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과 마리아 - 페터 투리니

2012. 1. 16. 13:10Review/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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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들에게 직구를 던지는 극은 이해하기 힘든 예술극 혹은 실험극과는 다르게 직설적인 목적성을 지니고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과 애둘러서 말하는 것에 대해, 만약 누군가가 이 둘의 마디를 신중하게 돈을 내고 들었다면, 심오하게 생각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극은 전형적인 직구를 던지는 극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난해함이 전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마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더라도 무엇을 말하는 지 관객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극은 목적성을 굉장히 명확하고 눈에 띈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사람들의 생각을 다양화 시킬 수 없다는 단점이 있을 수 있다.
          요셉과 마리아라는 이름을 떠올리면서 극의 배경이 크리스마스 행사가 끝나는 시점의 백화점 분위기를 생각해보자. 상업화된 사회에서 이들은 가장 축복 받아야될 사람들이 크리스 마스 세일이 종료된 백화점의 한 뒷켠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두 주인공의 삶을 보아도 가장 비주류에 위치해 있는 상태다. 요셉은 한때 모두를 평등한 이상사회를 추구하고자 했던 공산주의자였다. 하지만 파시스트에 의해 상처만 입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오히려 파시스트가 무너지자 자본주의로 대체되어 버렸다. 마리아는 환상에 젖어있으면서 겉으로는 강인한척 하지만, 과거의 옛 직업과 생활, 그리고 자신의 가족사에서도 언제나 소외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둘의 성격은 전혀 사회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며, 이 사람들 스스로도 주어진 환경에 절대 타협하지를 않는다. 문제는 이 뿐 아니라 이들 외부도 이들의 존재를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로가 끊임 없이 불협화음 일 수 밖에 없다. 사회는 이들에게 가차 없이 크리스마스 선물 마저 제외 되고 가족들의 사랑마저도 없다. 모두의 사랑마저 없는 것이다. 소외되려하고 소외된 이 둘이 서로 백화점 한 곳에 남겨진 것이다. 모두다 크리스 마스 이브를 조용히 보내는 시점에서 말이다. 여기서 잠깐 독일희곡이니 만큼 크리스마스 이브에 대해 설명하자면,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크리스마스 분위기 와는 다르게 크리스 마스 이브 만큼은 굉장히 조용하다. 즉 우리의 설날 그리고 추석처럼, 이때만 되면 조용히 가족 또는 친구들과 집에서 혹은 교회에서 보낸다는 것이다. 엄청난 파티를 상상하지 말자. 따라서 백화점도 크리스마스 이브날은 왕창 팔고 행사하고는 저녁에는 문을 닫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다 집으로 가는데, 이 둘은 그러지 않는 다!!!
          이 둘은 사랑하는 거 같은 분위기를 끊임 없이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기 만 한다. 아름다운 사랑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원하고 싶어 한다.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는 사회의 통념을 깨고 싶어한다. 나이마저도 이들에게 장애물로 사회는 취급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예전의 공산주의 이론에 엃매여 있다. 과거에 대한 아쉬움 혹은 시대를 거스른 아직까지 잔재하는 이론들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순수하게 열정적으로 정의를 가지고 행동했던 때에 대한 추억을 병적으로 그리워 하고 있다. 과거를 떨쳐내고 싶어하는 자와 남는 자 간의 불협화음 속에 결국 이 둘은 결합을 시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해피엔딩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이 둘이 설령 행복을 누려도 사회적으로 보아서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고 (개인적, 사회적 입장에서 타자의 시선으로 냉철하게 자본적으로 바라보자면) 어짜피 이들의 삶이 불행한 삶과 이중 구속자 속에 놓여있다는 점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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