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켓의 "쿼드" 강의록

2012. 3. 22. 19:54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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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화영 교수님의 쿼드 강의록입니다.  
         멜로디가 타악기마다 음의 높낮이가 다르고 조화가 곧 변주가 된다. 사람의 발도 음악이 된다. 추상은 언제나 삶이다. 쿼드 1은 컬러이며 2는 무채색으로 되어 있다. 1과 2사이는 베켓의 말에 의하면 10만년 뒤라고 하였다. 이는 자연의 개념이며 흘러간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눈에 안보이지만 전제되는 눈이 있다. 무의미한거 같지만 무의미한 거 같지않는 것이 "쿼드"이다. 문학의 재료는 언어이지만 쿼드는 언어 조차 없다. 언어의 부재로서 무언가를 말한다. 가치들이며 이것은 선과 악 그 것에 행위들에 대한 값과 가치의 기준으로 매겨진다. 절대적으로 생각하며 스피노자의 말처럼 심판할 만큼 정말 절대적인가에 대한 즉, 신에 대한 의문 및 재정의가 있다. 따라서 이는 윤리학이며 도덕인 것이다. 기존의 윤리학은 억압하는 도덕체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성은 이성으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예언자는 강산 상상력과 약한 지성 사이에 있다. 주체의 눈은 상상력이며 사유와 의식을 통해 분석된다. 광학적 기하학이란, 객관적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의도 즉 위치와 빛 조절에 따라 주관적일 수도 있다. 추상이기도 하고 법칙의 세계에서 말이다. 따라서 주관이 아닌 객관이 있다. 주체의 눈이 세계를 본다. 이것의 중심은 눈이다. 소실점이 있으며 그것은 주관적이고 왜곡일 수 있다. 카메라눈과 공간 그 자체인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시간 그 자체가 주체 중심의 주관적 표현과는 달라진 것이다. 주체의 해체가 될 수 있다. 투사 되는 이미지의 세계는 물질이 아니며 그 본질이 또한 물질 아님일 수 있다. 광학적 비전으며 논리학 적으로 말이다. 투영한 이미지는 그 모든것을 감싸고 있다. 안에 있는 것을 다 풀어내면 전체가 된다. 이미지는 그 모든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뜻한다. 이미지속은 변화될 수 없고 정지된 상태다. 무엇의 생성지점이 무는 신적인 개념이다. 존재는 모든 것을 동일하게 의미하므로 일의적이다. 존재의 일의 성은 속성의 일의성이다.
          사유속성으로서 우리는 죽지 않는다. 투사된 이미지 그 본질에 참여한다. 공간, 시간, 이미지 그리고 인물이 개개인 인물이 고정된 자아, 현재의 표현이 아닌 본질을 아는 것. 기관 없는 신체는 몸과 몸사이의 관계가 아닌 전 우주 얼굴을 형상하는 하나의 삶. 이것이 양태의 본질이다. 중간은 회피되는 지점이다. 서로 부딪치지 않는 것이다. 동공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끊임없는 운동의 영역인 것이다. 잠재성의 공간이다. 정지 그 자체가 잠재성이다. 운동과 정지 그 2개가 있음으로서 현상이 없어진다. 절대적 가시적인 것을 뛰어 넘어서 차이로서 존재하고 각각의 차이가 판 위에서 상대적인 매치를 이룬다. 공간의 소진은 반복을 위한 것이다. 사건이 없는 것은 활동성이 없는 것이고 본질이 없는 것이다. 피해갈 수 없는 지대 그 죽음과 같은 없음이 있다. 다른 예술은 언어의 권능 그리고 힘에 의존하는 문학에 대한 비판에 받게 된다. 주체의 의식과 지각에 대한 의미를 삼는 기존 문학의 반발이며 다른 세계이다. 스피노자 적인 광학 세계로서 급진적이고 다른 사유로 문학을 베켓은 표현한 것이다. 사실은 정치적인 예술인 것이다. 삶에 대한 독단적이고 폐쇄적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의식은 절대적 중심에 놓을경우 사유와 반대된다. 불분명하고 부적합 관념이 아닌 관념으로 지성의 법칙을 따른다. 절대적으로 긍정되는 것은 몸들이 서로만나 기쁨들을 만들어 나가고 공동체 삶이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양태들 끼리 몸들 끼리 기쁨들이 이루어 나가는 것으로 나라는 자아가 공정된 가치가 지연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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