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에르(Moliere)의 타르튀프와 입센(Ibsen)의 페르귄트(Peer Gynt) 강의록

2012. 8. 3. 00:01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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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에르(Moliere)의 타르튀프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시도가 플롯에서 압도적이지는 않다. 웃음은 근본적으로 그 대상은 자신과는 다르다는게 일반적이다. 만약 그것이 같은 처지라고 느껴진다면 이는 비극이다. 삶과 생의 희극적 비극적 리듬이 있다. 사회적 코메디를 지닌 이 극은 어떤 규범이 지배하는 공시적인 코드가 있다. 비극이 통시적이라면 말이다.

         

입센(Ibsen)의 페르귄트(Peer Gynt)

          페르귄트에서 자아에는 핵심이 없고 계속해서 방황만 보여주고 있다. 양파를 까면 그 코어가 없듯이 말이다. 영원히 수정할 수 없는 수술을 극에서는 보여준다. 자기 눈에 칼집이 있는데, 고집스럽게 붙든 편견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올바르게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입센이 외국에서 30년간 살았다. 역사와 이야기가 구분되지 않는 바람에 역사는 왜곡된다. 과도한 민족주의 때문이다. 환상과 이야기를 우의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파우스트와의 공통점은 빛과 그림자 등의 알레고리와 우의적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있다. 논리는 두 세계가 근본적 대조를 이룬다. 트롤은 편견과 눈수술이라면 솔베이지는 종교적 순수한 이미지다.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것을 의미한다. 군인은 젊은이다. 이의 이야기는 손가락 잘라서 군대 안간 청년으로 나온다. 어떤 행동도 하지 않기 위해서 손가락을 자른다. 스칸디나비아 방어에 개입하지 않은 자기나라에 대한 비판적ㅇ니 입장이 담겨있다. 방랑 및 되기 그 자체를 핵심없음에서 알 수 잇다. 해석이 존재하며 방호아하지 않음 그것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생의 모든 방황을 통해서 삶의 모든 경험의 스케일을 지닌다. 상반된 삶의 모든 부분들과 경험들은 한 작품안에 넣으려고 하였다. 사랑과 구주로서 말이다. 파우스트와 이는 유사하다.아주 작은, 아주좁은, 아주 짧은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제한되기 때문에 낭만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인간은 제단된 존재로 보았다. 선과 악을 가지면서 오락가락을 누릴 수 없다. 문학 속에서 인간 내면의 모든것을 무제한의 자유로 되어 보기를 실행한다. 환상적 매료하기로 낭만주의 작품은 인간의 잠재성을 꿈꾼시대였다. 피어는 언제나 거짓말 쟁이다. 솔베이지는 왜 피어에게 헌신하는지 의문을 가져야만한다. 피어의 이 모든 경험이 트롤의 세계에 들어갔을때 꿈꾼한다. 거부하는 것은 피어 내면에 들어가 있다. 이는 평생을 끌고간다. 모든 이국적인 경험들과 모든것이 되어 보는 것은 파우스트와 같다. 꾸며낸 이야기들 자체와 환상 자체 삶보다 훨씬 풍요롭다. 피어의 세계의 역사되기가 된다. 이는 논리가 없다. 피어를 방랑하게 하는 힘은 솔베이지가 평생기다리게한 방화하는 것을 상응하는 것이다. 피어가 구원반을것은 인간 되어 질 수 있는 가와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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