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이야기

2011. 6. 25. 15:57Review/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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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KBS 고전아카데미에서 이기상 교수님이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강의가 열게 되는 강의실안에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공간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라고 한다. 존재한다라고 하면서 대통령이 존재하는 가에 누군가가 질문을 한다. 그럼 대통령은 존재하는가? 엄밀히 말하면 존재하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강의실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은 단순한 도국가 아니라 세계를 구성한다. 기술이 인간의 도구인줄 알았는데, 이제는 의존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종속되어 지고 있다. 과학에 종속되지 않으면 시대에 뒤쳐진다라고 말한다. 과학이 얼마가 강할 수록 군사력도 거기에 배례된다. 사실이러한 셈하는 사유? 이런 것들에 대한 발달은 고대 그리스부터 지금까지 쭉 내려오고 있었다. 로고스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 이기도 하다. 정신보다 셈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성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합리성이 과학을 만들었다. 
 다시한번 이야기 하겠다. 강의가 열린 강의실 안에서 대통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히 대통령은 서울 어딘가에 있다. 우리가 그를 존재한다라고 정의하려면 존재의 눈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있느냐 없느냐의 관점은 결국 시각의 차이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도 존재와 무의 차이 즉 실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눈에 보는것, 그러지 않은것 이 모든 것들이~ 존재의 유무를 판단하기에는 상당히 편협적인 생각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생각해보자. 있음이라는 말은 살아있음을 말한다. 그럼 신은 도대체 뭔가? 중세시대에도 마찬가지로 계산하는 사유를 가졌다. 위계질서를 가졌고 이를 바탕으로 고딕성당의 상징과 같다. 고딕성당의 경우 우뚝 솟은 성당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조각 조각들이 각기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에 들어서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심하게 된다. 인간이 주체가 되며 나머지는 객체가 된다. 아는 것이 권력이 시대였다. 현대에 들어서면 주체의 죽음이 시작된다. 자신도 만들어지는 존재다. 의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상호주체, 여럿이 주체인 세상이다. 객체와 주체는 계속 만난다. 과학자가 곧 신이다. 서로 주체가 만나 있지 않으면 전쟁이다. 과학자가 창조한 세계는 다시 그 세계가 인간을 다스린다. 종교의 몰란 즉 새로운 신앙은 없는 세상이다.  
 시각은 끊임없이 변한다. 과거의 철길이 악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희망의 의미로 변한거 처럼말이다. 존재의 눈은 변화된다. 신은 변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운동의 전과 후를 헤아리는 수라고 했다. 그러나 신은 시간이 없다. 완전한 조재기 때문이다. 신은 부동의 운동자다. 있음 그 자체는 있는 것을 있는거게씀이다.
 24시간 노출로 사람 많은 곳을 찍으면 사람들은 다 사라져 버린다. 존재가 없다. 어울림이 중요하다. 문화는 다양하다. 이는 실존의 문제다. 있음이라는 것은 신이 이간을 제작함으로서 창조되어 있음이다. 실질만 다를 뿐이다. 이 있음이 하이데거는 중요하다고 하였다. 있음은 고정, 확정 구실 못하면 폐기처분된다. 따라서 인간은 다양한다. 할 수 있음으로 각자는 가능한 존재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선택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선택할 수 없으면 비 본래성으로 계속 끌려 다닐 것이다. 나치치하에 우리는 자유로웠다 말은 그만큼 매번 선택의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떠맡음을 중요시했다. 실존적 선택이다. 너 자신을 선택하라~ 너 자신을 선택하여 나는 누구냐 나는 마음먹은 거기다. 이다;;;; 삶은 내가 사는것이며 내가 죽은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내 존재.. 그래서 살아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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