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12. 11:32ㆍLiteratur/English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 절대 죽을 수 없는 이유
201180142 석사과정 박형락
Ⅰ
가장 대중적인 극작가로 또는 영화 스텝으로 잘 알려져 있고 영문학에서도 가끔씩 언급되는 그의 작품들을 놓고 보자면, 분명 톰 스토파드는 대중문화와 학문적 영향에 있어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벌이는 극작가임에는 틀림없다. 그의 극작품들은 어떤 뚜렷한 정치성을 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말하기도 한다. 대중성과 예술성 둘 다 잡기위한 극작가의 심각한 고민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연출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의 초기작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 죽었다』에서는 최근 그의 대중문화에서 보여준 여러 연출 시도와 여러 비슷한 실험적인 모방한 부분을 많이 보여주었다. 이 작품에 대해서 쉽게 줄거리와 목적을 설명해 주기는 굉장히 어렵다. 대사와 대사마다 관객에게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난해한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곳곳에 재미있는 위트적인 요소를 집어넣음으로써 다시 관객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보장하게 하는 그의 극작 특징은 이 작품에서 명확히 잘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 죽었다』는 영화로 개작되었을 뿐 아니라, 다시 그 영화를 가지고 패러디 한 코미디 영화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어떤 목적 또는 어떤 의도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는 게 이 극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개성 있는 스토리 구성과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케 하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관계 및 대사를 가끔씩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어떤 심오한 극적 분석을 하기 힘든 게 이 작품의 단점이자 묘미가 된다. 여러 난해한 부분들 중, 가장 주목해야할 점은 시작과 끝이다. 주인공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다. 또한 이 극에서는 『햄릿』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원작에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 하는 일이라고는 원작 주인공 햄릿의 감시 및 사형 서한 전달이었다. 비중이 상당히 낮고 존재감이 없다. 심지어 그들이 죽은 것도 영국 대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한 문장으로만 알려질 뿐이다. 원작을 바탕으로 이 작품은 두 명의 존재감 없는 자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담고 있다. 이들은 시종일관 자신들의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고 있으며 계속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황당하게 이둘 사이는 주어진 그 상황과 상황 마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 물론 여기서 최선이라는 것은 앞으로 이들이 미래와 과거에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들의 의미 없는 반복된 행동과 알 수 없는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는 가에 관객들을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들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죽게 된다. 그런데 결국 이 작품은 이 두 명의 주인공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부조리한 배경 속에 의심 없이 죽음으로 가는 파국을 자신들 스스로 의심 없이 결정하는 것이다. 사실 연극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이 두주인공이 아니라 배우임이 틀림없다. 모든 사건의 핵심에는 각장마다 배우가 등장했고 죽음에 대한 진실들을 하나씩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신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극중극의 배우를 잠깐 겸했던 이 두주인공의 서로간의 묘한 다른 성격과 행동은 그들의 죽음이 어느 하나의 상징적 의미로 상기 시키게끔 하는 충분한 의구심을 자아낸다. 따라서 이들이 연극 속에서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았을 거라는 가정 하에, 왜 이들이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닌지 고찰해 보았다.
Ⅱ
두 주인공의 의미 없을 거 같은 이야기를 극작한 톰 스토파드틑 훗날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 죽었다』를 개작하여 영화화했다. 영화의 비주얼하고 스펙터클한 특징을 살리고 상업 영화의 특성상 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또한 지루한 반복되는 부분은 반드시 수정을 거처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의 연극과 상업 영화와의 간극 특징 때문에 개작한 게 아닌 의도적으로 개작한 부분이 있다. 그게 바로 마지막 장면인데, 여기서 연극의 경우 원작 『햄릿』처럼 주요인물이 전부 죽은 후 남은 호레이쇼와 영국대사 대화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면, 영화에서는 이 부분은 단순히 몇 장면으로 넘겨 버리고 다시 배우들이,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 연극에서 시작했던 부분에서, 여정이 시작된 그 시점으로 돌아가 방랑하는 모습으로 끝나게 된다. 사실상 이 연극을 극작했던 작가는 훗날 의도적으로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의미심장한 의도를 넣은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배우와 두 주인공은 이미 무언가 관객과는 특별한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여러 행동들이 존재한다.
길덴 : 한 사나이가 긴 여정 사이에 이름이 없고 특징도 없고 사람도 없고 볼 것도 없는 곳에서 쉬는데, 길 건너로 사라진 한 유니콘을 봤어. . . .
Guil : A man breaking his journey between one place and another at a third place of no name, character, population or significance sees a unicorn cross his path and disappear. . . . (17)
배우를 만나기전 이들은 배우들이 다가오는 소리에 대해 로젠크란츠는 의심을 하고 있다. 그런데 길덴스턴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밴드 소리에 대해 유니콘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자신이 계속 믿게 되면 정말 그렇게 믿는다고 착각한다고 경고를 한다. 그런데 당시 중세시대에 생각했던 유니콘의 존재를 떠올려 보면 길덴스턴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과 성격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다. 유니콘은 길덴스턴의 말과 유사하게, 중세시대에 존재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대표 환상종이다. 심지어 학명으로 에쿠스 모노테로스까지 붙어 있고 대부분 인도에 살고 있었으며 고대 및 중세 자료에 습성과 성격까지 기록되어 있다. 수많은 그림에 기독교 성경과 많이 연관 지어서 상징되어 있고 마치 현실적인 그림 속에서도 인간과 실제 있는 친숙한 동물들과 함께 그려진 종이다. 굉장히 사나우면서 성스럽고 고귀해 보이는 동물은 끊임없이 성격과 행동 방식을 확대해 가지만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더욱더 신화화 되면서 사실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불과 20세기 초까지 진실의 논란이 계속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뿔에 대한 효능과 여러 비슷한 종들의 등장으로 인해 진화론과 함께 대두되기도 하였고 남아있는 문헌 자료 때문에 사람들은 진짜 유니콘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중국에서도 기린이라는 종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필자가 장황하게 쓴 이러한 인간들의 노력이 대부분 허구의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코뿔소의 뿔 혹은 일각고래의 이빨로 거래한 것들이다. 기독교를 통해 유니콘이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지면서 최근까지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이기 때문에 진실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이 존재하고 있다. 정말 유니콘이라고 불리는 일각수가 정말 존재 유무를 떠나 지금 현시점에서 본다면, 조심스럽지만 마치 성경의 이야기와 현실과 자꾸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처럼, 유니콘 신화와 현실이 자꾸 끊임없이 차원을 현실세계 그 자체 안에서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구약성경을 보면 성경학자들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아프리카와 아랍권 주변의 신화를 많이 채용했다는 흔적이 보이지만 몇몇 신자들이 성경을 다루는 방식은 여전히 과학적으로 더 확고히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를 좀 더 톰 스토파드의 사유로 다가가기 위해 최근 영화 『세익스피어 인 러브』에서, 세익스피어와 바이올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세익스피어가 그녀와의 사랑 속에 담긴 안타까움을 그대로 드러낸 『로미오와 줄리엣』을 극작하고 공연하는, 영화의 대표적인 하이라이트를 연출 장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익스피어가 연기를 맡은 로미오는 바이올라가 맡은 줄리엣의 이루어질 수 없는 마지막 극중극 장면에서 무대 뒤에 둘의 키스가 순식간에 무대 앞의 키스로 바뀌게 된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극은 극 속에서 이 둘의 진실이 얽혀 다시 현실로 재발산하면서 현실과 극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여 이 두 가지의 차원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의 순간 지점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돌발적 행동들과 배우와의 관계와 대사들을 유추해 볼 때, 그들이 연기하고자 하는 세계는 현실과 깊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주인공은 서로를 헷갈려 할 정도로 똑같고 서로에 대한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둘의 성격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로젠크란츠는 굉장히 성급한 편이다. 주어진 알 수 없는 상황과 상황 마다 재빠른 반응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금기시되어 있는 어떤 룰을 말하려고 하는 행동은 마치 작가의 명령을 어기는 행동으로 묘사된다. 여기에 길덴스턴은 신중하다. 하지만 이런 제각기의 신중성과 돌발성은 현실과 연극의 세계를 롤러코스터 타는 듯이 들락날락 거리고 탈출의 여지를 항상 남긴다.
로스 : (오래 멈춘 후. 로스 객석에 소리치고 벌떡 일어난다.) 불이야!
길덴 : (길덴 벌떡 일어나며) 어디에?
로스 : 괜찮아 - 난 자유로운 언어의 오용에 설명하는 중이야. 그 존재를 증명하려고 (그는 관객을 향하는 방향으로 해서 조소를 보낸다.) 움직이지 마. 그들이 모두 타 죽어야 할 텐데. (그는 그의 동전 하나를 꺼낸다. 퉁겨 올린다. 그것을 살펴본다. 원래 자리에 다시 넣는다.)
Ros : (A good pause. Ros leaps up and bellows at the audience.) Fire!
Guil : (Guil jumps up.) Where?
Ros : It's all right - I'm demonstrating the misuse of free speech. To prove that it exists. (He regards the audience, that is the direction, with contempt - and other directions, then front again.) Not move. They should burn to death in their shoes. (He takes out one of his coins. Spins it. Looks at it. Replaces it.) (44)
이 극에서는 관객에 대한 어떤 설정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로젠크란츠의 돌발 행동이다. 카프카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개작한 연극처럼 관객들을 극 안으로 집어넣어서 소통을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유사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처럼 여러 소도구들이 필요 없고 오직 관객과 배우만이 있으면서 진행하는 언어와 내용만이 존재하는 극의 일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언어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배우의 연극 주목적은 관객을 연극이라는 공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관객들에게 넌지시 연극의 이야기 공간, 자신들의 이야기 혹은 햄릿의 이야기로 들어가지 말아 달라고 경고를 주고 있다. 두 주인공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는 자신들, 즉 배우에게도 연극이라는 공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특히 로젠크란츠가 적극적이다. 그는 일부러 각광에 서서 대사를 언급하기도 한다. 조명은 “가시성, 분위기, 구성, 강조, 신빙성 그리고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이태섭 외, 235). 조명이 배우에 어떻게 보이는 가에 따라 위의 6가지 기능에 따라 관객이 제각기 반응을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에 각광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의도되어 지는데, “극적 표현과 비자연적인 이미지를 창출할 때”사용한다 (고해선 외, 217). 각광위에서 로젠크란츠가 서 있으면서 관객들은 아주 비자연적인 초점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그는 고의 적으로 관객을 인지하고 자신이 현실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신중한 길덴스턴은 모든 체험을 토대로 마지막 임무를 띠고 보트 위에 갑작스럽게 존재 할 때 ‘큐’사인을 낸다. 연극에서 ‘큐’사인이 나면 일제히 공연 스태프들은 무대의 시간과 공간을 변화시킨다. 그런데 길덴스턴이 말한 ‘큐’는 이후 잠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순간적으로 길덴스턴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이들은 배우의 만남으로 간접적인 극중극으로 이미 자신의 운명을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큐’로 그는 이 모든 것을 무마 시키려고 한 것이다. 좌충우돌 하고 있는 그들이지만 점점 무언가의 힘에 자신들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점점 부조리한 세계의 진실들을 알아가고 있는 자신들을 보게 된다. 이제 확신을 하고 두 주인공은 현실로 나가기를 준비하고 있다. 죽음이 아니라 정말 현실에서의 삶을 위해서 말이다.
길덴 : (화를 내며) 그러면 넌 무엇을 기대 한거야? (불쾌하게) 우리는 본능으로부터 거의 분리 될 수 없어. (로스가 그의 지갑을 손을 집어넣고 난 후, 그의 두 손을 등 뒤로 대고 나서 손을 돌려 주먹을 쥐어 내보인다. 길덴이 그 중 하나를 친다. 로스가 손을 펼치고 동전을 보여준다. 그는 길덴에게 동전을 준다. . . 반복, 반복. 길덴이 긴장을 한다. 필사적으로 잃으려 한다. 반복. 길덴이 한 손을 치고 그의 마음이 바뀌어서, 다른 손도 친다. 그리고 로스는 하는 수 없이 두 주먹에 전부 동전이 있음을 보여준다.)
Guil : (angrily). Then what do you expect? (Unhappily.). . . we can hardly separate from instinct. (Ros Puts a hand into his purse, then both hands behind his back, then holds his fists out. Guil taps one fist. Ros opens it to show a coin. He gives it to Guil. . . Repeat. Repeat. Guil getting tense. Desperate to lose. Repeat. Guil taps a hand, changes his mind, taps the other, and Ros inadvertently reveals that he has a coin in both fists.) (108)
두 명의 주인공은 엄연히 『햄릿』의 등장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새로운 극의 주인공으로서 부여받았다. 좌충우돌하는 이들에게 원만하게 원작의 흐름에 그대로 따라가기에는 스스로가 불가능한 성격과 행동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배우다. 어찌 보면 그림 형제 동화의 이론에서나 나올 법한 조력자가 이들에게 나타남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말도 안 되는 마치 있을 수 없는 세계로 나아가는 데 아무런 방해요소가 없도록 제거해주고 마지막 죽음으로 나아가게 도와주고 있다. 마치 주인공이 동화적 혹은 제의적 또는 연극적인 의식 속에서 주어진 임무를 형싱적 혹은 상징적으로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양상을 띄고 있다. 이를 통과의례라고 한다. 통과의례는 사회극에서 비롯된다고 인류학자 빅터 터너는 주장을 했다. 사회극은“어떤 사회 공동체 내에 중요한 계기를 형성하는 극적인 사건의 전개”를 말한다 (빅터 터너 13). 위반, 위기, 바로잡는 과정 그리고 재통합 또는 회복할 수 없는 분립으로 나뉘는 과정을 사회극이라고 하는데, 어떤 기존의 틀에 대해 논의가 생기면 그때 가시적으로 드러나면서 위기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위기가 발생한다.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혁명이나 전쟁을 통한 정치적 전개, 비공식적 중재자부터 형식적 법정까지 관계되는 법적 전개 그리고 점이나 희생 또는 고통스러운 제의를 가지는 통과의례로 위기를 교정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다시 재통합을 하거나 완전히 합의 없이 틀어지게 되면 영원히 분립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빅터 터너와 리차드 쉐흐너는 미학적 행위와 사회극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원래 부족들이 이야기 내려오는 것은 연대기와 맞물리게 되는데 어떤 실재 있었던 일화가 이야기되어지면서 전승되어 지게 되고 이 과정에서 상징이 덧붙여진다는 것이다. 연극에서 본다면, 연극이라는 행위는 비현실적 측면에서 사회적인 정치 활동이 은연중에 있게 되고 무대에서의 가시적인 측면에서는 무대 기술로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대 행위 기법 혹은 기술들이 사회극으로 넘어오면서 숨겨지게 되고, 사회극에서 나타나는 것들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활동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사회극과 연극이 서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 주목을 해야 한다. 연극이 어떤 하나의 의식으로서 공연을 통해 끌어내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통과의례를 진행하면서 의식의 과정은 분리되고 경계되어지면서 재통합과정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사회의 귀속과정을 거칠 때, 제의는 공동체의 연합의 비밀스런 상징 같은 춤, 수수께끼, 신화와 친숙한 문화구성을 해체하고 재결합하며 사회구조관계를 단순화 시키는 과정을 겪는다. 두주인공이 겪는 과정은 바로 이러한 중간지대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겪는 이 모든 실험적이고 철학적인 행위이후 다시 세속적인 집단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거기에 대한 결말은 알 수 없지만 통과의례를 통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혹은 원작 『햄릿』의 새로운 존재자로서 의사 표현을 할 것이다.
Ⅲ
불쌍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결국 새로운 연극에서 마저도 죽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에 등장했던 『햄릿』에서 연기하고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 죽었다』에서 연기하고 나서는 더욱더 깨달은 바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계속해서 전체적인 각본 안에서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는 존재임은 틀림없다. 이러한 주변부의 존재들이 연극 이후의 연극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각본 있는 사회에 대해서 강하게 항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지나쳤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연대기를 이야기로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들의 연기에 대한 의혹을 제시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연기를 안 한 것은 아니게 되는, 상당히 애매한 상태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 죽었다』는 현실로 다가가기위한 기회의 장이었다. 『햄릿』이라는 공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단지 글자 그대로 죽었다는 그 말 한마디로 종결지어짐을 당했던 이들에게, 새로운 재통합 혹은 영원한 분리라는 현실로 나아가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된 것이다. 톰 스토파드의 극은 『햄릿』과 현실 사이의 경계의 존재이며 두 주인공에게 제시하는 통과의례의 장이었다. 그들은 사회극과 무대극 어느 한쪽에 놓여 진 것이 아니다. 그 경계에 놓여진 것이다. 그 곳에서 발생하는 현실과 가상의 공간 사이의 서로가 마주하고 있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사회극의 과정과 무대극의 과정을 동시에 밟고 있는 독특한 세계에 놓여져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전면으로 두각을 드러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주변부적 존재가 사회적인 존재로 들어가기 직전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와 수수께끼, 웃기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몸짓, 이미 정해져있는 친숙한 운명에 대한 의문들은 배우라는 존재에 의해 새로운 질서로 전복 시킬 수 있는 존재로 나아가, 자신들은 사회에 하나의 새로운 존재로 거주하게 되고 인정받으면서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은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배우는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하는 조력자의 존재였다.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또는 왜 동해 번쩍 서해 번쩍 나오는 인물인지는 두 주인공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햄릿』의 배경이긴 한데 뭔가 익숙하면서도 변모되어 있고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수행에 이끌려가면서, 조력자는 그들에게 계속 행동과 방향을 스스로 설정케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경계의 극에서 마저도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처럼 다음에는 그들의 존재가 현실에서의 관객과 자신들의 위치가 변화된 이야기 되어져 새로운 지위 전도에 대한 희망으로 다시 극 무대에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인 용 문 헌
Michael Greenwald, Dario Pomo Roberto, Marie Welsh Anne and Schultz Roger. "Rosencrantz and Guildenstern are Dead." Longman Anthology of Modern and Contemporary Drama, the: A Global Perspective.Longman, 2004. 508-552. Print.
Richard Schechner. "Ritual." Performance Studies an Introduction. 2 Vol. Routledge, 2006. 52-88. Print.
Simon Shepherd and Mick Wallis. "Ritual." Drama/Theatre/Performance.Routledge, 2004. 118-121. Print.
William Shakespeare. Hamlet. Ed. Richard Andrews and Rex Gibson. 2 Vol. Cambridge, 2006. Print.
고해선, 김창기, 이상도, 이정규, 천세기. 무대조명3. 교보문고, 2007. Print.
빅터 터너. 제의에서 연극으로. Tran. 김익두 이기우. 현대미학사, 1996. Print.
이태섭, 구근회, 최수연. "무대조명 디자인과 실제." 공연제작의 실제.아르케라이팅아트, 1998. 233-288. Print.
조엘레미. "처녀를 사랑하는 동물." 신비의 동물을 찾아서. Tran. 조진경. 북플래너, 2009. 76-80. Print.
'Literatur > English'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긴스가 일라이자에게 ‘골목길’을 이용한 통치전략 (0) | 2012.01.18 |
---|---|
미국 들소가 되어 버린 주인공들에 대하여 (0) | 2012.01.14 |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요약문 (0) | 2012.01.10 |
라틴 아메리카에서 우리로.. - 1492 타자의 은폐 : ‘근대성 신화’의 기원을 찾아서 : 엔리케 두셀 : 그린비 (0) | 2012.01.08 |
들어올 땐 마음대로 들어왔겠지만 나갈 땐 안 된단다. - Judith Butler 의 Gender Trouble 의 서문 (0) | 2012.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