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농민전쟁 (Der deutsche Bauernkrieg) 1

2009. 7. 31. 15:06Literatur/Deut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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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농민전쟁

(Der deutsche Bauernkrieg)

1


과목 : 독일문화1

담당교수 : 김창우 교수님

발제자 : 2006006010 박보은

2006006015 박형락


Freheit ist immer die Freiheit des Andersdenkenden - Rosa Luxemburg


1. 독일농민전쟁이란?

Martin Luthers Botschaft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weckte auch bei den Bauern neues Selbstbewusstsein. In Deutschland lebten die allermeisten Menschen noch von der Landwirtschaft. Ihr hartes Leben hatte sich seit Generationen kaum verändert.

Seit Ende des 15. Jahrhunderts hatte es daher immer wieder einzelne Aufstände wie die "Bundschuh-Bewegung" am Oberrhein gegeben, die blutig niedergeschlagen worden waren. In Süddeutschland und Thüringen kam es 1524~25 schließlich zu einer Rebellion, die nicht mehr regional begrenzt war.

2. 농민전쟁 당시 독일의 경제 상태

1) 14~15세기에 독일의 산업은 상당한 발전과정을 거쳤다.

a. 봉건적인 농촌지역의 산업은 도시의 길드 생산조직으로 대체되었다. (화폐경제 등장)

b. 상업도 산업과 보조를 맞추었다.

a) 한자동맹1)을 통한 해상활동 독점

b) 아우구스부르크와 뉘른베르크 : 부와 사치의 중심지

c. 15세기의 독일의 광부는 세계에서 가장 숙련된 기술의 소유자였다.

2) 독일의 국민생산은 다른 나라의 진보를 따라잡지 못하였다.

a. 농업 : 영국과 네덜란드에 비해 훨씬 뒤쳐져 있었다.

b. 산업 : 이탈리아, 영국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다.

c. 항해 : 영국, 네덜란드가 압도하였다.

3) 독일의 문명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산업과 상업 중심지를 중심으로 몇몇 지역에서만 살아 있었다. 그리고 개개의 중심지의 이해관계조차 달랐으며 거의 접촉이 없었을 정도였다. 즉 영국에 있어서 런던의 경우처럼 전국적인 산업과 상업의 중심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도시가 없었다.

4) 농촌인구에 관해서 살펴볼 때 오직 귀족들만이 넓은 지역과 새로운 수요에 접촉하게 되었고 농민 대중은 지방적 제 관계와 지방적 시야의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였다.

5) 영국이 상업과 산업의 대두로써 전국에 걸쳐 여러 이해관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 반면에 독일은 지방 중심지를 중심으로 다양한 이해관계를 무리 짓는 데에만 성공하였다. 이는 정치적 분권화 현상을 나타내며 이후에 독일이 세계 상업으로부터 밀려남으로써 그 추진력을 획득하였다.

a. 통일의 결속 약화

b. 대봉건 영주는 거의 독자적인 제후로 전환

c. 제국의 기사들이 제휴하여 상호 대립하거나 아니면 제후나 황제에 대항

6) 지방적이고 지역적 중앙집권화의 대표자는 영주들이었으며 이들과 함께 황제도 점차 여러 제후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7) 황제로부터 거의 독립되어 있었으며 통치권의 주요 부분을 소유한 제후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전쟁을 선포하고 스스로 강화를 맺기도 하였으며 지방 의회를 소집하며 조세를 징수하였다.

8) 산업의 발달과 군사학의 발달, 보병의 중요성 증대, 화기의 보급으로 중세의 봉건적 계급질서에서 중류정도의 재산을 소유한 기사계급은 거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들은 독자적인 소제후의 지위로 상승하든지 아니면 하층 귀족의 지위로 몰락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극빈화 되었다.

9) 인쇄술의 발명과 확대된 상업의 요구로 말미암아, 성직자들은 읽기와 쓰기에 대한 독점권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고등교육의 독점권을 박탈당하였다. 즉 상업의 발달로 인한 분업의 요구는 지적인 노동의 영역에도 도입되고 있었다.

a. 성직자 계급중 귀족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주교와 대주교 그리고 고위 성직자들은 무자비하게 피 지배인들을 착취하였고 잔인한 폭력 뿐 아니라 종교적 음모도 이용하여 수탈하기 까지 했다.

b. 성직자 계급 중 평민적 집단은 도시와 농촌의 설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교회의 봉건적 위계질서를 벗어나 있으며 교회의 부에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다. 중간계급이나 빈민 출신으로서 이들은 대중의 생활에 한층 더 근접해 있었고 중간계급과 빈민의 심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10) 도시에서는 상업과 수공업의 성장으로 인하여 중세의 성외시민은 세 개의 성격이 다른 집단으로 구분되었다.

a. 귀족가문

a) 최고의 부를 소유한 가문

b) 도시 참사회에 장악하였고 모든 공직을 장악하였다.

c) 도시지역의 농민들을 무분별하게 취급하였다.

b. 중간계급반대파

a) 현대의 자유주의자의 선조로서 부유한 중간계급, 적당한 정도의 부를 소유한 중간계급 그리고 지역적 조건에 따라서 다소간 눈에 띄는 하층 중간계급을 포괄

b) 시 행정의 통제권을 요구하고 시민회의를 통하여 입법권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c) 소수의 가문중심의 정책을 수정하도록 요구하였다.

c. 빈민반대파

a) 몰락한 중간계급의 성원과 시민권을 소유하지 못한 도시거주대중으로 구성

b) 농민전쟁 전에는 하나의 파당이 아니라 뇌물로서 매수될 수 있는 오합지졸로서 정치투쟁의 무대에 나타났다.

d. 농민

a) 전 계급의 최하층부에 대규모 피착취 국민 대중을 말한다.

b) 전 계층의 부담을 떠맡고 있다.

c) 영주에게 돈을 바치지 않고는 농민은 결혼할 수도, 죽을 수도 없었다.

11) 독일에서 농민전쟁 전까지 어떠한 전 국가적인 농민 봉기도 발생하지 않았다.

a. 광대한 지역에 걸쳐 분포되었기 때문에 농민이 공통된 이해에 도달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b. 수세대를 통하여 계승된 굴복하는 오랜 습관, 많은 지역에서의 무기사용의 경험부족

c. 영주의 인간성에 따라 생기는 착취정도의 불균등함

d. 농민이 모든 계급으로부터 균등하게 착취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른 계급과 제휴할 수 없었다.


*농민전쟁 당시 독일 경제 상황에 따른 농민의 경제적 형편의 상반된 입장*

a. 빈곤설 : 엥겔스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다.

a) 엥겔스(Friedrich Engels) : “군주, 관리, 귀족, 성직자, 도시귀족, 시민 등 사회의 모든 계층은 농민 위에 누워있었다. 농민은 물건같이, 짐을 진 짐승같이 혹은 그보다도 더 열악하게 취급되었다. 합의된 부담만 해도 그를 짓누르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나 부담은 날로 증가해갔다.”

b) 스미린 : “농민 경제의 잉여를 최대한 학취하기 위해 차지 조건을 자주 변경하고 지대를 인상했기 때문에 1525년경의 농민은 빈곤했다.”

b. 부유설 : 구서독의 대표적 역사가인 프란쯔는 농민들이 그들의 향상된 경제적 지위에 걸맞은 정치적 자유를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고 하였으며 농민층의 내적 향상과 부유의 결과로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3. 농민전쟁 당시 독일의 정치 상태

1) 농민전쟁 당시 독일에는 약 2500개의 영방국가가 있었는데 그중 2000개는 소영 방이었다.

2) 군주들은 대부분 신성 로마제국의 기사로서 황제에 대한 봉사를 자신의 주 업무로 여겼으며 통치권에는 무관심하였다. 하지만 15세기 들어서면서 이들도 자신의 통치권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해 독자적인 영방국가를 형성하려 하였다.

3) 농민전쟁 당시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독일의 농민공동체가 있었다.

a. 공동 작업을 하는 농민들이 파종기, 추수기, 경작지 등을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의사결정력의 경험에 근간하여 자치권을 지녔다. 이 농민공동체의 자치권은 정치적 자치권으로 발전하여 경제적 가치가 없는 지역의 경우 치안 유지, 재판권과 집행권 등을 행사하는 소국가 역할을 감당하였고 심지어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영방국가로 인정되었다.

b. 15세기 말 영방국가를 이루어가려던 영주가 농민공동체의 자치권을 잠식하려하자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c. 영주가 잠식하려하던 농민공동체의 자치권에는 중세사회에서의 목재 권과 방목권이 있는데 이것은 빈민에게도 삶의 기회를 보장해주고 빈부 차이를 어느 정도 완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리권이 영주에게 넘어가면 농민들은 공동체에 대한 참여 기회가 제한되고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영주 측에서도 관리 채용 등 재정적 필요가 증가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공동체의 권리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4. 농민전쟁 당시 독일 사회 상태

1) 영방 화와 관련된 경제, 정치적 변화는 농촌의 사회구조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a. 영주들은 통치단위의 보존을 위해 분할상속을 금하였다.

b. 통치할 신민확보를 위해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c. 신민 확보를 위해 다른 영주의 신민과 혼인하는 것을 금하였다.

2) 경제적, 정치적 변화와 맞물려 사회적 긴장이 유발되었고 혼인과 상속 등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억눌리고 있었다.


5. 2대 반대파의 결성과 그 이데올로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혁명적이고 종교적이며 정치적 사상이 전반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반동파 혹은 가톨릭 세력, 종교개혁파 중간계급 혹은 루터파 그리고 혁명적 분자가 있다.


1) 보수적 가톨릭 세력

a. 기존의 제국의 권력을 유지시키는 데 이해가 놓여있는 분자들

b. 성직자, 세속 제후의 일 분파, 부유한 귀족, 고위성직자와 도시귀족을 포괄함

2) 중간 계급적 루터파와 온건 개혁진영 (반대파)

a. 기치 하에 있는 유산계급 반대파 : 하층귀족, 중간계급 그리고 교회영지를 몰수하여 부를 획득하고 제국으로부터 보다 확고한 독립을 확립하기 위한 기회를 장악하고자 희망하였던 세속 제후의 일부마저도 규합하였다.

b.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 1483~1546)

a) 고대의 단순한 교회제도로의 복귀와 베타적인 성직자 계급의 폐지를 주장

b) 자신의 활동 초기에는 강인한 농민적 성격을 보여주었다.

c) 빈민 운동에 강력한 무기인 성서해석을 제공해 주었다.

d) 한편으로는 농민봉기와 관계를 청산하고 종교적. 세속적 권위에 대한 자신의 저항과도 결별하였다.

3) 농민-빈민 진영 (반대파)

a. 그들은 스스로 혁명적 파당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었다.

b. 이 혁명적 파당의 요구와 교의는 뮌처를 통해 가장 대담하게 표현되었다.

c. 토마스 뮌처 (Thomas Münzer : 1490~1525)

a) 성직자와 교황에 대한 중간계급의 이단운동의 모든 요구를 공유하면서도 고대 기독교적 평등의 회복을 요구

b) 신의 자녀로서의 평등에서부터 시민적 평등과 부분적으로 또한 재산의 균등을 요구

c) 신의 왕국이란 계급차이, 사유재산, 사회구성원들에 대립적인 위로부터 강요된 국가 권력이 없는 사회로 이루어진 국가라고 주장

d) 사회 공화 주의적 평등의 천년왕국적 비전과 대비

e) 뮌처의 교의에서 그 같은 공산주의적 개념이 사회내의 활력적 분파의 욕구로 표현

f) 뮌처의 포교활동이 농민과 빈민들을 동요시켰다.


*루터와 뮌처 - 그들의 종교개혁과 농민과의 관계*


종교개혁은 16~17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그리스도 교회의 혁신 운동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연방분립이 확정되고 황제가 제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교황과 손을 잡는 과정에서 교황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그리고 로마교회는 신성로마제국에게 많은 부과금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성 베드로 성당 신축의 재정적 지원을 위한 면죄부 판매가 시행되고 루터는 그것을 보고 95개조 항의문을 써서 비판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교황은 칙서를 보내 파문하겠다고 위협을 하나 루터는 굴복하지 않았고 카알 5세는 루터를 추방시켰고 루터의 추종자들은 체포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루터는 한동안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서 성서를 번역하였는데 당시 통일된 독일어가 없던 독일에서 루터의 성서 번역은 민족적 의미를 지닌 문화적 업적으로 일컬어 졌다. 이는 민족적 결속력 강화와 통일 독일에 대한 희망을 강화하였다. 루터는 성서 번역을 끝낸 후 새로운 교회 조직에 몰두했다. 그리고 1530년 이후 종교개혁이 전 독일과 북유럽, 폴란드로 확산되었다.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1524년 고대사회 및 봉건사회의 지배계급인 귀족층과 봉건 영주 층에 대하여 피지배층인 농민이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를 농민 전쟁이라고 한다. 그 당시 농민계급의 몰락과 빈궁 그리고 수탈이 심한 상황이었다. 농민들은 지역적으로 제한되어 있어 조직적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한 비밀 동맹을 결성하였다. 교황과 황제에 저항하는 루터의 용감한 태도와 직업소명설에 고무된 농민들은 혁명적이 되어 봉건 사회 전체에 비판을 가하였다. 1524년 남서부 독일과 슈바벤에서 대규모 농민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이는 북부와 라인 강 서쪽으로 번져나갔다. 루터는 종교개혁이 사회변혁으로 발전하는 것을 반대해 농민 전쟁이 발발하자 제후의 편을 들고 루터는 민족 운동의 적이 되었다. 루터의 추종자 중 한 명인 토마스 뮌처가 튀링엔에서 농민전쟁을 이끌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제후들의 보복으로 약 10만 명의 농민들이 죽음을 당했다. 살아남은 농민들은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300여 년간 농노로 갖은 압박을 받았다. 농민전쟁은 비록 실패로 끊났지만 유럽에서 봉건주의에 항거한 가장 큰 농민운동이었다.

루터는 성서 번역을 끝낸 후 새로운 교회 루터의 사상은 신앙의 원천은 성서라고 하는 성서중심주의와 신의 은통과 믿음만이 인간을 구제하며 노동을 중시했다. 그리고 비활동적 금욕주의 배격과 수도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리고 ‘신 앞에 모두 평등하고 누구나 성직자가 될 수 있다’라는 만인사제주의를 지녔다. 루터의 사상 중 자유의 구호는 전체로의 인간,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조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단지 교회적인 개체 혹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인간만이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즉 백성으로서의 인간은 관계당국에 복종할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은 ‘평등한 기독교인’ 이라고 천명했지만 그에게 있어 평등이란 자유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영혼의 평등만 의미할 뿐이었다. 따라서 루터는 농민운동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루터와는 달리 과격한 종교개혁가 토마스 뮌처는 민중들이 권력을 차지해야한다고 보았다. 뮌처는 1524년 이후 일련의 서한과 선언문들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계속 펼쳤다. 그는 1525년 농민전쟁 중에 국민주권의 원칙으로서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독일 최초의 의사표시를 하였다. 뮌처는 루터와는 다르게 ‘은총’과 ‘성서’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은 내면에서 신의 계시에 동참해야한다고 주장 했다. 루터의 경우에는 성서의 말씀이 기독교인에게 모범적인 지침이라고 하지만 뮌처는 농민들의 기독교적인 삶의 실현을 투쟁과 진리의 쟁취에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개혁가로서 루터가 시작에 그친 일을 뮌처가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신앙의 변혁이나 정신적 영역에서의 변혁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개혁 없이는 불가능 하다고 본 점에서 뮌처는 그의 시대를 훨씬 앞질러 매우 근대적인 생각을 한 것이었다.


6. 1525년 이전의 농민전쟁 전쟁과정

1) 한스 뵈하임

a. 1476년 뷔르츠부르크의 주교구에서 최초의 농민 음모 주도

b. 당시 배경 : 민중들은 과중한 조세와 지불금, 가문 사이의 불화 그리고 주교와 성직자, 귀족에 의해 무자비하게 약탈을 당하고 있었다.

c. 금욕주의를 주장

d. 영감을 받고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는 설교를 하자 남독일 전역에서 수만 명의 순례자가 찾아오는 사건이 발생

2) 분트슈 봉기 (Bundschuh-Bewegung)

a. 원래 가난한 농민들이 신는 가죽 장화였는데 농민 봉기 무렵에는 농민의 단결과 자조를 상징하는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b. 1492~1517년까지 남부독일 각지에서 가죽구두를 표치로 삼아 봉기

c. 농노제의 철폐, 각종 세금의 면제 등을 내세웠으며 이후 독일 농민전쟁에 합류

d. 신의 정의, 신법 원칙을 기초하여 봉건 부과조의 폐지, 수도원 재산의 몰수 주장

3) 가난한 콘라트 (Der Arme Konrad) 봉기

a. 1514년 독일의 뷔르템부르크에서 발생

b. 원인

a) 중세말기 쇠퇴기에 특권적 시민이 행정에 진출하기 시작하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농민층이 봉기를 일으킴

b) 낭비벽이 심했던 뷔르템부르크 공 울리히가 재정적자를 메우려고 새로운 세를 지방에 부과 했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봉기를 일으킴

c. 농민층이 지역적 차이를 극복하고 보편적 이념 하에서 협동했음


7. 마치며

발제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독일 혁명사를 중심으로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준비과정에서 얼마나 쉽고 빠르게 전달하느냐에 대한 문제에서 위 책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고민을 가졌다. 그래서 다른 자료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독일농민전쟁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좌파, 우파, 중도 이렇게 3가지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처럼 어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이렇게 극명한 시각차를 드러내고 있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발제를 준비하면서 엥겔스의 저서를 중심으로 하면서 필요에 따라 마티 키친 저서를 보충하는 형식으로 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농민이라는 존재는 항상 밑바닥이었으며 착취당하는 모습이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될 것이라는 무서운 생각도 해본다. 세상 속에서 농업이라는 것은 가장 기본이 되지만 기본 밖에 안 되기 때문이라는 우리들의 생각에서 나온 게 아닐까? 지난해 농촌연대활동으로 청송에 간적이 있었다. 청송이라는 마을에 간적이 있었다. 당시 개인적인 사정으로 후발대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선발대가 겪었던 일에 대해 잠시 들을 수 있었다. 마을 내부 사정은 이미 학교라는 교육시설은 없어진지 오래며 나이 많은 사람 밖에 없었으며 일손이 부족해 시간제형식의 노동을 고용해서 농사를 짓는 다고 한다. 거기다가 농민전쟁당시 독일 농업 사정처럼 착취당하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농업공동체형식의 부농도 존재했었다. 이처럼 청송이라는 마을도 부농으로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농민들이 힘들어 했었는데 특히 후발대로 온 나에게 가장 먼저 시킨 일이 배추가 너무 많아 없애야 가격이 올라간다고 멀쩡한 배추를 하루 동안 파헤쳤다. 그리고 일 중간 중간에 깡소주를 주셨다. 그때 필자는 힘들다는 생각보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민이 생존을 위해 멀쩡한 밭을 헤치는 거랑 술 마시는 거였다. 거기다가 선전하는 날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농촌연대활동 자체가 정치적인 개념과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당시 떠들썩했던 주제가 한미 FTA반대 시위 동참 및 서명 이었는데 선전할 때 농민들이 왜 반대하는지 몰라 했고 그걸 필자가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교육도 받지 않았다. 거기다가 중요한 것은 서명할 때 농민에게 설득 없이 하면 좋은 거라고 말하면서 서명 부탁한 것은 필자로선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는 농민전쟁이전에 독일 사회에서 국가적인 봉기가 없었던 상황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구로 다시 돌아가는 마지막 날 어떤 분과 이야기 했는데 내가 공격적으로 질문한 적이 생각난다. 그 때 단도직입적으로 한미 FTA 반대하는 건 이해되는데 그러면 지금 현실상황에서 해결책은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그때 한마디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맴돈다. “해결책은 아직 없다.” 세상의 일을 시행할 때는 뚜렷한 목적과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당시 상황은 단순 몸부림일 뿐이다. 안 그래도 약자인데 강자 앞에서 해결책 없이 몸부림을 부린다는 것은 생쇼라고 생각했다. 독일농민전쟁의 발생 배경을 앞서 정리한 것처럼 경제와 사회 그리고 정치 상황이 맞물려야 하고 거기에 반비례하는 어떤 정당화의 힘이 약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지금 우리 농민 현실을 보자면 경제적 부담이 크고 사회적 긴장도 근데 해결책이 없으니 정치적 기대감은 상실되어서 힘을 받을 수 없고 거기에 반비례하는 힘인 정당화의 힘 즉 독일 사회 같으면 종교개혁으로 인한 귀족 성직자의 힘이나 교리, 계시겠지만 우리 현실을 봤을 때는 농민들의 입장에서 반대하는 힘과 여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너무 농민과 반비례해서 그러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발제를 준비하면서 어떻게 농민전쟁이 일어났는지 발생배경을 알 수 있었으며 그것을 우리 현실에 적용시킨 좋은 계기가 되었지 않나 생각된다.


*참고 문헌* (가나다 순)


독일문학사 : 볼프강 보이틴 : 삼영사

독일혁명사 2부작 : 프리드리히 엥겔스 : 소나무

역사비평 : 김헌수 : 역사문제연구소

위키피디아 : 우리들의 백과사전

유럽혁명사 : 설영환 : 동천사

케임브리지 독일사 : 마틴 키친 : 시공사


함부러 불펌, 인용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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