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데이비스의 "레비나스 입문" 중심으로 주저리;; (2)
2012. 2. 15. 15:27ㆍ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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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록을 바탕으로 정리해서 쓴 내용입니다.
현상학은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와는 다른 형식이다. 소쉬르의 언어혁명에서 기인한 구조주의는 데리다, 들뢰즈, 바디우 같은 사상가들을 낳았다. 현상학과 관련된 인물은 하이데거, 후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타자를 귀속 시킬 수 밖에 없다라고 주장하고 타자를 동일자로 귀속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포스트 구조주의는 주체 죽음 이후 주체는 무엇인가 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질료는 변화하면서 일면적이다. 질료는 외부의 대상으로 이러한 의식작용의 대상을 형상이라고 한다. 이라한 통합적인 인식 자용을 노에시스라고 한다. 자연적 태도는 자아와 세계가 대립되는 초월론적인 세계다. 세계 모든 것은 자아와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순간 멈출때 그 시점을 바라본다. 선험적으로 경험에 있기 앞어서 이때 선행하는 의식작용이 있다. 현상은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서의 현상이다. 명증성과 확실성이 세상의 혼란스러운 과학기술 문명안에 있다. 인간의 의식에서 존재한다. 존재가 드러날려면 현상학적 환원을 이룬다. 존재자가 역사성과 세계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존재자의 사고다. 이는 인간 중심적이다. 무형의 것을 해체시킨다. 초월론자 자아가 바깥 세계를 동일성으로 환원 시킨 것과 같이 존재를 인식은 하지만 차이들이 존재에 묻혀 들어간다. 존재자들을 익명성 속으로 사라져 들어가는 것이다. 과학적태도는 자연적 태도다. 과학은 실증적이다. 다양한 인상들이 하나로 이미지화 되어 인식되어 있다. 의미를 통합적 구성한다. 외부 세계에 대한 존재들도 공간에 넣는다. 이는 타자의 문제다. 의식 자체가 현실의 객관적 유무는 의심해도 의심에 대한 현실성은 없다. 우리의식에 드러나 사태 그 자체인 것이다. 몸은 물론 이미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존재자들을 잊도록 해주는 존재 즉, 늘 존재자적 중심으로 만 생각하는 것을 접으면 초월론적 에고가 될 것이다. 실증주의는 자료를 모으면 모을수록 객관적 관착이 가능하다. 규칙을 추측하고 일반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의식이 세계관 연속에서 구성는 것을 지양한다. 자기 자신의 밖을 지향하는 것이다. 경험된 세계 자체가 지향된 것이다. 후설의 의식은 항상 열려있기 때문에 자기 독립적이지 못하다. 구원적 열림이다. 의식보다는 존재를 우선하다. 의식을 철저하게 바성적이고 성찰적으로 태도를 취한다. 역사성과 시간성의 문제는 간접적 속성을 지닌다. 의식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사람들이 탈출해야하는 감금이라고 하였다. 존재자는 그 현존재에서 말이다. 자기 정립은 필요적이다. 타자에 대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자기 정립이 없다는 자에 대한 환대의 위험성은 이 레비나스의 철학 쪽과 관련있는 사유다.후설과 하이데거를 레비나스를 비판을 하였고 이를 통해 타자를 만나려고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현존재에서 존재로 보았다. 한편 레비나스는 존재를 자기정립, 홀로서기 그리고 분리된 자기로서 존재자로 갖춰 향유와 소통으로 타자를 대면한다. 타자와 타자가 만나도록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는 책임성의 주체를 강조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과정은 서로 차이가 있다. 자기 훈련이 열림의 전제로서 정신적 기율을 강조한 것이다. 존재로부터의 자기정립 없이는 레비나스는 타자를 만날 수 없다고 하였다. 종교는 일상적 삶을 규정하는 삶의 원리다. 레비나스에서는 이에 대한 부분이 느껴지지만 하이데거에게 종교는 없다. 이러한 한계는 윤리적 과정의 관계를 언어로 사용하는 순간에 대한 명확한 의견이 없다. 타자에게는 무수한 존재들이 있을 것이다. 타자는 절대화되어있고 특권화되어있다. 타자로서 혹은 제 3자로서 나는 또다른 나의 타자를 체험할 것이다. 신 아래에서의 인간은 절대화로 혹은 우월화로 쳐다본다. 이 인간은 인간을 만날때 타자화 시키고 열등화 시킨다. 바로 18에서 19세기 빅토리아 조의 육체적 억압과 연관있다. 타자는 의무가 없다. 윤리적 관계속에서 말이다. 유한자인 나에게 오직 의무만 있을 뿐이다.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대칭적 관계가 되면 포용과 관련용의 논리 그리고 환대의 논리에서 차이를 서로 강화시키는 논리로 발전된다. 다문화주의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대칭적 관계에서 비롯된다.
현상학은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와는 다른 형식이다. 소쉬르의 언어혁명에서 기인한 구조주의는 데리다, 들뢰즈, 바디우 같은 사상가들을 낳았다. 현상학과 관련된 인물은 하이데거, 후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타자를 귀속 시킬 수 밖에 없다라고 주장하고 타자를 동일자로 귀속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포스트 구조주의는 주체 죽음 이후 주체는 무엇인가 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질료는 변화하면서 일면적이다. 질료는 외부의 대상으로 이러한 의식작용의 대상을 형상이라고 한다. 이라한 통합적인 인식 자용을 노에시스라고 한다. 자연적 태도는 자아와 세계가 대립되는 초월론적인 세계다. 세계 모든 것은 자아와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순간 멈출때 그 시점을 바라본다. 선험적으로 경험에 있기 앞어서 이때 선행하는 의식작용이 있다. 현상은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서의 현상이다. 명증성과 확실성이 세상의 혼란스러운 과학기술 문명안에 있다. 인간의 의식에서 존재한다. 존재가 드러날려면 현상학적 환원을 이룬다. 존재자가 역사성과 세계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존재자의 사고다. 이는 인간 중심적이다. 무형의 것을 해체시킨다. 초월론자 자아가 바깥 세계를 동일성으로 환원 시킨 것과 같이 존재를 인식은 하지만 차이들이 존재에 묻혀 들어간다. 존재자들을 익명성 속으로 사라져 들어가는 것이다. 과학적태도는 자연적 태도다. 과학은 실증적이다. 다양한 인상들이 하나로 이미지화 되어 인식되어 있다. 의미를 통합적 구성한다. 외부 세계에 대한 존재들도 공간에 넣는다. 이는 타자의 문제다. 의식 자체가 현실의 객관적 유무는 의심해도 의심에 대한 현실성은 없다. 우리의식에 드러나 사태 그 자체인 것이다. 몸은 물론 이미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존재자들을 잊도록 해주는 존재 즉, 늘 존재자적 중심으로 만 생각하는 것을 접으면 초월론적 에고가 될 것이다. 실증주의는 자료를 모으면 모을수록 객관적 관착이 가능하다. 규칙을 추측하고 일반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의식이 세계관 연속에서 구성는 것을 지양한다. 자기 자신의 밖을 지향하는 것이다. 경험된 세계 자체가 지향된 것이다. 후설의 의식은 항상 열려있기 때문에 자기 독립적이지 못하다. 구원적 열림이다. 의식보다는 존재를 우선하다. 의식을 철저하게 바성적이고 성찰적으로 태도를 취한다. 역사성과 시간성의 문제는 간접적 속성을 지닌다. 의식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사람들이 탈출해야하는 감금이라고 하였다. 존재자는 그 현존재에서 말이다. 자기 정립은 필요적이다. 타자에 대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자기 정립이 없다는 자에 대한 환대의 위험성은 이 레비나스의 철학 쪽과 관련있는 사유다.후설과 하이데거를 레비나스를 비판을 하였고 이를 통해 타자를 만나려고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현존재에서 존재로 보았다. 한편 레비나스는 존재를 자기정립, 홀로서기 그리고 분리된 자기로서 존재자로 갖춰 향유와 소통으로 타자를 대면한다. 타자와 타자가 만나도록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는 책임성의 주체를 강조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과정은 서로 차이가 있다. 자기 훈련이 열림의 전제로서 정신적 기율을 강조한 것이다. 존재로부터의 자기정립 없이는 레비나스는 타자를 만날 수 없다고 하였다. 종교는 일상적 삶을 규정하는 삶의 원리다. 레비나스에서는 이에 대한 부분이 느껴지지만 하이데거에게 종교는 없다. 이러한 한계는 윤리적 과정의 관계를 언어로 사용하는 순간에 대한 명확한 의견이 없다. 타자에게는 무수한 존재들이 있을 것이다. 타자는 절대화되어있고 특권화되어있다. 타자로서 혹은 제 3자로서 나는 또다른 나의 타자를 체험할 것이다. 신 아래에서의 인간은 절대화로 혹은 우월화로 쳐다본다. 이 인간은 인간을 만날때 타자화 시키고 열등화 시킨다. 바로 18에서 19세기 빅토리아 조의 육체적 억압과 연관있다. 타자는 의무가 없다. 윤리적 관계속에서 말이다. 유한자인 나에게 오직 의무만 있을 뿐이다.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대칭적 관계가 되면 포용과 관련용의 논리 그리고 환대의 논리에서 차이를 서로 강화시키는 논리로 발전된다. 다문화주의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대칭적 관계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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