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 - 견성이면 성불이라

2011. 9. 15. 19:01Review/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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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고전아카데미 권서용 교수의 강의를 정리한 글입니다.
 달마 키르티는 법칙이라는 의미를 가진 600년대 사람이다. 달마에 대해서 통달한 사람아라고 칭할만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식론과 논리학이 중요한 분야이다.
 육조단경의 저자 육조 혜능은 우리나라와 가장 연관되어 있는 스님이다. 법화경을 가장 중시하는 종단을 천태종이라고 하며, 조계종은 조계산에서 머물렀던 혜능 스님이 설하신 법과 사상을 이어 받았다. 7세기 신라시대 유명한 스님은 원효와 의상이 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혜능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 육조단경이 나왔다.
 기독교에서 말씀이라면 불교에서는 선이다. 선은 중국사람들이 디아나라는 인도어를 번역하면서 생겨나게 된 용어다. 디아나를 의역하면 지관이라는 의미다. 지관은 거쳐서 본다라는 뜻이다. 그친다라는 말은 멈춘다라는 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8조목에 보면, 그칠줄 알고 난 이후에야 마음이 안정된다 의미, 혹은 가야할 길이 정해진다라는 의미이다. 가다가 멈춘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깨닫는 다는 것은 힘든일이다. 그것을 깨닫는 방법은 바로 지금 이자리, 앉은 그 자리에서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이다. 선은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닫는 것이다. 멈추려면 없어야 한다. 즉 무아로 간다. 관세음 보살에서 세상의 소리를 본다 라고 의미한다. 세상의 소리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귀만가지고 세상의 소리를 듣게 되면, 본다는 의미는 사실, 바로 마음이라는 것이다. 소리를 듣고 마음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결국에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자신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모든 문자로된 모든 종교의 경전들이 통일되는 생각이다. 한마대로 살아있는 경전 속의 문자들이 나에게 들어오려면 결국 내가 받아들이고 나의 마음으로 봐야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달마대사는 견성은 성품이라라고 주장했다. 이념과 사람은 마음보다는 멀다. 이념은 사람을 통하고 그래서 개인 각각의 마음을 통한다.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르려면 개인 마음이 무상이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의 마음 , 즉 나의 마음은 나가 중요함을 의미한다. 데카르트는 코기토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다. 이는 생각이 중요하다라고 하면서, 항상 생각하는 나를 전재한다.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생각한다는 것으로 본다. 이는 중세 사상을 무너뜨리는 철학이다. 나의 생각이라는 말 속에, 나와 생각은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즉, 분리하는 생각인 것이다. 나가 먼저이다. 하나님이 있고 죄가 있다 그리고 마음이 있다. 생각과 나가 분리되어 있는 뒤받침에서 나가 먼저 된다. 그런데 불교는 이와 다르다. 사람이 생각이다. 마음이 먼저다. 일체유심조라고 했다. 나가 없다. 죄에 대한 삼계마저도 나에 대한 언급이 없다. 부처도 마찬가지다. 깨달은 마음을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조촐한 마음을 스님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구나 조촐한 마음을 가지면 스님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나가 어떤게 아니라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 추상적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욕심부리는 사람이 욕계가 아니라, 욕망을 어떻게 마음에 쓰느냐에 따라 욕계가 되는 것이다. 화내는 마음을 계속 쓰면 색계가 디는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도 그렇다. 이를 무색계라고 하는 것은 경지에 오르다가 어긋나게 깨닫는 마음을 말한다. 
 성이라는 것은 자신의 본래면목을 뜻한다. 즉, 선이다. 이러한 선은 적정한 마음이다. 정은 인간의 희노애락이다. 문자, 언어, 상징은 자기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문자에 엃메이게 된다. 마하반야는 대지혜며, 금강반야는 금강지혜다. 중생은 부처로 나아가는데, 마하반야.. 즉, 이 경전을 통하게 되면 저 세계로 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 모든 현 존재들은 무이다. 없다이다. 우리가 보는 것들은 색즉시공이라고 하여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 뿐이라고 한다. 지혜는 작은 지혜가 아니라 큰 지혜를 지녀야 한다고 한다. 금강경에서는 가장 중요한 글자는 삼이다. 내가 어떻게 외적으로 정성들이고 형식적으로 마음을 다스르는게 아니라, 바로 있는 자리에서 대지혜를 가지고 체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 방심을 하지 말아햐 하기 때문에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은 자기 안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며, 중생은 세상속에서 자기를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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