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빨간 피터 감상문

2009. 7. 31. 14:29Review/The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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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의 빨간 피터' 를 감상하고..
독어독문학과 2006006015 박형락

어릴 적부터 연극은 친숙하면서도 꽤 낯선 장르였다. 학교에서 가끔 식 주연으로 연극을 해봤는데 관객들은 보이지않고 뜨거운 조명만이 나에게 비출 뿐이었다. 하지만 참여하는데 의미를 두었고 내가 하는 것에 즐거움만 찾았지 그렇게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가끔식 연극을 보러 갔었지만 나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것은 어느 한 작품도 없었다. 영화 '씬 레드라인' 을 본 이후로는 영화의 큰 매력에 빠졌다. 그 전율은 아직도 있을 수 없었는데 그 이후로는 연극을 보지 않았다. 연극은 나에게 몽환적인 존재 였을 뿐이었다. 영화는 나의 대리만족 존재였고 나를 바라보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보게 된 '김준의 빨간 피터'는 사실상 중학교 이후로 처음으로 연극을 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극장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카프카의 공연이라고 들었을 때 내용이 어떻는 지는 모르지만 현대인과 관련된 문제 겠구나 하는 생각이 즉각 떠올랐다. 그리고 팜플렛에 나와 있는 출연진이 한명이라는 점에서 모노드라마 형식이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원작 카프카의 빨간 피터를 직접 읽어보진 않았다. 사실 카프카 작품을 고작 읽어본 것은 '변신' 밖이었다. 왜냐하면 카프카의 작품은 기괴하고 신선하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원작과의 비교를 할 수 없음에 아쉬었지만 그래도 나름 각색을 통해서 영화처럼 우리에게 전달하는 게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기존 카프카의 성격을 토대로 연극을 감상 아니 읽어 보았다.
무대에 나와 있는 철제 상자가 눈에 띄었다. 팜플렛 사진에 나와 있는 것을 통하면 분명 이곳에서 주인공 원숭이 피터가 속박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상자는 현대인의 자유롭지 못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철제상자를 빼면 나머지 분위기는 마치 연설하는 곳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주게 했다. 그런데 연극을 끝마치고 나서 이 교탁은 피터에게는 단지 물 마시는 곳 그 외에는 존재성이 없어 보였다. 원숭이는 원숭이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인간에게 있어서 교탁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나에게 있어서도 먹고 살기 바쁜 지금 세상 분위기에 교탁은 필요한 존재인 듯 하면서도 사용하지 않은 공간인 듯 했다.
원숭이이가 관객에게 보고를 하겠다며 그들을 학술원 회원들이라고 한다. 그가 빨간 피터가 된 이야기에 주목했다. 인간이 쏜 총이 스쳐지나가면서 생긴 상처가 그를 빨간 피터라고 했다. 상처가 피터라는 동명이인을 구분 짓게 했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구분지음은 단순한 꽃에서 생명을 불어 넣는 의미가 아닌 어떤 목적성을 띈 도구적 의미에서의 구분인 듯했다. 왜냐면 인간은 수많은 원숭이들이 다 같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아니 우리들은 서로가 다 다르게 보이는 지 의문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의미보다 우리들은 자신의 경력을 위해 만난다. 그러다 보니 자기 외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도구적 존재에 불과하고 하나의 스쳐지나가는 인연뿐이다.
피터는 자유로운 원숭이에서 속박된 원숭이로 변했다. 그곳에 갇혀 있으면서 스스로 고민을 한다. 필사적으로 탈출하려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먹을 것을 주면서 처다보는 인간들을 보고 점차 인간의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한다. 탈출하기위해 반항하면 할수록 고통을 받고 인간의 호의에 맞춰주면 줄수록 기쁨을 얻음으로써 학습되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유에 대한 행복보다는 갇혀있으면서 그 속에 만족 되는 거 같았다. 사회적 부조리 속에서도 개인적 자기합리화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거 같았다. 어두운 세상을 불을 켤 생각은 안하고 어둠을 그저 만족하며 어둠속에서 은신하려하는 듯 했다.
빨간 피터는 점점 인간화 되어가고 있었다. 숫자세기부터 시작해서 악수, 물마시기, 수학적 기초지식을 인간처럼 따라한다. 그러나 자신은 스스로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은 피터를 단순한 수단으로써 이용할 뿐이다. 피터에게는 결정적인 한계를 수학 문제에서 드러내었다. 사실 자신이 수학적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통해서 맞추는 것 뿐이다. 그거마저도 틀려서 계속 학습한다. 확실한 것은 어쩔 수 없이 강요되어져서 학습되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도구다. 그러다 보니 피터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후반부로 들어갈 때 피터의 행동은 스스로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연기에서 자신은 단지 보고 하는거 뿐이라고 반복할 때 자신 스스로가 인간의 도구였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적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지 한 듯했다. 인간처럼 행동을 하는 듯 하지만 그 실상의 인간적 행동자체가 인간적일 수 없다. 남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행동하는 동물적 본능에 충실하는 일뿐 그 외에는 없다. 따라서 끝마무리는 무언가의 아쉬움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쾌감이 더욱더 커지지 않는 이상 찝찝함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즉 우리도 피터처럼 인간이 아닌 것이다.
공연을 보러가기 위해 택시를 탔을 때 선배랑 서로 지금 현실에 따른 우리의 미래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취업전선이 암울한 이때 삭막해지는 대학현실을 보면서 우리들이 어떻게 대학의 낭만을 꿈꾸며 취업난에 대한 탈출구에 대해 논의 해봤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졸업은 코앞에 다가오는데 취업은 잘 되지 않아 대학원이라는 비상 탈출구를 사용하자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 였으나 결국은 실질적인 대안이 없었다. 이제 암울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우리가 내던져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한 고민은 그야말로 암울했다. 왜 원숭이 빨간 피터가 자꾸 우리 대학생들이랑 같이 페이드 가 될까? 자유를 위해 우리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데로 나아간다. 설령 그것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도 어쩔 수 없이 살기위해 나아간다. 살기위해서는 경쟁을 해야 하며 사실상 우리 모두는 적이 되어 버린다. 인간성은 차츰 잃어가게 된다. 오죽했으면 외국인들이 우리 대학생들을 보는 시각이 교양인답지 않는 타락적인 모습이 보인다고 할까? 어쩌면 이는 자본세상에서 경제 도구로 쓰이게끔 우리는 학습을 강요당하면서 서서히 인간성을 잃어 가는 지도 모른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성공한다고 해도 뒤에 남겨진 것은 마치 피터가 단상을 떠날 때 처럼 쓸쓸히 인간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써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소외를 감수 하면서 자유를 감수하면서 동물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펌 금지~~ 제발~~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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