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26. 00:00ㆍLiteratur/English
소포클레스의 이상 세계를 위한 통제 장치
박 형 락
Ⅰ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흐름도 한해 흘러 갈수록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유행은 반복되는 것이겠지만, 대중문화의 흐름만큼은 이 명언은 사용하기에는 너무 섣부를 발언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MC 체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상황 극을 펼치거나 공익을 기반으로 하는 감동의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가하면, 사실인지 아닌지 비판 없이 자신이 있었던 일들을 폭로하면서 서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토크쇼도 유행을 했었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개인의 사생활 뿐 아니라 진실과 거짓은 네티즌들의 수사망에서는 절대로 벗어 날 수 없기에 이전의 예능은 최소한, 거짓이라면 거짓이라는 상황을 강조하거나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소위 ‘리얼’을 표방해야만 한다. 그리고 항상 연출가는 대중과 소통하면서 그 비판이 고상하던 가볍던지 간에 무시할 수 없고 항상 제작하는데 긴장을 해야만 한다. 요즘, 예능 프로그램의 판도는 ‘리얼’ 그리고 ‘서바이버’ 로 함축할 수 있다. 국민 시청률을 보유하고 있는 『1박 2일』의 경우는 대본과 설정의 요소는 분명 있지만, 어떻게든 연출가의 구조를 벗어나려고 하고 그것을 표방한다. 그런데, 한국의 공영방송은 케이블에 비해 예능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특징이 있다. 바로, 공익성이다.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거나 지나치고 과장된 선정성은 배제시킨다는 점이다. 심지어 요즘 나오는 코미디 프로그램마저 하나정도는 사회를 풍자하거나 고상한 영역까지 건드리고 있다는 점, 문화방송의 김태호 연출자는 자막을 이용하여 웃긴 연출 속에 정치적 패러디를 집어넣고 있다. 최근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프로그램인 『나는 가수다』는 대중문화가 어떻게 고상함의 영역으로 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문학이라는 장르 안에서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것처럼, 대중문화 안에서 저급함과 고상함 사이를 네티즌 뿐 아니라 문화 평론가들 사이에서 설전을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유명한 사건 중 하나인, 옥주현과 김건모 사건이 그 하나의 예이다. 둘 다, 가수라는 영역에서 넘어서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심각한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영역에 대한 경계는 그 누구도 선을 그은 적이 없지만 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사건 이 후의 이야기다. 계속되는 언론플레이와 자막에서 말이다. 김영희 연출자는 김건모 사건 이후 재 경연 도중에, 손을 떠는 것을 기표로 내새우고 음악평론가의 그를 옹호하는 평을 내새웠다. 그 뒤, 대부분 김건모에 대한 심각한 논란이 사그라지게 되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 기표라는 것들, 즉 , 연출자의 의도된 기표가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간파되는 순간 비난이 생기는데, 이는 『스타킹』의 강호동에서 알 수 있다. 강호동은 소위말해서 억지감동이라는 코드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호불호 평을 받고 있다. 과장된 표현과 몸짓 그리고 웃음과 감동을 그는 이용한다. 그런 방식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대로 그의 웃음 속에 빨려드러가, 마치 진짜 그의 의도라는 환상에 빠져버리게 된다. 지금 현재 우리가 즐기고 있는 희극들이 먼 미래에는 어떻게 평가 받을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오락적인 대중문화는 시대를 거슬러 가면, 지금 우리의 고상함과 연결된다. 물론, 이런 고상함은 낭만주의 시대 때는 귀족의 전유물이었지만 말이다. 이 당시 희곡은 발전에 대한 논쟁으로 벌여질 수 있다. 대중 속에 많이 상연된 것과 대가가 써야하는 공연 사이에서 말이다. 고대 그리스 시절의 가장 유명했고 유행했던 문화는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고상하다는 철학자들과 문예 이론가들 사이에서 사용하고 있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통해, 그가 관객들에게 자신이 의도대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마련하는 무대 장치를 분석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가 사용하는 희곡 속에 존재하는 기표의 법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도록 하고, 이에 영향을 받은 현대 예술 희곡에 대해서도 언급하도록 하겠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장치들이 무대 밖을 벗어나 어떻게 영향을 끼치게 하는지 소포클레스의 생각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Ⅱ
교과서대로 그리스는 지정학상 지중해에 위치한 해상국이지만 산이 많이 도시 곳곳이 독립성이 강한 곳이다. 트로이 전쟁으로 이후 기근과 도리아인들의 침략으로 폴리스로서 간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금의 이란인 페르시아의 힘이 커지자 지중해의 세력을 놓고 폴리스는 연합을 구성하여 페르시아의 그리스 지중해 진출을 막아내게 된다. 여기서 아테네는 큰 성장을 하기 된다. 아테네는 재해 권을 가지고 다른 폴리스의 상업을 위협했다 (박현모 150). 결정적인 것은 바로 스파르타의 국내 문제에서 둘을 갈라놓게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승리 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동맹들은 이 기회로 확장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런데 스파르타에서는 국내의 문제가 심각했다. 바로 스파르타의 구조상, 헤일로타이라는 민족이자 노예들이 전체인구의 대다수였고 사실상 이들이 스파르타의 원주민이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이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통치를 하였는데 아테네를 따라 대외정책을 계속 펼치면 국내의 힘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골이 깊어질 때는 아테네이서 페리클레스가 집권했을 때부터다. 그는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고 추방된 헤일로타이 반란군을 받아들이면서 스파르타 동맹국인 코린토스를 견제한 것이다. 즉, 이는 스파르타를 견제하겠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것으로 27년간 전개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96년에서 406년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삶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함께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함으로써 사실상 아테네 뿐 아니라 그리스 전체가 쇠퇴를 맞게 된다. 아테네는 3자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오만했다고 한다. 특히, 델로스를 점령했을 때는 시민들을 전부 살해시키거나 노예로 팔았다고 한다. 그 뒤로부터 사실상 아테네는 몰락했다고 보면 된다. 이때가 전쟁 중반 무렵에 들어서면서 부터다. 제 2차 시칠리아 전투에서 스파르타 동맹에게 대패하게 된다. 펠로폰네스 전쟁사에서 큰 실수를 범한 것이다. 이때 소포클레스는 “국가적 위기에서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그의 국민적 신망과 권위가 필요” 로 국가최고위원이 되었다 (천병희 85). 그를 서술했던 여러 자료들을 나열해 보자면, 높은 관직에 자주 취임했고, 여러 왕들이 하는 초청에는 일절 응하지 않았고 (천병희 84), “애국심이 강하고 경건한 자로서 많은 업적을 이루어졌고” (전혜신 154), “신앙심이 두터웠다” (앙드레 보나르 151) 라고 적혀있다.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그는 실질적인 정치적인 능력은 없지만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는 선망을 받는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관직에 머물렀으며, 신앙심과 애국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어릴 적부터 코러스의 일원으로 합창 단원을 했었고 연극을 개회할 당시 상당히 파격적으로 코러스의 숫자를 늘렸다는 점이다. 그가 쓴 비극의 주요 배경은 특이하게도 테베로 되어 있다. 이 테베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와는 다른 행보로 갔던 도시이다. 아니, 페르시아와의 전쟁 때부터 아테네가 멸망할 때 까지 테베는 이리저리 기회를 엿보고 중립적인 행동을 취한 나라였다. 그러다가 친 스파르타 정책을 펼치기도 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에는 아테네를 끌어들여 스파르타를 침공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말년에 잡은 도시였다.
소포클레스의 대표 저작 『오이디푸스 왕』,『안티고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고민이 복합적으로 담겨있다. 신이 정해놓은 운명 속에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인간은 운명이라는 굴레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탈주하려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운명의 비극적 기제는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델포이 신전에 적혀있는 ‘너 누군지 아느냐?’ 라는 물음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고 의도적으로 의도한 것도 아닌데 신의 의도에 걸려, 이미 굴레 속에 억압되어 있는 그 압축되어진 기억들이 언젠가는 돌아와 버리면서 비극 되어져 버린다. 이러한 비극을 민주적 성향의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공연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에 따라, 소포클레스도 궁극적인 목표는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몰입이었다. 왜냐하면 비극 속에는 연민과 공포가 있기 때문이고 단순히 나만의 일이 아닌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벌여진 이 비극은 상당히 정치적이었음은 틀림없다. 아테네인 시민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관람이 가능했었다. 아테네의 정치 구조와 비극 상연 문화를 비교해 보면 그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민회나 법정 연설이 주로 교육받은 이를 중심으로 행해졌던데 비해서, 비극이 상연되던 극장은 상대적으로 보다 민주적” 이었으며, 민회보다 “비극은 거의 1/2의 시민이 참석하였다는 점에서도 극장의 흡인력이 더 강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최혜영 109). 따라서 비극은 오늘날 우리들이 대중매체를 접하고 서로 생각을 공유하는 장이었을 정도로 파급력이 있었다. 소포클레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만큼 정치적으로 영향을 가졌음은 틀림없다. 비극은 아테네에서는 상당히 정치성을 띄었다. “극이 상연되기를 원하는 작가들은 미리 그 대본을 아르콘에서 넘겨서 심사를 받아야 했다” (최혜영 110). 따라서 정치적 검열을 거쳐야지만 이 비극을 공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가들의 성향에 맞게끔 작성되어야만 했다. 극장은 “폴리스 정책의 효과적인 선전장” 이었다 (최혜영 110). 마치 히틀러가 연설할 때 고조되는 연극 같은 무대 장치 그리고 그 전에 있는 장엄하고 어마어마한 행진을 통해 비판 없는 민주적 군중 심리를 낳듯이, 이 연극이 행해지기 전 “아테네시가 제공한 병기로 중무장하여 행진해 들어오는 의식”을 치른다 (최혜영 111). 그리고 그 소포클레스의 비극 주 무대는 반 아테네의 성향을 지닌 테베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이전부터 점점 개혁되어 온 것이었지만 소포클레스가 코러스라는 기능을 잘 살린 인물 중 하나이다. 합창단 출신이었던 그는 극중에 갈등이 발생 시 코러스를 집어넣는다. 코러스는 『오이디푸스 왕』,『안티고네』에서는 테베의 연장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정되어 있고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콜로노스의 연장자로 구성되어있다. 세 작품 전부다 상당히 주관성이 강하다. 영웅을 찬양하기도 하고, 중간 중간 사건에 개입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한다. 즉, 이 극의 사건 전개를 코러스가 유도한다는 것이다.
코러스 : 오, 왕이시여! 이 일은 우리를 몹시 두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진 마십시오. 적어도 그 일을 목격한 사람으로부터 자세한 것을 알게 될 때 까지는. (소포클레스 54)
코러스는 마치 한 영웅을 찬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안위에 대해서 걱정하고 신에 대한 분노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작용하기에 신의 운명이 그대로 유지되어 진다. 오이디푸스가 갈등할 때 라이오스 왕의 살해 사실을 어떻게 밝혀내는지 그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점점 가면 갈수록 그들의 보이지 않는 흑막이 존재하는 것이다. 심지어 관객들과 계속 추적하는 것을 막으려는 이오카스테에게 까지 신을 빌미로 경고를 한다 (천병희 111).
코러스 : . . . 라이오스 오아에 대한 예언은 빛을 잃어 사람들이 잊은 지 이미 오래고 어디서도 아폴론 신의 영광을 찬미하지 않는다. 신들에 대한 신앙은 점점 시들어 가고 있다. (소포클레스 57)
이러한 코러스의 만행은 이오카스테에게 오이디푸스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죽이도록 내버려두고, 관객들에게 흥미를 유발시키게 하려고 오이디푸스 자손은 누군지 궁금해 하게 만든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도 역시 이와 유사하지만, 테베인들 과는 다르게 좀 더 주관적인 경향을 띄고 극의 참여에 실질적인 개입은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왕이 콜로노스의 성스러운 숲 속에 진입할 때, 들어가지 마라고 막고 그의 정체를 알자 떠나라고 명령이나 간곡함보다는 호소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또한 신에 대한 규율을 어긴 나그네지만, 신들의 노여움을 해결해주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는 친절함까지 보인다. 이런 친절함은 크레온이 오이디푸스를 강제로 끌려가려고 할 때, 신에게 기도까지 드려 버린다. 중립적인 탄식과 한탄 같은 것은 없다. 그의 운명에 대해 제사장 인 마냥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콜로노스는 아테네의 교외에 위치한 소포클레스가 태어난 곳이다. 테베의 코러스와 콜로노스의 코러스는 그의 진행하는데 있어서 거시적으로는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사건개입의 중요 부분 즉, 신과 주인공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주느냐에 대해서는 상반된 행동을 취하고 있다고 판단 할 수 있다. 이는, 신에 대한 운명에 신의 입으로서 운명을 이끌어 갈수록 기재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기도를 통해 영웅의 위기를 좋은 운명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신에게 호소하느냐의 차이다. 『안티고네』의 경우에는 위의 두 코러스를 소포클레스의 구미에 맞춰서 종합시켜놓았다. 형식적으로 당연히 왕을 찬미하기는 하나 실제 사건이 발생되면 신의 편에 들어서 심판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향력은 없고 단지 이들의 대화와 노래는 관객들에게 호소하고 비판의 떡밥을 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안티고네의 무사안일을 신에게 기원하기는 하지만 이미 안티고네는 죽은 상태다. 모든 것이 후회만 남길 때, 코러스가 관객들과 하고 싶은 말들을 털어놓으면서 끝나게 된다.
코러스 : 지혜야말로 최고의 행복. 신들에 대한 존경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오만한 자의 호언장담은 언제든 큰 타격을 받고, 벌 받은 자는 늙어서야 현병해진다. (소포클레스 221)
이러한 코러스의 역할들은 관객으로부터 공포와 연민을 경고로서 제시한다. 코러스는 그들 삶의 심판자이자 제사장이다. 신의 뜻, 즉 소포클레스와 아테네 정치인들의 이데올로기를 거스를 수 없도록 하고 설득하고 있다. 브레히트의 『조치』같은 경우에도 공산주의 심판원으로서, 중간 중간 등장으로 인한 몰입 방해로 관객들에게 현 사회의 비판의식과 참여의식을 스스로 키워 나가게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당시 사회의 이데올로기의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함이 브레히트의 목적인데, 그 목적 자체가 브레히트의 이데올로기를 다시 재생산시키는 것 밖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희곡의 수잔 로리 팍스의 『핏빛으로 쓴 주홍 글씨』처럼 처음 프롤로그에 연출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등장인물들이 코러스로서 설명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결국은 코러스라는 장치가 중재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기 보다는 연출자의 법에 의도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나 다 우상은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보았을 땐 자신의 큰 이상 속의 역할 모델이 될 수 도 있다. 또는 자신의 다른 자신 일 수도 있다. 한 도시를 대표하는 왕이고 스핑크스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사람이 오이디푸스이다. 가장 지혜롭고 용감하면서 한 나라의 모범이 되었기에 그를 찬미하고 추종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연스레 사회에서 국가 전체의 구성원으로서는 영웅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이자 선망의 존재가 된다. 영웅은 비범하지만 신 앞에서는 평범한 존재일 뿐이다. 아무리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고해도 소용없는 모습을 관객이 보게 된다. 오히려, 신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서 비극이 종결된다. 관객들은 “영웅의 행동 덕분에 인류의 한계”를 실감하게 된다 (앙드레 보나르 14). 자신들의 위대한 모델이었던 영웅의 추락을 보게 되면서 자기 자신들과 영웅과 동일시하게 만들도록 소포클레스는 세 가지 장치를 만들었다. 코러스, 예언자, 신이 바로 그것이다. 극에 참여하고 있는 코러스는 관객과 연극의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는 존재다. 연극 속의 비극들에 대한 모든 상황을 코러스는 관객에게 전이시키고 있다. 신이라는 존재는 예언자와 때로는 코러스를 통해서 운명을 예언하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살펴보면, 신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오이디푸스에게 괴롭힐 때는 언제고 그를 구원하면서, 아테네 교외 콜로노스를 그로 인해 구원자로서 행하게 한다. “신들은 그가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 때문에 그를 선택해서 영예롭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앙드레 보나르 201). 테베는 운명적으로 신들에 의해 파멸을 맞는다. 라이오스 시절부터 크레온 집권까지 계속해서 불운이 끝이지 않는다. 단지 영웅의 자손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안티고네처럼 영웅을 오랜 세월동안 함께 방랑 했으면서도 정작 안티고네에게는 돌아가는 게 전혀 없다. 오직 아테네 백성들에게만 신들에게 복을 받는 다. 안티고네는 단지 신의 법을 따랐을 뿐이고 크레온은 통치자로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선택한 것이다. 그게 신의 법이든, 인간의 법이든지 간에 결국은 전부 테베 인들은 불행하게 되지 않는 가? 영웅은 신의 뜻을 거스르려고 엄청 노력했었다. 결국 운명의 길로 빠져 버리자 눈을 찌르고 저주받은 자로 낙인 찍혔다. 그 후에는 신의 뜻을 따르면서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어디서 죽어서 그곳의 복을 심어다 줄지, 신의 하인 노릇을 한다. 신이 인간을 다스리는 세계 속에서 영웅은 아주 잠깐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억울함이 잠시 그의 입 밖에 드러낸다.
오이디푸스 : . . . 나는 다만 나에게 부당한 짓을 한 사람에게 보복을 했을 뿐이니까. 설사 내가 잘 알고 그런 짓을 했다 하더라도 나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고. 그러나 알다시피 나는 전혀 모르고 그런 짓을 했던 거요. (소포클레스 99)
관객들은 그의 비극 세 작품을 본다면, 현실과는 동떨어질 정도로 내용 구성상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영웅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라면 그 정도 가혹한 운명에 불만을 털어 놓는 게 당연한데, 그런 행동은 없고 계속 신의 찬미만 내용전체가 이뤄지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관객들은 영웅과 인간이라는 존재를 서로 동일시하지 않고 다른 타자로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와 저 세계와는 서로 병렬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 할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일반 사람들의 삶처럼 구성하게끔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증상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증상은 억압된 것이다. 자신들의 삶을 비추어 볼 때, 당연히 극 안에서 생기는 모순은 언젠가는 관객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소포클레스는 자신의 극이 현실이게끔 혹은 빠져들게끔 하기위해 일부러 그 모순을 관객에게 고백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은 스파르타 동맹국인 테베의 플라타이아 침공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테베는 아테네를 열렬히 사랑한 소포클레스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테베는 스파르타 동맹국이기도 하면서 페르시아 전쟁 때는 중립을 구사하기도 하다가 친 페르시아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테베왕국은 오랫동안 아테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만 놓고 보더라도 힘을 잃은 아테네를 이용하여 전쟁후 라이벌이 되어버린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된다.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놓고 보더라도 그리스인으로서는 테베는 힘이 강한 나라면서도 그리스인사이에서 상당히 기회주의적인 나라였음은 틀림없다. 소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테베의 만행은 외상임이 틀림없다. 비록 그것이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영웅이 될지라도, 테베의 왕으로서가 아닌 아테네의 수호자가 아닌 이상, 신의 천벌을 받을 존재였던 것이다.
Ⅲ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시칠리아 전투를 통해 아테네인은 216척의 함선과 4만의 군사를 잃었다. 소포클레스가 죽은 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말은 사실상 아테네로서의 민주정은 끝이 나게 된다. 이렇게 페르시아 전쟁이후 찬란했던 아테네의 번영은 그가 사는 동안 27년간의 전쟁에서는 시민들에게 전쟁 아니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불안과 공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통해 끊임없이 절반이 넘는 축제 참석자를 위해 재교육 할 수밖에 없었다. 관객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호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가 진정으로 아테네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게 하려했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그가 살아생전 공연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고, 그가 사후에 손자에 의해 뒤늦게 아테네가 쇠퇴된 상태에서 공연을 했다. 연극 연출가이자 정치가 였던 소포클레스의 이데올로기는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기표로서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우리에게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어떤 외상 적이고 실재적인 중핵으로부터의 도피처로 제공하는 것이다” (지젝 89). 관객들에게 환상으로서 그의 비극은 국가 이데올로기의 구성요소다. 이데올로기가 없어질 수 없다. 이데올로기가 없어지면 그 자체로서 상징 계는 무너져 버린다. 기존의 상징계의 모순들이 실재계를 통해 상징계가 무너져 내린다면, 또 다른 상징 기표들이 무수히 쏟아져 내릴 것이다.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 『은하영웅 전설』에서 나오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국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에 끊임없이 휘둘리는 존재이다. 그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얼마나 숭엄한지,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가든 나쁜 방향으로 가든, 민주자본주의의 모순에 대중들의 힘을 얻어 왕권을 확립한 폭군 루톨프 대재라든지 그의 폭정에 못 이겨 민중들을 이끌고 행성을 탈출하여 민주정을 일으킨 하이네센과 그의 동지들이라던지 순수한 자본주의 사회라든지 중세 가톨릭처럼 종교에 심취시켜 신을 앞세워 하나로 만들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세력이 모두다 모순이 항상 생기며 서로 대립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의 지지는 왔다 갔다 하고 대표하는 사람만 바뀔 뿐, 모두 우매한 존재로서 인간은 끊임없이 모순 속에 테제와 안티테제의 반복 속에, 진정한 진리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아무리 노력해도 알지 못한 채 삶과 죽음을 가지고 장난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삶의 존재자인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은 이상적인 공화주의를 잠시 동안 이끌고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순수한 청년 양웬리와 이상적인 왕권정치를 잠시 동안 이끌고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순수한 청년 라인하르트가 서로의 이상을 인정하고 화해와 평화를 위해 만나려고 하는 것을, 반대파들의 공작에 죽음으로써, 사실상 실재하는 잉여 없는 등가세상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이 있다. 소포클레스는 관객들을 위해 그 당시 불쌍한 운명을 지닌 자에게 다른 여럿 것들을 생각해도 중요한 어느 한 이데올로기만큼은 벗어날 수 없게끔, 환상에 빠지게 하고 공포를 주는 ‘마취제’를 놓아준 셈이다.
《부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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