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주체와 집단기억 그리고 학생운동과 이석기 (3)

2013. 11. 2. 23:21Culture/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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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기가 언론에 조명을 받은 시기는 통합진보당 부정 선거 개입 의혹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석기에게 관심을 받은 부분은 그가 속해 있는 파에 대한 역사적 사실 부분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 있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시 대두되었던 NL 단체의 북한과 소통에 관한 국가보안법 위반 문제에 대한 과거의 사건의 귀환을 불러일으키기위한 목적성 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언론과 특정 정치 집단과의 무시무시한;;; 음모가 아닌가 생각하지만... 어찌되었든 사실이긴 사실이며 법적으로도 NL 계열이 문제를 일으킬만한 소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 NL 단체는 (특히 이석기) 언론이 요구하는 물음에 내재적 접근법으로 응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질문에 대한 명확한 응답이 없으며 항상 보류하는 입장을 취한다. (사실 내재적 접근법이 보류적 입장을 취하는 언법은 아니다. 내재적 접근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렇게 들릴 뿐이다.) 이러한 보류 입장을 바라보는 언론과 시청자들은 그들의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못함에 답답해 하거나, 엘리트? 주의 처럼 그들이 정치하지 않는 사람들 또는 그들의 생각과 다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과 벽을 쌓고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들이 취하는 입장들은 여러 오해를 낳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해명마저 보류하는 것이 그들이다. 왜 그럴까?

          이석기와 그를 지지하거나 함께 정치판을 벌이는 NL 집단들은 (즉 NL에서도 여러파가 존재한다.) 경기도 용인 외국어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 동부 연합이다. 이들의 집단기억은 옛 시절 7 80 년대 운동권에서의 유령들로 끊임없이 추억하는 집단이다. 하위 주체들... 이들이 시작하는 계기는 박정희 정권시절 정치의 요구와 억압에 타 지역 사람들에게 마저 집단적으로 배재되어야만 했던 경제성장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밀려난 광주시, 성남시의 집단 기억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계획에 배제되어 왔으며 차별당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 이들 원주민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신도시 경제 계발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원주민들은 이주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밀려나는 쓰라린 기억이 있으며 그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과 타지인들의 차별이 이들 기억으로 지금까지 유령처럼 이들에게 맴도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경기도 광주시의 못사는 동네들은 배고파서 아기를 삶아 먹는 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 였다. 이것이 광주시의 이미지 였다. 그리하여 서울에 상경한 광주시 시민들은 빈곤하면서 처절하게 생존하고 잔혹한 사람들로 타 지역 시민들에게 차별받았다. 이것은 전두환 시절 전라도 (경기도 아닌) 광주 혁명과 같은 기억과는 달리 경기도 광주 시민들은 집권 체제에 대한 차별 항거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광주와는 달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잊혀져 갔다. 체제에 억압당한 사람들 사이에 마저도 잊혀져 버린 존재.. 무관심과 역사에 사라져 버린 존재... 하위주체.. 바로 경기도 광주 대단지 시민들이었다.

          경기도 광주 대단지 사람들을 봉사하기 위해 연세대학교의 어느 청년이 이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들을 계몽하기 위해 야학을 개설했다. 이 야학 단체가 경기동부연합하고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경기도 광주대단지가 학생운동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임을 말한다. 실제로 이곳은 80년대 부터 대거 이주민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 이주민들의 대부분은 호남사람들이었다. 80년대 전라도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면서 전라도 다음으로 경계했던 곳이 경기도 광주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도 광주 출신 운동가들이 학생 운동과정에서 분신자살과 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그것이 바로 NL 집단이 가지고 있는 차별과 억압과정에서 발생했던 집단기억이 7-80년대 대한민국 하위 주체들의 응결지로 광주에 축적되게 된다.

          90년대 학생운동이 위축되면서 하위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회귀와 폭팔적인 행위들은 또다시 우리들에게 잊혀져갔다. 학생운동 자체도 7-80년대와 지금하고는 다르다. 달력식 투쟁이라고 해서 운동권 학생들은 비운동권 학생 또는 다른 정파 운동권 학생들과 대립하면서 학생회 감투를 차지해야하며 신규 학생들을 모집하면서 교육해야하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투자와 학업 역시 신경 쓰는 걸 병행하면서 학생 운동을 해야한다. 만약 큰 이슈가 되는 사회 집회가 있으면 투쟁을 하러 가긴 가지만 올인 할 수 없는 그들의 안타까운 현실 때문에 7-80년대 같은 학생운동 행동 방식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과거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과는 (물론 별반 차이없다라고 주장할 수 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국민인식이 조금 그때보다는 민주적이다라는 소시민적인 생각이 팽배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 그들 집단의 선배들이 이끌어 왔던 주체적인 의지와 국민들을 이끌었던 혹은 그 집단에 운동의 한 일원으로 이룩해 왔던 업적들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하위주체들이 남겨져 있는 기억들과 지금과 대비되는 와중에 사회의 빈부격차는 더 심해지고 광주 대단지 상황은 여전히 다른 수도권 경기도권 지역들의 정부 지원이 떨어지면서, 이들의 역사가 안그래도 잘 기억되지 않는 마당에 이제는 잊혀질 형국이 발생한 것이다.

          고립과 고립은 현실의 학생운동 상황과 이석기 집단과 비슷한 상황이다. 어떠한 합리적인 이론이 이들에게는 없으며 이론 보다는 행동 그리고 유창한 수사와 설득은 없으면서 내재적 접근이라는 회피적이고 자칫 대중과 담을 쌓을 수 있는 토론법은 더더욱 현실과 이들과 동떨어져 간다. 그 집단들은 철저하게 현실에 배재되어 있으면서 당시 과거 기억을 집단적으로 가지고 자의 그리고 타의로 대중과 멀어져 갔다. 그렇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기억은 계속 유령처럼 맴돌것이며 항상 하위주체로서의 자기 인식을 가지며 학생운동이 성행했을 당시를 평생 추억하며 살 것이다. 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조금 이석기라는 사람을 무자비한 종북주의자라는 비이성적인 시각보다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하위주체로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소리는 아니다 ㅎ)

         

 

참고문헌

 

이명준.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서울: 바오, 2012.

임미리. "'경기동부연합'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고립". 기억과 전망 28. 6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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