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철학 - 사상과 그 원천 : 서동욱 : 민음사 리뷰~~

2011. 6. 28. 20:44Literatur/English

반응형
 이 책을 가지고 강의한 수업을 토대로 쓴 글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의 개념을 생각해보자. 질료는 재료이며, 형상은 재료를 가지고 형상부리로 사람을 만든다. 영혼이 되돌아 온다는 것은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차이들에 의해 되돌아 온다고 했다. 이 세상의 존재는 프라톤의 이데아에 따르면 어떤 결과는 모방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내려와 창조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오차적으로는 복사다. 저 멀리 이념이 있는 것이다. 인신록에서는 인간은 개념화 한다고 하였다ㅓ. 존재자들의 존재란 존재의 본질은 존재자들의 본질이다. 초원적인 것은 이데아이며 형상이다. 데리다는 이를 배격한다. 차이를 그 이념이며 차이 그 자체가 차이보다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신의 형상과 인간들의 형상 사이에는 초월이 있다. 저건 나무다 라고 안보고 말 할 수는 없다. 지각을 한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다. 개념을 만든다. 이는 보고 아는 것이다. 존재라는 것은 기원, 동일성, 근원이다. 니체는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차이로 돌안온다고 했다. 예컨데, DNA와 DNA가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DNA를 창조하지만 이 DNA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차이들 밖에 없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있다와 없다의 구분이 없다. 공에서 시가해서 공으로끝난다. 다만 그것의 형식은 존재하너다. 영원한 것은 있다. 실체는 없다. 그러나 형식은 있다. 감각도 중요하다. 거시적 지각과 미시적 지각이 있다. 배고픔을 느끼고 배고픔을 안다. 그러나 미시적으로는 배고픔이 느끼기 직전에 이미 배고픔을 몸은 알고 있다. 이는 외연적 크기와 강조적 크기로 설명된다. 강도적 크기는 좀더 쉬운 예를 들자면 설탕을 넣어도 처음에는 모르다가 자꾸 넣다보면 어느센가 느껴진다. 그 어떤 최대한 긴장하는 본질 그 장소는 0에 근접한 놀이와 유희에 가깝다. 모든 삶 , 즉 본질은 End game 이다. 시작되고 끝나고 다시 끝나고 시작된다. 유령이다. 강도적 크기의 출현으로 삶을 보면 힘의 출현은 시시각각 변이하고 변화하는 연속체다.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삶에 대하여 선, 악에 대한 판단기준은 없다. 예를들어 재판을 하는데 반성문을 쓴다. 잉여 쾌락이 발생한다. 재판은 단지 판결의 권리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강도적 크기의 판단기준은 +-다. 강도기준에 따라 0과 이것이 결정된다. 서정적인 개념과 발생이 아니라 차이들 사이의 상호규정에서 앞의 일에 대해 크거나 작거나 하는 것이다. 배고픈거에 비하면 그 이전에 배고픈것과 비교하면 별거아니다. 이는 이전과 이후가 공존한다. 서로 이전의 배고픔과 이후의 배고픔이 서로 비교 차이가 발생하면서 결정된다. 원인에서 결과는 인간이다. 신은 초월하고 인간은 결과물이다. 이들은 내재적인 것이 된다. 대상의 힘은 시시각각 변화를 말한다. 양태는 존재하는 것이다. 소산이란 생산된 것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다가 나는 의심할 수 없다라고 한다. 존재론에서 본질적 물음은 나는 누구냐? 이다. 대상의 힘의 출현 뿐 아니라 주체도 관점이 바뀐다. 대상이 어떤 형태를 정의하지는 않는다. 이미 이렇게 되넋은 형성되는 과정, 즉 힘의 발생에 의해서 생긴다. 단지 실재를 대상으로 바라보는게 아니다. 대상을 힘의 출현으로 본다. 고정된 어떤 형태를 시간을 주입하면 그 고정된 형태는 변할 수 밖에없다. 수간과정들의 규정들이 들어 있다. 생성과정으로 보는 차이는 오이디푸스와 대립되는 내용이다. 무의식은 미세지각으로 있다가 거시적 지각으로 드러난다. 순수지각과 수수한 정서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순수지각은 의식은 못하지만 초록에 존재있게 하는 것은 노랑과 파랑이다. 감성의 중요이다. 모든 경험상의 지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환각적이다. 라이프니츠는 환각에서는 현존한다고 했다. 예를들어, 고집하지 마라 확신하는데 아닐 수 있다. 조심해라. 원래 아줌마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 경험되는 것은 분잦적 감각 지각 뿐이다. 겉모습 몇번 만 알고 판단하면 안된다. 지각하는거에 오히려 본질적이다. 지각 불가능 하게 되기와 같다. 두힘의 조우가 잘 드러나는 백경을 보자. 선장과 모비딕이 맞 붙으면서 외적 지각 불가능한 생성이 일어난다. 생성의 모든 과정 힌들과 힘들의 만남과 조우는 거기서 생겨나는 생성이 있다. 미시적 지각들의 생성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다. 재현적 모방 즉 미메시스는 상상적이고 동일시는 아니다. 선장인지 모비딕인지 식별 불가능한 대도 들어간다. 고래에게 작살을 던진 것은 자신에게 던진 것이나 다를바 없다. 선장이 동물에 속박되지만 동물 또한 다른 것이 된다. 지각과 정서에서 우리가 인간적 혹은 고래적 차원에서 지각 할수 없는 순수한 흰색이었다. 바로 그 고비는 별이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고래가 사람, 사람이 고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각가의 힘은 다른 하나를 조우한다. 그들 사이 또는 그 둘 밖의 어떤 무엇이다. 이 무엇은 순수한 정서이며, 지각이다. 비개인적인 것이고 변별적인 관계들, 덩어리들이다. 이는 주관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이념차원은 시간 공존의 차원이다. 모든 요소있고 변별적 관계도 있고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6시와 7시는 변별적 관계에 의해서 경험가능한 잠재성이 있는 것이다. 경험 차원은 현실태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반복할 수 있다. 복사는 차이에서 나온다. 이를 니체적 차이라고 한다. 이념적 시간은 과거, 연체, 미래이다. 하나의 고정된 주체는 없고 우발적으로 변동한다. 대상은 본질적 형상은 아니라, 순수한 감수성에 얻게된다. 연속체다. 무지개는 여러색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합치게 되면 빛은 희색이고 물감은 검은색으로 된다. 그속에 무지개 여러개 색이 담겨 있다. 차이자체란 무지개 색깔 하나 하나가 차이들이다. 차이들이 모여서 무엇을 만든다. 이 무엇은 선험적 조건속에서 차이를 생산하는 것이다. 
 트라우마 구성하는 사건들도 차이들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정리가 가능하다. 텅빈 구멍으로서의 모든 것들을 넣는 무의식들의 흔적이다. 따라서 하나가 아닌 둘이상의 차이들로서 계열과 의미가 발생된다. 한번도 현존한 적 없는 과거를 순수과거라고 한다. 현재라는 선속에 있는 그 지점이 과거의 덩어리다. 과거 없이는 현재가 없다. 현재가 지나가기 위해선 과거가 있어야 한다. 사건이 기원적이라면 시간순이다. 이와 상반되게 사후적이라는 것은 과거는 정말 현존했던건가?에 대한 의문이다. 모든 사건들과 뒤섞여서 현상 혹은 양태를 만들어 낸다. 원초적 사건인거 같으나 사건이 없이는 의미가 즉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는다. 사후성의 논리에서 트라우마는 차이들을 낳는 혹은 발생기키는 그 차이 그 자체다. 내용은 없는 형식은 원초적 사건과 기원에 반대되는 논리다. 그 시간이다. 차이들이 현실화된다. 이념적 시간인 중간 휴지의 시간은 현실적 시간 혹은 전후관계와는 상반된다. 엘리스의 이야기에서 선험적 근거로서의 차이 즉 시간 전후가 흔들린 상태를 설명할 수 있다. 엘리스가 커졌을 때, 이전의 작은 엘리스를 떠올려야 자신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어두운 전조가 자이 자체다. 차이라는 것들 끼리 계열을 이루고 뒤늦게 본질이 끼어들어 어두운 전조를 있게 한다. 차이들이란 현실화는 되지 않지만 초월적 근원이 된다. 이상한 나라 엘리스에서 차이의 관점은 커졌다와 작아졌다이다. 작고 큰것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끊임 없이 작아진다면 작은것은 큰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사후성 논리가 의존하는 것이다. 이는 억압적이다. 과거의 원한에 사로잡혀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은 망각으로서 나아간다. 사후성의 논리는 부정된다. 힘의 보다 긍정적인 의지는 생산하려는 욕망이다. 들뢰즈와 니체의 이론이다. 초월인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로잡혀 있으면 재 활동이 된다. 억압된다. 미래를 생산하지 못한다. 기표의 기의는 끊임없이 생산한다. 많은 낱말 들이 대리보충된다. 이를 차연이라한다. 이 흔정과 지연이 있음에 근원적 의미를 지닌 절대적 기표가 아니라 끊임없는 연쇄와 글쓰기 보충이 있는 것이다.
 잠재적 차원에서는 차이가 공존한다. 태어나기전 잠재적 차원에서 포기한 것이다. 본질의 세계다. 현상적 세계가 아닌 영원한 본질의 세계 그속에서 나는 나의 아버지였고 나는 나의 아들이었다가 된다. 작가의 본질은 사실성이었다. 그러나 베켓의 이미지 출현은 힘의 출현에서의 대상이 된다. 욕망하는 생산은 힘의 의지인것이다.생산하는 자연은 속성들의 일의성으로 생산되는 자연이 된다. 본질은 내재해있다.영혼회귀는 함의 의지다. 생성만이 존재함을 긍정한다. 내재성과 초재적은 상반된다. 존재는 일의적이다.
 말하는 주체와 말해진 것 안에서의 나 즉 주체는 언표하는 주체가 언표의 주체를 말한다. 어떤 한 개인이 발화한다 하더라도 사회의 집단적 발화가 있다. 카프카의 작품은 파시스트, 전체주의 속에서 두욕망의 동시 존재하였다.  분열증적 욕망은 탈주하려 한다. 편집증적 욕망은 이것으로 부터 탈영토화한다. 스피노자는 행하는 그가 정당화 된다고 했다. 그라는 것은 신이 아닌 다른 신 혹은 우리 스스로를 말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를 일끌어가고 생산한다. 결여는 단순 결여가 아니라 범신론적 사고의 스피노자적 해석이다. 분열증적 욕망들이 자리잡고 있다. 애초에 욕망하지만 발화 될 수 없는것. 따라서 대체물을 찾아서 욕망을 찾는다. 끊임없이 연쇄될 뿐이다. 충족되면 다시 부족된 것을 찾기 시작한다. 결핍은 계속 결핍의 반복이다. 태어난 존재의 이유는 내가 하고 있는게 아니라 당하고 있는 것이다. 희극에서 반복적인 대사 그 자체가 만족이다. 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존재 그자체 근원적 결핍이다. 이는 애초의 결여다. 왜냐면 궁극적 목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상 a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욕망의 기계의 본질은 힘이다. 생명은 곧 기계이며 들어오면 빠는 것이다. 신의 의지를 배재하고 운명을 배재한 것이 기계다. 편집증적 법 없이 사회는 없다. 욕망하는 기계는 생산하는 경제 형태를 지닌다. 힘의 변용은 리비도다. 연결로서 종합의 형식을 이어나간다. 스피노자의 개념은 속석이며 라캉의 부분 충동이라 할 수 있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등록을 하는 경제 형태를 취하지만, 리비도가 부분 변모하여 누멘이 된다. 그리고 속성이 분리하여 이접이 된다. 실체라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 이는 칸트의 실재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독신 기계는 소비를 하며 기관없는 신체의 일부분인 볼룹타스가 힘의 변용이다. 연접을 하고 계속적인 변용들 즉 되기의 과정으로 양태한다. 분열증적 주체와 부분적 주체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다 의 계속적, 횡단적 연접인 것이다. 참된 욕망은 분열증적 욕망이다. 베켓은 삶 그자체가 End game이라고 했다. 근본적으로 Endgame은 다른 것으로서의 다른 Endgame으로의 과정이다. 계속적인 흐름 속에서 주체가 그때 그때 출현하여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분열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거짓말을 통해서 진리를 찾는다. 기호를 하여금 대상을 다가가게 하는 이미지다. 아직은 모르는 상태에서 경험을 통해 아는 것. 사유의 양태는 무의식이다. 사유의 자동기계는 우리의 의식을 뛰어넘는 부분이 사유다. 사유의 양태에 관한 부분이다. 완전성과 기쁨을 위한 결합의 철학. 그것이 바로 우리가 초월하려는 그 철학인 것이다.
 
반응형

'Literatur > English'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미국희곡 연구 강의록 1  (0) 2011.07.03
들뢰즈의 비판적, 임상적 에세이들 리뷰  (0) 2011.06.30
Deutsche als Vergangenheit 번역자료  (0) 2010.12.18
English Letter Practice  (0) 2010.11.30
Verb Phrase 2  (1) 2010.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