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과 안티고네

2011. 6. 27. 22:20Review/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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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깡 세미나 7에 있는 THE ESSENCE OF TRAGEDY : A commentary on Sophocles's Antigone 에서 윤화영 교수님 강의 내용을 요약한 것임.
 오이디푸스가 숙명적 무지와 숙명적 무모함의 소유자라면 안티고네는 아버지의 운명을 그대로 따르는 인물이다. 신이나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여 죄를 범하게 한다. 평소에는 공존했었다. 법을 따르고 죽은자를 묻는일.
 S인 주체는 태어났을 때 그 상태는 자연적인 존재일 뿐이지 주체인 상태는 아니다. 그런데 집단속에서 나는 나로써 타자와 나 사이에 개별됨으로써 주체는 어떤 식으로는 나를 표시되어진다. 이를 상징계의 과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거세된다. 빗금이 쳐진다. 자연적 존재일때 아무것도 자신의 욕망을 하면 되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젠 각각의 개인의 욕망을 사회가 적절히 대타자가 억압을 하는 것이다. 상징화에 의해 포기해야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일정 정도 포기해야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나와 대타자사이에서 언어적 시스템이 나온다. 하나의 자연적 존재에서 주체적 존재로 변모해나간다. 주체, S는 내가 내가 말할게 없고 남이 누군가 말할 수 없는 상태이고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완전하고 온전한 상태이다. 빗금 그여진 주체는 자연적 탄생이 아닌 주체로서 탄생됨인데. 결국 주체의 죽음으로서 이 사회에 태어난 것이다. 우리는 빗금 그여진 상태로 죽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S로서 탄생하기 위해 빗금그어진 상태를 죽이는 것을 두개의 죽음이라고 한다. Sade는 S가 빗금그여진 주체로 되는 것은 무언가에 작동되니까 그렇게 된것이다.
 안티고네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모르겠다고 끝까지 버티면서 고문을 버텼다. 대타자 입장에서 모델이 될 가능성은 저항하는 안티고네이다. 그러나 끝까지 버티면 주어야 한다. 추상적 개념으로서 말이다. 산채로 무덤에 간다는 것은 상징적 죽음이다. 주체의 표지를 뺏음이다. 살아있는데 무적자인 셈이다. 즉, 사회적인 죽음이다. 상징적 죽음이란 폭군이 죽으면 그의 모든 기록을 없애는 것과 같다. 욕망 발생 자체 매커니즘을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대타자가 주는 보상의 지위는 욕망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이유는 항상 욕망은 항상 성취하면 충족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그러나 항상 결핍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결핍, 대상을 가지지 않고 주이상으로 감으로써 자기 향유를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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