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타유의 "에로티시즘" 강의정리 2/2

2012. 3. 30. 23:06Review/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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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은 폭력적이다. 죽음을 견제한 에로티시즘은 폭력적이며 신성도 폭력이다. 성모마리아는 폭력을 상징한다. 김대중, 예술, 김근태 전부 폭력이 수반되어 신성하게 된다. 오이디푸스왕이 위대해진 이유는 폭력을 당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틈속에 말이다. 폭력은 무시무시하지만 황홀하다. 예수의 죽음과 불꽃 처럼 말이다. 칸트적 숭고비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너무 나 커서 감당 할수 없는 것 말이다. 에로틱은 죽음이며 황홀함이며 종교적이다. 파괴를 내재한다. 신성한 것이 에로티시즘이다. 이는 비 생산적 소비이며, 이렇게 비생산 적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노동, 생장 그리고 성장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다. 즉 비생산적 요소들을 죄악시 여기도록 국가 이데올로기는 강조한다. 이는 비생산을 없애려고 한다. 그래서 금기가 시대를 거치면서 많아지는 것이다. 내적 체험은 경험적이며 과학적 객관성을 중시한다. 역사적 사실과 연결지어질 수 있다. 내적체험과 객관적 사실은 둘다 중요하다. 경험의 보편성은 객관석이다. 이러한 것은 연사적, 객관적 그리고 과학적으로의 조건이다. 인간은 궁극적 소비하는 욕망의 존재지만 생산한느 이성이 내재 되어 있다. 문명의 제도와 억압으로 내면과 불만이 내재된다. 노동의 이성의 결과 생산적이게 된다. 규칙과 축적, 근면 그리고 노력을 강조하고 에로는 비생산 적이고 쾌락이라고 국가는 치부하는 것이다. 쾌락은 불규칙 적이며 소모적이고 사실 이것이 노동을 멀리하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에로는 죽음 까지 이르게 하는 이어지는 삶인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내적인 요소다. 과학의 근본은 종교에 있다. 물안은 원죄의 경험 때문이다. 인간 보존의 증거이기도하면서 금기의 존재다. 터부의 핵심에서 고뇌 즉 민감함을 느낀다. 이는 두려움 속 쾌락을 내포한다. 금기는 늘 억눌려 왔다. 인간을 알 수 있는 지표다. 내적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지 바깥으로 금기는 나오지 않는다. 욕망과 공포는 쾌락이며 번테기의 벽으로 누에를 상징한다.
          삶의 영속적 양태의 기본적인 것은 성과 공포 그리고 놀라움이다. 인간이 좋아하는 것이 들어 있는데 그 주변부에 시스템들이 억압을 한다. 죽음은 비생산적 소비이며 축제와 성은 중요한 것이라고 하면 되겠다. 왜냐하면 소비가 되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넘치면 넘칠수록 갈등이 심화되기 때문이다. 아르또의 말처럼 일상적 삶에서의 폭력을 억누려하다가 터져나온다. 노동과 이성은 생산적이고 발전적이다. 폭력은 에로티즘이다. 칸트는 아무도 목적이 없는거 같지만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축제의 인간은 폭력과 충동이다. 일은 즉각적이지 않다. 긴장완화의 요소다. 즉각을 없애기 위한 억압이 바로 이성이다. 폭력은 생성과 죽음이다. 마조히즘은 자학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에 대비되는 새디즘은 가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변태 성욕이다. 여기에 죽음의 충동이 내포된다. 금기는 바로 벗어나려는 것이고 결국 폭력은 충동이며 죽음은 성적인 것과 연관된다. 노동은 이성이라면 폭력과 대비될 것이다. 노동과 이성 그리고 이것은 통제와 맞물려 전쟁을 억제 시킬 수 도 있다. 폭력과 위반은 그러나 계속된다. 금기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이는 재생산과 관계를 가지며 보편적 요소다. 기술은 생산적과 비생산 적으로 나눠지듯이 말이다. 죽음은 생산적이지 못하지만 효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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