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대의 기술』에 나타난 특별한 무대 기법에 따른 보편적 다문화 인종 갈등 발견

2011. 7. 18. 00:00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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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대의 기술에 나타난 특별한 무대 기법에 따른 보편적 다문화 인종 갈등 발견

박 형 락

평행세계는 타임 패러독스를 해결시키는 이론으로 유명하다. 영화 터미네이터시리즈처럼, 암살자가 시간을 거슬러 반군의 지휘관의 어머니를 살해한다면, 미래세계의 모든 것이 다 바뀌게 된다. 그런데 무언가 모순이 생긴다. 만약, 위의 현상이 생기게 되면, 반군의 지도자가 일생을 거쳐 가면서 영향을 주었던 모든 것들은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비효과를 떠올려 보면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설정이 바로 평행세계다. 나라는 주체가 기한 내에 페이퍼를 제출한다하더라도 또 다른 시공간 속에서 나는 페이퍼를 기한 내에 못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를 이용해서 현실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예컨대, 롯데 자이언트가 매년 노력해도 우승을 못하는 것처럼, 또 다른 세계에서도 병렬적으로 한신 타이거즈가 만년 희망고문을 펼친 다든지, 시카고 컵스처럼 100년 넘게 우승 못하는 과정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희곡의 주제들을 특수성에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병렬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로서 다른 세계에도 결부시키고, 특수한 예가 아니라 우리 주위의 이야기를 끌어 들일 수 있는 사유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대학교 게시판 곳곳에는 항상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이는 외국 대학교와는 전혀 다른 전혀 생소한 단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유럽의 경우, 민족이라는 단어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다. 과거 2차 세계대전 시절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순수 아리아인 혹은 순수 게르만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후, 사실상 유럽인들 사이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는 극우파 혹은 소위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은어인 양아치라고 불리고 취급받는 네오나치가 아닌 이상 듣기 힘들다. 한 예로 독일에서는 오른손을 치켜드는 자세로, 마치 독일 나치 경례를 행동하는 시늉으로 의심되거나 간주 될 경우, 자국민은 체포되고 외국인의 경우 강제 추방을 당한다. 물론, 2011년 현재 대다수 유럽에서는 다문화 정책을 펼치려고 노력을 하지만 실패하거나 그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은 틀림없다. 이런 현상에 대한 큰 해석은 자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114월 달만 하더라도 극우 정당이 강세를 펼치다가, 일본 핵시설 사고 이후 녹색당이라는 극좌 정당이 거꾸로 앞서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만 놓고 보아도, 무려 2010년 기준 150만 명이 있다. 대부분, 1세대를 지나 2세대, 3세대들이 거주 하고 있는 상황이다. 1세대가 자신 고유의 문화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다면, 2세대부터는 상당히 정체성의 혼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색깔의 문제부터 자신의 기원의 문제, 1세대와의 문화와 가치관의 갈등이 있다. 또한, 문화 차이에 따른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 뿐 아니라, 문화 충돌에 따른 범죄에도 일조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본래 영토에 살고 있던 원주민 혹은 거주자들과의 갈등을 낳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세계화 시대 그리고 다문화 시대는 20세기를 거쳐 점점 과도 화되고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문화 충돌이 다가 올 것임을 예견할 수 있다. 2000년도 이후 급격히 국제결혼 수 증가, 새터민 증가를 볼 수 있다. 이미 국내에서는 10년이 지난 지금 외국인 부부, 한쪽이 외국인인 부부, 새터민 이렇게 3 분류로 나눠서 자녀들을 교육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과 다문화인과 편 가르기 뿐 아니라 다문화인 사이에서도 어느 출신이냐에 따라, 편 가르기가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심각한 문제의 전조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단지 다문화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에 따른, 과도기에 지나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 거주 한국 출신 희곡 작가 랍신의 작품접대의 기술을 통해, 미국인들이 갖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정체성 혼란과 편견 그리고 1세대 한국 미국인 부모와 2세대 정체성 혼란을 갖고 있는 한국 미국인 자녀와의 갈등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 희곡에는 다양하면서 독특한 무대요소들이 존재하는데, 무대요소 장치를 통해 강조하는 작가의 생각을 발견해 보고, 분석을 통해, 단순히 인종 차별에 따른 비판, 사실을 알리는 것 혹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한국에 존재하는 다문화가정을 바라보며 비판적인 시각에서 끝나기 보다는 이 극의 열린 결말처럼 문제를 인지하고 우리 주변의 현 실재계를 찾아가는 방안의 여지를 남겨 보고자 한다.

극이 시작되면 등장인물 간의 대화나 사건이 아니라, 외국인이 한국에 갔을 때 사용하는 언어를 배우는 멀티미디어 사운드를 관객은 듣게 된다. 이 사운드의 진행 방식은 남, 녀가 모의 상황에서 대화를 펼친다. 미국인의 영어를 먼저 한 문장 진행하면, 그 다음 한국인이 한국어로 이전에 진행한 그 한 문장을 말한다. 이 때, 주어진 내용은 백인 입장에서 보는 동양인의 시선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인 남성 테이프 목소리 : 태워다 드릴까요?

미국인 여성 테이프 목소리 : 고맙습니다. 아주 즐거운 저녁이었어요.

미국인 남성 테이프 목소리 : 혼자 사십니까?

 

AMERICAN MALE TAPE VOICE : May I take you home?

AMERICAN FEMALE TAPE VOICE : Thank you. It's been a wonderful evening.

AMERICAN MALE TAPE VOICE : Do you live alone? (Rob 332)

 

우리나라에서는 낸시랭으로 유명한 남윤정 씨가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중퇴 후, 미국 생활에서 연예인의 꿈을 키워나갈 때, 워너뮤직 동양 여성을 탐미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으로 인해 일 년 만에 한국을 돌아가 연예인으로서, 기업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바로 그 예다(주간한국, 2004). 극에서 나오는 영어강의는 번갈아 가면서 남성과 여성이 대화를 하는데, 마치 내용이 남자가 여성의 집을 바래다 준 후, 남성이 여성의 집 앞에서 여성이 혼자 사는지 유무를 마치 의도적으로 확인한다. 그리고 대화 종료 벨이 울린다. 이 대화의 주제는 한국 여행이지만, 여행 관련 어학 학습 멀티미디어의 내용이 시작부터 강한 성적 기대감을 갖도록 백인들에게 교육 또는 훈련 시키고 있다. 한국인 대학생들의 경우, 주로 필리핀에 많이 가게 된다. 그 이유는 환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호주나 캐나다, 미국에 비해 쉽고 싸게 어학연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등지에서는 새로운 인종 문제가 생겼다. 필리핀인들 사이에서는 이 새로운 인종을 코피노라고 한다. 바로 한국인과 필리핀인 사이에서 나온 자식들이다. 어학연수 중, 필리핀과 베트남에 자주 한국 어학 연수자들이 수업 방과 후에 클럽에 가서 만난 필리핀 여자와 관계를 가질 경우가 있는데, 한국인 남학생이 떠난 후,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필리핀 여자는 종교상의 이유로 임신 후 낙태를 하지 않고 낳게 된다. 일본인과 비교 했을 때, 자녀 양육비를 책임지지 않는 한국인 유학생들 때문에, 한국의 이미지가 상당히 타격 받기도 한다. 이렇듯 어느 누구에게나 미국인과 한국인 간에서 또는 한국인과 다른 나라 간에 서로 다른 환상이 존재한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이러한 환상이 권력과 힘에 의해 자칫 강한 성적인 억압과 비극을 낳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욕망의 대상인 이성에 대한 환상의 기제는 누구에게나 있는 사실이다. 이런 환상을 가르치고 기표의 법을 찝어주는 교육 멀티미디어가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 작가는 이 극의 시작 부분에 이러한 교육 매체를 통해, 사실상 사회 불평등의 근원은 교육기관으로서 자기 논리를 합법화 시키고 억압하게 하는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것에 조롱이라도 하듯, 이 텍스트 부분 중간 부분에는 NG를 넣어, 사람들에게 다시 생각을 정리 할 수 있도록 소외 효과를 삽입하였다.

이 희곡은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다. 마치 영화처럼, 시간이 빨리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음악을 점점 빠르게 튼다. 이 외에도 앞서 설명한 기법과 나중에 설명하게 될 기법들까지 전부다 특징을 먼저 짓자면, 극의 한 단락, 단락 마다 서로 얽혀있지 않고 나눠져있다는 것이다. 이는 텍스트를 통해서도 나눠져있음을 알 수 있다. 인종문제라는 주제를 하나 놓고 봤을 때, 극 전체는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서 시작하고 끝을 사실상 맺는 것이나 다를 바 없겠지만, 그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이 시간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의식속의 시간은 뒤죽박죽을 놓더라도 문제 될 것이 없다. 특히, 사회문제를 가진 주제, 인물들의 스테레오 타입, 곳곳에 낯선 기법들, 수동과 능동 상관없이 관객들이 극에 참여하는 희곡들은 자연스럽게 서사극과는 거리가 멀다.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거부하게 만들고 재미있으면서 심각한 사실들을 관객에게 고발하려는 극작가의 처절한 노력이 돋보인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의식이라는 흐름 속에 자신이 직접 참가해, 그 장만큼은 굉장히 심각하면서 관객들에게 내용 몰입을 유도하고, 상황에 대해 관객들에게 생각하게 만드는 장이 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어렸을 적 회상장면에서, 다른 장과는 다르게 인종차별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장이 등장한다. 예컨대, 다른 장을 말하자면, 랍의 어린 시절 애칭이었던 바비와의 대화를 통한 정신적 유일한 친구는 색깔차별을 할 필요 없는 인형뿐임을 연상케 하는 장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극 중 독백들도 보면 주제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1세대들의 어눌한 영어실력으로 인한 고통과 2세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이 장에서는 다른 장과는 다른 주제를 띄면서, 많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바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부분이지만, 어머니는 1세대로서 영어가 유창하다 못해 기본적인 영어 발음조차 제대로 흉내라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학습능력도 빠르고 상대적으로 유창한 어린 바비 또는 랍이 가르치려고 애쓴다. 여기서 랍은 자기 자신의 의식 속을 들여다보면서 참가한다. 사실상 아이와 어머니와의 대화가 불가능 하다. 아이가 잠을 잘 때 까지, 1세대인 부모와 자유롭게 사회화의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볼 수 없다. 사실상, 아이에게 있어서 초기사회화는 찾아 볼 수 없는 것 이다. 아버지는 바비가 잠잘 때, 퇴근 할 정도로 바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민 1세대로서 현지어를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좁게는 주변 이웃과의 관계, 넓게는 사회화에 대한 적응이 상당히 힘들었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독일어 폭스바겐(Volkswagen)을 가지고 어린 바비가 영어 우드(would)의 발음을 설명하려든다는 점에서, 어머니의 1세대로서의 사회와 언어가 함축되어 있는 이 고통이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바비의 헷갈림 속에 둘 다 틀리다는 의미가 상충되고 해결되지 않음으로써 결론 없고 해결 없는 상호 소통이 되어버리고 이런 것이 고통이라는 단어로 대물림 되어지는 것을 찾을 수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독일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처럼, 의도되어 진 것도 아니고 자신과 전혀 무관한 관계 또는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안나의 아니 전쟁세대의 죄를 짊고 살아야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랍도 1세대와는 다른 고통, 상대적으로 가벼운 괴로움처럼 보일지라도 어떤 형식이든지 온전한 현지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고통스로운 삶을 물려받는 운명이다. 이러한 문제를 경제적인 문제에 원인으로 둔다면, 랍의 가족은 상당히 미국의 경제적 지위 혹은 사회적 지위에서 낮은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 랍에게 기대했던 가족 내 첫 박사학위자라고 언급한 것을 본다면, 아버지의 꿈에 미치지 못하게 된 랍이 현재처한 상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다문화 가정에 대한 실태 조사 중, 이와 유사한 흥미 있는 자료 있다. 부모의 경제력 또는 직업에 따라, 다문화 가정 자녀의 학업 성취도와 사회 적응도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사례를 분석해보면, 이주민의 부모의 국적보다는 직업이 아이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신현식, 33) 또한, 랍과 어머니와의 대화 후, 그 다음 장에 나오는 랍과 자신의 인형과의 대화에서 나오는 장과 지금 소개하고 있는 장과 연결 지어 볼 때, 다음과 같은 다문화 가정의 사례를 통해 아이에게는 자기 자신만의 피해의식과 함께 부모의 사회속의 위치도 사회화 과정 속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피부색도 다르고 필리핀에서 왔다는 편견 때문에 아이들이 또래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혼자 지내고, 학교가 끝나면 집에서만 놀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영어강사로 활동하면서 인식이 달라져서 요즘은 또래 아이들과 곧잘 어울려 지낸다. (신현식 22)

 

정약용의 애절양을 보면, 조선시대 관료 혹은 귀족들에 의해서 너무 강하게 하층민들이 착취를 당한 그 분노와 슬픔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시는 관료들이 하층민의 세금을 더 받아내기 위해 3일 밖에 되지 않는 아이에게 군역을 부과하고 소를 빼앗아가자, 아이의 아버지가 이에 대한 분노로 자신의 성기를 잘라내었다. 이에 그의 마누라가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남편의 잘려져 피가 떨어지는 성기를 들고 관청에 가려하니 문지기가 막아버렸다는 이야기다. 당대, 유교 문화를 생각한다면, 군주와 신하와의 관계는 소통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참된 정치는, 혹은 참된 삶은 주체인 나가 타자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서로 상호 소통하는 행위를 말한다. 예컨대, 나라는 존재가 나로서 존재되어지려면, 타자로부터 다양한 기표들로부터 지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은 타자에게 어떻게 불리느냐, 어떻게 인정되는 가에 따라 자신의 존재와 지위,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체와 타자 간에 억압이 생기고 소통이 되지 않는 다면, 주체는 스스로 정체성을 잃고 거세하는, , 죽음 아니면 사회 전체 기반의 기초를 흔드는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극 중에 관객에게 이목을 끌만한 무대 기법이 있다.

 

청중들 속에 있는 사람 (실제로는 랍의 어머니): 미안한데. 내가 잘 못 알아들었다.

: 그게 뭔데요??

청중들 속에 있는 사람 (엄마): 내가 니 말 잘 못 알아들었다. 너 마지막 그 구절 다시 말해줄 수 있겠나?

: ;; 좋아요. 제 사춘기 시절에, 그땐 제가 오이피클을 확 비틀었었을 것..

엄마 (청중들 속에): 예야~ 미안한데;; 니는 더 확실하게 이야기해야 할 거야.

: .. 절라;;

 

PERSON IN AUDIENCE (ACTUALLY ROB'S MOTHER): I'm sorry. I didn't catch that.

ROB: What's that?

PERSON IN AUDIENCE (MOMMY): I couldn't hear you. Could you repeat that last line?

Rob: Uh, OK. During my adolescence, when I would jerk the gherkin...

MOMMY (IN AUDIENCE): I'm sorry. You're going to have to speak more clearly.

ROB: Oh man... (352)

 

주인공의 어머니가 관객 속에 있는데, 랍이 미국인이면서 제대로 미국인으로서 취급 받지 못하는 그런 상태를 고백하며 관객과 공유를 하고자 독백을 장황하게 토로하지만, 관객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어머니가 소통을 억지로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사용된 다문화 자녀가 심리사회적 적응을 가지는 작용에서, 교육지원과 차별경험, 언어문제와 또래관계사이에서 타 인종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스트레스가 나중에 심리 사회적 적응으로 가는 그 과정에서 사회적지지에 의해 완충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통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 소통은 단순한 형식적인 소통이 아니다. 군주가 백성의 말을 귀 기울일 수 있느냐의 문제다. 사실상 권력에서나 사회에서 다수가 아닌 소수의 주체라면, 그와 반대되는 타자가 그들에게 다가가는 게 중요한 것이다. 이미 약자이자 소수자들은 존재 그 자체를 위해 다가가고 있는 상태다. 제논의 역설이 되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다.접대의 기술2004년 오카다 하우스에서 공연했을 당시,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상황에 대해 웃음이 오고갔다. 이 극 자체가 상당히 심각한 주제이면서 동시에 문제를 공감하고 문제를 희극화 하여 재미있게 꾸며 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출자의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말 그대로, 이 상황은 결국 이민 1세대의 대표인 어머니와 소통과 위로가 되지 않으면서, 관객 ,, 다른 사람들 그 누구와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나가 나라는 존재를 존재자로서 부정당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랍신의 접대의 기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용으로나 연출의 기법에서나 주제는 어느 장이든 장치든지 간에 동일하다. 그녀는 2세대 이민자로 한국인은 아닌데 미국인이면서 그것도 아닌 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서 소수자로서의 삶과 좌절을 그리고 있다. 어느 세계든지 간에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경계는 과도기를 거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수많은 소수자들이 살고 있는 미국 뿐 아니라 중국의 경우에도 지금 현재 갈등을 빚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어떻게 다양한 문화의 충돌을 관리하느냐가 중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소수자에게 바라보는 시선과 그에 따른 지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예를 보더라도 상당히 완고하면서 한편으로는 통제를 하기도 한다. 티베트나 위구르처럼 상당히 억압하기도 하지만 중부 지방, 특히 황허 강 유역일대 옛 실크로드가 발달되어 있는 은천시만 놓고 보더라도 이슬람 문화에 상당히 순응하는 정책을 펼치고 오히려 중국정부가 큰 돈 들여 매년 여러 나라 학생들을 초청하는 노력까지 펼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가 무섭게도 언론을 이용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있다. 티베트의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티베트의 알려지지 않은 상당히 잔인한 고문과 엄격한 계급제도와 비인권이 이곳 문화는 존재했었는데, 중국이 아니었으면 민중들은 해방하지도 못했다. 여러 가지, 타국의 시선들 사이에서 장단점이 존재하지만, 정말 진리라는 것은 무엇인지 명확할 수 없고 항상 다른 패러다임에 변화되어가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랍신의 접대의 기술에서도 아시아 인종들의 인종 차별 문제는, 단순히 전체의 소수자들의 시각을 절대적으로 대변 할 수도 없고 굉장히 한쪽에 의한 시각에 치우쳐져 있다는 비판은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어느 한 개인의 사건을 가지고 타인의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의의를 지니고 있다. 무대장치를 한 여러 가지 시도들은 관객들에게 잠시 생각을 줄 수 있게 하고 관객 스스로 가지고 있는 기존 편견을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 볼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이 모든 세계의 인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작품은 틀림없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다문화 문제만 놓고 보아도, 미국거주 교포들의 삶과 한국의 다문화 가정과의 문제점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점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삶에 연결시키고 문제를 인식시키게 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야 말로 적어도 한국에서 다른 나라의 문화를 공부하는 인문학의 존립 이유이기 때문이다.

부산대학교

인 용 문 헌

, 순규. "다문화가정 자녀의 심리사회적 적응." Editorial. 청소년학연구 18.3 Mar. (2011): 247-72. Print.

, 현식. "농촌지역 다문화가정 어머니의 양육 경험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2011). Print.

, 진환, and 창식 이. "농촌 다문화가정 청소년의 사회적 거리감과 관련 변인." 농촌지도와 개발 18.1 (2011): 73-99. Print.

주간한국, "'유밀레' 위풍당당 젊음의 톡톡 튀는 세상탐험." 주간한국 10 Mar. 2004. Web. 15 June 201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42&aid=0000001736>.

Nelson, Brian, ed. Asian American drama: 9 plays from the multiethnic landscape. N.p.: Applause Books, 2000. 325-83. 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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