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국희곡연구 강의록 3
2011. 7. 30. 00:00ㆍ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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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닐의 ILE
표현주의적인 작품으로 환상적이다. 유진 오닐은 부조리와 심리적인 면에서 실험적 작가이다. 수평선을 넘어 라는 작품도 새로운 세계 도래 기다림을 나타낸다. 그의 작품 속에 있는 환상적인 곳은 타인이 원하는데 더 큰목적을 두는, 원하는 곳이다. 갈등은 자연과 인간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비롯된다. 자연을 주인공은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선장은 평판을 중요시한다. 전형적인 비극 속의 주인공이다. 자부심과 자만심이 가득차있다. 헤겔은 인정받기 위한 평판에 대한 사유를 주장했다. 바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다. 의식과 의식 간의 투쟁, 이후, 노예는 일을하지 않으면 죽는다. 왜냐하면 해고는 곧 먹고 살길이 없으니 죽음이다. 그리고 주인은 노예에게 주인이라는 인증을 받아야한다. 즉, 노예는 주인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주인은 인증적 욕망존재다 노예가 주인의 인증과 평판에 대한 원동력인 것이된다. 그리스 비극은 수치에서 시작된다. 문명을 이끌어가는 원동력, 그 자체가 수치이다. 라깡은 욕망은 욕구- 욕구 = 결핍을 주장한다. 들뢰즈는 이를 유기체적 흐름이라고 한다.
경제문제와 주종문제는 계약문제로 발생되면서, 극의 갈등이 심화된다. 합법화 된 체계속에서 오인은 배치적 권력이다. 헤겔의 인증욕망에서 노예가 주인이 될수는 없다. 환상은 저항성을 갖는다. 환상이 지배계층에 대한 환상이다. 저항성을 띈다. 편지라던지, 전화를 통한 대화는 공간을 확장 시킬 수 있다. 극에서 기존과 방식이 다르게, 말을 안하고 오르간을 치면서 표현하였다. 외적인 상태를 내적인 상태로 표현한것이다. 표현주의라고 한다. 객관적 상관물은 대상을 통한 상관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인간의 정신상태를 이야기하기 위해 상태를 차용하는 것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논리학, 심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시학, 수사학 이 모든 것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된다. 보편적인것 보편성을 쫓는다. 문학은 역사와 상반되면 가짜이야기지만 우리 삶에 진실이 개연 가능성이 유효하다. 보편적이기 때문에 다양하다. 비극은 시작, 중간, 끝이 존재한다. 짜여진 것이 영혼이다. 주인공이 아니다. 여기에 담긴 실마리는 탐정소설과 유사하다. 목적론 적인 것이다. 동기가 중요하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미로, 길잃은 사회이다. 클라이 막스이후 평정이 생겨난다. 목적에 의한 수난은 고조되다가 클라이 막스가 발생하고 평정심이 찾아온다고 한다. 인상주의는 시각적 리얼리즘이고, 멀리보면 진짜인거 같은데 가까이 보면 그렇지 않게 표현되어 있다.
엘머라이스의 계산기
극이 만들었을 당시, 1923년은 표현주의 시대였다. 칸딘스키를 대표로하여 내면을 마구 쏟아낸 시기였다. 미국에서는 포디즘이라고 하여, 기계적인 인간, 기계화된 인간을 경고하였다. 1915년은 테일러리즘으로 인간의움직임을 유용하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생각이다. 현대사회에서 도피를 위해서 환상을 창조하는데, 대표적인 도구가 영화와 스포츠다. ETAOIN 이라는 말 자체가 산업화의 오류를 잘 설명한다. 왜냐하면 영문자에서 가장 자주쓰이는 글자인데 의미없는 문자다. 그러나 활자로 인쇄할때 입력자들의 실수로 생겨난 단어이기때문이다. 가장 불쌍한 존재로, 세상에 좋아하는 여자, 돈, 쾌락, 능력, 직업, 하고싶은것 조차 없다. 수동적인 삶이며 속박된 삶이다. 종교와 가정이 사람을 억억압한다. 산업사회 속에서 말이다. 자신의 꿈을 펼치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갑자기 폭팔하면서 천국가서 하고 싶은 것들 다 하는데 쉬들루가 원하는 어머니는 없는 것이었다. 실용주의적으로 보자. 도전보다 기계 수공의 존재일 뿐이다. 죄의식 시스템은 천국 마저도 있었던 것이다. 표현주의는 내면의식 분출이라고 설명하였다. 벤야민의 기술복제 이론에서 아우라의 경험은 기술복제를 통해 상실된다고 하였다. 원본과 복제간 허물어짐으로 예술가는 노동자가 된다고 하였다. 노예는 주인과 주인임을 인식하지만 여전히 노예로서 생활한다. 스틸 포인트란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수레바퀴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인다라고 명시한다. 왜냐하면 끌어 당기기 때문이다. 정점에는 신이 있었다. 핵심은 소외다. 라이만의 군중속의 고독은 즉, 고독속의 군중이다. 물질 만능이 세계를 지배를 하고 있다. 구중은 자기의식 없이몰려가는 것을 말한다. 때거리와는 다르다. 하이데거는 기술에 관하여, 존재의 짐이라고 표현하였다. 존재는 불러들이기, 모시기 위한 공간이다. 언어를 통해서 존재가 드러나게 한다. 꽃봉오리가 터져서 꽃이 핀다. 아무것도 가하지 않고 저절로 드러난 것이다. 우리가 기술을 자연에서 이용할 때를 말한다. 엘리엇은 시인은 백금의 촉매라고 하였다. 일부러 의미를 끄집어내지 않는다. 형이상학파 시인이다.
엘리스 칠드리스의 마음의 갈등
케터링은 고객이 우너하는데 해주는 것을 말한다. 주인공은 겉과 속이 다르다. 극 중 극은 역할속의 역할이다. 흑인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는 것이 백인이 바람하는 것이다. 듣고 싶어하는 말을 타자가 원하는 것이다. I know that you know that, when I give you a gift. I know, that you will... present라는 것인 먼저 보내다라고 할 수 있다. 중세제도에서 시작되었다. 선물 기초는 봉건제도에서의 봉토에 있다. 그 봉토속에서 왕이 있는 것이다. 이 속에는 상징적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레비나스는 부조리한 것이 가장 원초적이라고 하였다. 모든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조리함에 벗어날 수 없다고 느낄때, 부조리함에 직면하다라고 하였다.
변화할 수 있는 변신은 몸과 마음이다. 유동적인 것이다. 텍스트 속의 텍스느가 상호텍스트다. 공시적으로는 역사에서 과거의 작품에서 존재하고, 통시적으로는 지금있는 상황에서 같이 있는 내용을 가지고 논한다. 음악의 한 장르인 블루스는,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다. 재즈와 같이 저항성을 띄고 있다. 위를 보고 부를는 것이라는 말로, 울분을 토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주디는 백인 페미니스트다. 사실주의는 상세한 표현을 지닌다. 무대공간에서 칠르러스는 무대공간을 건축학적, 이분학적으로 설치하였다. 갈등을 무대공간 적에서 표현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기술에 관한 질문
이것 역시도 드러남이다. 현대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기술 역시 드러내는것, 꼼꼼히 살펴보면 드러나있다. 그렇지만은 현대 기술을 통해서 지구를 흔들다. 현대 기술은 강요해서 끄집어내는 특징을 지닌다. 그 자체 스스로가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현대기술에서 지배적인 드러남이다. 자연이 에너지를 내어놓아야한다. 풍차에는 이런 이론이 적용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람에 따라서 돈다. 그것은 전적으로 바람이 부는데 맡겨진다. 풍차는 에너지를 내어 놓긴하나 받지 않는다. 공기 흐름을 통해서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지 저장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진리라는 것은 존재가 드러남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를 전통적 로고스 중심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였다. 언어는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집이다에서 말이다. 헤겔은 근원을 무시하였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땅에 광석을 내어놓으라고 닥달한다. 광산이 드러나게 되면 농부가 이전에 옛날과는 다르게 한다. 이제는 농부가 등장하는 땅과는 다르게 된것이다. 농부일은 토양의 땅에다가 닥달하지 않는다. 곡식의 씨를 심는데 있어서 성장하는힘을 유지해 주는 그 속에다가 두고 씨가 자라나는 데다가 자연스레.. 또다른 종류의 돌봄과에 놓여있다. 닥달하는 의미에 있어서.. 말이다.
에드워드 알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충격에 대해, 빅터프랑클이라는 교육학자는 존재의 의미를 창조, 사람, 고통이라고 하였다. 제임스 딘의 이유없는 반항에서 이상적인 가족상이 드러나 있다. 아메리카 드림이 갖고 있는 문제와 허구와 환상을, 이 작품에서는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경제적으로 자기 것을 만든다고 레비나스를 노동에 대해 설명하였다. 4시 48분은 자살 충돌 시간이다. 동물원 이야기에서도 동물원은 우리를 뜻한다. 컴니케이션은 식물적으로는 배운사람이라면 동물적으로는 아이이다. 왜냐하면 소통이 쉽기 때문이다. 까뮈는 부조리에 대하여, 배우가 무대를 느껴지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럽의 부조리와 미국의 부조리와는 상반된다. 관계의 세계로 바뀌어갔기 때문이다. 즉, 해결책을 모색한 것이다. 그래도 태양은 떠오른다와 뮈토스는 월요일이 중요한게 아니고 화요일이 중요한게 아닌 다 똑같다고 하였다. 레비나스는 조리화 체계를 싫어하였다. 말과 행위가 부조리 않것이다. 까뮈의 이방인에서 말이다. 나와 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이방인인 것이다. 엄마가 죽었다라는 큰 사건이 비중이 낮다. 모든 사물은 똑같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원초적 부조리에 대한 경험으로 우리는 늘 잊고 살고 망각한다라고 하였다. 익숙한 사고 방식을 벗어나면 그 사태, 본질을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낯설게 느껴진 그 상황 그 자체가 부조리하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부조리 한 것이다. 충격을 이용해야한다. 지젝은 실제를 바라보게 해준다라고 하였다. 벤야민은 우리 삶을 일상을 부조리함을 드러내게 한다라고 하였다. 등장인물은 물건처럼 바라본다. 마르틴 부버는 유태인 랍비 철학자이다. 나와 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관계를 다른사람으로 맺을 때, 그로 바뀐다고 하였다. 우리가 3인칭 존재 할때는 그것이다. 그것은 3인칭으로 할 때의 의미다. 그것이 곧 사물의 의식이고 의미의식이라고 하였다. 이 극은 의미의 세계인 것이다. 의미와 가치의 세계속에는 나가 있다. 잔혹극은 이성 작용을 때려 버린다. 모든 것이 무의미 해질 때 모든것이 끝장이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는가? 내의 존재로 직면하게 된다. 무의미는 없음이 있음이다. 레비나스는 사물의 외형이 어두운.. 밤의 암흑이 우리를 점령한다라고 하였다. 없다는 것은 무자체가 아니다. 이것저것 존재하는 것 자체이다. 그러나 부재는 현존이다. 그것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현존이다. 무는 어무런 매개없이 현존하는 것이 무다. 모든 것이 가치를 광법하게 한다. 부조리 감지는 분위기로 느낀다. 부조리함을 직면하게 만든것이다. 세계도 없다. 극에서는 아이를 죽이는 것처럼 말이다. (상상에서) 두려움은 실존론적 불안감이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는 것 처럼 있는데 실제다. 그것이 불안함인 것이다. 잠은 과거 현재를 이어주는 통과길이 아니라 부조리 상황이 부조리다.
부조리에 대한 경험의 주도권은 부조리함에 있다. 따라서 자율적이지 않다. 무의미함은 긍정, 부정도 할 수 없다. 결핍은 과잉의 감정에 수반된다. 죽음이라는 것은 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것 그 자체가 무다. 부조리는 우리들에게 충격을 준다. 나를 아무것도 아니게 하는 그 무엇으로 말이다. 레비나스는 단절이라면 벤야민은 이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레비나스는 과거와 잠을 단절시킨다. 충격이후 혼이 나간다. 타인을 새롭게 바라 볼 것이다. 폭력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끌어내는것이다. 환상의 아이가 있음에서 없으면서 사랑에 대한 필요감이 생긴다.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에 대하여 (역사철학테제)
눈에 띄지 않는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과거의 진정한 모습은 휙 지나간다. 이를 비상사태라고 한다. 감정이입은 역사 방법론이다. 메시아는 반그리스도 극복자이다. 상속자인 우리는 90%이어 받으면서 살아간다. 지식의 정원에서 소외되는 무위도식을 취한다. 메시아는 거슬러서 흠집내서 거슬러서 겨, 곁에 거슬러서 빗질하고 흡집을 낸다. 역사는 주어진 진보이다. 역사주의자 영웅의 이야기의 오스트 윌슨은 미국을 다시 쓰겠다라고 하였다. 과거를 끄집어낸 것이다. 백인 중심역사와는 다르게 사건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 과거 사실을 가져온다라고 하였다. 피아노 레슨이 역사유물이다. 역사의 연속성을 폭파시키고자 하는 의식을 말한다. 비상사태는 억눌린자들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댓가를 치르고 나야 우리는 비로소 안다. 이론이 있으면 자기에 맞게 맞게끔 작성되어 지는 세상이다. 과거 망각과 침묵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주어져 있다. 낯설게함은 내꺼이면서 내꺼인게 아닌것 즉, 분리되는 것이다. 동질적이고 공허한 것이다. 순간으로 반는다. 그 속에 진리가 있으며, 역사를 거스 를 수 있는 자는 메시아이다. 어느 한 순가에 나타난다. 동일시를 끊임없이 벗어나기 위한 타자가 필요하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다. 역사 유물론 한판 승부로 꼽추다. 항상 승리한다. 침묵해진 목소리를 들어내게 하는 것이다. 해석에 반하는 것은 자본 억압체계에서의, 지식의 정원에서 무위도식이다. 기존해석을 반한다. 수잔 손탁의 사회실천가처럼 말이다. 해석에 거스른다.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해석이다. 우리는 역사를 필요로 하며 철학에 무엇을 이용하는 가에 대한 질문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등불처럼, 역사주의자는 등불이라는 진실 없이 자기들 끼리 자기 입장에서 따라가게 한다. 딴판인걸 딴판으로 인정해주는것, 레비나스는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인정하고 그대로 봐주는 것을 주장했다. 비상사태는 역사의 방관자 때문이다. 현재는 통제를 부드럽게 통제한다. 억압양식이 세련되어 있다. 메시아는 깨닫게 하기 위한 메시아다. 그는 억압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려 왔다. 조장하고 있으면서 협력자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게 아니라 스스로 메시아가 되는 경험을 해야한다. 위험한 순간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게 메시아다. 각성시키려고 온다. 하나의 작품을 해석할때 그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서사극은 감정 이입 자체에서, 거리를 두고 본다. 연극 기법이다. 꾕과리 이것은 연극이다 처럼 말이다. 편안하게 읽음은 심리적 거리르 두고 봄으로서 작동 원리를 기제한다. 망각은 각성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망각이다. 메시아는 죽은 과거를 되살려 내는 것이다. 파시즘은 죽은자들을 겁낸다.
벤야민은 감정이임과 동일서으이 철학을 거부한다. 헤겔의 두흐름의 변증법도 거부한다. 벤야민은 정지된 변증법을 주장한 것이다. 계시로서 말이다. 기술복제시대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는 없다.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하는것, 일회적인 것 말이다. 영상매체는 끊임 없이 복제된다. 아우라는 상실되고 말이다. 벤야민은 감정이입을 거부하였다. 표현양식은 서사극을 중시하였다. 전위주의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칸트의 형식주의와 헤겔의 내용중심주의인 이념의 감각전 재현과는 상반된다. 헤겔은 정반합의 통일을 통해 역사는 발전한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벤야민은 전진의 계기가 없다면서 정지된 변증법을 주장한 것이다. 독자의 의식을 뒤흔들기 위함이다. 진보는 파국으로 가기위한 과정이다. 이는 충격의 체험을 위해서다. 브레히트의 낮설게 하기는 충격을 이용한 기법이다. 초현실주의 꼴라주 기법으로 여기저기 이야기를 전져 놓는듯한 기법이다. 루카치의 총체성 비판에서 낭만주의 총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한다. 왜냐하면 형식적인 방식에 벗어나려 했기 때문이다. 아우라는 가까우면서도 멀리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종교적 제의다. 아무리 가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회적 겸험을 지닌다. 수직적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평준화 구조 또한 불합리가 있다. 기계적 평준화 속에 다시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패션세계의 미니스커트를 생각해보자. 처음엔 자유지만 유행자체가 통제되어 있는 상태다. 현대 전위예술은 아우라 파괴다. 부정한 것은 조화, 원칙, 유일성이다. 이와 다르게 대중에게 비판적 사고를 이끄는것, 그 속에 배재된 억압을 찾는 것을 주장하였다. 아우라 가치가 아니라 전시가치인것이다. 혁명을 촉발 시킬수 있는 미학적 원리를 옹호하였다. 개인 관조보다 대중의 수용을 원했다. 카오스 이론은 별거 아닌 것이 별거 처럼된 것을 말한다. 별거아닌 것이 역사속에서 외친다. 전복을 말이다. 역사를 일으키는 무엇이다. 앞으로 대새 문학은 폭로 문학일지도 모른다. 카이스트 사건은 수치의 문화에서 비롯된다. 수치를 강조하면서 죄악시 시켰기 때문이다.
에드리언 케네디의 부엉이는 대답한다.
부엉이란, 늘 영역안에 있으면서 타자다. 영역밖에 존재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처벌 받을때는 안에서 받는다. 에드리언 케네디는 직설적이고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교육의 억압적 문제를 지적하였다. 로즈마리 잭슨은 환상성과 주체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변하지 않는 흑인성을 이 작품을 보여주었다. 기억이 어떻게 외적인 형태로 나오는 형식, 현실에서 왜곡을 나타낸다. 변신기법은 정체성이다. 마음이 끊임없이 변한다. 아도르노의 미학에서 아름다운 가상을 생각할 수 있다. 시작과 중간과 끝 말이다. 끝는 수수께끼가 풀려야 한다. 그런데, 현대예술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가상이기를 포기하고 추해진다. 답이 있는데 수수께끼가 풀리는게 아니라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는 방법을 보여준다. 질서정연함과 논리를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미건 테리의 KEEP TIGHTLY CLOSED IN A COOL DRY PLACE
상당히 반어적이다. 우리의 생각을 넣어 놓지 마라라는 뜻이다. 말보다는 행위 중심의 연극이다. 연출가가 굉장히 중요시 된다. 무대는 시적공간이자 환상적 공간이다. 푸른색만 표현하고는 천국을 떠올리게 해야한다. 로버트 윌슨은 이미지극을 창조했다. 이는 청각 장애인을 위한 연극이다. 변신은 바꿔야 바꿔질 수 있다는 극이다. 주로 페미니즘 연극에서 나온다. BWO는 Body Without Organ의 약자다. 기관없는 신체다. Baumann은 액체근대를 말한다. 감옥은 우리사회가 감옥인데 감옥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옥해 놓는다. 전쟁은 게임처럼 현대사회에서 생각되게 한다. 실재와 허상, 가상과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 한 것이다. 유령은 드러난 것이다. 죽음은 흑인극에서 유령으로 자주 나온다. 시간과 공간이 없다. 사라짐이 아니라 드러냄이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볼때 그대로 받아들이는 계시를 주장했다. 부조리에 빠져 받아들이다 보면 계시가 드러난다고 했다. 흑인극의 현재와 억압이 있다. 제목은 우리의 기존 사고 방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인지 아무도 모른다. 해석이 분분하다.
아도르노의 예술
현대 예술은 아름답지가 않다. 아름다운 거짓말이며 가상적이다. 더이상 아름다운 가상의 길을 포기한다. 제의를 포기한 것이다. 조성을 포기한것이다. 연극은 부조리 해졌다고 한다. 사회가 끼리끼리 먹는 것을 포기하고 신은 의미를 포기했다. 현대 예술은 아름다움을 거부했다. 예술이 추해진 것이다. 의식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소리가 독립적이 되었다. 라는 의미는 존케이지의 생각인데, 의식적으로 연결하고 피아노를 끊는 작업을 준비해 놓는다. 이미 조작된 상태인 것이다. 베켓은 유토피아 제시를 하지않고 현실도 제시하지 않는다. 멀리 떨어짐으로서 소외를 표현하였다. 삶의 조건을 깬다. 현대예술에서는 말이다. 예술이 의미를 포기했다. 작품 재현을 포기하고 음악은 조성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추해보인다. 사회 비판을 위해서는 타자를 멀리하였다. 예술이 독립함으로 타자, 사회를 비판하였다. 예술을 끌어들이는 것과 다르게 예술 그 자체로 떨어져서 머무는 것이다. 작품은 더 이상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도르노의 미학은 사회 비판을 위해서는 사회 속이 나닌 타자를 머물면서 비판하였다. 예술이 타자로 머문다해서 비판 안한다는 것은 아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인간의 조건 자체를 즉, 존재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라는 집을 짓고 표현한다. 체계와 소통적 합리성을 거부하였다. 카프카는 사회와는 다른 맥락 방식을 지닌다. 변신에서 인간에서 바퀴벌레로의 변신은 합리적이지 않다. 난해해진 것이다. 예술 그 자체에서는 메시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사회에 현존하면서 드러난다. 개념으로 표현하는 시대? 아도르노는 예술은 수수계끼라고 하였다. 예술이 바로 개념화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은 유기적이지 않다. 체계화 되어있지 않고 모든게 파편화 되어있다. 아도르노는 하이데거 유사성을 지닌다. 연관성은 없다. Gestell 즉, 집단적 심문법은 강요되고 소유된다. 그리고 안다. 보편적 진리를 말이다. 그리고 이해하는 합리성과 이성을 중요시 여긴다. 이러한 자연관은 야생적 사고를 지닌다.
데이비드 메밋의 시카고의 성 도착증
미국문학의 흐름에서 청교도적 관점과 상반되는, 환상을 통한 성적 만족이 있다. TV와 오락으로써의 무엇이다. 아메리카 버팔로는 실재는 없고 이미지만 남아있는 원래의 그 모습이다. 실재 대신하는 이미지는 폐쇄적 공간이다. 언어가 언어로써의 비논리성은 무수히 많은 기표와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전화는 공간을 확장 시키는 수단이다. 머리속에서 공간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가의 공통적 작품요소는 공간이다. 도시는 장소성이 보이지 않는다. 황폐화되고 메말라가는 공간이다. 언어가 살아있고 생생하게 하기위해 작가는 직접대화들을 발췌한다. 실제적이고 숨김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미디어 역할은 환상과 대중문화 이야기다. 공간과 정소에서 장소는 고향이라는 장소를 말한다. 이는 물질적 개념이다. 장소는 추상적 개념으로 변해가는 것을 말한다. 아늑한 존재로서의 고향이라는 장소는 안락과안전이다. 생산적인 공간은 재현의 장소이다. 장소는 곤강이 된다. 프리드릭 제임스의 후기 자본주의 문화논리에서 80년대 이전 만 하더라도 실증 지리학이 없다.은유로서의 건축에서 우리 삶이라는 말은, 즉 몇등, 몇초의 숭, 언어, 화폐로 건축은 구성된다는 것이다. 관계속에서 사람이 대화된다. 성은 소통으로서의 양성애인것이다. 제도로서의 체제들이 중점이다. 라깡은 언어로 가능한 생각을 요구하고 실재 충족시킬수 있는 그 무엇을 요구라고 하였다. 데리나의 글쓰기는 단어 하나로 시작한다. 아주 작은데서 격파해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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