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과 사무엘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
2012. 2. 11. 18:23ㆍ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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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록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들뢰즈의 감각은 정독적이며 지각적이다. 이는 예술이 된다. 정동은 나가 없는 상태로 우리 인식으로는 포착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레고리 잠자가 바퀴벌레가 되듯 이러한 되어가기는 나와 관련 없는 2개가 되어가는 것을 지각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은 이와는 다른 정동과 지각을 보유한다. 영혼과 플록은 논리적이고, 수사적이며, 이성적이다. 마치 탐정소설과 같다. 시작과 중간과 끝이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하나의 유닛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개연성은 그럴싸 하게 만든 개연성이 존재한다.
칸트는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맞딱드릴 때의 느낌을 숭고라고 하였다. 이러한 숭고심은 언어적이다. 하나의 장은 막과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작동원리 및 매카니즘을 지닌다. 그 나름의 주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은, 현대극에서의 목표없는 극 중 연극과는 대조로 배우가 목표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존재로서 있음이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최초로 분과 학문을 나눈 사람이다. 내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바라봄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이 추상적이고 절대 순수형식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이고 관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에서 주인공은 자만하고 이는 비극적 결함이 된다. 희극은 명령과 질서와 주문으로 권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경계지어진다. 연민과 공포를 순환하기 위한 카타르시스가 극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관객은 연극을 보면서 생기는 생리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회복되어가는 과정과 모습에서 말이다. 목적과 질서와 지각이 발현한다고 하였으며 모름에서 앎과 함께 실천이 동반되어 진다고 하였다. 개연성은 인간 존재 작동원리이며 메카니즘이다. 이는 되어가는 과정이다. 생성변화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플라통의 그림자 세계에서의 예술 모방과는 대조적이다. 모방은 인간의 삶을 모방하는 모방을 말한다.
비극에서의 플롯은 사건의 배열과 유기적인 관계에서 존재한다.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인과적 필연성으로 쓰여진다. 비극의 고결함은 질것을 알면서 맞서는 것과같다. 저항성이 담겨있으며 죽음이 내포된다. 즉 무다. 시간은 절대 가시화 할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미는 질서에서 아름다움이 있다. 비극의 줄거리에서나 기하학적 문장구조에서 말이다. 거짓말 자체는 허구지만 쾌감이 있다. 문학으로서 인정된다. 진리보다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정신분석에서 말의 지배는 무의식의 지배다. 이점이 최근 오이디푸스 요소를 읽게 만드는 하나의 사유다. 소포클래스는 인간 주체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운명의 비극을 헤겔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운명이 필연의 변증법으로 인간이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그 자체가 운명 실행의 매개체로서 해석한다. 오이디푸스의 세계는 무질서를 몰고 다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죽을 줄 알면서 맞서는 비극적 고결함이 있다. 구조적 시스템에 대해 대항하면서 비극적이다. 의도적으로 비극을 선택하는 주인공이다. 죽는 다는 사실을 이미 주인공은 알고 있다. 내 속에는 죽음이 들어있고 죽음과 산다. 모순적 행동과 삶을 지닌채 말이다. 맞서 싸우는 인간의 삶 자체는 어찌보면 비극적이다. 까뮈는 삶 그 자체가 저항성이라고 하였다. 타자는 죽음이 있다. 무자에게서 죽음을 본다는 레비나스 적 시각도 취할 수 있다. 사실을 사실로 보지 못한 것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눈을 찌르는 것이다. 도시의 위기는 무질서다. 왜냐하면 왕의 무질서 즉, 근친상간으로 부모와 자식의 등급이 같게 되기 때문이다. 비극의 핵심은 질서의 회복이다. 근친상간에서 관계의 무화, 차이의 무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수치의 발달은 곧 우리 문명, 제도의 시스템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다. 지라드는 욕망은 삼각관계이며 다른 사람 욕망해서욕망을 취한다고 한다. 같다는 것은 싫어하는데 말이다. 오이디푸스는 희생양일 수도 있다. 폭력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본성이다. 성폭력이 너무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라고 주장하였다. 주체적 폭력과 시스템적 폭력은 법이라는 이름의 구조적 폭력에 위치한다. 또는 상징적 폭력일 수도 있다. 부르드외는 보이지 않지만 지각적인 폭력이라고 하였고 지젝은 미학적 규범, 내가 만드는 상징, 상징화 시키는 폭력 혹은 개인을 사물화 또는 상징화라고 저으이하였다. 의미를 부여해서 폭력을 취하는 것도 이와 같다. 십자가가 그 예다. 푸코는 양심이라는 수치를 끊임없이 주어서 스스로 내려놓게 했다고 말한다. 수치는 외부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나의 수치심으로 느끼도록 마음 속에 존재하다는 것이다. 이를 감시라고 한다. 수치는 오이디푸스를 파멸로 몰아가게 한 것이다.
사무엘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
작가의 정답이 없고 질문만 던져주는 작이다. 나뭇잎이 바람에 마치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암시하게 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의미가 없다. 반복될 뿐이다. 어제 그리고 오늘도 비슷하다. 단순하며 허우하고 지루하며 반복적이다. 마치 인생과 같다. 인간의 조건을 기다림으로서 표형하였다. 마치 카뮈처럼 부조리가 조리처럼 진행된다. 어떠한 개연성도 없으며 목표도 없다. 행위에 대한 논리적 근거 마저 없으며 지향점도 없다. 고도는 충실한 재현만 할 뿐이다. 기다림은 관객에게 가능성만 제시한다. 목적이 없는 기다림은 나와는 상관없지만 던져난 존재 그리고 좋은 기다림 아니면 나쁜 기다림이 있을 것이다. 있음 그대로 그것이 있는것, 그것이 기다림을 느낀다. 시간위에 처해 있을때 말이다. 이는 지루하다. 시간을 죽이지 않는다. 시간의 흘러감을 지루함을 통해 거꾸로 느껴진다. 오이디푸스 왕과는 다른 억지로 끼워 맞추는 서사적 요소도 전혀 없다. 동일자의 논리로 하나씩 포섭할 수 없는 인물이 많다. 모자 쓸지 않쓸지 마저도 알 수 없듯이 말이다. 행위 자체는 알 수없고 이유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유를 댈 수 없다. 실존주의의 배경은 2차 대전 이후이다. 인간이 인간 같이 않을 때 부조리가 느껴지고 여기서 실존주의가 등장하였다. 제임스딘의 이유없는 반항 또는 비키니 섬의 거북처럼 원폭 투하에 대한 장님거북은 방향성이 없는 미트세대를 대변한다.
희극의 탈을 쓴 비극이다. 비극적 코미디이며 블랙 코미디이다. 샤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라고 하였다. 평가하고 가치매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늙은 자들의 이야기 처럼 삶의 무의미를 논하고 기억이 흐릿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뭔가 갈피가 없는 그 무언가와 유사하다. 연결사가 빠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베켓이 말하길 레지스탕스에서 지하 생활 2년에서 가장 힘든 것이 권태라고 하였다. 시간이 길게 느껴질때, 할일이 없을때 오래 사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오랜 시간은 시간이 길다는 것에 대한 향수가 있고 가고자 하는 무엇을 스스로 철학하기가 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레비나스는 있음을 그대로 있음으로서 말했다. 유결무이성 그 자체 홀로있음으로 말이다. 벌거멋음은 인간의 벌거 벗은 그 자체다. 상처받기 쉬운 존재다. 죽음을 가진 조재라고 하였다. 환영으로, 환상으로 보는게 아닌 있는 그대로를 우리는 연극을 통해 보는 것이다. 타자는 나의 완전히 다른 수수한 다른 그 자체다. 얼굴은 사람의 드러내는 행위 그자체다. 얼굴을 본다가 아니라 판단하고 비교하는 것이다. 타자를 바라봄으로서 폭력이 없어진다. 명령은 나를 나에게 하여금 반응을 보이게 하니까 책임생기고 사랑한다고 하였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가 살게 만드는 것은 이들이 삶 생산 자체가 생의 자체이다. 타자가 진정한 순수로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권태로인한 불안으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였다.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인것이다. 부조리의 기분은 부조리속에 처함으로서 발생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 의미가 없다. 단지 던져있는 상태다. 나의 결단과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벗어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실존하기가 해결책이다. 새로운 자기로서 산다는 것을 하는 것 그 뿐이다. 인생은 지루하고 반복적이다. 그래서 이 극은 정치성을 지닐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들뢰즈의 감각은 정독적이며 지각적이다. 이는 예술이 된다. 정동은 나가 없는 상태로 우리 인식으로는 포착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레고리 잠자가 바퀴벌레가 되듯 이러한 되어가기는 나와 관련 없는 2개가 되어가는 것을 지각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은 이와는 다른 정동과 지각을 보유한다. 영혼과 플록은 논리적이고, 수사적이며, 이성적이다. 마치 탐정소설과 같다. 시작과 중간과 끝이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하나의 유닛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개연성은 그럴싸 하게 만든 개연성이 존재한다.
칸트는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맞딱드릴 때의 느낌을 숭고라고 하였다. 이러한 숭고심은 언어적이다. 하나의 장은 막과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작동원리 및 매카니즘을 지닌다. 그 나름의 주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은, 현대극에서의 목표없는 극 중 연극과는 대조로 배우가 목표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존재로서 있음이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최초로 분과 학문을 나눈 사람이다. 내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바라봄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이 추상적이고 절대 순수형식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이고 관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에서 주인공은 자만하고 이는 비극적 결함이 된다. 희극은 명령과 질서와 주문으로 권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경계지어진다. 연민과 공포를 순환하기 위한 카타르시스가 극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관객은 연극을 보면서 생기는 생리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회복되어가는 과정과 모습에서 말이다. 목적과 질서와 지각이 발현한다고 하였으며 모름에서 앎과 함께 실천이 동반되어 진다고 하였다. 개연성은 인간 존재 작동원리이며 메카니즘이다. 이는 되어가는 과정이다. 생성변화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플라통의 그림자 세계에서의 예술 모방과는 대조적이다. 모방은 인간의 삶을 모방하는 모방을 말한다.
비극에서의 플롯은 사건의 배열과 유기적인 관계에서 존재한다.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인과적 필연성으로 쓰여진다. 비극의 고결함은 질것을 알면서 맞서는 것과같다. 저항성이 담겨있으며 죽음이 내포된다. 즉 무다. 시간은 절대 가시화 할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미는 질서에서 아름다움이 있다. 비극의 줄거리에서나 기하학적 문장구조에서 말이다. 거짓말 자체는 허구지만 쾌감이 있다. 문학으로서 인정된다. 진리보다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정신분석에서 말의 지배는 무의식의 지배다. 이점이 최근 오이디푸스 요소를 읽게 만드는 하나의 사유다. 소포클래스는 인간 주체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운명의 비극을 헤겔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운명이 필연의 변증법으로 인간이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그 자체가 운명 실행의 매개체로서 해석한다. 오이디푸스의 세계는 무질서를 몰고 다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죽을 줄 알면서 맞서는 비극적 고결함이 있다. 구조적 시스템에 대해 대항하면서 비극적이다. 의도적으로 비극을 선택하는 주인공이다. 죽는 다는 사실을 이미 주인공은 알고 있다. 내 속에는 죽음이 들어있고 죽음과 산다. 모순적 행동과 삶을 지닌채 말이다. 맞서 싸우는 인간의 삶 자체는 어찌보면 비극적이다. 까뮈는 삶 그 자체가 저항성이라고 하였다. 타자는 죽음이 있다. 무자에게서 죽음을 본다는 레비나스 적 시각도 취할 수 있다. 사실을 사실로 보지 못한 것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눈을 찌르는 것이다. 도시의 위기는 무질서다. 왜냐하면 왕의 무질서 즉, 근친상간으로 부모와 자식의 등급이 같게 되기 때문이다. 비극의 핵심은 질서의 회복이다. 근친상간에서 관계의 무화, 차이의 무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수치의 발달은 곧 우리 문명, 제도의 시스템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다. 지라드는 욕망은 삼각관계이며 다른 사람 욕망해서욕망을 취한다고 한다. 같다는 것은 싫어하는데 말이다. 오이디푸스는 희생양일 수도 있다. 폭력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본성이다. 성폭력이 너무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라고 주장하였다. 주체적 폭력과 시스템적 폭력은 법이라는 이름의 구조적 폭력에 위치한다. 또는 상징적 폭력일 수도 있다. 부르드외는 보이지 않지만 지각적인 폭력이라고 하였고 지젝은 미학적 규범, 내가 만드는 상징, 상징화 시키는 폭력 혹은 개인을 사물화 또는 상징화라고 저으이하였다. 의미를 부여해서 폭력을 취하는 것도 이와 같다. 십자가가 그 예다. 푸코는 양심이라는 수치를 끊임없이 주어서 스스로 내려놓게 했다고 말한다. 수치는 외부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나의 수치심으로 느끼도록 마음 속에 존재하다는 것이다. 이를 감시라고 한다. 수치는 오이디푸스를 파멸로 몰아가게 한 것이다.
사무엘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
작가의 정답이 없고 질문만 던져주는 작이다. 나뭇잎이 바람에 마치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암시하게 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의미가 없다. 반복될 뿐이다. 어제 그리고 오늘도 비슷하다. 단순하며 허우하고 지루하며 반복적이다. 마치 인생과 같다. 인간의 조건을 기다림으로서 표형하였다. 마치 카뮈처럼 부조리가 조리처럼 진행된다. 어떠한 개연성도 없으며 목표도 없다. 행위에 대한 논리적 근거 마저 없으며 지향점도 없다. 고도는 충실한 재현만 할 뿐이다. 기다림은 관객에게 가능성만 제시한다. 목적이 없는 기다림은 나와는 상관없지만 던져난 존재 그리고 좋은 기다림 아니면 나쁜 기다림이 있을 것이다. 있음 그대로 그것이 있는것, 그것이 기다림을 느낀다. 시간위에 처해 있을때 말이다. 이는 지루하다. 시간을 죽이지 않는다. 시간의 흘러감을 지루함을 통해 거꾸로 느껴진다. 오이디푸스 왕과는 다른 억지로 끼워 맞추는 서사적 요소도 전혀 없다. 동일자의 논리로 하나씩 포섭할 수 없는 인물이 많다. 모자 쓸지 않쓸지 마저도 알 수 없듯이 말이다. 행위 자체는 알 수없고 이유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유를 댈 수 없다. 실존주의의 배경은 2차 대전 이후이다. 인간이 인간 같이 않을 때 부조리가 느껴지고 여기서 실존주의가 등장하였다. 제임스딘의 이유없는 반항 또는 비키니 섬의 거북처럼 원폭 투하에 대한 장님거북은 방향성이 없는 미트세대를 대변한다.
희극의 탈을 쓴 비극이다. 비극적 코미디이며 블랙 코미디이다. 샤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라고 하였다. 평가하고 가치매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늙은 자들의 이야기 처럼 삶의 무의미를 논하고 기억이 흐릿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뭔가 갈피가 없는 그 무언가와 유사하다. 연결사가 빠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베켓이 말하길 레지스탕스에서 지하 생활 2년에서 가장 힘든 것이 권태라고 하였다. 시간이 길게 느껴질때, 할일이 없을때 오래 사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오랜 시간은 시간이 길다는 것에 대한 향수가 있고 가고자 하는 무엇을 스스로 철학하기가 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레비나스는 있음을 그대로 있음으로서 말했다. 유결무이성 그 자체 홀로있음으로 말이다. 벌거멋음은 인간의 벌거 벗은 그 자체다. 상처받기 쉬운 존재다. 죽음을 가진 조재라고 하였다. 환영으로, 환상으로 보는게 아닌 있는 그대로를 우리는 연극을 통해 보는 것이다. 타자는 나의 완전히 다른 수수한 다른 그 자체다. 얼굴은 사람의 드러내는 행위 그자체다. 얼굴을 본다가 아니라 판단하고 비교하는 것이다. 타자를 바라봄으로서 폭력이 없어진다. 명령은 나를 나에게 하여금 반응을 보이게 하니까 책임생기고 사랑한다고 하였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가 살게 만드는 것은 이들이 삶 생산 자체가 생의 자체이다. 타자가 진정한 순수로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권태로인한 불안으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였다.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인것이다. 부조리의 기분은 부조리속에 처함으로서 발생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 의미가 없다. 단지 던져있는 상태다. 나의 결단과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벗어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실존하기가 해결책이다. 새로운 자기로서 산다는 것을 하는 것 그 뿐이다. 인생은 지루하고 반복적이다. 그래서 이 극은 정치성을 지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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