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국희곡 연구 강의록 1

2011. 7. 3. 23:45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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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의 비미학
 연극 이념은 나름의 진리가 존재한다. 충격을 받으로 연극을 보러간다.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관객은 교양을 얻어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잠겨 극장에 나간다. 진리는 복수다. 단수가 아니다. 즉, 불투명한 사건은 기존의 질서체계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하나의 진리는 억압적일 수 밖에 없다. 예컨데, 학교 개구멍은 결국 학교 행정과 학생간의 서로 대립될 것이다. 결국은 길이된다. 끊임없이 매우고 뜷고를 반복하는 상황 속에서 말이다.
 소피스트는 괘면론자로서 주류사회의 담론에 끼어들지 못하는 자이다. 다른 지역 출신들로 기둥 밑에 앉아서 토론하는 주변부 사람들이다. 철학이 할 일은 철학 외부에서 과학, 예술,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는 것이다. 진리가 알수없는 사건으로서 진리가 되는 것이다. 혁신되 진리는 개구멍, 등산로이다. 하이데거의 숲길은 보편적으로 우리가 이끄는 길이다. 진리의 대한 사유는 진리에 대한 사건에 대한 사유다. 진리에 대한 주체에 대한 주체다. 사건과 진리에 대한 실천이 그 사유다. 해방은 개인에 대한 결단이다. 다양한 진리의 달이다.
 바디우의 수학의집합론에서, 새로운 진리를 기존의 진리는 당혹, 거부감, 불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새로운 진리는 저항적이고 도덕적이기 때문이다. 세계화된 세계, 하나의 세계, 이 모든 개별성을 하나로 인정한다. 하나의 그룹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존재의 형성과 비미학을 저술 했다.
 처음 프랑스 혁명은 불법이었으나 계속 장기화로 인해 합법이 된다. 후 사건적 실천을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였다. 충격이 주고 남은 이념의 흔적은 주체이다. 이 이념의 흔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념의 흔적을 기초해서 끝임없이 실천하여 진리에 도달하려 한다. 따라서 끊임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바로크 음악은 고전주의이고 보편적 흐름이었다. 그런데 낭만주의 음악이 보편화 진리화 되기 시작한다. 낭만주의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이고 농민적이었다. 저항적이었던 이 낭만주의도 훗날 다시, 신고전주의의 저항을 맞게 된다. 인정받고나면 하나의 정당성과 법칙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혁명과 기존질서에 대해 저항은 폭력이 발생될 것이다. 욕망의 조각들이라는 연극에서는 무대 안에서 주인공들이 영화를 본다. 이를 통해 상호스크린이 가능하다.
 연극은 철학 사상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비미학이라는 말 자체가 예술을 철학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루이스 이리가리의 하나이지 않는 성
 
하나이지 않는 성이라는 말에서 하나는 남성을 지칭한다. 남성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는 성이다. 남자들과 다름을 중시하는 것이 루이스 이라가리의 생각이다. 여성의 다성성을 주장한다. 작품 평가도 하나의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는 시각 정도로 해석 할 수 있겠다. 연봉제라는 것은 30~40 대에 맞춰줘있다. 그 이후의 나이를 위한 시스템이 아니다. 사람들의 인식이 노인들을 결국 무시하는 경향으로 이끈다. 신경증은 여자에게 남자로써의 삶을 강요하고 남자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 간다. 여자 자신이 무엇을 원하든지를 말하지도 알지도 모른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복수다. 하나는 남성적인 것이다. 남성의 시선에 의해서 말들어져 가는 여성 그리고 교환물로서 여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어느 원시인들이 가문끼리의 교환물로 여성을 사용하였다. 리얼리즘은 시작과 중간과 끝이 순환적이고 연속적이다. 루이스 이리가리의 목표는 여성이라는 존재를 어떤 맥락에서든지 정의할때 남성을 생략해도 존재 할 수 있는 것이다.

찰스 풀러의 어느 군인의 연극

 재현이라는 말은 하나이지 않는 목소리이다. 군대이야기, 부르스, 백인들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흑인 문화, 극이 존재 했었다. 흑인 문화가 백인 문화에서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흑인의 고통을 흑인 만이 가ㄴ지는 고통이 될 수 밖에 없으며, 흑인 음악은 결국 백인의 취향으로 나아간다. 이 극에는 큰 차이속에서 또 구별짓는 과정이 있다. 흑인들 사이에서도 흑인들 끼리 구별짓는 것이다. 차별하는 것이다. 조명은 분위기 역할을 한다. 이는 기억의 흐름을 상징한다. 인터뷰 방식을 이 극에서는 도입하였다. 부대는 루이지애나 주로 프랑스 계다. 독백 부분에서 데이비드는 살해 맡게된 독백을 보여주고 월터스는 인물대 대한 분석을 보여준다. 병영은 제한된 공간적 차별을 상징한다. KKK단은 애들렌타에 있다. 이 극은 백인이 흑인에 대한 차별로도 볼수 있지만, 핵심은 백인의 차별 속에서 다시 흑인과 흑인 사이의 구별짓기 즉 차별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르드외의 구별짓기
 공간지리와 상상적 지리도 구별짓기가 가능하다. 인식적 지도 그리기라고 한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지리와 공간에도 서로 무언가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마르크스의 자본 즉, 경제적 자본은 문화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이 합쳐진다고 했다. 부르드외의 구별짓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취향이다. 취향이라는 것 속에 계급이 들어있고 그 취향을 통해 구별짓기 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천부적으로 물려받은 이데올로기라고 했다. 서열화된 취향이 이미 우리들속에 알지 못하지만 있는 것이다. 문화, 자본, 사회, 상징적 자본들이 계급을 결정짓는다. 계급화된 것을 알게 모르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회적 배경이 중요하다. 상속자는 사회적 불평등을 생산한다. 습관화 되어버린 것은 하비투스라고 한다. 외부적인 사실을 실재를 내면화 시킨다. 그리고 잘난체한다. 밖으로는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리고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차별하게 되고, 여기서 구별짓기를 한다. 이는 보이지 않는 상징적 폭력을 자아낸다. 사회적 불평등은 그원적이다. 이는 교육기관이 자기논리를 합법화시키고 억압한다. 나와 너가 있는데, 내가 너에게 선물을 줬다고 하자. 그럼 너는 당연히 이 사실을 알게된다. 나도 알고 있고. 그리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다음의 어떤 답례에 대해서 서로 알면서 무한 반복으로 지내게 되는 것이다. 선물을 보답해야하는 이런 문화가 상존할 경우 생각해보자. 이것이 바로 상징적 폭력이다. 굉장히 부드러운 보이지 않는 억압적 폭력인 것이다. 백인 페미니스트는 흑인 여성을 도와주려하는 것 같지만, 이런 폭력이 생긴다는 것을 상기하자.
 하비투스는 외부에 있는 상황을 내면화시킨다. 이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여있다. 그리고 내부에 있는 상황을 외면화도 시킨다. 맛을 보면 계급이 보인다고 했다. 상류층의 삶에서 밖에 나가 티내는 것이 그 예다. 나와는 다른 외적인 것이 나를 영향을 준다. 이를 물적 토대라고 하는데, 즉 95%는 과거에 산다는 것이다. 구별짓기는 한마디로 티내기이며 상대방을 쟤보는 거다. 배웠으면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부르드외는 사회적으로 보았다고 보면된다. 문화와 취향이 사회학적인 것이다. 칸트는 스스로 판단하고 욕구하는 이성적인 존재를 인간이라고 보고 있으나, 부르드외는 취향에 대해서 즉 계급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판단한 다고 하였다. 자본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상징적이다. 하지만 이를 발견하기 힘들다. 따라서 비평이라는 것은, 이를 보여지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상징적 폭력 장소는 바로 학교다. 선생님 의도대로 학생은 따라야 시험 억압에 순응된다. 합법화하고 합리화한다. 수준 높은 시키는 것이 학교다. 끼리 끼리 모여서 그들만의 나름의 이유를 만든다. 미학이론도 차별하는 것이다.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모여든 이유는 차별짓기 위해서다. 구별짓기 위해서인 것이다.

마리아 포니스의 삶의 수행
 작가 포니스는 페미니즘의 고착화에 대해 비판한 인물이다. 물론 그녀는 페미니스트다. 여성 연극 위원회 결성하여 여성극 자체가 페미니즘의 시각에서만, 제도화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익순된 언어 이면에서 드러낸다. 관객에게 요구한다. 이 연극의 의도를 관객이 스스로 인식하게 만든다. 색감, 공간적 배경을 통해 충격의 요법을 이용한다. 일상의 비 일상화 시킨다. 현명하는 것을 의미하는게 무엇인가? 에 대해 예술이 가르친다고 생각했다. 올란도는 집착이 강한 인물이며 올림피아는 일에대한 힘이 강하며 일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다. 여성 해방을 위한 권력을 이 극에서는 찾는다. 이 극에서는 신여성에 대한 모델이 없다. 조지 버나드 쇼의 잔다르크 같은 것과 유사하다. 벗어나야 할 사람은 관객이다. 바꿀 수 있음에도 일상의 틀을 바꾸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들이 힘을 잡으면 이라는 가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예가 주인이 되는 것은, 이 극에서 올림피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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