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18. 10:43ㆍLiteratur/English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시작한다는 것은 항상 어렵다. 중국과 이집트 또는 그리스의 역사와 비교해서 독일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젊다. 만약 북미역사와 함께 독일 역사가 비교된다면 독일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우리는 예수가 태어나기 전 기원전 1세기에 카이사르와 함께 독일 역사가 시작 될 것이다. 그것은 두 개의 이유가 있다. 이 당시 시대에 게르만인과 로마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첫 번째 접촉은 기원전 100년에 이미 알프스 산을 넘어 북 이탈리아로 돌진하는 게르마니안 부족을 발견했을 때이다. 그들은 로마인 사령관 마리우스로부터 격퇴당했다. 이밖에 카이사르는 첫번째 게르만인을 근거로 한 작성한 사람이다. 그는 그의 유명한 책 데 벨로 갈리코에서 마리우스의 승리 이후 불안하는 것을 시작하게 한 이 민족에 대하여 알렸다.
물론 시저 이전 오랜 기간 동안에도, 오늘날 독일영역에 사람들이 살았었다. 게르만 족뿐 아니라 켈트 족과 동스라브족도 있었다. 그들은 도시와 국가가 없었다. 독일의 겨레가 가장 커졌고 그들은 사냥과 농사로 살아가고 있었다. 한 세대나 두 세대가 지나도록 수확이 만족에 이르지 못하면 그들은 접경해 있는 영역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러나 시저 이후 비로써 우리는 그들에 대한 상세한 것을 알게 되었다. 갈리아를 정복한 이후 시저는 여러 번의 출정을 시도했다. 게르만인의 주거지역 안으로 라인 강 저편의, 그러나 항상 강 뒤쪽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그 다음 200년 동안 라인 강이 로마제국과 게르만인 사이에 경계로 있었다.
기원후 9세기에 로마인은 라인 강을 넘어 북동쪽으로 진격하려고 시도했다. 게르만의 지도자인 헤르스크 종족 헤르만은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3개 로마연대를 소멸시켜버렸다.
기원후 1세기에 로마인들은 라인 강 저편에 있는 지역을 정복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들의 실패를 한 후에 남쪽지역 도나우와 라인 사이에 크고 견고한 리메스 라 불리는 성채를 쌓았다. 라이강의 서쪽영역과 리메스의 남쪽에 쾰른, 마인츠, 트리아, 비스바덴과 다른 도시들이 생겨났다. 이 도시들은 로마도시에 대한 병참기지 이기도 하고 게르만족과의 교환을 위한 교역로이기도 했다.
또 다른 로마인 저술가, 타키두스를 통해 우리는 이 시기에 대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타키투스는 로마지역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의 책을 통해 게르마니안과 게르만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된다.
그는 로마 병참기지의 군인에 의해서 알게 되거나 사인에 의해서 게르만의 습속이나 생활양식을 알 수가 있었다. 그의 보고서가 기원후 2세기의 게르만 인들의 가장 중ㅇ한 자료가 된다. 로마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많은 게르만 종족은 차차 관습이나 로마인들의 질서에 대한 원칙 중에 어떤 것들 수용한다. 하지만 그들은 오래 지속되었고, 게르만 인이 그들의 첫 국가를 창설할 수 있었다.
(9-3) 서기 150 ~ 300 년대 많은 게르마니아 부족들이 유럽에 이주했다. 그리고 고트족은 흑해에서 그리스로 이동했다. 다른 종족은 천천히 동쪽 독일에서부터 갈리안을 지나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로 이주했다. 그것은 계속해서 로마인들과 전쟁을 수반했다. 283년 라임의 알레마니안이 성체를 파괴했다. 로마인들은 천천히 알프스산맥 뒤편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3세기 중엽 오늘날 남 러시아의 영토에 에르마니쉬 왕이 고트족 첫 번째 동 게르만 민족 대 제국을 형성하였다. 고트족은 이미 이 시기에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의 주교 불필라는 고트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그는 틀림없이 첫 고트인의 글자 말을 창조했을 것이다. 이 성격번역은 첫 게르만의 문헌이다. 고트족의 언어는 아직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독일 말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것은 그런데 (언어를) 발전시켰던 토대의 하나다.
에어만에어리히 통치아래 있는 고트인의 왕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부분 게르만인의 왕국들은 다음 세기에 그렇게 계속되었다. 그 왕국은 375년에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인 훈족에 의해 파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두 번째로 게르만 부족의 대이동이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를 민족이동이라고 부른다. 200년 동안 다양한 게르만 민족들이 유럽을 통해 뻗어 나갔다. 그러면서 그들은 당연히 매번 계속 로마인들과 충돌했고 그들은 서서히 로마인의 거대제국을 멸망시켰다.
게르만 인들은 그들의 이주로 스페인과 북아프리카까지 왔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8세기에 아라비아인을 통해 스페인이 정복할 때까지 지속했었던 왕국을 건설했다. 500년 초반이 되어서야 게르만인과 로마인들의 첫 접촉 이후 서 고트인들은 로마로 향해 이주하러 왔다. 로마인 제국은 이미 벌써 나뉘어졌었다.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서고트인들은 다시 한번 공격을 하고 로마는 구하는데 하는데 성공시켰다.
정말 오랫동안 로마인들과 접촉한 모든 게르만 부족들 중에서 프랑켄 족은 갈리안에 프랑켄 왕국을 크로드뷔히 1세하에 설립되었다. 이는 프랑스와 독일의 이후의 역사와 문화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었다.
476년에 마지막 서로마 황제가 게르만 군인들로부터 실각 당했다. 그들의 지도자 오도아케르의 군단 조직은 그러나 10년 뒤 동 고트인의 왕 테오데리히에 의해 제거당했다. 테오데리히는 게르만의 왕국을 이탈리아에 세웠지만 다시 535년에 동로마 비잔틴으로부터 멸망 당했다. 6세기 말에 게르만이 랑고바든족이 이탈리아 중간부터 윗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200년 동안 군림 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인은 이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나뉘어 머무르게 되었다. 로마까지 게르만인의 지배권과 영향이 다다랐다. 거기서 교회와 교황이라는 새로운 힘이 형성되었다.
게르만 민족들의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통해 그들로부터 로마인의 행정과 법의 틀을 가졌을 뿐 아니라 로마인의 문화를 알게 되었다. 500년 동안 게르만 인들은 그들의 개성을 전통적인 로마인의 틀과 함께 융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다음 중세시대의 정치적, 종교적, 정신적 토대를 오랫동안 발전시켜나갔다.
그들의 이주와 전쟁들을 치러 졌던 시대에 호머가 고대 그리스인들 앞에서 유사한 게르만 영웅 들의 찬가가 생성되었다. 이 영웅서사시는 기록된 것과는 달리 특별한 일을 가질 때 구전음악 종류로 낭독했었다. 그들은 위대한 부족의 제후 행동들을 다루어졌다. 예컨대 디트리히 폰 베른이라 불러진 테오데리히 대제는 이 찬가들의 가장 많이 불리는 주인공이다. 수 백 년 후에야 이 찬가는 기록됐다. 그들은 오늘날 독일의 역사에 중요한 원천이다.
이 시대 게르만 인들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 중에서 종종 공작이나 왕으로 자기 아래에 선출했다. 보다 점차적으로 봉건제도와 함께 행정을 수반한 국가적인 조직을 위한 토대와 성문법을 발전시켰다.
(11-4)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첫 게르만 왕국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연방 지역에 달했었다. 그들의 왕들은 8세기에 시작된 거의 전체 스페인 인들을 정복했던 아라미아인들과 맞서 성공적으로 남서에 있는 이 왕국을 방어했고 동쪽에 있는 슬라브 민족과 당시 이교도였던 작센 족과 맞서 싸웠다.
(11-5) 768년 칼 1세는 26살 때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당대 일부 이탈리아에 언급한 지역을 제외하곤 로마까지 그들의 왕국에 속했었다. 훗날 사람들이 독일에서 칼 대제, 프랑스에서는 샬를마뉴라고 부르는 칼 1세는 독일 실질적인 문화와 역사가 시작된 곳이었다.
칼 대제는 46년 동안 프랑크 왕국을 통치했었다. 그는 다양한 게르만인 종족들과 민족들을 처음으로 통일했다. 그의 모델은 로마제국이었다. 그는 그의 제국을 유지하고 확고히 하려고 그의 오랜 통치 기간 동안에 4번의 전쟁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경제와 문화와 교육 그리고 행정기구의 구축에 힘써 그의 왕국의 계속 되는 발전에 기초를 놓았다. 칼 대제 때 제국은 봉건적 행정구조를 얻었다. 모든 영주들은 그의 가신이기 때문에 위기가 있을 때 그의 부하들과 함께 그에게 도와주어야만 했다. 이러한 고용관계를 위해 왕은 그들에게 행정적인 땅과 그들의 소유의 수입원들 즉 봉토를 주었다. 이 땅은 만약 그들이 믿음의 가신으로 지속된다면 그들의 아들들에게 유전되지만 그렇지 않고 실추되면 그것은 다시 왕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 권리는 수 세기 동안 제후들과 왕들 또는 황제들과의 사이에서 힘든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주교들 역시 땅을 빌려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세속적인 주교들처럼 황제의 가신들과는 달리 교황에게 아주 전적으로 지배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교황과 황제가 서로 따로 따로 운영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이러한 봉건주의 행정조직을 칼 대제는 우리들의 역사 속에서 최초로 관료주의와 행정의 토대 같이 유사한 것을 도입했다. 그는 단일한 화폐제도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고대 로마시대 이전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향해 여기 교환경제를 자유롭게 하는 경제를 시도하였다. 그는 법원과 법률 개혁과 법을 편찬하도록 하게 하였다 그의 밑에 관리들은 이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수도사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이들이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거의 단지 라틴어를 썼었다. 칼 대제는 수도사들로부터 라틴어의 모범에 따라 독일어 문법을 작성하고 제작하도록 하게 했다. 독일어 문자를 고대 영웅 서사시를 기록하게 했다. 이 시대의 언어는 고고 독일어로 오늘날의 독일어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불필라의 성경언어 같이 매우 유사했다.
(13-3) 칼 대제는 그의 왕국을 동쪽과 남쪽으로 향하여 확장했다. 길고 긴 피비린내 나는 전쟁 이후 작센 족들을 굴복시키고 크리스천으로 개종시켰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랑고바든과 맞서 전쟁해서 교황을 지지하였다. 그의 승리 이후 로마교황으로부터 800년에 황제로 직위에 이르게 하고 로마 황제의 후계자로 취임했다.
(13-4) 칼 대제 정부아래에 당시 신앙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심지로 형성되었던 많은 학교들과 수도원들이 생겼다. 이 시대 유명한 수도원이 풀다에 있었다. 그들의 수도는 아헨 황제 성에 있는 칼이다. 로마의 전통과 기독교인의 정신과 게르만인의 정신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융합시키는 그의 시도는 당연히 매우 빠르게 성공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시도를 시작한 후에 이 원칙들이 훗날 발전하는데 큰 성과가 있었다.
누구나 그의 후계자 치하에서 왕국들이 칼 대제의 개인의 성격에 좌우되었고, 그에 의해 도입된 국가의 행정원칙, 질서원칙이 경고하지 못했다. 그것은 스스로 중앙집권들이 힘으로 제후들에 항상 대항하여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 아님을 입증했다. 매우 빈번히 그것은 다음 세기에 황제의 명령을 이행하는데 강한 제후들이 거부하는 것이 생기게 되었다. 만약 황제가 강한 인품인 이라면 그는 제후들에 대하여 자신의 주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만약 황제가 제후들이 종종 빈약하게 간주하기를 종종 시도되어 보잘것없다면 제후들의 의지에 굽혀야만 한다. 제후들에 대한 이러한 갈등은 종종 신앙적인 힘과 교황과 함께 어려운 난관을 딛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국가내의 교회의 지위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많이 토론 되었다. 국가의 발전은 종종 국가들이 점차적으로 봉건 사회로 발전하는 것 같으니까 기독교 이념과는 상반되게 존립했다. 즉 다시 말해서 하나의 새로운 지배구조이다. 그런 이유로 교황들과 황제들, 때때로 교황들과 황제의 제후들 사이에 수많은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외부적으로는 이러한 투쟁에서 국가의 힘이 중요했다. 내적으로는 그것은 실질적인 기독교 국가를 얻으려는 갈등이 있다.
당시에 상속 분할 법이 여전히 유효 되었기 때문에 칼 대제의 왕국 역시 오랫동안 존속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후임으로 나이 많은 아들이 승계 받는 것이 아직까진 세간에 널리 행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상속자 성 루드비히는 이미 프랑켄 왕국 내의 후계를 얻으려고 하는 그의 아들들과 함께 싸움으로 가졌다. 베르둔으로 부터의 조약으로 왕국은 대제의 3명의 손자들 아래로 왕국이 동쪽 (독일과 북 이탈리아), 남쪽 (남 이탈리아) 그리고 서쪽 부분 (프랑스) 으로 분할되었다. 칼 대제가 죽고 100년에 영원히 제국의 통일은 중단되었다. 이 시기부터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는 그들 각자의 진로로 경과했다.
칼 대제 시대와 그 다음 첫 10년 동안이 고대 독일어 문학작품이 절정에 도달했다. 830년에 ‘구세주’ 서사시가 생성했다. 정해진 운율 (두운) 로 쓰여졌던 이 서사시는 게르만인 영웅서사시의 문체로 기독교의 삶을 종교적인 시인이 묘사하였다. 다른 고대 독일어 문학 작품 역시 이 시기에 생성되었다. 900년 이후 라틴 언어가 다시 독일 내 문학작품에서 몰아내었다. 라틴어는 항상 여전히 학술의 쓰여지거나 말로 일컬어지는 언어였다.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 말하는 민족언어들이 점점 더 많이 서로서로 나눠지는 동안에 그들은 항상 여전히 그 무렵 중시 유럽 세계에서 라틴어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었다.
(15-2) 정치적으로 교황들과 제후들에 맞서 황제와 왕들은 200년 가까이 (920~1150) 전쟁들을 통해 특징을 지어졌다. 936년 독일 영주들로부터 작센제후로 선출되었던 하인리히 1세가 죽었다. 헝가리와 맞서 동쪽으로 향해 전쟁으로 확장을 한 그는 첫 번째 독일 제국의 창시자처럼 간주되었다. 사람들로부터 훗날 대제라고 불렀던 그의 후계자 오토 1세가 되었다. 영주들의 권력을 개혁하여 줄일 수 있었던 오토 대제는 다시 강력한 왕이었다. 그는 제후들을 견제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주교들을 제후들 옆에 임명하고 그들의 권력을 줌으로써 달성했다.
962년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오토대제는 황제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것은 첫 독일 황제왕국이 공식적으로 1806년 까지 다시 말해 나폴레옹 시대까지 존속했다.
오토 대제는 대략 40년 통치했다. 그의 통치아래에 독일 내 건축술과 조각술이 특히 전성기를 경험했다. 그것은 로마 식 건축물의 시작이었다. 그의 제국의 동쪽 다시 말해 오늘날의 체코슬로파키아 또는 대략 오더까지의 지역에 그는 방어 도시를 세우도록 했다. 그의 아들 오토 2세는 비잔틴 제국의 공주 테오파노와의 결혼함으로써 비잔틴 장식 예술 영향이 독일을 향해 왔다.
사람들은 만약 아헨에 있는 고대 황제 성 또는 라인에 있는 마인츠와 스페이어 또는 웜즈에 있는 세 개의 로마 식 황제 성당을 방문했다면 초기 중세의 정신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아직도 느낄 것이다. 이 성당의 건물은 11세기에 시작되었다. 많은 독일 황제들은 거기에 매장되었다. 교회들이 뒷날에 수 차례 변화되었을 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아직까지 오늘날 그들의 지어졌을 당시의 귀족적인 정신을 보여주었다. 아직까지 교회는 국민 교회도 아니었다.
세속적인 권력에 주교들을 임명하는 황제의 권력을 얻으려는 데서 교황들과 황제들 간의 맹렬한 싸움이 일어났다. 교황들은 즉 황제의 정치에 그들의 후원과 함께 영향을 줄 수 있는 주교가 스스로 임명하는 것이다. 서품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갈등은 1077년에 정점에 달했다. 교황은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에 명했다. 이것은 독일 영주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더군다나 반 황제를 구성하기 위함에 유리했다. 황제에겐 참회를 통해 파문으로부터 교황에게 면제를 청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임명 갈등에 처음으로 1122년 황제와 교황 사이의 웜 협정으로 종교 회의로 규칙을 세웠다. 이 조약에는 교황이 주교들을 임명하는 것에 결정되었지만 황제는 그들을 사전에 땅을 봉토를 수여했다.
12세기 중엽에 다시 의미 있는 독일 문학을 획득했다. 1150년 독일인 황제의 첫 번째 연대기가 독일언어로 출현했고 조금 늦게 알렉산더 노래가 나타났다.
중세 후기 전환기 때 중요한 사건은 셀주크투르트 군사로부터 성지인 팔레스티나를 구출하는 것에 대하여 모든 유럽 나라들에서 기사들이 참가한 십자군 전쟁이었다. 십자군 사상은 특별한 문화적 중요성을 말미암아 강한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운동을 발생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이념은 천천히 국민 종교로 변화하였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문화적 힘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까지 수도원들은 문화의 유일한 주체자였고 지금은 더욱더 많이 기사들과 그 훗날엔 도시들의 시민들이 되었다. 거기에 거대한 거래소가 생겨났고 거기에 수공업이 발전했다. 도시들은 번성했다. 이들은 부유하게 되었고 자유와 힘을 향해 추구했다. 도시들의 모든 시민이 지금 고딕의 스타일로 건축하게 된 새로운 거창한 교회들을 짓는데 관여하였다.
(17-1) 사람들이 기대 했었던 십자군 전쟁은 정확히 말하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힘의 집중과 자각으로 중 유럽나라들 안에 통합했다. 그것으로 정신적인 삶을 매우 풍성하게 하는 동양의 새로운 세상이 함께 접촉이 이루어져왔다.
1152년에 슈타우펜 가문의 영주인 프리드리히 바바로사라고 알려진 프리드리히 1세가 다스려졌다. 그는 대략 40년을 다스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간주된다. 때로는 전쟁으로 때로는 능수능란한 담판이 독일에서의 통치를 하는 힘을 또 한번 더 강화시키는 것이 그에게 이루어졌다. 때로는 교황에게도 투쟁했다. 독일에서는 그의 통치기간에 중요한 문화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1세기 동안 높은 기사 문화가 일어났다. 시민이 더 강하게 참여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중세 예술의 번성을 더 이상 체험하지 못했다. 그는 1190년 터키의 십자군 원정 때 익사했다. 예술의 새로운 형식들이 프랑스에서 왔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생겼다. 파리의 대성당은 이미 고딕의 양식이었다. 중세의 음유시인들과 유명한 시인들 중 하나인 차레테인 데 트로이즈는 새로운 형식의 유명한 시를 썼다. 그것이 로트링엔 지방을 넘어서 독일로 들어왔다. 음유시인의 시라고 독일에서 불리는 민네라는 뜻은 여인에 대한 사모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뜻한다. 시인은 한 여인을 애모하고 시를 쓰고 존경의 마음으로 그의 시와 노래를 짓는다. 종종 그는 그의 노래를 스스로 낭독하기도 한다. 연가는 사랑의 시였다. 여인이 예술의 중심에 있었고 전 문화적 변화에 대해서 매우 중요했다. 그 시대의 윤리가 사랑의 시 속에 이야기 되었다. 시가 존경 받을 만한 여인에게 그 가치를 인정하는 민네장의 시대와 노래들이 기교화 되었고 개인적인 사람으로 써 덜 중요했다.
프랑스뿐 아니라 공의 문헌도 이 시대의 문헌에 영향을 주었다. 많은 프랑스 문학을 독일로 가져온 하인리히는 처음으로 바질의 머나이데를 번역했다. 그는 글자 그대로 번역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시대의 정신에 따라 서사시를 제작했다. 그 밖에 프랑스 원천에 따라서 대체로 중세의 위대한 서사문학을 지었다. 이 시대의 위대한 세 사람의 위대한 서사시인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시인은 하르트만 폰 아우에 였다. 토마스 만도 그레고리우스에 관한 우리시대 소설을 썼었다. 하르트만 보다 약간 젊은 파르치팔의 시인은 바로 볼프람 폰 에센바흐다.
세 번째 서사시인은 이미 시민이다. 그 시인은 1210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라는 작품을 썼다. 똑 같은 시대에 니벨룽겐의 노래가 생겨나왔는데 그의 저자는 아무도 모른다. 마지막 서사시에 대한 사고범주에서 나중에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 소재를 가지고 음악 드라마로 이용했다. 이 모든 시들은 1190년과 1210년 사이에 작품이 나타났으며 운문으로 쓰여 졌다. 그래서 이러한 작용들로 사랑의 정신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민네의 형이상학적인 특성이 중요시 된다. 이 세상의 남녀연예는 이제 와서는 약간 불만족스럽고 별 성과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가장 최고의 행복은 기사가 여인을 가짐으로써 최고의 행복을 도달하지 않고 겸손으로 신을 신뢰하고 섬기는 것을 배운다. 그는 최후로 신에게 헌신한다. 그러나 이점은 이 세상의 사랑을 성취함을 포기를 뜻한다. 그리고 신의 은총에 의한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을 인식한다. 독일의 민네장의 경향은 볼프람의파ㅡ치팔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파르치팔의 주인공은 많은 삶의 역정과 모험을 통해서 나간다. 결국 그는 그랄스 부르크에서 신에 대한 인식에 이르게 되고 신의 사랑을 알게 된다.
프리드리히 바바로사는 그가 살았을 때에 그의 아들 하인리히를 왕으로 즉위했다. 왜냐하면 아들이 통치기간 동안에 영주들에 의해서 선택 받고 즉위되기 때문에 그의 후계가 안정이 된다. 하인리히 6세는 스스로 민네 노래를 지을 정도로 영리하고 예술을 좋아하는 지배자였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확고한 왕국을 물려줬다. 그의 의미를 그는 많은 내적, 외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더 강화시킬 수가 있었다. 시칠리아 지방의 노르만 군주를 통해서 왕국을 남쪽으로 향해 확대했다. 1194년 팔레즈모라는 지방에서 즉위했다. 그의 통치지배는 이태리 남쪽 끝에서 북쪽과 동해까지 이르렀다.
그의 개인적인 권력의 절정에서 그리고 슈타우펜 독일의 황제의 절정기에 하인리히 6세는 32살로 십자군 원정 바로 전에 메시나 지방에서 죽어버렸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죽음이 특별히 어려움이 되었다. 왕국의 후계는 3살짜리 아이다. 그 아이는 왕으로 선출되기는 했지만 즉위는 못했다. 이미 프리드리히 바바로사와 하인리히 6세도 강한 영주 가문 중에 벨펜 가문과 심한 투쟁을 했다. 이제 지도자적인 강한 손이 없었기 때문에 슈타우펜가문과 베펜 사이의 대립이 정치의 전면에 부각되었다.
다음 20세기 동안 독일은 슈타우펜 가문과 베펜가문의 국가의 권력에 대한 싸움이 있었다. 때로는 젊은 시칠리아의 어린왕과 더불어 11가문 왕 필립과 벨펜가문의 오토, 두 사람의 왕이 더 있게끔 했다. 독일은 독일 내부에서의 권력 다툼은 중앙집권적의 약화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교황과 이웃나라의 정치적 관심에 놓였다. 1208년에야 비로소 슈타우프 가문 왕의 필립이 살해되었고 벨펜의 가문의 다른 황제는 영국과 결탁하고 교황은 동의 했다. 황제는 하인리히 6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를 1215년에 독일 황제에 즉위했다.
중세에 가장 유명한 시인 중에 한 사람인 발철 폰 데어 포겔바이데는 정치적 시인이고 예언적 현자였다. 그의 노래들은 우리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에 속한다. 그는 이제 정치적인 모토를 쓰기도 했다. 그는 많은 지방영주들의 싸움이 왕국을 내적 외적으로 양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교황도 슈타우퍼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그는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이용했다. 발터는 위대한 호소문에서 영주들의 간계와 교황의 정치적 세력을 막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지적이고 혈기왕성한 군주였다. 그의 전쟁에서 그는 시칠리아 왕국과 이탈리아의 재건에 헌신했다. 여기에서 그는 통치기간의 40년 동안에 관리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그의 시대 동안 현대적인 중앙국가 시대를 창설했다. 그는 봉건 땅의 소유 하는 귀족과 맞서도록 신흥 부르주아를 도와주었고 유럽에 처음으로 성문법을 만들도록 했다. 그는 팔레르모라는 지명에 있는 궁궐에서 모았다. 가장 훌륭한 아랍인, 그리스인, 유대인 학자를 모아 나폴리의 대학을 만들었다.
단지 2번만 방문한 독일을 그는 시칠리아 이탈리아에서의 정치와는 반대로 수공업과 무역장사를 통해서 점점 더 세력화 되고 있는 도시들과 대항하기 위해 지방영주들에게 대항해서 독자성을 부여하도록 통치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들과의 관계는 통치 못했다. 그는 왕국에 대해서 권력에 대한 요구를 인정하지 않았고 독실한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새로운 프랜치스카와 도미니카 교의에 대중들에게 황제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신앙의 흐름에 대해서 적은 타협을 가졌다. 프리드리히 2세는 2번이나 교황들로부터 파문을 받았다. 그것이 직위에 대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 1245년에 교황은 그를 이교도적인 태도 때문에 황제로써 박탈했다. 그리고 새로운 왕을 선출했다. 이 왕은 프리드리히가 살 동안에는 아무 힘도 없었다. 그 프리드리히 2세는 56살로 루어에서 이질로 갑자기 죽었다.
프리드리히 2세 통치기간은 프리드리히 1세의 통치기간과 함께 전설과 설화가 되었다. 두 황제의 삶을 사람들은 전설 속에서 키포호이저 산속에서 제국의 위대한 상징으로 계속 살아가는 하나의 형상을 융화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 죽음 이후 20년 동안에 즉 황제가 없는 시대, 끔찍한 시대인 정치 공백기간이 시작되었다. 권력이 효력이 없었고 실권도 없었다. 그것은 자유재량과 강한 자들의 완력이 지배했다. 왕국은 계속해서 붕괴되었고 지방영주들은 그들의 나라를 확대하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다. 슈타우프 가문 사람들은 이러한 발전의 희생물이 되었다. 마지막 슈타우퍼 가문의 콘라딘은 1268년에 그의 반대세력으로부터 나폴리에 있는 광장에서 공식적으로 사형을 당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지난 백 년을 돌아보자. 슈타우펜왕가의 통치아래에 유럽에서 신성로마 제국으로 지배하는 지위였다. 이 왕국은 초국가적이었고 당시 보편적인 영토였다. 이 왕국에 교황과 그들을 대항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서양을 인도하기도 하고 이끌기도 했다. 그들 내부 구조는 그러나 미래적이지 못했다. 이 왕국은 봉건적 구조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 까닭에 항상 황제의 중앙집권적인 권력과 지역 세력 사이 그리고 부유한 시민계급과 점차적으로 가난해지는 작은 지방영주에게 강력하게 되는 정치적으로 사회적 기장이 극복되어 지지 못할 수 밖에 없었다. 황제의 통치 정부는 지속적으로 한 왕국의 손에 성공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고 영주들의 선택 시스템으로 기능적으로 좋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에 이르게 되었다. 그 밖에도 민족국가의 이념이 신성로마제국의 보편적 이념처럼 강했다. 거기다가 신성로마제국에도 권력다툼이 황제와 교황 사이에 매우 세속적으로 나타났다.
슈타우펜 가문시대의 100년 동안에 독일 내에서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기사계급은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지배했었다. 그러나 부유한 시민계급이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같이 돈이 많은 부작 똑같이 굉장한 자의식으로 이르게 되어서 요구를 했고 자신의 권리를 갈망했다. 귀족과 부유한 시민들은 영국에서 국왕에게 1215년 마그나카르타라고 잘 알려진 문서화된 권리를 쟁취했다. 독일에서는 아직 거기까지 못 갔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13세기 중반 경에 기사와 자그마한 지방영주가 시민들에 대해서 장차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1250년에 고딕이 독일에서 완성되었다. 고딕은 교회창문들에 뾰족한 아치와 교회 방들의 둥근 천장을 의미한다. 고딕은 전반적인 사상과는 달리 새로운 건축 양식은 단지 아니었고 새로운 예술과 삶의 양식에 산출해냈다.
이 시대의 교회양식들은 높고 밝았다. 그것들은 유리에 그린 그림을 가진 큰 창문을 가지고 있다. 형상들은 정말로 조형적이다. 그것들은 개인적인 표정뿐 아니라 몸뚱어리도 실제의 이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몸뚱어리는 르네상스처럼 똑같지는 않았지만 들어있긴 하다. 고딕의 건설적 경향은 수직적이다. 모든 선은 위쪽으로 향해있다.
이는 프랑스보다 더 강한 경향이다. 사람들은 크고 쭉 뻗은 기둥, 높은 천정, 길고 밑으로 늘어진 창문에서 탑에서도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로마틱한 육중한 벽은 볼 수 없고 많은 실질적인 구조를 감추고 있는 수직의 선을 볼 수 있다. 건물의 몸체는 떠다니는 것처럼 된다. 외부적으로 교회는 이제 조형적인 것으로 장식되어 있다. 민족, 즉 교구에 있는 민중은 지금까지보다 더 성모마리아 숭배로 인한 새로운 형식인 신에게 예배한다.
수백 년의 이 철학은 스콜라 철학이다. 이 사상은 커다란 철학적 체계를 발전시켰고 고대이념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그리스도적 사상과 결합시키려고 했다. 고대 이념은 아라비아와 유대인 철학자를 통해 유럽으로 도입된다. 스콜라 철학은 철학적인 신들의 존재 증명을 초래하려고 시도했다. 스콜라 철학의 합리적 구조는 파리의 대성당, 수많은 형상, 양각, 그림의 유리를 가진 상이한 건축양식과 일치한다. 스콜라 철학은 파리대학에 중심을 두고 있다. 독일에서 스콜라 철학은 13세기 말에 끝나고 형이상학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방향을 잡은 신비주의가 점점 더 변화가 되고 결국 쪽겨났다.
대중들은 도시에서 고딕의 정신에 의해서 새로운 거대한 교회민중을 위한 프란치스카너와 도미니카너 수도원의 교회가 되고, 십자군 원정에 의하여 실질적인 삶으로 깨우쳐졌다. 기사도적인 서사시가 이미 시민적인 특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시타우퍼 가문시대의 수백 년은 싸움과 제국에서의 세력을 얻기 위한 전쟁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칼 대제가 창조한 중세의 제국이념의 절정이기도 했다. 이 시기 예술과 학문은 높은 발전을 했다. 프랑스의 건축대가가 중세적 삶의 경험과 인식에서 예술적 작품을 조각한 것을 볼프람이 그의 파르지알에서 단어로 나타내려고 했다. 아직은 유럽이 분열되지 않고 정신적으로는 많은 것에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이 이상 되지 못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단테는 1265년에 태어났고 그의 디비나 코메디아로 중세의 정신적인 것에 절정이 되었고 동시에 미래지향적이다.
후기 독일 역사에 있어서 사람들은 늘 되풀이 해서 일면은 동경에 가득한 낭만주의적이고 일면은 체념적인 감상적이다. 이러한 슈타우펜 가문의 왕정시대를 뒤돌아 본다. 사람들이 대부분, 이러한 슈타우펜 황제국가의 왕조는 내적으로 충분하게 강하지 못했고 미래지향적으로 까지 작용할 수 있도록 잊어버렸다.
그래서 1250년과 1273년 사이에 독일 영주들은 한 사람의 황제에 제국을 함께 아우르는 일치하는 일이 불가능 해 가능하지 못했다. 그들은 힘센 자를 자신들의 서열에서 강한 자를 안뽑으려했다. 교황도 슈타우퍼 가문의 사람들을 후계자 하는 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시도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의 민족국가의 발전을 착수하려고 막 시작하고 있었고 내적 싸움에 열중하고 있는 독일을 바라보는 것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이러하다 보니까 마침내 1273년에 71명의 독일에 있는 선 제후들은 오스트리아의 공작인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를 왕으로 뽑았다. 그 당시에는 7명의 선 제후가 있었는데 세 사람은 주교출신이고 네 사람은 세속 출신이었다. 이 사람들은 선 제후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왕을 고를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 제후들의 선택은 누구나 민주적인 다수결하고 비교해선 안 된다. 이러한 7명의 선 제후들은 그 당시 독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영주들이었다. 이론적으로는 그들이 그들 서열에서 한 사람을 왕으로 선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중 하나가 다른 사람들 영주들 보다 더 많은 세력을 가졌다. 그 밖에도 선출된 왕이자 황제는 그가 통기기간 동안에는 그의 아들을 후계자로 즉위되었다. 그럼으로써 선 제후들에게는 선택의 실질적인 결정권을 빼앗았다. 그것은 다수결원칙에 의해서 개별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ㄷ욱이 그 중에 더군다나 소수가 그들의 후보를 대항하는 왕을 선출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선 제후들은 실질적으로 선거 전에 한 사람의 후보자에게 의견 일치를 봤다. 또 하나의 특징은 물론 좀 약하고 위험하지 않은 후보자를 뽑는데 서로 합의 하기도 했다. 이 후보에게 그들은 그가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한 힘이 없는 영주가 선출되면 그의 첫 번째 노력은 선 제후에 대한 개인적인 세력을 강하게 했다. 왕이나 황제로서 실제로는 단지 세력만 갖고 있었을 때처럼 만약 왕으로써가 아니라 영주일 때는 그러니까 왕이 아니었을 때는 충분한 땅과 사람과 돈을 소유 소유했다. 황제로써 그는 가난했고 점점 더 가난해졌다. 그는 그의선출권을 사들인다. 그는 봉토와 공물 세에 영주들로 하여금 황제와 국가에 대하여 면제를 해줬다.
신성 로마제국이 수세기 후에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독일의 황제도 짤막한 전쟁을 통하기도 해 독일 내에서 만 그의 세력을 주장하고 확장하는 일을 했다. 선 제후에 의하여 선택된 왕 모두는 선출된 뒤 즉시 독일 내에서 자신의 소유를 늘리기만 했다. 그는 후계자가 없거나 죽었을 때 영주에 대하여 결혼정책을 통하기도 하고 짤막한 전쟁을 통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을 가세정책이라고 불린다. 이 이기적인 왕들의 정책은 영주들의 정책에 불가피하게 생기게 된다. 그들은 당연히 제국 정치의 약화와 혼란을 결과로 초래해야만 했다.
왕들은 지방자치구에 대항하는 도시들을 후원했다. 그 도시들은 부유했고 그는 그들의 돈이 필요했다. 지방영주들도 마찬가지고 도시의 돈이 필요했고 그런 이유로 황제와 도시에 싸웠다. 그것에 향하여 방어로 도시들은 스스로 함께 연합을 하였다. 동시에 기사들은 점점 더 가난해졌다. 자주 도둑기사가 되었다. 그들은 여행하는 상인에서 그들의 시민들로부터 약탈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신비주의가 내적, 외적인 약화와 위기 독일 내에서 생성되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교황과 황제들의 싸움이거나 황제와 영주들 사이의 싸움에서 세속적인 싸움에서 외면해 버렸다. 이 사람들은 영혼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했고 신과의 영혼의 일치를 주장했다. 자기 영혼을 신에게 바치는 것과 일상적인 삶과는 그것과는 강하게 거리감을 두는 것 그러한 것에서 개인의 새로운 삶의 과제를 보았다. 가장 위대한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게 하르트는 이러한 경향을 보다 더 철학적이고 사변적으로 바꼈다. 그는 물론 스콜라 철학도 알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잘 알았다. 이 시대의 수녀원에서 신비주의는 열광적이고 비합리적이었다. 영혼들은 크리스트교의 신부가 되었다. 대중에게는 종종 신앙적인 커다란 고난의 행렬에서는 대중의 히스테리 상태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는 독일 정신사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나중의 종교개혁을 위한 신앙적인 뿌리를 여기서 작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가 처음으로 각각의 개인을 혼자서 신에게 다가가도록 한다. 그래서 신비주의를 발전시킨 에케하르트가 이교도로 의심을 받았다. 후기 독일 철학의 큰 흐름은 초월성,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이다. 이러한 것들이 신비주의에서 출발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능수 능란한 결혼정책을 통하여 강하게 된 이후 선 제후들은 다른 힘없는 영주 하인리히를 왕으로 뽑았다. 새로 뽑힌 왕 하인리히 7세는 옛 제국의 권한 교황 위 의해서 북 이탈리아에 관찰하기 위해서 이탈리아의 원정을 했다. 이러한 시도가 완전히 실패했다. 이때부터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에서는 전혀 실권을 쥐지 못한 독일민족의 장식품에 불과 했다.
1347년에 룩셈부르크 가문의 칼 4세는 독일의 왕이 되었고 1355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와 더불어 독일의 황제국가는 또 한번 짧은 번창 기를 가졌다. 이미 미래 지향적인 번창을 겸했다. 칼 4세는 동시에 뵈멘 지방의 동시대 왕이 되었다. 프라하지방에 1348년에 파리의 본을 따서 독일 대학을 세웠다. 곧 이어서 하이델 베르크 대학과 에어푸르트 대학이 세워졌다. 도시에서는 서민들의 자제를 위한 점점 더 많이 학교가 생겨났다. 그래서 프라하는 대학과 더불어 그 당시 독일의 국가에서 정신점의 삶의 구심점이 되었다.
똑 같은 시대에 프라하와 다른 제국 도시 들에 있어서 새로운 교회가 생겨났고 시청도 생겨났다. 국가 내의 도시는 그들의 지역 내에 있더라도 영주에게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국가 내의 도시는 영주로부터 자유로웠고 단지 황제 한테만 지불하였다. 독일에서는 그 도시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부유한 많은 자유로운 국가도시들이 있었다. 그 도시 안에서 시민문화가 시작되었고 자치적 행정의 시작이 발생하였고 중세의 경제적인 생활이 번창했다. 상이한 도시들이 지방 영주들에 대해서 보호하기 위해 매우 자주 서로 뭉쳤다. 종종 그들은 주위에 놓여있는 마을들을 그들의 세력에 끌어들여 포위될 때 많은 먹을 것과 많은 힘을 방어하기 위해 갖도록 시도했다. 칼 4세는 이러한 어려운 국가적인 상황을 가볍게 하기 위해 개혁을 하나 도입했다. 이 개혁에 의해서 선 제후들이 왕을 다수결 원칙에 의해서 뽑도록 하는 황금칙령이라 불렀다. 그래서 제후들은 자기 영역에서 독자적이 었다. 동시에 그들은 요즘의 상원에 비교할 수 있는 소위 제국 의회를 만들기도 했다. 칼 4세는 지방 영주들에게는 도시연합을 금지시키기 위해 도시들의 성장하는 세력에 대한 승인을 했다. 도시들의 제정적 도움 없이 왕은 지방영주들에 조금 맞서는 군사행동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또다시 도시 연합이 생겨났다.
이 명성을 떨치고 힘있는 연합을 한자라고 불렀다. 한자는 북 독일에서의 도시연합인데 14세기에는 거의 모든 서부 도시들에도 여기에 속했다. 그 한자 동맹의 중심지가 동해에 있는 항구도시인 뤼벡이었다. 한자는 일시적으로 매우 강해서 동해 전역을 지배하고 혼자서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한자동맹은 국가적인 영국, 스웨덴, 벨기에와 러시아에 무역지구를 두었다. 국가적인 도움 없이는 신생 민족국가에 대하여 저항 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한자 동맹의 도시에서는 초기 자본주의 적인 화폐경제뿐 아니라 자신에 찬 점점 강화되는 시민이 형성되었다. 기사들의 중세적인 민네장은 도시에서는 이제 독자층이 없어졌다. 14세기와 15세기 초반에 성직자의 신비적인 문학과 더불어 시민문학도 생겨났다. 그와 더불어 연극도 생겨났다. 이미 12, 13세기 교회가 성경을 대중화 시작했고 특별한 축제일 즉 성탄절에 몇몇 교회에서 특정한 장면,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승려들로 하여금 나타내도록 시작했다. 이러한 연극은 큰 반향을 얻었다. 전 그리스도 수난사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상연하기 시작했다. 후기 중세의 대규모 수난사는 여러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연기자들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미 칼 4세의 치하에서 휴머니즘에 현재덕인 이념이 이탈리아에서 비롯되어서 처음으로 독일에서도 나타났다. 칼 4세는 이탈리아 시인인 페트라르카와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보카치오는 독일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1400년대에 초기 휴머니즘 문학인 뵈멘지방의 아크만이라는 작품이 나타났다. 이 문학의 형식은 전통적이긴 하지만 보카치오의 단편들과 비교하면 전통적이다. 문학의 정신은 새로운 것이다. 홀아비와 죽음 사이의 벌어지는 논쟁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은 중세적이다. 홀아비가 하나님을 발견하기 때문에 아직 중세적이다. 그러나 죽음과의 논쟁자체가 이미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의미에 대한 의문을 나타낸다.
점점 더 강하게 자연과학에 대한 흥미가 강해졌다. 후기 스콜라 학파의 철학자 니콜라우스는 스콜라 철학과 신 플라톤 적인 의미를 결합시키려 했다. 그는 수학적이고 자연과학적인 관심을 가지려고 했다. 그는 이미 자국의 자전을 이미 알았다. 이것은 100년 후에야 태양중심적인 세계상에 대한 대 반전을 이끌어 내게 되었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자전을 이미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휴머니즘 영향은 미묘했다. 15세기에 있어서 이탈리아에서는 휴머니즘과 르네상스가 활짝 꽃피는 동안에 독일에서는 넓은 충의 대중들이 다른 문학에게서 활동하고 있었다. 고딕양식과 더불어 기독교의 대중화가 민중들에 있어서 시작된 이래로 신비주의가 종교적인 느낌에 대한 대변화가 이래로 클레루스는 성직자와 교회는 세력정치에 빠지게 되었다. 세력정치를 함으로써 성직자와 교회는 성경의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이미 14세기에 개혁을 부르짓는 목소리가 있었다. 체코의 신학 석사의 후스가 프라하 대학에서 한 운동은 새롭고 커다란 힘을 갖게 되었다. 후스는 교회의 가난한해야하고 평민들도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의 학설은 체코 귀족들의 민족적인 경향과 맞아 떨어졌다. 귀족들은 독일의 우선권에 대하여 항거해왔다. 그 종교회의에 후스가 불려나갔다. 이 종교회의에서 교회는 개혁을 준비해나갔다. 아무도 개혁을 동의하지 않아 후스는 1415년 이도교로 화형 당했다. 수십 년 지속되는 전쟁이 독일 황제임과 동시에 체코 베엔의 왕인 버머와 후스의 체코의 지방 귀족에 의해 이끌어지는 후스이 지지자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후스파들의 억압으로 끝났다. 룸셈부르크 황제의 가세가 약해졌다. 그리고 체코지방 귀족의 승리로 끝났다. 대부분 독일 사람들은 다른 데로 떠났다. 그래서 독일인 들의 프라하에 있었던 교수가 라이프치히에서 대학을 창설했다.
교회의 개혁에 대한 부르짓음은 더 이상 침묵을 하지 않았다. 휴머니즘과 르네상스의 정신도 멈추지 않았다. 중세가 마지막을 달했다. 이때 에 요한 구텐 베르크가 마인츠에서 인쇄술을 발명했다. 바로 이 점을 통해서 비로소 새로운 이념, 사상들을 멈추지 않고 전파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기술적인 발명이 이러한 정신의 실질적인 날개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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