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정치적 무의식(The Political Unconscious) (3/3) 강의록

2012. 7. 26. 20:24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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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튀세르는 구조적 막시스트다. 역사는 공시적이다. 힘 단면을 자르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횡잔적 역사에는 수많은 저항체가 존재하는데, 이질적인 것이 차있다. 지배되어 있고 거기서 저항곳곳에 다양한 시간성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시절 기억들 처럼 말이다. 여기에 비판한게 역사주의다. 역사주의는 통시적이다. 이들은 흐름을 중시하며 선형적 역사로서 인간의 구체적 실체 없이도 발전하다고 믿었다. 텔로스로 말이다. 이는 맑스주의를 탈피하고자 한다. 맑스를 쇄신하는 포스트 맑스로서 말이다. 지적 환상에 대한 강조를 한다. 목적없는 주체 없는 점으로서의 역사를 추구하는 것이다. 해겔의 매개는 모든것이 연결됨을 말한다. 지점과 지점의 연결에서 새로운 지점은 미래관점에서 설명된다. 매개의 과정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수많은 것들을 무시한다. 들뢰즈는 이를 폭력이라고 하였다. 나머지는 다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현실화 과정 속에서 잠재적인 차원들이 사라진다. 다양한 힘을 보여주려 하는 것 그것이 들뢰즈의 사유다. 매개는 약호변화으로서다. 트랜스코딩이다. 경제, 법을 문화로 코딩하는 작엄을 요구한다. 과잉 중층경정으로 역사를 다시 논한다. 목적론과는 다른 사유를 지니고 있다. 한 사회에서 모순은 여러가지다. 자본가와 프롤레탈리아 갈등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과 대립된다. 마오의 모순론은 주요 모순이며 부차적 모순이다. 목적론적 시각과는 다르다. 문화 횡당의 사례로서 크리스테바와 바디우와 알튀세르 영향을 지닌다. 

          인과성에는 세가지가 있다. 기계적, 표현적 그리고 구조적이다. 기계적 인과성은 단순한 인과성이다. 표현적 인과성은 핵심적 본질이 있고 그것이 모든것을 표현한다. 해겔을 염두해 둠으로서의 주장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관련된다. 구조적 인과성은 복합적으로 생각하기다. 프로이트는 개인적 차원으로, 맑스의 사유는 사회적 차원으로 말한다. 보이지 않는 부재의 원인으로서 말이다. 구조의 표현은 부분이다. 결정의 영역이 초월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상을 구조가 현상 속에 드러낸다. 하나의 본질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구조이며 과정이 있다. 구조가 나를 결정한다. 특정한 본질이 아니라 구조다. 영영ㄱ의 현상들이 구조로 식별한다. 구조하나 연관성이다. 구조의 결정에의해 만들어진 것이 주체이다. 전체가 곧 구조다. 주체는 곧 효과다. 구조가 효과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부분 집합으로서 말이다. 이것이 중층결정이다. 부재한 원인이고 생산양식으로의 변화다. 이것이 역사다. 부분적 설명으로 인증한다. 총체성의 절대적 지평과 함께 생산양식으로 설명된다. 

          문화적 양식과 생산양식은 자유적인 자본주의, 즉 리얼리즘으로 그리고 독점 자본주의로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로 서로 운동하면서 흘러간다. 독점 자본주의는 모더니즘이며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힘들다. 세계가 불투명한 것이다. 나 속으로 들어가 세계와의 단절이 있다. 나에게는 불편한 진실이 있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로 가면 다국적 자본주의다. 포스트 모더니즘인 것이다. 사물화와 상품화 되는 정도가 강하다. 세계인식이 힘들어진다. 이는 인식 불가능 하다. 인간의 삶은 단절되고 고립되어 파편화 되어간다. 사적이고 공적 사이에서의 단절인 것이다. 초체성적 사고를 요구한다. 각 부분적인 것들은 사고가 되는데 총체는 없다. 이는 인식적 지도 그리기이다. 불투명하지만 인식이 가능하다. 표현적 매개와 달리 구조적 매개는 축소적이고 환원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매개할 려고 하는 인간으로서 말이다. 들뢰즈는 매개없이 사고하려 하지만, 제임슨은 풍부한 매개적 사고를 생산양식 변화 측면에서 요구하고 있다. 제국적 물질성이 알레고리화 되어 지배적 코드로 있다.  이는 알레고리적 중층화로 보면된다. 기독교 보편화로서 구약이 신약으로 가는 그 과정 말이다. 개인의 문제에서 성격으로 인류해방문제로 이어진다. 생산양식의 부재원인의 역사인 것이다. 서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개인적 주체 밑의 차원에서 보여주고 있다. 문학적, 심미적, 도덕적, 신비적으로 말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지배가 가장 이윤을 가져가는 구조다. 소유의 양식이 사적소유로서 말이다. 공적 소유로 바꾸기 위해 막시스트는 노력해야한다. 경제 결정론 시간으로 역사주의와 경제주의와 짝을 이룬다. 하부구조에 상부구조가 결정하는 것이다. 단조로운 시간이며 이는 경제의 시간으로 된다. 상부구조에서 법률체계는 개인의 사적 소유를 지켜주는 역할이고 정치는 그 개인의 권한 을 지켜주는 역할로 구조를 유지시킨다. 생산양식의 교체를 통한 새로운 것을 트랜스코딩화하여 보여주어야 한다. 알튀세르와 제임슨은 이러한 상하부구조가 아니라, 심층과 표층을 없앴다. 경제를 하나의 요소로 본것이다. 경제 결정론과 상반되는 의견이다. 경제, 역사, 인간 모두 이로서 비판가능하다. 많아져 버린 횡단면들이 있다. 문화와 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아니라 물질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 의식이 아니라 제도로서 말이다. 선형적인 역사 주의와는 다르게 다양한 것들이 섞여 나오는 사회로서 공시적이면서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복합적 시각의 공시성과 단일화된 통시적 시각에서다. 문화, 이데올로기, 법 등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관계적으로 정교하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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