산 대첩에 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20. 고려의 멸망

1) 1391년 조준 등의 급진 개혁파 신진 사대부는 과전법을 실시하여 권문세족과 사원이 보유하던 농장을 혁파하고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2) 1356년 고려 말 공민왕은 원의 기황후와 연결되어 위세를 떨치던 기철 일파를 숙청하였다.

3)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가 소 주민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다.

4) 1356년 공민왕은 원, 명 교체기를 이용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

5) 신문고는 조선 초 태종 때 처음 설치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 폐지와 설치가 반복되다가 영조 때 다시 복원되었다.

 

21. 고려 시대의 경제

1) 고려 시대에는 개경에 시전을 설치하여 관청과 귀족이 주로 이용하게 하였고, 경시서를 두어 시전의 상행위를 감독하게 하였다.

2)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지고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늘어났다.

3)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일본에서 고구마가 전래되었고, 19세기 청에서 감자가 전래되었다.

4) 조선 초기인 15세기 전반 일본이 다시 교육을 요청하자 조선은 부산포(부산, 동래), 제포(창원 진해), 염포(울산)3포를 개방하였다.

5) 농사직설은 조선 초 세종 때 우리나라 최초로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정리하여 편찬한 농업 서적이다.

6) 고려 시대에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대외 무역의 발전과 더불어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

7)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이앙법)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지고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늘어났다.

8) 조선 세종 때인 1443년 대마도주의 계해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내에서만 교역을 허락하였다.

9) 6세기 초 신라 지증왕 때에는 동시전을 설치하여 시장을 감독하게 하였다.

10) 조선 후기인 18세기에는 일본에서 고구마가, 19세기에는 청에서 감자가 전래되어 재배되었다.

11) 고려 말 이암이 원의 농상집요를 충정왕 원년(1349)에 원의 연경에서 구입하여 소개하였는데, 공민왕 21(1372)에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12) 통일 신라의 신문왕은 689년 귀족의 경제 기반인 녹읍을 폐지하였다.

13) 당백전은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발행한 동전이다.

14) 대동법은 광해군 때(1608)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숙종 때(1708)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왕실과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해 납품하는 공인이 등장하였다.

15) 조선 후기에 일부 농민은 인삼, 담배, 고추, 목화, 약초, 마늘, 채소 등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높은 수익을 올렸다.

 

22. 고려 시대 인쇄술의 발달

1) 팔만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을 격퇴하고자 하는 당시 고려인의 민족적 염원을 담아 1232(고종 19)부터 1248(고존 35)까지 16년에 걸쳐 당시 무신 정권의 실권자 최우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2) 팔만대장경은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에 8만 장이 넘는 목판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우수성으로 인해 200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론 유산에 등재되었다.

3) 조선 태종 때 활자 주조를 담당하는 기관인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로 계미자를 주조하였다.

4) 초조대장경은 무처의 힘으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현종 때 조판하기 시작하여 선종 때 완성하였다.

 

23. 고려 시대의 건축

1) 고려 전기에 건축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주심포 양식으로 균형잡힌 외관과 각 부분의 치밀한 배치로 고려 시대 건축의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2) 예산 수덕사 대웅전도 고려 시대 주심포 양식의 건축물이다.

3) 경주 불국사는 통일 신라 때 창건되었고,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조선 후기에 재건하였다.

4) 논산에 위치한 쌍계사 대웅전

5) 고려 전기에 건축된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6)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1363년에 중건되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중건 시기가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앞서고, 건축 양식도 더 옛날식이어서 13세기 초 건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7)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후기의 건축물로 배흘림기둥 등의 기법이 들어간 주심포식 건축물이다.

8) 논산 쌍계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만들어진 사원이다.

9)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조선 후기인 17세기에 만들어진 사원 건축물로 외형은 다층이지만 내부는 하나로 통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10) 강화 전등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다. 조선 선조 때와 광해군 때 근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광해군 때인 1621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건축되었다.

 

24. 고려 시대의 탑

1) 개성 경천사지 10층석탑은 충목원 4(1346)에 만든 대리석 탑으로 기단이 좁고 표면이 정교하여, 원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2) 백제의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3) 통일 신라의 경주 불국사 다보탑

4) 발해의 영광탑

5) 고려의 평창 월정사 89층 석탑

 

25. 고려의 신분 제도

1) 공음전을 고려 시대에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에게 지급된 토지이다. 향리들이 직역의 대가로 받은 토지는 외역전이었다.

2) 향리는 고려 시대 지방 행정을 담당한 대표적인 중류층이다.

3) 원래 호족 출신인 향리는 조세, 부역, 소송 등 행정 사무를 맡았으므로, 비록 수령의 보좌역이지만 실권은 매우 컸다. 이를 억제하기 위한 조치가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였다.

4) 무신 집권 이후 상급 향리는 중앙 관료가 되기도 하였는데, 고려 수기 정치 행정의 실무자로서 조선 왕조 개창의 주역이 된 신진 사대부의 다수는 향리 출신이었다.

5) 고려 초 성종 때 향리제도가 마련되었다.

 

26. 고려 시대 여성의 지위

1) 고려 시대에는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사위는 물론 외손자까지도 음서의 혜택을 받았다.

2) 조선 후기에는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더욱 강화되었다.

 

27. 고려 유학의 발달

1) 원 간섭기에 이제현은 충선왕이 원의 수도인 대도(베이징)에 설립한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였다.

2) 고려 충렬왕 때 안향이 성리학을 최초로 소개하였다.

3) 고려 문종 때 활동한 최충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9재 학당을 세워 유학 교육에 힘썼고, 고려의 훈고학적 유학에 철학적 경향을 새로이 불어넣기도 하였다.

4) 조선 후기의 정제두는 강화도에 살면서 양명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써 강화 학파라 불리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다.

5) 성학십도는 조선 전기 이황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군왕의 도를 도식과 함께 설명하여 올린 상소문이다.

 

28. 조선의 중앙 정치 조직

1) 사헌부는 5품 이하 관리 임명 과정에서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2) 고려의 삼사는 단순 회계 기구였으나 조선의 삼사는 언론 기능을 담당하였다.

3) 왕명 출납을 맡은 비서 기관은 승정원이다.

4) 실록의 보관과 관리는 춘추관에서 담당하였다.

5) 재신, 추밀 등으로 구성된 법제를 논의한 것은 고려와 식목도감이다.

 

29. 경연 제도

1) 승정원은 국왕의 비서 기관으로 왕명 출납 등을 담당하였다. 경연은 집현전을 계승한 홍문관에서 주관하였다.

2) 경연은 이미 고려 시대부터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3) 연산군은 경연을 일시적으로 폐지하였으며, 세조도 경연의 개최를 꺼려하였다.

4) 경연에서는 유교의 경전과 역사서 등의 교재를 일정한 순서에 따라 강의하였다.

5) 경연에서는 왕과 신하가 유교 경전에 대한 강의를 함께 듣고, 학문과 정책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

 

30. 수취 체제의 정비

1) 조선 후기 실시된 대동법은 기존에 토산물로 거두던 공납을 토지 1결당 12두의 쌀이나 포,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한 제도로 토지를 기준으로 부과하므로 양안을 근거 자료로 사용하였다.

2) 임진왜란 중에 양안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이에 광해군은 전후 복구 노력의 일환으로 토지 대장(양안)을 작성하였다.

3) 사람의 수를 기준으로 한 호적은 양안과는 관련 없으며 역의 부과와 관련 있다.

4) 가축 및 유실수의 현황까지 모두 기재한 것은 통일 신라의 민정 문서에 해당한다.

 

31. 조선시대의 신분

1) 조선 시대의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고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2) 조선 시대에 신량역전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수군, 봉수군, 나장 등 칠반천역이다.

3)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 된 계층은 노비이다.

4) 고려 시대에 화척이라고 불리던 계층은 조선의 백정이다.

5) 시전을 운영하며 관청의 수요품을 조달한 이들은 시전 상인이다.

 

32. 성리학의 발달

1) 이황은 군주의 도를 도식으로 설명한 성학십도를 저술하였다.

2) 최초 서원인 백운동 서원은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3) 한전론을 담은 성호사설은 이익이 저술하였다.

4) 동호문답을 통해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한 것은 이이이다.

5) 가례의 내용을 증보, 해설하여 편찬한 가례집람은 김장생이 정리한 것이다.

 

33. 조선 전기의 역사서

1) 동국통감은 서거정이 편찬한 편년체 형식의 통사로 고조선부터 고려말가지의 역사를 정리하여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2) 세가, , 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역사서는 기전체 형식인 삼국사기, 고려사 등이 해당된다.

3) 서사시 형태로 고구려 계승 의식이 나타나 있는 역사서는 고려 시대에 편찬된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다.

4) 고려사절요는 동국통감보다 먼저 편찬된 역사서이다.

5)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 등을 포함하여 저술한 역사서는 고려 시대에 편찬된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34. 조선 전기의 편찬 사업

1) 세종은 유교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충신과 효자, 효녀 등의 행정을 그림과 함께 글로 소개한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2)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태종 때 만들어졌다.

3) 우리나라의 역대 문물을 정리한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때 편찬되었다.
4) 각 도의 지리, 풍속 등이 수록된 동국여지승람은 성종 때 편찬되어 국가 통치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5) 고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동국통감은 성종 때 서거정이 편찬하였다.

 

35. 조선 전기의 과학 기술

1) 무예도보통지는 조선 후기인 정조 때 제작된 무예 훈련 교범으로 이덕무, 백동수 등을 통해 기존의 교범과 새로운 내용을 합쳐 편찬하였다.

2) 신기전은 조선 세종 때 개발된 로켓형 화기이고, 화차는 수레 위에 여러 화살을 쏠 수 있게 만든 발사 무기이다.

3) 혼천의는 세종 때 제작된 천체 관측 기구이다.

4) 금양잡록은 조선 성종 때 강희맹이 자신의 경험과 견문을 토대로 지은 농서이다.

5) 향약집성방은 세종 때 간행된 의약서로 우리나라 약재를 이용한 것이 특징이다.

 

36. 조선 시대의 건축

1)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팔만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15세기(1488)에 건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2) 세조 때 세워진 서울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15세기의 대표적인 불교 건축물 중 하나이다. 이 탑은 고려의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본뜬 것이다.

3)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고려 시대에 건축된 대표적인 주심포 양식의 건축물이다.

4) 보은 법주사 팔상전은 17세기의 대표적인 불교 건축물로 양반 지주층의 성장을 반영하고 있다.

 

37. 조선 전기의 공예

1) 보물 제1456호 분청사기 박지태극문 편병으로 조선초기에 유행한 도자기인 분청사기이다.

2) 국보 제94호인 청자 참외모양 병으로 고려청자에 해당한다.

3) 국보 제68호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으로 고려 중기의 상감 청자에 해당한다.

4) 국보 제170호인 청화 백자 매죽문 항아리이다. 조선후기 유행한 청화백자.

5) 보물 제1437호인 백자 달 항아리이다. 16세기 유명한 백자이다.

 

38. 조선 전기의 대외 관계

1) 연행사는 조선 후기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에 보낸 사신단을 가리킨다.

2) 조선은 태종 이후에 명과 조공, 책봉의 관계 속에서 실리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3) 조선은 여진에 대해 경성과 경원의 무역소를 개설하는 회유책을 펼쳤다.

4) 조선은 일본에 대해 부산포, 제포, 염포의 3포를 개항해 무역을 허락하는 회유책을 펼쳤다.

5) 조선은 시암, 유구 등과 조공과 진상의 형식으로 교역하였다.

 

39. 광해군의 대외 정책

1) 광해군의 중립 외교 추진에 불만을 품은 서인 세력은 인조반정을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2) 김종서가 여진을 몰아내고 6진을 개척한 것은 세종 때의 사실이다.

3) , 명 연합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4)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큰 피해를 입은 기축옥사(1588)는 정조 때의 사실이다.

5) 계해약조(1443)는 조선 세종 때 체결되었다.

 

40. 예송논쟁

1) 남인은 주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서인은 성혼과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2) 서인은 환국의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3) 갑술환국이 일어날 당지 인현 왕후의 복위를 주장한 세력은 서인이었고, 남인 세력은 희빈 장씨를 지지하였다.

4)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지지한 세력은 북인이다.

 

41. 환국의 전개

1) 금위영을 설치하고 5군영 체제를 확립한 왕은 숙종이다.

2) 대전통편을 편찬한 왕은 정조이다.

3) 탕평비를 건립한 왕은 영조이다.

4) 균역법을 실시한 왕은 영조이다.

5)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왕은 정조이다.

 

42. 탕평 정치

1) 서얼 출신의 학자들을 검서관에 기용한 왕은 정조이다.

2) 홍문관을 처음으로 설치한 왕은 성종이다.

3) 현량과는 중종 때 조광조의 건의에 따라 실시된 관리 등용 제도이다.

4) 만권당은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 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를 위해 원의 수도에 설치한 학술 연구 기관이다.

5) 국자감에 전문 강좌인 7재를 개설하여 국학을 진흥하고자 한 왕은 고려 예종이다.

 

43. 수취 체제의 개편

1) 균역법의 실시로 인한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주에게 토지 1결당 2두씩 결작을 부과하였다.

2) 풍흉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세금을 차등 부과한 제도는 세종 때의 연분 9등법과 전분 6등법이다.

3) 선혜법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제도는 대동법이다.

4)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것은 정조 때의 신해통공에 따른 결과이다.

5) 공인이 등장하여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게 된 것은 대동법 때문이다.

 

44. 조선 후기 화폐 경제의 발달

1) 벽란도에서 국제 무역이 성행한 시기는 고려 시대이다.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는 고려 시대의 최대 무역항이었다.

2) 조선 후기에는 장시의 발달로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상품 작물이 활발하게 재배되었다.

3) 장시의 발달로 지방 장시를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보부상이 활동하였다.

4)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사상이 성장하였는데, 개성 지방에서는 청과 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을 주도하는 송상이 성장하였다.

5)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모내기법(이앙법)이 확산되면서 이모작이 널리 성행하였다.

 

45. 중상학파의 실학자

1) 의산문답을 통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한 인물은 홍대용이다.

2) 정약용은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설계하였다.

3)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수레와 배의 이용을 강조하였다.

4) 박지원은 양반전에서 양반의 위선과 무능을 지적하였다.

5) 유수원은 우서에서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46. 중상학파 실학자

1) 박제가는 청의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한 대표적인 북학파 실학자로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2) 100리 척을 사용한 동국지도를 짝한 인물은 정상가이다.

3) 지봉유설에서 천주실의를 조선에 소개한 인물은 광해군 때의 이수광이다.

4)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주장한 인물은 박지원이다.

5) 역대 문물을 정리한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때 편찬되었다.

 

47. 조선 후기의 회화

1) 단원 김홍도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무동이다.

2) 조선 전기의 작품인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이다.

3) 조선 시대 여류 화가인 신사임당의 조충도이다.

4) 조선 후기 진경 산수화의 대표적 작품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이다.

5) 조선 후기 풍속화가인 선유복의 상춘야흥이다.

6) 신윤복읜 대표적인 작품은 미인도이다.

7) 진경 산수화의 대표적 작품인 겸재 정선의 금강전동이다.

8) 조선 후기 대표적 풍속화가인 김홍도의 씨름이다.

9) 김득신이 그린 노상알현도이다.

10) 장승업이 그린 영모이다.

 

48. 조선 후기의 서예

1) 흑산도 유배 중에 흑산도 주변의 생태를 연구하여 자산어보를 저술한 사람은 정약용의 둘째 형인 정약전이다.

2) 김정희는 당대의 여러 필법을 연구하여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서체를 완성하였다.

3)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인 세한도는 김정희의 작품이다.

4) 김정희는 청에 가서 청나라의 대표적 학자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5)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가 신라 진흥와 순수비임을 밝형ㅆ다.

 

49. 조선 후기의 건축

1) 김제 금산사 미륵전은 국보 제62호로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며, 견훤이 유폐되었던 금산사에 있다.

2)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제49호로 고려 시대의 건축물이다.

3)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국보 제15호로 고려 시대의 건축물이다.

4) 보은 법주사 팔상전은 국보 제55호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탑 건물이며, 조선 후기와 건축물이다.

5)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고려 시대의 건축물이다.

 

50. 홍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1) 영조는 법전인 속대전 등을 편찬하여 시대 변화에 맞게 통치 치제를 정비하였다.

2) 흥선 대원군은 군역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3) 흥선 대원군은 비변사를 사실상 폐지하고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시켜 군국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4) 흥선 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경복궁의 중건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5) 흥선 대원군은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사창을 설치하고 이를 주민 자치적으로 운영하여 수령과 아전의 부정을 막고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자 하였다.

6)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7)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일종의 기부금이라고 할 수 있는 원납전을 징수하였다.

8) 흥선 대원군은 국가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대전회통과 육전조례등 각종 법전을 편찬하였다.

9) 흥선 대원군은 민생 안정을 목적으로 600여개의 서원을 47개로 정리하였다.

10) 흥선 대원군은 삼정의 문란 중 하나였던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사창을 설치하고 이를 주민 자치적으로 운영하여 수령과 아전의 부정을 막고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자 하였다.

 

51. 통상 수교 거부 정책

1) 신미양요 때 사용되었던 어재연 부대의 수자기는 당시 미국 군대가 가져갔었는데, 미국 해군사관하교 박물관에 보관되다가 2007년에 임대 방식으로 우리나라에 반환되었다. 어재연은 관군을 이끌고 광성보에서 항전하였으나 결국 전사하였다.

2) 일본이 통상을 요구하여 조선을 위협한 운요호 사건(1875)은 강화도 조약(1876)의 체결 배경이다.

3) 1866년 흥선 대원군은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수천 명의 천주교도를 처형(병인박해)하였는데,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통상 등을 요구하며 같은 해에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4) 갑신정변(1884) 직후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향후 출병 시에 상대 국가에 통보하는 내용의 텐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5) 병인양요(1866)때 프랑스 군대는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를 약탈하였다.

52. 각국과의 조약 체결

1) 조선은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김기수를 제1차 수신사(1876)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또한, , 미 수호 통상 조약 이후 민영익 등을 보빙사(1884)로 미국에 파견하였다.

2) , 미 수호 통상 조약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3) 임오군란의 결과로 체결된 제물포 조약(1882)에서 일본 공사관의 경비병 주둔을 허용하였다.

4) 강화도 조약 체결 때 운요호 사건 등과 같은 무력시위가 일어났다.

5)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은 강화도 조약이다. , 미 수호 통상 조약은 조선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53. 근대적 개혁의 추진과 반발

1) 2차 수신사였던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일본에서 가져와 국내에 유포시키면서 1881년 위정척사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이만손이 중심이 되어 영남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올린 만인소 였다.

2) 강화도 조약 직후 조선은 김기수를 제1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였다.(1876)

3) 신미양요(1871) 당시 어재연은 강화도 광성보에서 미군과 격전을 벌였다.

4) 임술 농민 봉기(1862) 당시 정부는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박규수의 건의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5) 서북 지역에 대한 차별과 세도 정치의 폐단을 비판하여 평안도에서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다.(1811)

 

54. 위정척사운동

1) 단발령과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어난 것은 1895년의 을미의병이다.

2) 이항로와 기정진은 1860년대 대표적인 위정척사 인물이다. 이들은 척화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3) 1863년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는 위정척사 세력의 척화 주전론과 맥을 같이하였다.

4) 최익현 등은 왜양일체론을 주장하여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하였다.

5) 조선책략이 유포되면서 영남 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렸다.

 

55. 갑오, 을미개혁

1)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 내각이 수립되어 단발령과 태양력 도입, 건양 연호 사용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을미개혁이 추진되었다.

2) 조선은 조, 미 수호 통상 조약 이후 민영익 등을 보빙사(1883)로 미국에 파견하였다.

3)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조선 정부의 개화 정책에 따라 1881년 창설되었다.

4) 한성순보(1883~1884, 순한문)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박문국에서 발간하였다.

5) , 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은 임오군란 직후 청이 조선에 대한 경제 침투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청의 강요로 체결되었다.

 

56. 1880~90년대 주요 사건

1) 삼국 간섭 이후 조선 정부가 친러 정책을 펴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키며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잡았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아관 파천을 단행하였고, 1년 뒤 환궁하여 대한 제국을 선포하였다.

 

57. 일제의 국권 침탈

1) , 일 전쟁 중인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불법적으로 시마네 현에 편입시켰다.

2) , 일 전쟁 중에 체결된 제1차 한, 일 협약(1904)에 따라 대한 제국의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가 부임하였다.

3) 아관 파천(1896) 이후 러시아의 이권 침탈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러시아는 저탄소 설치를 위하여 절영도 조치를 요구하였고, 독립 협회는 이를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 파천1896년에 일어났다.

 

58.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

1) , 일 의정서(1904.2) : 일본이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이용할 수 있다는 내용. , 일 의정서에서는 일본의 군사적 요지와 시설 점령, 외교권 행사 관여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2) 1차 한,일 협약(1904.8) : 이 조약은 러, 일 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하기 위한 조약으로,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인정함.

3) 포츠머스 강화 조약(1905.9) : 일본에 의해서 외교 고문이 추천된다는 내용. , 일 전쟁 중에 일제가 외교, 재정 분야의 고문 초빙을 강요하면서 체결

 

59. 애국 계몽 운동

1) 신민회는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설립하고, 대구에 태극 서관을 설립하는 등 경제적 실력 양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 1920년대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에서 민립 대학 설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추진하였다.

3)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 운동을 벌였던 보안회에 대한 설명이다.

4) 1930년대 동아일보가 중심이 되어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였다.

5) 대한 자경회에 대한 설명이다. 대한 자경회는 고종의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6) 신민회는 민족 경제의 자립을 위해서 회사를 세웠는데, 태극 서관과 자기 회사가 대표적이다.

7)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설명으로, 교통국은 정보 수집, 분석 교환 업무를 맡은 통신 기관이었다.

8)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하였다.

9) 독립 협회는 관민 공동회를 열고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려고 하였다.

10) 독립 협회는 군중을 동원하여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고 외세의 이권 침탈 반대 등을 주장하였다.

 

60. 외세의 경제 침탈

1) 1883년에 관세권 설정, 방곡령 선포 등이 포함된 조, 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서 방곡령을 선포할 경우, 지방관은 시행 1개월 전에 일본 영사관에 통고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2) 독립 협회는 러시아가 저탄소 설치를 위해 절영도 조차를 요구하자 만민 공동회(1898) 개최 등을 통해 이를 저지하였다.

3) 보안회는 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이를 저지하였다.(1904)

4) 시전 상인들은 상권 수호 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하였다.(1898)

5) 대한 제국의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일본인 메가타는 1905년부터 화폐 정리 사업을 추진하였다.

 

61. 경제적 구국 운동

1)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등을 중심으로 국채 보상 기성회가 결정되면서 국채 보상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2) 근우회(1927~1931)는 일제 강점기 여성 운동 단체였다.

3)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운동은 1920년대의 물산 장려 운동이 대표적이다.

4) 조선 사람 조선 것의 구호는 물산 장려 운동과 관련 있다.

5) 독립 협회의 주도로 열린 만민 공동회에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반대하였고, 정부는 결국 러시아의 조차 요구를 거부하였다.

 

62. 근대 시설의 도입

1) 원각사에서는 신극이 공연되었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은세계와 치악산이다.

2) 1885년 정부는 미국의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의 건의로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였다.

3) 나운균의 아리랑은 1926년에 최초로 개봉되었다.

4) 신간회는 1927년에 창립하여 1931년에 해소되었다.

5) 1897년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한 고종은 그 해에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63. 근대 교육 기관

1) 원산 학사는 근대적 학문에 대한 덕원 주민들의 요구와 협력, 덕원 부사 정현석의 지원 등 관민이 합심하여 설립하였다.

2) 최초로 설립된 여성 교육 기관은 1886년 개신교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이화 학당이다.

3) 교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교육 기관은 한성 사범 학교이다.

4) 2차 갑오개혁 당시 고종이 반포한 교육 입국 조서(1895)에 근거하여 외국어 학교, 사범학교, 소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5) 1886년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공립 교육 기관인 육영 공원에 대한 설명이다.

 

64. 언론 기관의 발달

1) 한성순보(1883~1884, 순한문)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정부 정책을 알리는 관보적 성격을 띠었다. 1884년 박문국이 불타면서 폐간되었다.

2) 대한매일신보를 중심으로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 여러 신문들이 국채 보상 운동을 후원하였다.

3)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가 영문판을 발행하였다.

4) 대한매일신보는 언론 탄압 과정에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였고 명칭도 매일 신보로 바뀌었다.

5) 한성순보를 계승하여 1886년에 발간된 한성주보에 최초의 상업 광고가 게재되었다.

 

65. 국문 연구소

1) 국문 연구소에서 지석영과 주시경 등의 주도로 국어 문법의 연구와 정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시경은 국어 문법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2) 박문국에서 한성순보를 발행하였다.

3)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조선어 연구회와 이를 계승한 조선어 학회에서 기관지인 한글을 간행하였다.

4) 조선어 학회에서 우리말 큰 사전 간행을 추진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5) 조선어 연구회에서 가갸날을 제정하였는데, 이 날은 나중에 한글날로 바뀌었다.

 

66. 일제의 경제 침탈

1)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 과정에서 양전 사업이 실시되고 토지 소유 문건인 지계가 발급되었다.

2) 토지 조사 사업은 토지 소유권을 새로이 정해 토지를 약탈하고 지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3) 한국에서 싸게 토지를 얻을 수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일본에서 한국으로의 농ㅇ업 이민이 증가하였다.

4) 토지 조사 사업 시행 과정에서 처지가 더욱 어려워진 농민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를 선택하기도 하였다.

5) 조선 총독부는 미신고 토지나 국유지를 총독부 소유로 하고 이틀 동안 척식 주식회사에 헐값으로 매각하였다.

6) 일제는 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개간과 간척 사업, 수리 시설 개선 등을 추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각지에 수리 조합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지주들이 자신들이 처리해야 할 수리 조합의 운영 비용이나 비료값을 소작농에게 전가하자, 곳곳에서 수리 조합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7) 농광 회사는 1904년에 설립되었으며, 그해에 황무지 개간 사업을 추진하였다.

8) 태평양 전쟁 이후 군량미 조달을 위해 산미 증식 계획이 재개(1940)되었으나, 최초 시작은 1920년이다.

9) 하와이 노동 이민은 1900년대 초에 이미 시작되었다.

10) 방곡령은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선포되었다.

11) 민족 말살 통치 시기에 일본은 공출제를 실시하여 금속, 미곡 등을 수탈하였다.

12) 회사령은 무단 통치 시기인 1910년에 제정되었다.

13) 조선 태형령은 1912년에 제정되어 2.1 운동 이후 폐지되었다.

14) 조선 총독부는 만주의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만주 군벌과 마쓰야 협정을 체결하였다.

15) 일제는 1912년 토지 조사령을 발표하고 1918년까지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였다.

 

67.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1)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로 독립 의군부가 북볍주의(황제가 다스리는 국가로 돌아가자는 주장)를 지향한 것과는 달리, 대한 광복회는 공화정체의 근대 국민 국가 수립을 지향하였다.

2)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 등이 연합하여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3) 신민회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대한 설명이다.

4) 1912년 국내 비밀 결사인 독립 의군부에 대한 설명이다.

5) 독립 의군부는 일본 내각 총리대신과 조선 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 발각되어 조직이 해체되었다.

 

68. 국외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

1) 연해주에서 권업회가 독립 전쟁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정부 형태의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였다.

2) 북간도에서 서전서숙, 명동 학교와 같은 민족 학교가 설립되었다.

3) 상하이에서 신한 청년당이 결성되어, 김규식을 따라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4)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군사 조직인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였다.

5)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3.1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69. 1920년대 무장 독립 전쟁

1)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천주교의 항일 조직인 의민단 등의 독립 부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 약 1200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2) 1941년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가 활약한 호가장 전투

3) 1920년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비롯한 연합 부대가 일본군을 격퇴한 봉오동 전투

4) 1930년대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대전지령, 사도하자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둠

5) 1930년대 양세봉이 이끈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홍경성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70. 1940년대 무장 독립 전쟁

1) 한국광복군은 1945년 무렵에 미국 전량 정보처(OSS)의 지원을 받아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2) 1921년 밀산부에 있던 대한 독립군단은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했으나, 그곳에서 러시아 적군에 의해 무장 해제를 요구당하다가 참변을 겪었다.

3) 신흥 무관 학교는 1911년 서간도(삼원보)에 세워진 신흥 강습소를 전신으로 하여 1919년에 설립되었다.

4) 1938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산하 부대로 중국 한커우에서 결성된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인 무관 부대이다.

5) 1930년대 만주에서 한국 독립군(총사련관 지청천)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대젖지령, 사도하자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71. 실력 양성 운동

1) 국내 민족 유일당 운동의 결과로 1927년에 설립된 신간회는 회장에 이상재, 부회장에 홍명희를 선출하였다.

2) 이승만, 박은식은 각각 초대 제2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으로 활동하였다.

3) 박은식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을 저술하여 일제의 침략적 역사를 비판하고 한국 독립운동사를 정리하였다.

4) 조소앙은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이라는 삼균주의를 주창하였고, 삼균주의는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의 바탕이 되었다.

5) 여운형 등은 광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선 건국 동뱅을 결성하였다.(1944)

 

72. 국내의 만세 운동

1) 6.10 만세 운동을 통해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의 연대 가능성이 확인되었고, 이 운동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계기가 되어 신간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2) 3.1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3) 신간회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4)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이 발단이 되어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

5) 19193.1 운동이 발생하자 일제는 헌병 경찰 통치 방식을 이른바 문화 통치 방식으로 변경하였다.

 

73. 사회적 민족 운동

1) 농민들이 암태도 소장 쟁의에서 약 1년간 소작윤 인하 등의 투쟁을 전개한 끝ㅇ 소작료를 낮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2) 원산 노동자 총파업 당시 프랑스, 소련, 중국, 일본 등 국외 노동 단체의 격려와 후원이 있었다.

3) 조선 농민 총동맹은 암태도 소작 쟁의가 끝난 뒤인 1927년에 조직되었다.

4) 조선 노동 공제회는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 일어나기 전인 1920년에 조직되었다.

 

74. 통일 정부 수립 노력

1)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12)의 결정 사항이 국내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우익을 중심으로 반탁 운동이 전개되었다. 우익은 신탁 통치의 결정은 민족적 모독이며, 또 다른 식민 지배라며 반탁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반면, 좌익은 처음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를 하다가 신탁통치가 과도적 방도임을 직시해야 한다며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의 지지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좌, 우익의 다른 주장으로 좌, 우익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2) 6.25 전쟁 당시 휴전 협정 과정에서 이승만 정부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였다.

3) 김구, 김규식 등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반대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위해 평양에서 개최한 남북 협상에 참석하였다.(1948.4)

4)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자, 유엔은 총회를 열고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 실시를 결의하였다.(1947.11)

5)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제헌 국회에 의해 제정되었다.(1948.9)

6) 1차 미,소 공동 위원회(1946.3~5)가 무기한 휴회되고, 이승만이 정읍 연설(1946.6)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중도 세력인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 합작 위원회가 결성되었다(1946.7) 좌우 합장 위원회는 그해 10월 좌우 합장 7원칙을 발표하였다.

7) 19482월 유엔 소총회가 한반도에서 가능한 지역만의 선거를 결의하면서 사실상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를 우려한 김구와 김규식은 그해 4월 평양으로가 남북 제 정당 사회 단체 연석 회의와 남북 정치 지도자 간의 회담에 참석하였다. 그 결과 전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 이름으로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75. 제헌 국회의 활동

1)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전통적인 지주제가 폐지되고, 농민 중심의 토지 소유가 실현되었다.

2) 농지 개혁법이 19503월에 공포되었으나, 시행 초기인 그해 6월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실시가 지연되었고 그 긴간에 지주들이 토지를 매각하면서 농지 개혁 대상 토지는 감소하였다.

3) 노지 개혁의 원칙은 유상 매수, 유상 분배였다.

4) 한 가구당 3정보를 소유 상한으로 하였고, 그 이상인 토지는 국가가 지주에게 지가 증권을 발급하여 매입하였다.

 

76. 박정희 정부 시기의 경제

1) 1970년대 초 건설 분야의 본격적인 중동 진출로 이른바 오일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2) 이 시기에 정부는 산업에 필요한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곡가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3) 이 시기에 정부는 독일로부터 차관을 얻기 위해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 등의 인력을 파견하였다.

4) 이 시기 한국 경제는 산업 발전을 위해 정부가 외자를 도입하는 등 대외 의존도가 높았다.

5) 이 시기에는 국내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경공업 제품을 중심으로 수출이 증가하였다.

 

77. 통일을 위한 노력

1)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남북이 합의한 통일 원칙을 실무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구로 남북 조절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 협력 정책(햇볕 정책)추진 과정에서 1998년에 금강산 해로 관광이 시작되었다.

3) 20006. 15 남북 공동선언(김대중 정부)에 따른 경제 협력 사업으로 개성 공단 조성 사업이 추진되었다.

4)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이 개최되었다.

5) 1991년 노태우 정부 시기에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이 채택되었다.

 

78. 지역사

1) 고려 말 온건파 신진 사대부인 정몽주는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개성에 위치한 선죽교(당시 선지교)에서 피상당하였다.

2)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왕족을 수행하며 강화도로 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순절한 인물이다.

3)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강화도의 외규장각 도서 등 여러 문화유산을 약탈하였다.

4)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의 부대는 강화도 광성보 일대에서 미군과 맞서 싸웠다.

5) 강화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가 설치되었다.

6) 의주는 압록강 쪽이고 6진은 백두산 동쪽 즉 두만강 쪽이다. 세종은 영토 확보와 국경 지방의 안정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46진을 개척하였는데, 이때 김종서가 여진을 몰아내고 6진을 개척하였다.

7) 거란의 1차 침략 때 서희가 외교 담판을 통해서 강동 6주를 확보하였는데, 강동 6주 중 한 곳이 의주(홍화진)였다.

8)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는데, 위화도가 의주 지역에 있다.

9) 선조는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10) 의주의 만상은 대청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척하였다.

11) 안승은 신라의 지원을 받아 금마저(익산)에 보덕국을 세우며, 고려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12) 1923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가 창립되면서 본격적인 형평운동이 시작되었다.

13) 1876년 강화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조, 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가 체결되었다.

14) 조선 후기 만상은 의주를 근거지로 삼아 청과의 무역을 주도하였다.

15) 1920년 평양에서 조만식이 조선 물산 장려회 발기인 대회를 열면서 물산 장려 운동이 시작되었다.

16) 자산어보는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전이 그곳의 어류에 대해 저술한 책이다.

17) 탐라총관부는 1273년 고려 충렬왕 때 몽골()이 삼별초를 진압한 후 제주를 통치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18) 고산리 유적지는 제주에 있는 구성기, 신석기 시대와 유적지이다.

19) 김만덕은 제주 출신의 여자 상인으로 정조 때 제주에 흉년이 들자 자신의 재산으로 제주 주민을 구휼한 것으로 유명하다.

20) 4.3 사건은 19484월에 5.10 총선거를 앞두고 제주도에서 남조선 노동당 당원들을 중심으로 한 무리가 무장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에 대한 진압 과정에서 당시 제주의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던 사건이다.

 

79. 세시 풍속

1)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조상께 제사를 지내고 대문이나 벽에 뿌려 귀신을 Ehcdk 새해의 무사안일을 빌던 풍습이 있었다. 동지 팥죽은 새알심을 넣어 끓이는데, 가족의 나이 수대로 넣어 끓이는 풍습도 있었다. 여기서 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전해 온다.

2) 음력 55일인 단오

3) 음력 815일인 추석

4) 음력 115일인 정월 대보름

5) 음력 11일인 설날. 설날의 세시 풍속에는 차례, 세배, 설빔, 덕담, 복조리 걸기, 윷놀이, 널뛰기 등이 있다.

 

80. 세계 문화 유산

1)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창덕궁은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1997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궁궐이다.

2)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진 궁궐로 본래 경덕궁이라고 불렸으나 영조 이후 경희궁으로 불렸다.

3)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태조 Eoi 한양으로 천도 이후 처음 지어진 궁궐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고족 즉위 이후 새로 중건되었다.

4) 덕수궁은 본래 경운궁으로 불린 궁궐로 대한 제국 시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50 창경궁은 성종 때 청덕궁을 확장하여 지은 궁궐로 일제에 의해 동물원, 식물원 등으로 사용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81. 세계 기록 유산

1) 서정기(춘추관이 각 관청의 업무 일지를 정리하여 보관한 것)나 사초(사관이 작성한 자료) 등을 토대로 저술된 책은 조선왕조실록이다.

2)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으로 이전 것은 사라지고 인조 이후의 기록만이 남아 있다.

3) 승정원 일기는 국왕과 신료들이 열람할 수 있었다.

4) 승정원일기는 300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 승정원일기는 업무 관련 내용이 일지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82. 금관가야

1) 각종 철제 무기와 덩이쇠를 만들어 낙랑 및 왜와 무역을 하였다.

2) 4세기 말~5세기 초에 백제,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83. 대가야

1) 5세기 후반에 백제와 함께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였다.

2) 신라의 법흥왕과 대가야의 이뇌왕이 522년 혼인 동맹을 맺었다.

 

84. 통일 신라 경제

1) 조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정도를 수취하였다.

2) 촌락의 토지, 인구, 가축, 토산물 등을 파악하는 문서를 만들었다.

3) 관료 귀족에게 녹읍을 지급하여 조세와 함께 노동력을 징발하게 했다.

4) 향이나 부곡에 사는 사람은 농민보다 더 많은 공물을 부담하였다.

 

85. 신라 시대의 비석

1) 영일 냉수리비 : 왕을 비롯한 6부의 대표자들이 재산 분쟁에 대해 처결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2) 울진 봉평비 : 울진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을 처리하고 관련자를 처벌한 내용을 기록하여 법흥왕 시기의 율령 실시와 6붑의 존재 여부를 확인 할 수있다.

3) 영천 청제비 : 영천 청못 저수지의 축조와 중수에 대한 내력과 노동력 동원 상항을 기록하였다.

4) 단양 적성비 : 새로 점령한 지역에 대한 포상과 민심 수습책을 기록하였다.

 

86. 역사서

1) 동명왕편 : 이규보의 시문집에 실려 있는 서사시

2) 삼국사기 :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하여 기전체로 서술

3) 사략 : 성리학적인 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반영

4) 삼국유사 :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건국 이야기를수록

 

87. 고려시대 성리학

1) 이 시기에 성리학을 익한 사람들을 대부분 신진 자대부였다.

2) 공민왕은 성균관을 순수한 유교 교육 기관으로 개편하였다.

3) 이 시기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측면보다 실천 윤리를 중시했다.

4) 이제헌은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88. 고려 왕의 정책

1) 문종 : 5품 이상의 관료에게 공음전을 지급

2) 광종 :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새 관리 등용법을 만듬

3) 숙종 : 삼한통보 등을 주조하여 화폐 유통을 활성화하고자 함.

4) 성종 :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 지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 파견, 향리 제도 정비.

 

89. 조광조

1) 알성시 : 왕의 문묘 참배 후 성균관에서 실시

2) 홍문관의 부수찬, 수찬 : 왕과 신하가 정책을 토론하는 경연에 참여

3) 현량과 실시 : 사림을 대거 등용하고자 함.

4) 기묘사화 : 조광조가 쫓겨남.

 

90. 붕당

1) 광해군 즉위 후 북인은 서인과 남인 등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하였고, 결국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해 몰락하였다.(1623)

2) 인조반정 이후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는 붕당정치가 행해졌다.

3) 숙종 때 처음 탕평론이 제기되었다.

4) 현종 때 전개된 예송논쟁에서 서인은 서자가 후계자가 된 경우인 체이부정의 논리로 효종의 정통성에 비판적이었다.

 

91. 조선 혼인제도

1) 조선전기 : 재가한 여성의 자식을 차별하였다. 고려 시대와 같인 서류부가의 풍속이 행하여졌다.

2) 조선후기 :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가 더욱 강화되었다. 혼인 관행이 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로 바뀌었다.

 

92. 양명학

1) 앎은 행함을 통해 성립한다는 지행합일설을 주장하였다.

2) 정제두는 이 학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3) 중종 때 전래된 후 주로 서경덕 학파와 종친들 사이에서 확산되었다.

93.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

1) 카이로 회담(1943) : 연합군이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였다. 현재 노얘 상태 아래 놓여 있는 한국민에게 적절한 절차에 따라 자유와 독립을 준다.

2) 알타 회담(1945.2) :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38도선이 분할되는 배경이 있다. 소련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극동 전선의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한다.

3)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 : 결의사항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4) 유엔 소총회((1948.2) :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결정한 것에 반대하여 우리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한 남북 협상이 추진되었다.

5) 유엔 총회((1947.11) : 남북한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임시위원단 감시하에 시행한다.

 

94. 역사서

1) 조식 :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으며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2) 이황 : 기대승과 편지를 교환하며 사단과 칠정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다.

3) 이이의 기자실기 :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4) 서경덕 : 이보다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이었다.

 

95. 고려시대 향도

1) 대규모의 인력이 동원되는 사원을 지을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2) 마을 노역, 혼례와 상장례, 민속 신앙과 관련된 마을 제사 등을 주도하였다.

3) 불교와 함께 토속 신앙의 면모도 보이며, 불교와 풍수지리설이 융합된 모습도 보였다.

4) 마을 주민들로만 구성되지 않아 다른 지역 마을 주민도 구성원이 될 수 잇었으며, 심지어 타 지역의 군현민도 조직원이 되기도 하였다. <-> 동계 : 조선

 

96. 고려 충선왕 소금 전매제

1) 재정을 운영하는 관청으로 호부와 삼사를 두었다.

2) 공물은 상공과 별공이 처음으로 구분되어 부과되었다.

3) 호를 인구와 장정의 수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부역을 시켰다.

4) 토지를 논과 밭으로 나누고, 비옥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부과하였다.

 

97. 근대 사학자

1) 박은식의 한국통사 : 역사를 민족 정신인 국혼의 전개 과정으로 파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을 지냈다.

2)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고 있다. <-> 이병도와 손진태 : 실증주의

 

98. 근대 신문

1) 한성순보 :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박문국에서 한문으로 발간되었으며, 국내외의 시사와 서양의 신문화를 소개하였다. 박문국에서 발행하여 관보적 성격을 띠었다.

2) 독립신문 :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 한글과 영문판으로 발간되었으며, 처음에는 격일간으로 발행되었으나 후에 일간지가 되었다.

 

99. 독립운동

1) 3.1운동-간도참변 : 북로 군정서 등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청산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2) 간도참변-미쓰야 협정 : 임시 정부와 연계된 참의부가 국내 침투를 감행하였다.

3) 미쓰야 협정-만주사변 : 3부 통합 협상을 통하여 국민부와 혁신의회가 결성되었다.

4) 만주사변-중일전쟁 : 만주국 수립이후 한국 독립군, 조선 혁명군이 한중 연합작전을 전개

5) 중일전쟁 이후 : 조선 의용대가 중국군과 함께 정보 수집, 포로심문, 후방 교란 등의 활동을 벌였다.

 

100. 삼국 시대 사회 모습

1) 삼국 시대의 신분은 귀족과 평민, 천민으로 편제되었으며, 천민의 대부분은 노비였다. 노비는 대개 형벌 노비와 채무 노비였으며, 정복 전쟁에 따른 전쟁 노비도 많았다.

2) 삼국 시대에는 전쟁 노비가 많았으나 통일 이후 점차 사라져 갔다.

3) 고구려에서는 평민간의 혼인때 남자집에서 술과 돼지 이외에서는 신부집에 예물을 주지 않았다.

4) 신라 화랑도는 왕경(수도)의 주민을 대상으로 조직되었다.

 

101. 조선 왕

1) 세종 :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하는 것으로 세종실록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으로 집현전을 두었다.

2) 태종 : 언론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을 경제하였다.

3) 태조 :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성과 경복궁을 쌓았다.

4) 세조 : 함경도 지방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유향소를 폐지하였다.

 

102. 삼국의 문화재

1) 돌무지 무덤 : 초기 한성 시대 무덤으로 이를 통해 백제 건국 주도 세력이 고구려 계통임을 알 수 있다.

2) 공주 무령왕릉 : 웅진 시기 벽돌 무덤으로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교류 관계를 보여준다.

3) 부여 금동대향로 :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백제 금속 공예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4) 신라 분황사지 모전석탑 : 석재를 벽돌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것.

5) 익산 미륵사지 석탑 : 백제 초기 탑의 전형

 

103. 조선 후기 농업

1) 상업화가 촉진된 모습을 보여준다. 현종 때 제언사가 설치되어 저수지 축주에 관한 일을 주관하였으며, 정조 때 제언절목이 반포되었다.

2) 모내기법이 일반화되자 제언절목이 반포되었다.

3) 국가가 사람을 모집해 일을 시키고 임금을 주는 고립제가 발전하였다.

4) 청과의 무역으로 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5) 소작료로 일정액을 납부하는 도조법이 나타났으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104. 조선 교육기관

1) 4부학당 : 승보시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2) 성균관 : 원칙적으로 생원, 진사에게 입하 자격이 주어졌다.

3) 서원 : 봄과 가을에 향촌의 덕망 있는 자를 모시는 향음 주례를 지냈다.

4) 4부학당은 한양에 설립한 국립 중등교육기관이다. 4부학당의 학생들은 성균관에 결원이 생길 경우 승보시를 치러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의 중등교육기관이었던 향교는 모든 군현에 설치되었다. 향교는 문묘와 명륜당 등을 갖추고 있었고, 중앙에서 교수나 훈도가 파견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서원은 유학자들의 제사를 지내고 성리학을 연구하는 사립 교육 기관이었다. 국가로부터 사액과 함께 서적 등을 받기도 하였다.

 

105. 조선 후기 실학자

1) 이익 : 역사는 시세, 행불행, 시비의 순서로 움직인다고 보았다.

2) 유형원 : 신분에 따라 차등있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을 조정하자고 주장하였다.

3) 홍대용의 의산문답 : 기술의 혁신, 문벌 제도의 철폐,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다.

4) 정약용 : 마진(홍역)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고 이 분야의 의서를 종합회 마과화통을 편찬하였다.

 

105. 을사 조약 체결에 대한 우리 민족 대응

1) 나철과 오기호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2) 최초의 평민 의병상이 등장하여 활약하였다.

3)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였다.

4) 을사조약(1905) 이후 한일 강제 병합(1910) : 황현이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5) 을사조약 체결에 맞서 민영환, 조열세 등이 결하는 거족적인 반대 움직임이 일어났다.

 

106. 조선 총독부 정책 산미 즈식 게획

1) 증산된 쌀보다 더 많은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어 조선의 식량사정이 악화되었고, 만주에서 잡곡을 들여와 식량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2) 자작농이 줄고 소작농이 늘어났다.

3) 친일적인 조선인 대지주도 이득을 보았다.

4) 종자 개량비, 수리 시설비 등이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5) 조선의 부족한 식량은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으로 대신하였다.

 

107. 국채보상운동

1)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이 운동의 확산에 크게 기여 하였다.

2) 보안회와 농광회사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 요구에 맞서 설립되었다.

3) 총독부가 아닌 통감부에서 국채보상운동을 방해하였다.

4) 민립대학설립운동에서 내세운구호

5) 대한 매일신보를 비롯한 언론이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108. 일제 강점기 노동운동

1) 임태도 소장쟁의(1923) : 소작료 및 소작권 문제가 쟁점이었다. 신간회는 조사단을 파견하여 파업을 지원하였다.

2)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 : 이후 비합법적 노동조합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3) 임태도 소장쟁의 이후 조선 노농 총동맹(1924)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109. 가야 연맹의 변화

1) 522년 대가야왕이 법흥왕에게 혼인을 요구하여 신라가 이를 수락하였다.

2) 금관가야는 왜구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돕기위해 출병한 고구려군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여 가야 연맹의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3) 금관가야는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였으며, 대가야는 후기 가야 연맹을 주도하였다.

4) 금관가야는 532년 법흥왕 시기에 병합되었고, 대가야는 562년 진흥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110. 삼국의 항쟁

1) 침류왕은 백제의 15대왕(384~385)으로, 침류왕의 불교 수용은 한성 합락(475)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다.

2) 장수왕에 의해 한성이 함락된 직후, 22대 문주왕 즉위년인 475년에 백제는 옹주(공주)으로 천도하였다.

3) 백제의 24대 동성왕(479~501)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 연합하였다.

4) 백제의 26대 성왕(523~554)538년 사비로 천도하고 한강 하류를 회복하는 등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다.

5) 백제의 25대 무령왕(501~523)은 성왕의 아버지로, 22담로를 설치하여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111. 신라 중대의 정치

1) 중대는 무열왕~혜공왕에 해당한다. 진골 출신인 김춘추가 무열왕이 된 후 그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했던 시기이다.(7세기 중반~8세기 후반)

2) 중대는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던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이 강화되고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3) 6세기 지증왕부터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거서간, 차차웅, 마립간 등의 전통 왕명 시대는 지증왕 이전 시기에 해당한다.

4) 진골 귀족 간 왕위 계승 분쟁은 신라 하대의 정치적 특징이다.

112. 발해의 정치

1) 상경성으로 천도하고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인 발해의 왕은 문왕(737~793)

2) 문왕은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며 당의 중앙 정치조직인 36부제를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였다.

3) 무왕 때에는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4)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때는 926년이다.

5) 발해는 선왕 때 전성기(9세기 전반)를 누렸으며, 중국인들은 이 시기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113. 통일 신라의 관리 등용 제도

1) 독서삼품과는 신라의 관리 선발 제도로 국학의 학생들을 독서능력에 따라 상, , 하로 구분하였으며 이를 관리 임용에 참고하였다.

2) 고려 시대 과거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제술과는 문장의 능력을, 명경과는 유교의 경전을 시험하였다. 잡과는 법률, 의학, 천문, 지리 등의 기술 과목으로 시험을 보았다.

3) 조선 시대 조광조가 주장한 현량과가 대표적이다.

4) 고려 시대에 5품이상의 관리 자제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오를 수 있게한 음서제도가 있었다.

 

114. 고려 무신 정권기 권력 기구

1) 최우는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사용하였다.

2) 도방은 사병 기관으로 최씨의 신변을 경호하였으며, 서방은 문신 숙위기구로 문학적 소양과 행정 실무 능력을 갖춘 문신들을 등용하였다.

3) 도병마사는 고려 초부터 존재하였던 관청으로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국방상 중요한 일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던 회의기구이다. 고려 후기에는 도평의사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4) 중방은 고려 무신들의 합의기구로, 정중부, 이의방 등이 무신 정변을 일으킨 무신 집권 초기의 최고 기구였다. 최충헌이 집권한 이후에는 교정도감이 최고 집정부의 구실을 하였다.

 

115. 조선 시대의 궁궐, 경복궁

1)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인 것은 맞지만, 왕들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궁궐은 창덕궁이다. 조선 초기에는 왕자의 난 등 혼란한 상황에서 궁궐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으며,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되고 난 후 흥선 대원군 집권시기에 중건되었다.

2) 태조는 조선 건국 후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엿다..

3)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이다.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또한 공식 행사와 조회에 사용한 경복궁의 중심 건물은 근정전이며, 사정전은 국왕의 편전으로 국정을 일상적으로 의논하고 정사를 보는 곳이다.

4) 명성 황후 시해로 위협을 느낀 고정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쳐를 옮겼는데 이를 아관 파천이라 한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돌아온 후에서는 경운궁(덕수궁)으로 거쳐를 옮겼다.

 

117. 조선 후기의 정치 변동

1) 예송논쟁 1차는 효종, 2차는 효종비가 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다. 두 사건 모두 현종 재위기간에 있었다.

2) 인현 왕후가 퍠위된 기사환국(1689)으로, 숙종 대에 있었던 사건이다.

3) 예송논쟁과 기사환국 사이에 있었던 사건으로는 숙종 때 남인이 대거 축출된 경신환국이다.

4) 대동법은 광해군 때 경기도에 국한하여 시작되었다.

5) 인조반정(1623)은 예송보다 이전의 일이다.

6) 임진왜란 직후 일본에서 다시 통신사를 요청하면서 조선과 일본 간에 외교 관계가 재개되었다. 통신사의 호칭이 다시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인조 때인 1636년이다. 이는 현종 Eoi보다 훨씬 앞선 시기다.

7) 정여립 모반 사건은 선조 때 있었던 일이다.

118. 조선 후기 정조의 정책

1) 화성을 건설한 왕은 정조이다.

2) 정조의 개혁내용으로는 초계문신제 실시, 규장각 설치 및 신진 관료 육성, 장용영 설치, 화성 건립, 신해통공, 대전통편 편찬 등이 있다.

3) 북벌 정책을 실시한 왕은 효종이다.

4) 흫성 대원군은 세도 정치를 극복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비변사를 해체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5) 환국이 일어난 시기는 숙종 때이다.

6) 순조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정순 왕후의 수렵청정을 받았다.

 

119. 조선 후기의 정치

1) 영조는 균역의 부담을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2) 영조는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신문고 제도 부활시키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또한 탕평책을 실시하여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 중심의 정국 운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고,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또한 영조 시기에 속대전이 편찬되었다.

120. 동학 농민 운동

1)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의 주장은 집강소를 설치하여 추진하고자 한 폐정 개혁안에서 확인 할 수 잇다. 주요 내용은 탐관오리를 처벌할 것, 노비 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칠반천인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양립은 벗어 버릴 것,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할 것, 무명잡세를 폐지할 것, 인재 등용을 고르게 할 것, 왜와 간통하는자는 엄정할 것,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등이다.

121. 독립운동가 신채호

1) 조소앙 : 삼균주의

2) 신채호 :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이며 언론인

 

122. 대한 제국 시기의 신문

1)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은 독립신문

2) 독립신문은 1896년 서재필 등에 의해 창간되었고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구성

3) 양기탁과 영국인 배델이 창간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

4) 한성순보는 국가가 발행한 우리나라최초의 근대 신문

5)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자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비판

123.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동

1) 북간도의 용정촌, 명동촌에서는 이주 동포를 기반으로 조직된 중광단 등의 항일 단체가 조직되었고 서전 서숙, 명동 학교 등의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2) 대한인 국민회, 대조선 국민 군단은 미주 지역에서 형성된 항일 단체

3) 승무학교는 멕시코 지역에서 독립군을 양성한 학교

4) 권업회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조직된 단체

5) 자치 기관인 부민단과 신흥 무관 학교의 전신인 신흥 학교는 서간도 삼원보에 설립

 

124. 6.25 전쟁의 배경

1) 에치슨 선언 : 1950110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을 알래스카,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선으로 한다고 선언한 내용. 북한은 이를 보고 미국이 한국을 태평양 방위권 내에서 제외하였으므로 한국에 침공하여도 미국의 무력 지원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

2) 1950625일 북한군의 전면적인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

 

125. 통일을 위한 노력

1) 19727.4 남북 공동성명 : 자주, 평화, 민족 대결단의 통일에 관한 기본 원칙과 남북 조절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함.

2) 7.4 남북 공동 성명 이후 남북대화의 과정에서 남한에서는 유신 체제가 형성되었고 북한에서는 국가 주석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헌법개정으로 사회주의 체계가 공식화

3)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것은 1991

4) 5.16 군사 정변은 1961년에 있었던 사실

5)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 위원장과 만난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에서 결의한 내용

6)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이 국방 위원장이 합의한 6.15 남북 공동 선언 이후 진행된 남북 협력 사업

 

126.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생활 모습

1) 신석기 시대에는 해안이나 강가에 모서리가 둥근 네모꼴의 움집을 짓고 거주하였다.

2)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기는 청동기 시대이다.

3) 뼈바늘과 가락바퀴로 옷을 지어 입기 시작한 시기는 신석기 시대다.

4)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의 원시 신앙은 신석기 시대부터 발생하였다.

5) 신석기 시대는 지배자가 등장하지 않은 평등 사회였지만, 청동기 시대는 지배자가 등장한 불평등 사회였다.

127. 고조선의 사회

1)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중국 전국 시대의 연나라와 맞설 정도로 성장하였다.

2) 주몽이 건국한 나라는 고구려이며, 고조선은 단군 왕검이 건국하였다고 전해진다.

3) 고조선 건국 당시에는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위만 집권 이후에는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4) 사출도는 부여의 정치적 특징이다.

5) 고조선의 문화 범위와 관련된 유물은 비파형 동검, 북방식 고인돌, 미송리식 토기 등이다.

 

128. 구휼제도

1) 고구려의 진대법은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농민의 몰락을 막고, 국가 재정의 원천을 확보하려는 춘대 추납 정책이다.

2) 태조 때 설치한 흑창은 고구려의 진대법과 유사한 제도였으며, 고려 성종 시기에 이름을 의창으로 개칭하였다.

3) 고려의 상평창은 물가 조절 기관이다. 큰 맥락에서는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이 같다고 볼 수 있지만 춘대 추납 제도는 아니었다.

4) 고려 예종 때 설치된 혜민국은 서민의 질병 치료를 위해 설치된 의료기관이다.

 

129. 통일 신라 신문왕의 업적

1) 만파식적 설화에 등장하는 왕은 신문왕

2) 신문왕의 업적으로는 녹읍 폐지, 관료전 지급, 국학 설치, 95소경 마련, 9서당 10정 정비 등이 있다.

3)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ㅂ하고 왕권을 전제화하였다. 김헌창의 난은 신라 하대에 있었던 일이다.

4) 경덕왕 때 녹음이 부활되었다.

5) 성덕왕 때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130. 고려 시대의 경제

1) 해동통보와 은병(활구)는 고려시대에 사용되었다.

2) 고려 시대의 화폐는 널리 유통되지 못하고 농민들의 통상 거래는 여전히 곡식이나 삼베를 활용하였다.

3) 은병은 가치가 커서 지배층만이 사용하였다.

 

131. 조선 시대의 문화

1)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25대 왕인 철정가지의 기록을 편년체로 써내려간 책이다.

2) 동국통감은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 등이 왕명을 받아 단군 조선부터 고려 말가지의 역사를 엮은 사서이다. 고려시대의 역사를 서술 범위로 삼아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밝힌 사서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대표적이다.

 

132. 예송

1) 예송은 효종과 효종비가 죽은 후, 효종의 새어머니였던 인조의 계비 장렬 왕후가 적장자에 준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이다. 차남으로 왕위를 이은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 심각한 정치적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2) 1차 예송 때 서인은 1, 남인은 3년을 주장하였고, 2차 예송 때 남인은 1, 서인은 9개월을 주장하였다. 1차 예송에는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였고, 2차 예송 때는 남인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아직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3) 남인은 왕실의 예와 사대부의 예는 다르다는 왕자례부동사서를 주장하는 왕권강화의 입장에 섰고, 서인은 왕실의 예와 사대부의 예가 같다는 천하동례를 내세웠다.

 

133. 농업 기술의 발달

1) 농사직설은 조선 세종 때 편찬되었다. 즉 조선 전기의 농업 발달상을 고르는 문제이다.

2) 목화는 고려 말 문익점에 의해 목화씨가 들어온 이후, 조선 전기에 들어와서야 재배가 확대되었다.

 

134. 조광조의 개혁 정치

1) 정암 조광조의 개혁 정치 내용에는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 삭제, 소격서의 폐지,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이 대표적이다.

2) 초계문신제는 정조가 실시한 관리 양성 제도이다.

 

135. 조선 후기의 경제

1) 조선 후기에는 민영 수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나라에서 필요한 물품도 구매하여 사용하면 되었다. 그리하여 공장안에 등록된 수공업자들이 1년 중 일부는 관역에 종사하고, 그 이외 기간에는 물품을 팔아 공장세를 내던 관영 수공업의 형태는 점차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결국 18세기말 정조 시기에 공장안은 폐기되었다.

 

136. 갑신정변

1) 급진 개화파인 김옥균 등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일으켰으나 실패한 사건은 갑신정변이다. 이들의 주장은 14개조 정강을 통해 알 수 있다.

2) 갑신정변에서 토지 균등 분배 등과 같은 토지 제도 개혁에 대한 부분이없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137. 동학 농민 운동

1) 사발통문은 189311월 고부 농민 봉기를 앞둔 지도자들의 결의가 담겨 있다.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을 죽일 것,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에게 탐학한 벼슬아치를 징치할 것, 전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등이다. 사발을 엎어서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이름을 둘러 가며 적어 주모자를 알 수 없게 했다고 추측한다.

2) 정부가 동학을 탄압하자 동학교도들은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는데 점차 종교적인 활동에서 척왜양창의를 표방하고 지방관의 횡포를 비판하는 정치 사회적인 성격으로 변하였다. 보은 집회는 이러한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 준다.

3) 장태는 동학 농민군이 정부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개발한 신무기이다. 이 속에 볏집 등을 가득 채우고 방어할 때는 뒤에 숨고, 공격할 때는 장태를 굴려 총알을 막으며 앞으로 나갔다. 특히 황룡촌 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4) 정부와 농민군 사이에 전주 화약이 맺어지자, 정부는 농민들이 요구한 12개조 폐정 개혁안 중 일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흩어진 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5)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위기를 느낀 동학 농민군은 2차 봉기를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에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전봉준은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138. 위정척사 운동

1) 1882년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 체결되어 청 상인의 내지 무역이 허용되었다.

2) 영남 만인소 상소 이전에 이미 일본과 강화도 조약(1876)을 맺어 개항이 이루어졌다.

3) 1882년 조, 미 수호 통상 조약은 서양 국가와 최초로 체결한 조약이다.

4) 1904년 발발한 러, 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다.

5) 거문도 점령 사건은 1885년에 영국군이 일으켰다.

 

139. 근대식 학교

1)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는 원산학사

 

140. 3.1 운동

1)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학생, 종교인, 사인, 노동자가 참가하면서 점치 지방 도시로 확산되었고, 뒤이어 전국 각지의 농촌으로 파급되었다.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차츰 면세무소, 헌병 주재소,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 식민 통치 기관과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는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제암리 사건은 이러한 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다.

2) 민족 대표 33인은 독립 선언서를 태화관이라는 요릿집에서 낭독한 뒤, 자진 신고하였으므로 실제로 시위를 지도하지는 못하였다.

3) 1923년 물산 장려 운동에 대한 설명이다.

4) 3.1 운동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141. 신민회

1) 신민회 회원들은 국권 피탈 직전 서간도로 건너가 유하현 삼원보에 자치 기관인 경학사와 부민단을 만들고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2) 1912년 각지의 유생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것은 독립의군부

3) 1915년 대구에서 만들어진 비밀 결사인 대한 광복회

 

142. 국민 대표 회의

1) 국민 대표 회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된다는 창조파와 임시 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개편, 보완하여야 한다는 개조파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난항을 거듭하다 사실상 결렬되었다. 신채호는 창조파다.

2) 외교론, 준비론은 신채호가 조선 혁명 선언에서 버려야 할 미몽이라고 규정하였다.

3)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 통치 청원서를 보낸 사실을 신채호는 매우 비난하였다.

 

143. 현대 사회의 주요 사건

1) 19604.19 혁명

2) 박정희 정부 초기인 1964년 베트남 파병이 시작되었다.

3) 19805.18 민주화 운동 전개

4) 19876월 민주 항쟁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이었던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중상을 입은 사건은 시위의 기폭제가 되었다. 결국 이한열은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44. 세시풍속

1) 찬 음식 먹기는 한식이다.

2) 음력 55일인 단오는 수릿날이라고도 하며 단오의 풍속 및 행사로는 창포에 머리감기, 쑥과 익모초 뜯기, 부적 만들어 붙이기,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단오 비녀꽂기 등의 풍속과 함께 그네뛰기, 씨름, 석전, 활쏘기 등과 같은 민속놀이도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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