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문화 관련 정리

2009. 7. 31. 15:05Literatur/Deutsch

반응형
독일의 사회보험
독일의 사회 보험에는 연금보험, 질병보험, 재해보험, 실업보험, 간병보험이 있다.

루터와 뮌처 - 그들의 종교개혁과 농민과의 관계
종교개혁은 16~17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그리스도 교회의 혁신 운동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연방분립이 확정되고 황제가 제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교황과 손을 잡는 과정에서 교황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그리고 로마교회는 신성로마제국에게 많은 부과금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성 베드로 성당 신축의 제정적 지원을 위한 면죄부 판매가 시행되고 루터는 그것을 보고 95개조 항의문을 써서 비판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후 교황은 칙서를 보내 파문하겠다고 위협을 하나 루터는 굴복하지 않았고 카알 5세는 루터를 추방시켰고 루터의 추종자들은 체포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루터는 한동안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서 성서를 번역하였는데 당시 통일된 독일어가 없던 독일에서 루터의 성서 번역은 민족적 의미를 지닌 문화적 업적으로 일컬어 졌다. 이는 민족적 결속력 강화와 통일 독일에 대한 희망을 강화하였다. 루터는 성서 번역을 끝낸 후 새로운 교회 조직에 몰두했다. 그리고 1530년 이후 종교개혁이 전 독일과 북유럽, 폴란드로 확산되었다.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1524년 고대사회 및 봉건사회의 지배계급인 귀족층과 봉건 영주층에 대하여 피지배층인 농민이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를 농민 전쟁이라고 한다. 그 당시 농민계급의 몰락과 빈궁 그리고 수탈이 심한 상황이었다. 농민들은 지역적으로 제한 되어 있어 조직적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한 비밀 동맹을 결성하였다. 교황과 황제에 저항하는 루터의 용감한 태도와 직업소명설에 고무된 농민들은 혁명적이되어 봉건 사회 전체에 비판을 가하였다. 1524년 남서부 독일과 슈바벤에서 대규모 농민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이는 북부와 라인 강 서쪽으로 번져나갔다. 루터는 종교개혁이 사회변혁으로 발전하는 것을 반대해 농민 전쟁이 발발하자 제후의 편을 들고 루터는 민족 운동의 적이 되었다. 루터의 추종자 중 한 명인 토마스 뮌처가 튀링엔에서 농민전쟁을 이끌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제후들의 보복으로 약 10만 명의 농민들이 죽음을 당했다. 살아남은 농민들은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300여 년간 농노로 갖은 압박을 받았다. 농민전쟁은 비록 실패로 끊났지만 유럽에서 봉건주의에 항거한 가장 큰 농민운동이었다.
루터는 성서 번역을 끝낸 후 새로운 교회 루터의 사상은 신앙의 원천은 성서라고 하는 성서중심주의와 신의 은통과 믿음만이 인간을 구제하며 노동을 중시했다. 그리고 비활동적 금욕주의 배격과 수도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리고 ‘신 앞에 모두 평등하고 누구나 성직자가 될 수 있다’라는 만인사제주의를 지녔다. 루터의 사상 중 자유의 구호는 전체로의 인간,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조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단지 교회적인 개체 혹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인간만이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즉 백성으로서의 인간은 관계당국에 복종할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은 ‘평등한 기독교인’ 이라고 천명했지만 그에게 있어 평등이란 자유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영혼의 평등만 의미할 뿐이었다. 따라서 루터는 농민운동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루터와는 달리 과격한 종교개혁가 토마스 뮌처는 민중들이 권력을 차지해야한다고 보았다. 뮌처는 1524년 이후 일련의 서한과 선언문들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계속 펼쳤다. 그는 1525년 농민전쟁 중에 국민주권의 원칙으로서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독일 최초의 의사표시를 하였다. 뮌처는 루터와는 다르게 ‘은총’과 ‘성서’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은 내면에서 신의 계시에 동참해야한다고 주장 했다. 루터의 경우에는 성서의 말씀이 기독교인에게 모범적인 지침이라고 하지만 뮌처는 농민들의 기독교적인 삶의 실현을 투쟁과 진리의 쟁취에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개혁가로서 루터가 시작에 그친 일을 뮌처가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신앙의 변혁이나 정신적 영역에서의 변혁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개혁 없이는 불가능 하다고 본 점에서 뮌처는 그의 시대를 훨씬 앞질러 매우 근대적인 생각을 한 것이었다.

독일의 3대 제국
제1제국 : 신성로마제국 : 962~1806년
제2제국 : 프로이센 : 1815~1918년
제3제국 : 히틀러 :1933~1945년

니벨룽겐의 신화에서의 충절이란 무엇인가?

봉건제도
봉건제는 가신제와 봉토제로 나뉘어져있다. 가신제는 주종관계로써 봉건제의 인적 측면으로 영주와 가신의 관계를 뜻한다. 봉토제는 봉토 즉 봉건제의 물적 측면으로 영주가 가신의 충성의 대가로 주는 땅을 말한다. 최대의 영주는 왕이며 왕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관계가 이루어진다.

할슈타인원칙
1955년 9월 외무장관 할슈타인이 작성한 것으로 서독만이 자유선거에 의한 정부를 가진 유일한 독일의 합법구가이므로 서독은 동독을 승인하는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국제적 냉전기류에 편승하던 독일은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여 냉전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

동방정책
1969년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추진하여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1972년부터 1987년 까지 약 15년간 34차례의 협상을 통해 과학, 기술, 문화, 환경 ed에 관한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동서독간의 민간인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게 된다.

니벨룽겐의 신화의 내용
Nebel 은 안개를 뜻한다. 난쟁이 알베르뤼히가 지키는 보물에 있는 초인의 이름이다. 또한 부르군트 종족이 이름이다. 독일문학의 제 1차 황금시대인 중세의 영웅서사시로서 독일 기사문학이 최대걸작으로 꼽힌다. 민족대이동 시대에 있었던 영웅설화가 전승되어 여러 형채가 이 작품에서 집대성되었다. (생략)

니벨룽겐의 기사에 대한 이해
니벨룽겐의 노래는 기독교 문화와 게르만 정신의 복수, 충성, 용뱅과 독일인의 철저성을 잘 보여준다. 또한 궁정문학이 지녀왔던 권선징악과 백인우월주의적인 사상에서 탈피한 모습을 보여준다.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기사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보면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 수백 명만 데리고 떠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기사들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용감하게 운명에 도전하는 인물로 그려진 것이다. 이는 독일이의 성향과 전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항상 기개가 넘치고 용맹스러우며 파란만장한 운명에 생가를 초월하여 과감하게 도전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니벨룽겐의 기사의 혼을 이어받은 독일의 문화와 성향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카알대제
742년에 태어나 814년에 죽었다. 프랑크왕국의 전성기를 이룩하였고 게르만족을 프랑크 앙국으로 통합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전통을 서구에 계승했다. 로마의 후계자 자처하며 로마로 유산 집결시킬수 있었다. 랑고바르트 왕국 정복하고 작센족을 개종시켰다. 그리고 기독교 전파는 카알대제가 제국을 확장해 가는 방식이자 가장 큰 업적이었다. 800년 로마 성베드로 사원에서 교황 레오 3세가 카알대제를 황제로 서품하였다.

동유럽 개척운동

십자군 원정과 맞물려 이루어졌다. 1000~1300 년경에는 독일인구가 약 2배로 증가하였고 종교적 포교활동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1199년 창립된 독일기사단은 동유럽 개척과 대규모 농민이 이주사업의 주축이 되었는데 이것은 프로이센의 시작이다.

서독의 사회적 경제체제
초기 서독은 중앙집권적인 통제경제 모델을 채택하였으나 동독에 비해 물자 부족 등 전체적으로 후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마샬플랜 등 원조 계획에 의해 지원을 받게 되었지만 경제난을 해소해 주지 못했고 국민경제를 왜곡시켰다. 독일정부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내세웠다. 당시 국민들은 시장경제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독일 국민들은 10년간 나치즘 관리경제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대공황 등을 초래한 시장경제에 회의적이었다. 1950~60년대 독일은 유럽평의회에 가입하고 유럽철강석탄 공동체, 경제공동체등의 출범 가입국이된다. 이를 바당으로 고속성장을 하여 ‘라인간의 기적’을 이루게 된다. 또한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하고 전후 고속성장에서 생기는 국내 불황 등을 타게하기 위해 노력한다. 1960년대 후반 경기 침체가 심화되자 경제 정책을 수정하여 성장과 형평성의 균형발전에 주력하게 되고 토지개혁, 조세개혁, 자산형성법, 노사동등결정권, 경영참여권 등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중산층을 형성하여 탄탄한 복지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독일 경제 발전은 1972년 뮌헨 올림픽을 개최함으로써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부르쉔샤프트

함부러 인용, 베끼지 마세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