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의 뫼비우스 우주에 담긴 우울성 그리고 비판

2011. 7. 16. 00:00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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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ong Rak, Park

Byung Eon, Jung

Studies in Contemporary American Drama, EL69787

14 July 2011

찰스의 뫼비우스 우주에 담긴 우울성 그리고 비판[1]

          극작가 앨머 라이스의 작품 『계산기[2]』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계산기』에서 나오는 주인공 제로는 시계속에 단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으며 갑작스럽고 새로운 사회 구조 변화에 결국 쓸모없는 조각으로 변하고 적응하지 못해 생을 저버린 인물이다. 그는 질서, 도덕 마저 없는 다른 세상에서도 결국 익숙해져 있던 톱니바퀴의 사상 그리고 육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계산기의 삶에 만족하면서 산다. 그런데 저 세상에서의 계산기의 삶마저도 사실 쓸모 없는 업무이다. 단지 세탁물 일 뿐이다. 이런 제로 같은 사람이 많아서 찰스는 제로를 다시 지상으로 내보내려고 한다. 현세에서 사용되다가 다시 버려지는 불행한 삶을 이미 오래 전부터 찰스는 제로를 보아 왔기 때문이다.

           찰스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그 시작과 과정과 결말은 항상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부조리 한 것인지를 알면서 말이다. 이를 뫼비우스 우주 역사관[3]이라고 한다. 국왕 중심 시대뿐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도 소수자인 그 분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세상을 돌아가는데 운명이 정해진 톱니바퀴의 인생을 살다가 부작용으로 버려지는 존재가 됨을 말한다. 무한의 루프 서사 가운데 제로 같은 일생은 몸과 형태는 단지 껍데기일 뿐이며 영혼이 앙그라마이뉴에서 스펜타마이뉴를 거치는 과정을 무한히 나가 아닌 주체에 의해 반복 당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제로는 자신의 새로운 삶 그 자체를 단지 아르케라고 생각할 것이다. 찰스는 단지 제로에게 있어서 거울효과[4]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블랙홀의 거울효과는 과거를 볼 수 있을 뿐 결국은 어느 주체에 의해 해결할 수 없는 역사성에 대한 우울이 존재한다.

           이러한 역사성을 알고 있는 자, 찰스는 이러한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해결하지 않는 전형적인 쁘띠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제로와 같은 프롤레타리아에게 모순된 사실을 전해주는 역사가이기도 하다. 『계산기』에서는 뫼비우스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구성원들을 작품 후반에 찰스와 제로와의 대사와 지문을 통해서 풍자하고 있다. 제로는 찰스의 모순된 역사와 자신의 운명을 듣게 되지만 성 이라는 마취제를 통해 다시 비판과 과거의 울부 지음을 망각한 채 돌고 도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다시 참여하게 된다.



[1] www.gedanke.wo.tc 에서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2] 원제목은 The Adding Machine 이다. 대부분 학술지나 논문에서는 ‘계산기’라고 번역했다.

[3] 정확히 말하자면, 뫼비우스 우주관은 뫼비우스 띠에서 파생된 말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뫼비우스 띠와 뫼비우스 우주관이 같은 것은 아니다. 뫼비우스 띠는 독일 위상 기학 학자 뫼비우스가 새운 개념으로 앞뒤 구분이 모호한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뫼비우스 우주관은 한 지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 루프 형태의 서사를 말한다.

[4] 블랙홀의 거울효과를 말한다. 블랙홀이 발생하면 빛을 흡수하는데 그 빛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시간의 왜곡이 생긴다. 만약 그 빛이 블랙홀의 자체 중력으로 튕겨져 나올 때 우리는 과거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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