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타유의 "에로티시즘" 강의 정리 1/2

2012. 3. 28. 22:13Review/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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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의 서두는 영역을 정하고 한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일반론을 먼저 제시하고 주장론을 펼친다. 감각은 촉각적이며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다. 이는 몸과 관련된다. 과학적 에로가 아닌 시적이다. 종교의 역사와 관련된 에로티시즘은 인간 영혼을 중시한다. 이는 신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인류학과 종교학의 역사로 금기와 위반과 관련한다.
          죽음은 불연속 적이다. 죽음은 나와 다른사람과 함께 죽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방향성의 문제다. 에로틱함 속의 신성함이 금기와 죽음이다. 에로티즘 그 생명 번식과는 관련없다. 먹고사는 것 이외의 사치스러움이 있을 뿐이다. 재생산이 필요하며 이는 삶의 희열과는 대조적이다. 죽음과 방탕 그것이 에로티즘이다. 살인자의 욕구로서 말이다. 죽음은 감각적이며 성욕적이다. 그것이 실채다. 실채가 얼마나 감각에 집착하는 자연관인지는 희열에서 찾는다. 존재간의 연속이 없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생식은 불연속적 존재들을 위험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12). 삶은 불연속 적이며 죽음은 연속적이다. 모두 죽음에 다가가게 된다. 에로티즘은 심오하게 연속성을 지닌다. 죽음에 가깝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위반이다. 에로티시즘을 실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웅크림 너머에는 아감벤의 발가벗음과 차이를 보인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바라볼때 우리의 인식체계로 보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것이다.
          죽음의 기회가 종종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소유자와 관련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사랑의 불가능성으로 어머니에게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유들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열정은 사랑이며 그것은 수난이 되고 고통이 된다.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는 이미지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비춰주는 스크린인 것이다 (21). 우연은 사랑이며 연속성은 곧 죽음이다. 죽음은 불연속성 실재다. 존재의 연속성하고는 관련이 없다. 상관 없으면서 입증 시킨다. 죽음에 존재의 연속성이 있다. 티벤에서 사람들이 태어나면 아이는 울고 다른 사람은 웃는다고 하였다. 죽으면 다른 사람들은 울고 자신은 편안하다고 하였다. 드러냄은 존재가 드러남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자연적이며 억지가 아님을 부정하였다. 기술인 것이다. 종교는 에로와 죽음과 관련시킨다. 성스러움은 연속적이다. 성스러운 죽음이라고 불린다. 장엄한 제의로 본다. 존재의 연속은 경험 뿐이다.
          욕망은 안에 있는 것이다. 밖에있는 대상 자체가 욕망이 있다. 이성이 깨닫기전의 몸이 먼저 깨닫는다. 내적 자동의 원리가 내적 동기다. 동물은 사유가 없다고 바타유는 말한다. 자기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실존주의를 그 근더를 들 수 있다. 작업은 도구를 사용하지만 동물은 그러하지 못하다. 수치를 가지기도 한다. 오이디푸스나 자살이 그예다. 문화는 그 비수치에서 수치의 문화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생긴다. 인간은 노동, 인식, 죽음, 종교 그리고 수치를 특징으로 한다. 에로티시즘은 종교적 체험의 한 양상이다. 성모마리아를 보자. 죽은 모습에서 관능적이고 성스러움이 묻어나 있다. 균형은 금기다. 그 금기를 넘어서면 불균형이 된다. 에로티시즘을 못하게 하는 것이 균형이다. 자기 자신을 잃으면 불균형이 된다. 현 정권을 예를 들어보면, 생산적 소비와 부의축적 그리고 에너지 과잉은 더 큰사건의 가능성을 지닌다. 비 생산적 조건을 현 정권이 억제시키기 때문에 전 우주적으로 위험하게 된다. 비 생산적 소비는 복지와 기부다. 성과 죽음과 먹는 것이 그예다. 에로티시즘은 비 생산적 소비다. 신성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전우주의 유지를 위함 이기도 하다. 연속적인것과 단절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다. 에너지 과잉은 해소되어야한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비 생산적 요소가 빈자리를 만들어 준다. 저주의 몫 이라는 소비론 처럼 말이다. 결국 소비론을 주장하는 것이 에로티시즘이다. 바타유의 사유는 인간에게 혜택이 너무 많이 가진다고 한다. 자연 즉, 태양, 에너지 과잉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것에 해소가 필요하다. 재앙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잉여 해소 필요로 전쟁이 생길 위험이 있다. 사치와 에로티시즘, 종교의식, 전쟁후 비석, 축제, 스포츠, 예술 그리고 도박 처럼말이다. 이들은 소비자체를 위한 소비이며 비 생산적이다. 그 근원은 에로티시즘이며 비생산적 소비는 신성한 소비다. 과잉 에너지 소비의 효율적 양태이다. 파괴와 폭동이 예방가능하다. 두개체는 아이를 낳는 것이다. 둘이 합쳐져서 하나가 된다. 볼연속적 존재를 연속체로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의지 그리고 소멸과 남은 불연속적 존재들이다. 죽음이 관련되면서 연속성의 행위가 이어진다. 우주 연속의 필수 조건인 것이다. 죽음은 곳 비생산적 같지만 생산적인 것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에로티시즘을 비판한다. 사실 모든 타 종교를 배격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에로티시즘이 비생산적이고 가치가 없다고 말이다. 전쟁은 위험한 발언이지만, 더 큰 파국을 막기위한 비 생산적 소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전우주적 입장에서는 말이다. 과잉에너지를 소비하는 문제를 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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