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빈곤, 그 부정의 변증법

2009. 8. 19. 12:14Review/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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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빈곤, 그 부정의 변증법

('세계에서 빈곤을 없애는 30가지 방법'을 읽고)

 

박형락

 

 

 

 

 

 인간은 누구나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삶이란, 진동과 진동이 마주하는 상호관계 속에서 생기는 따스한 열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인간은 더 나은 이상을 향해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한다. 큰 틀로 봤을 때 자연과 소통하려고 하였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소통에 대해 중간적 입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화를 통해 신과 인간의 관계를 구성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이러한 구성이 신을 대신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변형해 놓기도 했다. 인간의 발전은 초창기 모계사회를 중심으로 한 평등한 부족사회에서 사유재산이 생겨났다. 그리고 사유재산을 통한 빈부가 생겨나고 이에 따른 개인과 개인의 대립이 생겨났다. 시간이 흘러가면 갈수록 빈부격차가 커지게 되면서 사유재산이 큰 사람은 작은 사람을 잠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큰 사람을 중심으로 큰 세력이 형성하게 되었다. 점점 큰 세력과 큰 세력이 서로 잠식하기 위해 대립을 할 것이다. 서로의 대립에서 승리한 쪽은 처음에는 난폭하게 죽음을 준다고 하더라고 경제적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합리하다. 따라서 생겨난 것이 노예제도다. 노예제도는 굉장히 그들의 입장에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승리를 한 큰 세력은 하나의 국가로 존재한다. 계급으로 나뉜 탄탄한 중세시대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층민 사이에서 의문을 품게 된다. 같은 인간이 서로 다른 삶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 즉 신화라는 도구적 장치가 계몽을 통해 무너지지는 않지만, 이러한 신화는 관념 속에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문예사조에서 일컫는 계몽주의는 프랑스 혁명을 몰고 가게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뒤엎지는 못했다. 신화라는 도구적 장치는 여전히 우리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계몽이 낳은 과학 만능은 다시금 도구로서 우리를 존재케 하기 때문이다. 낭만, 상상, 환상을 부여하기에는 우리에게 너무 큰 거리감이 생기게 된다. '인간의 삶'은 항상 발전할 것이라는 인간의 믿음은, 상부에서의 분위기 조작으로 튼튼히 다져간다. 문화 비평이 없는 세상, 인문학을 멀리하는 세상이 오면서 이러한 믿음은 커져간다. 그런데 아직까지 세상은 불공평하게 우리를 이끈다. 인간은 도구적 존재가 된지 이미 오래이며 너무 오래다 보니 우리 스스로 느끼지도 못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부정되고 부정되어야만 하는 모순의 골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데도 말이다.

 

 

 이 책에서 나에게 낯익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공정무역이다. 노동력을 착취하여 싼값으로 원재료를 판매하기 때문에 우리가 값싸게 먹을 수 있다. 물론 값싼 초콜렛은 진짜 카카오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만들어진 가공 초콜렛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당하게 노동력에 대한 값을 주고 구매하여 소비자에게 양심적으로 파는 공정무역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세계는 이렇게 많은 노약자들이 공정무역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웰빙 열풍이 일어나면서 유기농 채소와 함께 공정무역이 알려졌다고 한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공정무역에 대한 정확한 소비자 인식이 부족하다. 대학교의 경우 이화여대와 경북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소개되었다. 당시 반응은 상당히 좋았는데 다만 걸림돌은 가격이었다. 정당하게 구매하고 판매를 하다 보니 가격이 시중가격에 비해 무척이나 비쌌다. 학교 축제기간에 행사 제품이어서 학생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으나 정작 소비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갈수 없는 물건이 아닌가 하고 생각 되어졌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책은 국외의 빈곤자들에 대한 연민의 시각으로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나는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해결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힘든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비싼 가격으로 구매를 하면 자연히 소비자 물가가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서민층의 허리는 안 그래도 휘어져있는데 확인 사살하는 거랑 다를 바 없다. 대기업 입장에서도 분명 질이 좋고 값싼 초콜렛을 생산하고 거기에 공정무역이라면 더욱이 회사 이미지 상승이라는 시너지 효과까지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쳐 있었기 때문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사줘야 더욱 큰 이익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생협이나 NGO 같이 소규모가 연합을 해서 공정무역을 하는 것에 그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자본주의로 향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뒤엎지 않는 한 완전한 해결을 불가능 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될 것이고 이는 자본주의 비난의 선봉 또는 초석이 되는 발판을 마련하는 구실이 되는 셈이다.

 

 

 이 책에서 해결책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은 국가와 대기업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국가와 대기업간의 밀착관계는 시대의 흐름과 맞물린다. 국가의 경우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빌려준 차관은 국가 이익을 넘어서 착취의 수단일 뿐이다. 이젠 국가마저도 도구화 되어버린 세상이 되었다. 또한 대기업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으로 변신한다. 단순히 세계 시장을 넓히는 목적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세금 회피가 있었다. 다국적 기업과 국가의 만남으로 가난한 나라는 착취의 수단이 되었다. 착취의 방법은 날카로웠다. 원조 또는 구호라는 이유로 필요한 물질을 빌려주거나 무상으로 기부를 한다. 분명 가난한 국가 입장에서는 도움을 받으니 좋겠지만 실제는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했다. 도움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자립할 수 있는 능력과 기반이 떨어지게 된다. 물질 문명이 발달함과 동시에 인간의 정신이 따라 와야하는 데 그러하지 못하다 보니 인간의 정신은 난민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립 할 수 없는 국가는 결국 선진국가 또는 대기업에 의존하게 되고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게 된다. 사실상 19세기말의 식민지 상황이나 다를바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또한 이러한 부도덕을 감수 하면서 까지 상생하는 것이 아닌 이용, 착취의 길을 가게된 국가의 모습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 언급된 일본이라는 나라는 부족한 자원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의 경제는 버블경제를 겪은 상황이다. 자원이 줄어 들게되고 국민이 요구하는 경제 성장률을 따라가려면 국가적 차원에서 소위 말해 돈벌이 그리고 자원 확보가 절실했던 것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다시 국민에게 돌아 갈수 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과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원점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실천, 행동이었다. 행동의 변화는 국가와 대기업도 어쩔 수 없이 변화하기 마련이다. 이 책은 행동의 변화를 위해 실천을 강조했다. 사람들이 의문시하고 의아해 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실천한다면 얼마나 우리들에게도 그들을 도움으로써 어떠한 것을 얻어갈 수 있는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논점이 흐려질 수 있으나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인간의 실천과 행동의 깨달음은 무지에서 벗어나 계몽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몽은 신화를 벗어나 체험을 통해 느껴야 하며 자신이 눈앞에 당면한 문제를 소외적인 관점에서 비판을 하지 않는 이상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감정 이입이 되고 만다. 따라서 실천과 행동을 위해 자신이 그 무대의 등장인물이 되어 연극을 하는 것이다. 관객도 없고 조명이나 무대장치 마저 없다. 단순히 연극할 줄 모르는 연기하는 자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연기를 하면서 서서히 연극 속의 등장인물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참여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실천 해야 하고 행동 해야 하는 지를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고 있다. 아이들이 노숙자의 체험을 통해 노숙자의 감정을 누군가의 의도를 통한 감정이입에서 벗어나 스스로 비판하고 진실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물질이 아니더라도 빈곤 국가가 원하는 꿈을 교류를 통해 알아내고 자립할 수 있도록 하여 서로가 사생하는 삶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물질이 무조건 발달한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우리 현실에 절실하게 다가 오고 있다. 이 책에서 대기업과 선진 국가들의 착취로 인해 피해를 받는 주민들의 말들 중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만의 행복한 꿈을 향해 달리는 것이었다. 이미 대학생들에게 뿌리깊게 인식되어진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어쩌면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 서로가 상생의 길을 찾아 행복이 가득한 진정한 세계를 찾기 위해 허우적 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들의 조그마한 실천부터 생각의 변화 그리고 행동의 변화에 이어 참여까지 우리가 해야 할 해결책은 이제 과제가 되어버렸다. 이번 동티모르 해외 봉사는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나 자신이 아니라 서로의 팀워크와 함께 현지인들을 이해하고 도와주면서 그들이 원하는 행복을 찾아 주고 우리들이 원하는 희망을 전해주면서 서로가 웃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무조건 적인 도움이 아니라 상대방의 문화를 인정하고 그들만의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주면 훗날 역사에서도 또 다른 비판이 아닌 진정한 합일의 세상이 오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p.s 불펌하지마시고 의견은 댓글 부탁해요~~ (동티모르가기전 작성한 글로 사진은 직접 찍었으나 내용과는 다를수 있습니다.)

 

p.s 동티모르 관련 자료는 경북대학교 도서관 -> '동티모르' 검색하시면 관련 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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