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정치적 무의식(The Political Unconscious) (2/3) 강의록

2012. 7. 24. 18:41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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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류에 거스르는 저항 즉 밪서는 것의 시각으로 이 책은 구성되어 있는 듯 하다. 사회적 맥락을 참고하여 분석해야하며 가능성의 조건을 알아야 함을 제임슨은 주장하고 있다. 대상과 주체는 둘다 변증법적 운동을 한다. 모든 것은 운동한다는 헤겔의 생각이다. 해석적 범주와 코드를 고민한다. 텍스트의 물질성은 순수한 그 자체로 대면할 수 없는 상징체계 로서다. 역사는 바로 드러나 있지 않다. 결코 역사를 대면할 수 없는 무의식이다. 세상은 전부 심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층 계급에 대한 두려움 과 거부감의 운동인 것이다. 이는 강화 그리고 얼버무림일 수 있다. 마스터 코드를 양보할수는 없다. 이것이 트랜스 코딩 작업이다. 그 사회의 생산양식의 차원에서 읽기다. A를 B로 읽어내는데 A를 중심으로 하여 읽는다. 이론을 국부적으로 분석하는 이론가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그것을 비판하되 어느정도 수용하는 작업을 취한다. 파편화된 여러 구조들이 있는데, 물화된 사회에서 역사, 종교, 사회 등등 여러가지로 분화되어 있는 것들을 역사로서의 총체성으로 보지않고 봉쇄의 전략을 통해 자신이 유리한 논의로 이끌어 나가는 것을 비난한다. 부재와 현존을 통해서 정의에 규정해서 시작한다. 오늘날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는 모든지식도 소비된다. 이에 제임슨은 저항한다. 정치적 무의식은 소비를 무한정 지연시키는 작업과 글쓰리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다. 알퉤세르의 구조주의적 인식론으로서 헤겔리안과 다른 지점을 제임슨은 논한다. 역사주의를 유지한채 다들고 가지 않는다. 가죠오되 봉쇄의 전략을 비판하는 것이다. 역사는 선행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끊임 없이 잘려져있고 수많은 양식들이 존재한다. 복합적으로 짜여져 있다. 역사주의는 알튀세르와 충돌 및 통합을 시도하는 것이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현재의 일기이다. 과거는 없다. 역사는 현재의 구성물이다. 현재주의인 것이다. 역사는 접근 할 수 없지만 상징화 되지 않는 실재다.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생산한다. 실체는 있지만 상징화 되어 있지 않다. 이는 매개의 관계가 복잡한 것이다. 철저하게 파편화하고 사물화된 세계에서 총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폭탄 사회에서 파편화 된 것들을 총체적 사유로 보여주고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 가를 보여주는 사고를 취한다. 하나의 체계와 집대성으로서의 실체가 아니라 지평으로서 존재해야 봉쇄적 구조의 총체성이 되지 않는다.

          막스주의를 어떻게 쇄신시키는지를 라캉을 통해 제임슨은 이용했다. 인간존재, 문화, 의식은 초월할 수 없는 절대적 지평으로 최종심급이다. 초월할 수 없는 절대적 지평인 것이다. 인간 자율은 경제에 의해서 마지막엔 결정된다. 사회 전체 시스템에서는 라캉이론이 가능 불가다. 실재의 흔적처럭 존재한다. 사회에서 가장 전형적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문학이다. 정신 분석학적 메커니즘 작동으로 역사는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부재의 원인으로 등장하였다. 마르크스의 출발점은 사회적 존재에 의해서 결정되고 조건되어 진다. 억압되어 있지만 부재된 원인으로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존재의 투사작업으로서 있는 것은 존재의 한계를 지닌다. 문학은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 마저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는 사회적 상징 행위로서 문학인 것이다. 철저히 과거지향은 현재주의와 대립되며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시각을 지닌다. 이미 과거는 아무리 현재 텍스트라 하더라도 설명이된다. 역사 즉 억압되고 상징화는 아닌 것이다. 풍부한 지평들을 이해하는 것이 해당 사회연구에 필요하다. 지점들을 끊임 없이 올겨나가는 것, 즉 개인화는 사건이다. 초점이 있기 때문에 소실점이 존재한다. 스스로의 이미지는 잠재성으로 나아가는 힘이다. 재현의 망각은 재현의 추가이다. 걷어내는 것 그것이 무아이다. 비 개인화가 된다. 이는 영화의 다중초점으로 끊없는 재현의 추가이다. 독자적 텍스트와 개별적 텍스트는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이다. 담론은 억압하고 되돌아오는 장으로 단순 글쓰기는 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수많은 것들이 사용되어 진다. 자본주의는 현재주의다. 시대는 달라지는 데 우리의 사유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모른채 지반은 달라지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역사는 대화한다. 해방의 역사는 필연에서 자유로가는 해방의 역사는 거대하고 집단적인 역사에 있다. 

          중단 없는 서사 흔적 간파가 필요하다. 텍스트 표면으로 회복 시켜 내야한다. 자본주의 강화되는 사회는 공적에서 사적으로 흘러가는 형태다. 나눈 것은 인위인데 마치 자연적인 것 처럼 한다. 이것이 물화다. 총체성을 다양하게 연결되어 무한한 연결성을 갖는다. 지엽적은 통하는데 큰 틀에서는 힘든 코드들이 있다. 레닌은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질리가 총체적으로 이루어 진다고 하였다. 상대적 진리는 충실성이다. 국부적인 진리로서 더 나아가면 진리가 아닌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의 진리는 절대적이다. 해석을 가해야 한다. 서사에서 서사로 말이다. 리비도의 힘을 재 쓰기 하여 가족이야기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작품세계는 알레고리를 통해 나의 세계로 되어 있다. 헤겔주의는 의식에서 정신으로 간다. 벤야민은 역사주의 시간은 텅빈 시간이라고 하였다. 목적에 의해서 동질화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누적되면 역사로서의 텔로스 도달이 된다. 즉 끊임없이 돌질화 된것은 이질적인 것들이 총체성이 된다는 것이다. 파편화된 지적 기억들이 모이는 것 말이다. 고등하교 학생들의 시간은 미래지향시간 오직 그것의 나를 생각하자. 지배소에 묶여 있는 것, 최종적인 것은 경제에 연관성을 맺는다. 주체와 목적에는 연결가능성이 있다. 해석학적 틈새를 우리는 열어놓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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