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목민심서 이야기

2011. 6. 23. 17:35Review/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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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고전아카데미 시민강좌 배병삼 교수의 목민심서 강의를 토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감상문;;;)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단순히 해석하면 청렴 결백을 위한 하나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정약용의 특유의 돌려말하기 식의 글쓰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다르게 해석된다고 한다. 그가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주어진 올바른 직책을 요구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의 저작 경세유표에서 아예 기존 사상을 뒤엎는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이렇게 돌려 돌려 쓴 그의 글쓰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사문난적 때문이었다. 당시는 조선시대는 굉장히 인문학을 좋아했다. 인문학이 짱이었다;; 그러다 보니~~ 말싸움으로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판이었다. 어느 정도였냐하면 왕이 죽고 상복 몇년 동안 입는거 가지고 목숨이 왔다갔다 할 정도로 싸웠으니;;; 이 정도면;; 이런 드립 치면;; 미안하겠지만;; 일제 강점 다 보이지 않는 숨겨진 작은 이유가 있다~
  정약용은 애절양을 통해 분노를 드러내었다. 사내의 성기를 자른 슬픔 정도라고 생각하면된다. 애절양의 이야기를 요약해보자면, 관리가 수탈이 심한 가운데~ 어느 부부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를 가지고 관리가 군역을 내라고 땡깡부렸다~ 거기에 아이의 아버지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성기를 잘랐다. 그 성기를 아이의 어머니가 가지고 문지기 한테 갔는데 문지기가 관리와의 소통을 차단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주체와 타자간의 소통상황에서 타자가 주체를 소통차단함으로써;; 주체가 주체의 노릇을 못하는 관계?? 정도 생각하면된다~ 
 주체가 타자 와의 관계에 의해서 나가 정립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학생들의 교수가 되기도 한다. 즉 관계속에서 내가 무엇인지가 정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관계 즉 소통이 없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이 되겠다.
 조선이란 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유학을 가지고 개론서를 쓰거나 그것을 바탕으로 주장을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당시, 소위말하는 사문난적 위험이 있었다. 정약용은 거기에다가 당시, 유배당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德을 서로 기호들을 짜짓기 하여 直으로 꿔서 '덕은 곧은 마음' 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 말은 즉 귀족들에게 똑바로 해라라는 말이된다. 이를 적절하게 유교로서 응용한것;;; 공자 이야기를 꺼내면서 요순시대 감찰제도 같은 이야기로 돌려 말해서~ 낮추고 경청하는 관리들의 자세를 촉구한 것이다. 스스로 낮춰 경청하면 이해하고 배려할 때 덕의 힘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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