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데이비스의 "레비나스 입문" 중심으로 주저리;; (1)

2012. 2. 13. 20:53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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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헤겔의 최종목표는 절대지혜다. 모든 나뉘어진 지혜들이 하나로 완성되는 지점이 그의 이상이다. 레비나스의 최종 목표는 타자성이다. 존재에서 존재라로 간다. 타자성은 타인과 출산성과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향유는 존재가 짊어져야할 몫으로 레비나스는 보았다. 앞서 말한 헤겔의 최종목표인 전체성은 모든 지식들의 완벽한 지점이라고 말하였다. 모든 것들의 관계성을 알게되고 부분과 전체가 하나가 되고 엮이는 것이다. 이와는 분명 레비나스와는 다른 사유이다. 존재자의 줌음은 유한함을 느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현존재의 결단론적 혹은 결의론적 의지를 주장하였다면 레비나스는 가능성의 불가능 성을 주장하였다. 가능성의 한계를 드러나는 지점 즉 타자와의 만나는 지점이 유한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타자성이 있음은 느끼는 것이다. 이는 에로스와 출산에서 비롯된다. 시간은 지속으로서 요동치는 것으로 볼수 없다. 타자성의 틈과 개입에 의해서 시간의 단절 및 타자가 만나는 지점이 시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현재를 근본적으로 의심하고 열어보는 지점이 타자와의 만남이다. 현재와 미래의 사이에서 발견된다. 존재와 시간은 영원성의 시간이다. 타자와 시간도 영원성의 시간이다. 존재자와 시간은 현재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성은 미래의 타자와 마주하는 것이다. 동일자의 타자의흡수 그리고 타자의 익명성은 무아경이며 흡수 없는 관계다. 즉 관계없는 관계인 것이다. 
          레비나스의 홀로서기는 자기정립이다. 존재자가 출현해서 존재를 떠맡는 사건이다. 존재는 연원하다. 홀로서기 속에 존재자는 현재에 위치한다. 미래는 타자다. 존재자의 사고는 존재자의 있음이다. 주체없이 존재하는 것은 일리야의 핵심이다. 있다는 없어도 남는 것이다. 존재의 익명성은 무규정적 배경과는 상이하다. 왜냐하면 배경에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주체인 존재자는 시간이 도래한다. 동일성은 의식과 의식 대상의 관계를 가진다. 현상에서 의식은 동일자에 의해 상호작용한다. 외부세계에서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는지는 알지 못한다. 의식에 의해 구성된 타자는 동일자다. 이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타자라로 봐서는 안된다. 타자와의 만남은 의식에서만 만나는 것 뿐이다. 실제 타자와 만난다 그런 의미는 아니다.
         자아지배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이다. 자기 정립을 거침으로서 타자를 만나는데, 자기 정립 없이는 책임이 서질 않는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차이는 더불어 있는 존재와 직면하고 있는 존재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는 또다른 나다. 그 타자를 통해서 내가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자기 자신의 존재론적 결단의 양식을 지닌다. 철저하게 고독의 주체인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만남이 문제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후설과 레비나스의 차이는, 후설은 타자를 직접 만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아주 내적이라고 볼 수 있다. 유추적 통각으로 다른 사람이 어떨것이라고 상상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와 반대로 자신에 갖혀있다라고 하였다. 유추적 통각이 나 말고 다른 거기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알게하는 것이다. 여전히 남의 의식을 초월론적 시각으로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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