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요약문

2012. 1. 10. 11:30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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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요약문[1]

201180142 박형락

           『시간과 타자』에서 핵심 키워드는 존재, 존재자, 있음, 홀로서기, 익명성, 초월, 형이상학, , 타자, 동일자, 전체성, 죽음, 사랑 (부자관계, 에로스), 고독, 고통, 물질성, 책임 그리고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나열한 단어들을 시간 이라는 개념에 씌운 것이기 때문에 일반 상식의 시간 의미라고는 볼 수 없다. 이는 레비나스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개념들이 그러하다. 베르그송과 아이슈타인의 시간에 대한 논쟁 일화에서 유추 할 수 있듯이[2], 이미 기초분야에서도 영향력이 있고 우리 삶에 더 깊게 파고드는 개념이 무엇인지 상기해본다면[3], 시간이라는 개념은 레비나스 만의 개념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저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시간과 타자』에 대한 요약문 이므로 필자의 주관은 개입되어 있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작성할 것임을 밝혀둔다.

           나라는 존재자는 나이지 타자는 아니다. 따라서 나는 혼자다” (34). 나의 존재 속에서 나는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단자로서 나의 존재 안에 고립되어 있다. 이 상태에서는 타자와는 만나는 상태가 아니다. 존재에서 오직 존재자만이 있는 그곳은 고독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고독의 의미가 아니라, 타인이 아닌 혹은 의해서가 아닌 내가 존재 속에서의 단자라는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사실을 아는 나라는 존재자는 존재 속에서 존재함을 알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사건이 발생하는 데 이것이 홀로서기다. 모든 것들이 장소에서 사라지면 아무것도 없어진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가 되는데, 무 그 자체는 없는 것의 가득 참이다. 언어적으로 본다면 es gibt 라는 말 자체는 비인칭적 주어라고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비인칭적이다. 있기만 할 뿐, 그 이외는 없는 것이다. 이 존재에서는 자신이 없는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따라서 영원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영원은 주체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안정하다. 모든 것이 없는 무의 상태지만 그저 있는 것 es gibt라는 익명적으로 있는 것에서 나는 떠맡음으로써 존재에서의 존재자가 된다. 이 상태에서 존재에서의 나는 시작을 한다. 현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홀로서기의 상태는 존재자가 존재에 있는 그 상태에서는 존재 내에서 자유를 가진다. 현재를 설정하고 시간 속에서 그렇다고 흘러가는 상황은 아니다. 왜냐하면 순수 사건으로서는 존재하고 처음으로 자유를 가지게 되지만 시작의 자유일 뿐 선택의 자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의 현재가 되는 존재자는 물질성에 의해 존재 속에서 '찟음'을 만든다. 이 때부터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응축된 상태이다. 왜냐하면 현재에서의 동사에서는 과거를 내포하기도 하고 미래를 암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와 현재의 관계를 끊임없이 엃매인다. 영혼과 몸이 따로 분리되어 있어서 몸이 죽으면 영혼은 이데아로 회귀하는 그런 물질적 관계가 아니라, 물질적 관계를 통해 나와 나라는 존재를 책임하고 떠맡고 엃매이면서 내 자신 스스로를 차단한 것이다. 물질 속에서 존재자는 고독 한다. 왜냐하면 물질은 자신의 삶의 일상성이고 자신의 존재 속에서 물질과 관계를 맺으면서 향유를 하며, 존재자는 부재하지만 현존하는 나에 대해 성찰을 하면 그것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상을 통해 나는 감각을 작용하고 흡수하지만 동시에 대상과 거리를 둔다” (65). 감각의 작용은 인식하는 것이고 아는 것이다. 빛을 통해 알게 된 물질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향유와 노동은 물질성과 존재자의 관계에서 필연적이다. 거기에는 항상 고통이 뒤따른다. 먹는 것부터 제도 혹은 앞으로 이야기 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말이다. 고통이 항상 뒤따르는 존재자는 어느 강도에 따라 다르게 받을 것이다. 그리고 끝얺는 고통과의 관계 속에서 빛 마저도 존재를 모든 것을 밝히지 못하는 어느 영역까지 미치게 된다. 바로 죽음이다. 고통과 죽음은 능동적인 선택이라던가 자유가 아니다. 수동적이다. 빛에 의한 인식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에서의 존재자인 나는 지금 현재 당장 홀로 서있으며, 현재는 물질성과의 관계로 노동과 고통 그리고 향유를 맛보았다. 그런데 죽음이 엄습하게 되면 존재자는 당연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죽음은 현재 볼 수 없지만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미래인 것이다. 죽음이 엄습하면 존재자는 고통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에서 파악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의 나타남으로 흐느끼게 된다. 존재자는 이러한 죽음에 극단적으로 수용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두 가지의 태도로 나눠지게 된다. 만약 아까 전에 언급한 죽음이 다가오는 사태에서 존재자는 어떻게 할 것 인가이다. 분명 존재자의 죽음은 피할 수 가 없다. 그러면 흐느낌 뒤에 남는 무언가의 반전을 일굴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을 것인가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주체의 자유에 의한 태도 혹은 행동의 선택을 정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희망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여태껏 주체의 향유, 물질, 노동에 언급을 했었다. 죽음이 다가올 때, 주체는 자신이 존재에서의 존재자로서 처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희망에 대한 어떤 기로에 놓이게 된다. 즉 선택을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주체는 타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자에게 주체가 소유 되는 것은 아니다. 타자의 관계를 통해서 미래와의 관계로 나아가야만 한다.

           타자성을 가진다고 해서 영생을 살지는 못한다.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주체는 계속해서 주체가 아닌 것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시간의 관계에서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계속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미래이지만 주체가 만날 수 없는 것이, 주체가 죽음을 만나는 그 자체가 죽음이다. 그런데 타자의 관계에서 자유를 지속시킬 수 있다. 현재에는 위에서 설명한대로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포괄할 수 있다. 그 현재에서 지속의 행위를 하는 것에 있다. 주체가 주체 스스로의 행동이 아닌 타자의 만남에서 그 지속성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주체가 죽음의 미래를 보는데 있어서 타자성에서 미래를 정의 내린다. “문명화된 삶 가운데는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103). 남성성과 반대의 개념인 여성성은 은밀하고 수줍은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이러한 여성적인 것에 빛을 비추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인식 불가능 한, “공간적 초월이나 표현의 초월성과는 다른 사건이기 때문이다 (106). 이를 통해 타자의 타자성은 주체로 하여금 죽음처럼 친숙한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여성적인 것은 주체에게 자신을 빛으로 향한 초월 속에서의 존재자로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수줍음 안에서 자신을 실현한다” (108). 한마디로 말해서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서로가 합쳐지는 혹은 누구 하나가 종속되는 전체적인 발상이 아니다. 누구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의 권력 투쟁도 아니다. 그렇지만 주체와 타자간에는 고통이 있기도 하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거 같으면서도 애매하게 각자 서로의 존재에서 존재자로서의 위치는 변함이 없다. 마치 타자와 주체간의 관계는 레비나스 룰에 의한 남녀간의 사랑 관계다. 애무를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서로에게 쟁취를 할 수 없으나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무언가 전망을 얻게 된다. 자식을 낳게 되면 2세는 나와 타자의 생산으로 인한 복제품이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그리고 2세라고 해서 나가 2세라고 ‘=’ 칠 수 없다. 왜냐하면 2세 에게는 2세만의 존재가 있고 그 존재에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떠맡는다. 이를 통해 나는 타자성을 느낀다.

           여기까지가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요약문이다. 요약문답게 1문단으로 간추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만큼 많은 사유들이 집약되어 있어 수많은 생각들을 놓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시간과 타자』에서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존재에서의 존재자인 나는 그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주체로서 나 말고 다른 타자와의 관계는 가질지 몰라도 그 타자의 자유 마저 함께 나의 존재 속에서 영위하지 않는 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수많은 2차 문헌 또는 관련 책들을 읽어보면 핵심키워드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레비나스의 일화를 빗대어서 요약을 많이 한 상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시간과 타자』를 벗어나 또 다른 그의 저서들을 빗대다 보니 『시간과 타자』를 넘어서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이 책을 통해서 레비나스가 말하고자 하는 많은 사유들을 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내가 자유를 떠안으면서, 타인과 관계를 가지면서 그로 인해 생기는 책임을 떠 안는다는 것은 상당히 레비나스적인 윤리적 철학이고 정치적인 철학인 거 같다. 마치 가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대통령이 된 후 그 직무를, 책임을 지는 것, 떠맡고 노동을 하면서 고통을 받으며 끊임 없이 서로의 주체간의 존재에 채워 넣으면서 향유하고 내가 범할 수 없는 속박할 수 없는 타자로서 관계함에 사랑할 수 있는 주체자로서의 행동이 엄습하는 죽음 앞에 숭고한 존재자가 아닌가 생각을 한다. 끝으로 필자가 생각하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상당히 위험한 철학 같다. 자칫 잘못하면 필자가 레비나스에 빙의되어 더 이상 필자가 아닌 글이 남발 할지도 모르고, 열심히 레비나스 철학만 파고들어가 여러 문화, 작품들을 대입시켜 생산하는 기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철학의 광신자가 되어 더 이상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고, 혹은 더 이상 반성과 앞으로의 모색이 없는 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만큼 레비나스의 철학은 뛰어난 철학이고 새롭고 인간적이면서 사랑스러운 철학이라고 생각된다. 이 글을 쓰면서 마지막까지 머릿속에 맴도는 문장 하나를 남기고 글을 끝맺도록 하겠다. 소칼의 주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제가 팔아먹은 상품을 헐뜯는 자에게 보내는 지식 소매상의 히스테리 수준” (한겨례 2000.3.2).

 



[1] 이 요약문은 www.gedanke.wo.tc 에서 다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2] 베르그 송은 자신이 죽은 후에 나오는 전집에서 아이슈타인의 시간 개념에 대한 비판 저서를 빼 줄 것을 요구했다.

[3] 가까운 한국에서 있었던 소칼의 지적 사기 번역 출간 사건 이후 11년이 지난 지금, 인터넷 여론만 보아도 딥웹을 제외한 100페이지 중 2~3페이지 만이 포스트 모더니즘 편을 지지하고 있다. 최근 지지 글은 2007년 글이며, 특정 인물 한 사람으로 중심 되어 있다. 소위 인터넷을 하는 좌파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오히려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특정 한 인물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 상황(비난에 가깝다.)과 백과사전의 동향을 통해 보는 입장을, 필자는 서술한 것임을 밝혀둔다. 그리고 지난 한국에서 일어난 황우석 사건, 주디스 버틀러와 노엄 촘스키의 체리피킹에 대한 포스팅을 먼저 어떤 그룹이 지식인들을 저격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과학 대 인문학 이라고 대립 구도를 놓는 입장을 가지는 인터넷 문화는 절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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