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렌마트의 희비극 – 『노부인의 방문』

2012. 8. 21. 20:06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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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렌마트의 희비극 노부인의 방문

석사과정 201180142 박형락

 

           뒤렌마트는 스위스 출신의 극작가로서 1921년에서 1990년까지 드라마작가, 라디오작가, 에세이스트 그리고 화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스위스 베른과 취리히에서 문학과 철학을 수학하였고 1947년에 취리히에서 드라마로 연극 데뷔를 했다. 그가 유명해 진 계기는 추리소설 『판결하는 자와 집행하는 자』 다. 형사와 범인간의 내기에서 선과 악을 구분 할 수 없는 깔끔하지 못한 결말을 제공해 준다. “세상 속에 죄악과 정의를 향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 작품이다 (Sucher 177). 그를 더욱더 유명하게 있게 한 『노부인의 방문』 은 “1956년 뒤렌마트를 전세계적인 첫 번째 성공이었으며, 지난 몇 년 이후에 그의 희곡은 매혹적인 지적 영광과 은밀한 도덕적인 죄를 쉽게 잃어버렸다. 모든 것들이 없다. 그것은 동시대의 소름 끼치는 유쾌한 작품이다“(Dürrenmatt 표지. Clive Barnes 재인용). 1955년에 그는 자신의 연극에 대한 깊은 생각들을 기술한 『연극문제』를 썼다. 이 글에 나온 그의 연극에 대한 깊은 생각은 그 해 집필을 하고 1년 뒤에 『노부인의 방문』을 공연함으로써 그의 이론을 적용시켰다. “코미디는 원자 폭탄의 시대에 세계를 보이게 하고 동시대 비극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하게 만드는 유일한 드라마 형식으로 남겨져 있다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Sucher 177). 그의 핵심적인 도구는 그로테스크와 풍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일생 특성상 상당히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강했으며, 『노부인의 방문』 이전 스위스의 연극이 당시 다른 나라 연극이 스위스에서 초연했던 것과는 다르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띄다가, 2차 대전 이후 막스 프리쉬와 함께 변화의 몰고 갔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노부인의 방문』의 부제 비극적 희극이라고 작가가 명명한 것처럼 단어 선택 면에서도 모순 같은 어떤 두 종류의 의미를 통해 어느 지점으로 가는 지를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어로 희비극이라는 단어는 Tragikomödie 이다. 그러나 뒤렌마트는 부제를 Tragische Komödie 라고 사용하고 있다. 희극인데 비극적이라고 작가의 에세이에서도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노부인의 방문』의 줄거리를 보면 전체적인 구성은 희비극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희비극이라는 하나의 범주 속에 들어 있긴 하다. 유럽의 특성상 철도는 굉장한 중요 교통수단인데, 지금도 그러하나 어떤 기차가 정차 하느냐에 따라, 그 도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극의 배경이 되는 귈렌이라는 도시는 옛날 문화적으로 가치로서 유서 깊은 곳이며 여러 공장도 있었을 정도로 번창했었다. 그러나 공장이 나중에 알게 되지만 클레어에 의해 자본의 힘으로 파산되어 버리고 도시가 궁핍해지면서, 이제는 지역 열차만 정차하고 상위 열차들은 더 이상 정차하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 결국 도시 전체가 파산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이때 클레어라는 노부인이 급행 열차를 타고 그 열차가 서지도 않는 귈렌 역에 뇌물을 주면서 정차시키고 귈렌을 방문하게 된다. 이를 알고 있는 시장과 일 그리고 시의 다른 중심 인물들은 돈이 많고 재단을 운영할 정도로 기부를 하는 노부인에게 도움을 받으면, 귈렌 시도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환영 행사를 준비하지만 바람과 기차소리로 인해 제대로 연설조차 못한다. 노부인은 아프카니스탄 비행기 추락사고로 의수와 의족을 착용한 상태라서 제대로 걷지 못하고 사형 선고 받은 로비와 토비를 돈으로 매수해서 가마꾼으로 고용하여 그녀의 움직임에 도움을 받는다. 그녀는 귈렌시와는 친숙한 사이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클레리 였으며 일과는 서로 연인 관계였으나, 일은 잡화점 딸과 결혼을 하고 일의 아이를 가지고 있던 클레리를 창녀로 내몰았다. 그리고 클레리는 함부르크로 떠나 창녀로서 생활하다가 부자 노인과 만나 클레어로 이름을 바꾸고 부자로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럽게 그녀가 좋지 않은 기억을 지닌 귈렌에 온 이유는 바로 일에게 복수를 하러 온 것이다. 그녀는 아주 철저한 계획으로 왔는데, 10대 시절 일과 관계로 아이를 가졌을 때, 일이 그녀를 창녀로 몰 때 동조해 주었었던 코비와 로비를 맹인과 고자로 만들어 버리고 그들을 다시 역으로 증인으로 내세운다. 집사는 그 당시 사건의 판사였으나 지금은 그 보다 더 많은 돈을 주는 클레어 밑에서 그녀를 도와주고 있다. 또한 의사와 목사에게 일의 죽음에 대해 암시와 그것에 대한 정의에 대해 확인까지 한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클레어는 귈렌시에 5억 기부를 하고 시민들에게 5억을 기부하면서 그 조건으로 정의를 사들이는데 제안을 한다. 그것은 바로 공소시효가 지난 일과의 관계에 대한 사건에 대한 복수인 것이다. 일을 시민 스스로 죽이는 것이다. 이로써 차기 시장 후보인 일은 엄청난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진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도덕이라는 이름 하에 거절하는 행동을 취하게 된다. 클레어는 시민들이 일을 죽일 때까지 관을 준비해 둔 채 호텔에서 계속 숙박하게 된다. 시민들은 점점 변해가는데, 잦은 외상을 하면서 마치 앞으로 엄청난 자본의 복지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예감이 들 정도의 행동을 하게 된다. 심지어 일의 가족도 일이 죽게 될 것이고 그에 대한 혜택을 누릴 것이라는 전제하에 행동한다. 일은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해보고 탈출해보려고도 하지만 시민들에 의해 실패한다. 교장이 일을 유일하게 감싸주려고 하는 듯 하지만 결국 자신도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동조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언론을 통해 알리려는 시도도 마찬가지로 실패한 일은 가족여행을 통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보게 되면서 자신과는 다른 모습들에 대한 기대감들을 느끼게 되며 심판을 받기로 체념한다. 결국 그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선언하는 시민들 속에 죄인 취급을 당하며 사형을 받고 시민들에 의해 죽게 된다. 그리고 시민들은 정의를 이루고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기뻐한다. 전체적인 작품 상황을 보면, 자본의 영향력 있는 한 개인에 의해 하나의 공동체가 무너지고 우리가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도덕이라는 것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한 개인이 다수의 행복을 위해 희생당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개인은 분명 도덕적인 부분에서 잘못했으며, 공동체가 만들어 놓은 법에서는 그의 죄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죄의 문제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자본에 의해 이 모든 기존의 법칙들과 인성들은 무너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상황만 가지고 선과 악을 명확하게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죄를 하나씩은 지고 있거나 지게 된다는 것이다.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 상황을 보여주며, 혼돈스럽고 마치 귈렌시 전체의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되지만, 뒤렌마트 특유의 그 해피 엔딩이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져서 얻으면 얻었지, 그것의 의미가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뒤끝이 나쁜 찝찝함이나 씁쓸함을 주게 된다. 이는 관객에게 무언가 해소 감을 제대로 줄 수 없다.

씁쓸함을 주고 찝찝함을 준다는 것은 희극이라는 결말과는 전혀 다르다. 희극은 어떤 등장인물의 특성을 우습거나 바보스러운 태도를 들춰 내주는 것이고 그에 대한 도구로서 그로테스크한 왜곡된 모습과 과장된 묘사를 도구로 하여, 관객의 자유로운 웃음을 주는 것이다 (Dautel 4). 하지만 뒤렌마트에게 웃음은 자유롭지도 못하고 걱정거리가 없는 웃음이 아니다. 목적은 당황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관객들은 은폐되어 있는 것들을 들추어내어 인식하게 된다(Dautel 4).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비극이라고 정의 내릴 수는 없는 작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연민과 두려움을 재현함으로써 그러한 종류의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라고 하였다(시학 131).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을 겪는 사람에게 향하는 것이고 두려움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의 불행에서 느끼는 것이라고 하였다(시학 237).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시학』 13장에 따르면, 의로운 사람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갈 경우, 반감을 자아낸다고 하였고, 악한 사람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갈 경우 인간적인 느낌마저도 들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악한사람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갈 경우에는 인간적인 느낌만 줄 수 있다고 하였다. 첫 번째 언급한 인물에서 반감은 도덕적으로 극악무도에 따른 것이다(시학 245). 이러한 반감이 없는 것은 모르는 상태에서 행동을 저지르고는 나중에야 진실을 알게 되는 방식이다”(시학 265). 『노부인의 방문』 에서 명확하게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분 할 수 없으며 그 구분은 단지 입장차이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비극적 주인공과 연관된다. “중간의 경우가 남는다. 덕과 정의감이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고, 악덕과 악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오 때문에 불행에 빠지는 사람이다”(시학 237). 여기서 과오는 바로 비극적 과오인 것이다. 이러한 중간적 주인공에게는 도덕이라는 부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도구가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노부인의 방문』 에서의 인물들의 시작과 결말의 과정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에서 중요한 요소인 연민과 공포를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뒤렌마트는 일에 대해 그는 죽음으로써 위대해진다. 그의 죽음은 의미심장하면서도 동시에 의미가 없다. 그가 고대 도시 국가의 신화적 제국에 산다면야 의미 있는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일은 귈렌에서 일어난다. 현 시대에 말이다라고 지적하였기 때문이다(뒤렌마트 16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에 대해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자주 언급한 『오이디푸스 왕』은 『노부인의 방문』과 상호텍스트로 해석 할 수 있을 정도로 비극적 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운명과 차량, 도시의 황폐화, 인물 구도, 일의 탈출 시도, 상징적 시간표현이 그러하다(박건용 227-28). 운명과 차량이라는 의미는 죄의 심판의 의미이다. 귈렌시에 클레어가 일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잠시 깜박했던 오래 전의 죄를 심판하러 오는 운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도시의 황폐화는 테베의 역병과 같다. 주인공이 서서히 죄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점점 인식하고 추적하기 시작하는 원인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한다. 물론 이를 통해 결론은 그것이 어떤 느낌을 주든지 간에 두 작품 다 코러스의 합창과 함께 질서 정립이라는 사건 마무리가 이루어진다. 이는 극에서의 공동체에서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노르베르트 아벨스 278). 그런데 『오이디푸스 왕』과 『노부인의 방문』의 비극에서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분명 존재한다. 이는 절대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 영웅뿐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희극의 주인공들인 그들은 부정성에 그들이 저지른 살인만큼이나 깊숙이 감염되어있기 때문이며, “오늘날의 세계에서 희생자만을 보여주고, “클레리를 추방하고 일을 죽이는 그 전체 사회의 움직임과 그것을 움직이는 힘의 근원을, 그 존재론적 질서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고 그리하여 희극적이게 되기 때문이다(박건용 284-5). 만약, 『노부인의 방문』이 『오이디푸스 왕』처럼 정말로 어느 한 사람의 희생 혹은 어느 한 영웅의 희생이라면, 그 희생이 정말로 어떤 것에 회복이 되었느냐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법, 신성 혹은 공동체의 법이 다시 회복 되거나 하지는 않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동시대에 뒤렌마트 세계 주변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 왜 이렇게 고대와 뒤렌마트의 세계는 서로 보이지 않는 간극이 생겨버렸는지는 비슷한 다른 상황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뒤렌마트가 연극 활동하던 당시 1950년대에는 부조리 극작가 이오네스코가 부조리 극으로 영향을 끼친 시기였다. 이 부조리 극과 뒤렌마트의 극은 인간 세계의 기괴성으로 대치시켜 희비극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김종대 153). 부조리극도 뒤렌마트가 생각하는 극의 이론처럼, 세계에 대해 고전극과는 다른 완결된 구조의 세계로 보지 않고 있다. 또한 부재와 목적이 있을 뿐이며, 인간 내적으로는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명확한 정의와 인격의 중심이 없고 허전하며 목적이 없다. 극의 세계가 논리적일 수 없는 것이 현실의 논리와 부딪치면서 모순이 발생한다.

부조리 극에서 세계는 완결된 세계로 나타나지 않으며 논리성이 없다. 드라마의 사건 진행이 부재고, 대신 목적 없는 대화, 곡예적 사고, 성찰이 지배적이다. 외적 세계가 서술되지 않고 인간 심리의 내적 공간을 서술대상으로 한다. 인간 심리의 내적 공간에서는 인간 세계가 기술되지 않고 불가사의한 것, 선험적인 것, 혼돈적인 것, 비존재적 존재에 관한 기술이다. 따라서 부조리 극의 주인공은 이상이나 목적을 지니지 못한, 그리고 목적을 지니지 않는, 중심을 잃고 허전한 심리 상태에 처해 있다. 환언하면 주인공은 형이상학적인 폐쇄 상태의 인간이다. 부조리 극에서는 시간 개념을 초월하고 무시간 상태가 나타난다. 공간 개념도 역시 초월되기 때문에 공간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사건 진행이 없고 정지 상태다. 등장인물은 동일 인물로 일관하지 않고, 주객 관계가 와해되기도 한다. 등장 인물도 꼭두각시, 유희자 등으로 나타난다. 보조리극은 논리 체계가 와해되어 있기 때문에 무언극적 요소가 지배적이며 비유, 패러독스, 광대극적 요소를 지닌다. 이러한 비논리적 언어와 유희로 인간 사이의 의사 소통은 불가능하고 언어의 파괴가 이해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부조리 극에서 인간은 시작과 종말이 없는 공전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부조리 극은 인간 세계의 문제를 보고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없고, 인간 운명을 논술할 수 없으며, 또한 화려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부조리 극은 상황극이다. (김종대. Esslin. Das Theater des Absurden 182 재인용)

           어떤 상황에서 현실 문제의 경종을 직접적으로 논하거나 울리거나 혹은 표현을 부조리 극에서는 하지 않는다. 그만큼 현실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무언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세상임은 틀림없다. 뒤렌마트는 이러한 부조리 극의 요소를 희극에서 찾고 당대 현실에 대해 고찰하였다. 그의 에세이 『연극 문제』와 『연극 쓰기들』에서 아리스토파네스를 높이 평가하면서, “희극적인 요소는 착상이나 발상을 가능하게 하고 착상이라는 수단을 통해 거리가 생긴다. 객관적인 세계 통찰의 가능성이 다양하게 열린다는 이유를 들었다(김종대 154). 그의 에세이 『연극 쓰기들』에서는 희극과 비극에 대해 이렇게 논하고 있다.

비극이란 죄, 곤경, 규범, 책임 등이 전제될 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지만, 오늘날의 종말적 서구 사회에서는 죄지은 사람도 없고, 책임질 사람도 없다. 우리는 공동적인 죄책 속에 존재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어떤 개인적인 비극적 상황은 성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비극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잃었다. 이러한 논리에서 2차 대전은 일종의 희극이다.

(김종대. Dürrenmatt. Theaterschriften. 136 재인용)

           또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코미디라는 것은 원자 폭탄 시대에 비극을 유일하게 식별할 수 있다라고 말을 했었는데, 위의 인용문을 비추어 보면서 그의 극 작품 진행 상황을 살펴보면서 그의 희비극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일은 옛 시절의 과오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과오와는 상관없는 귈렌 시의 경제적인 몰락이 찾아왔다. 그는 앞으로 차기 시장의 후보이며 앞으로 시를 구원하게 될 옛 과오의 피해자 클레어와 만나 친숙하게 지내면서 그녀에게 잘 보이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 클레어는 자본으로 귈렌시의 파산과 기존의 질서 체계를 매수하면서 까지 이 모든 것들은 영악하게 일의 심판에 준비했었다. 이미 그녀는 그것에 대한 암시를 시민들과 일에게 말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일을 감싸주려고 하지만 점점 일을 이미 이 극에서 계속 보여주었던 그로테스크한 행동으로 일을 압박해오기 시작한다. 일은 더 이상 귈렌시와 이 사건에서 탈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시민들의 정의 심판에 몸을 맡기지만, 시민들은 이미 정의와 도덕을 새롭게 정립하면서 그를 죽인다. 시민들은 정의를 선언하고 합창단은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낙관한다. 일은 스스로 그 책임도 내게 있습니다라며 죄를 인정하며 속죄하고 가족과 일과의 만남으로 의미심장한 행동을 하지만, 이 속죄가 시민들에게는 뒤렌마트의 말을 빌리자면 의미 없다(뒤렌마트 114). 그의 속죄와 죄에 대한 고백은 바로 죄에 대한 처벌로 이어진다. 관객들은 전체와 개인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 속에 있는 극에서 현대의 그로테스크한 희극적인 상황들을 보며 부조리함과 모순을 인식하게 된다.

그만큼 현실 세계는 뚜렷하게 말할 수 없지만, 파시즘과 자본과 인종 등등 셀 수 없는 키워드 사이에서 혼재하고 있다. 어떤 사건에서 원인은 추측할 수 있어도, 그것이 그럴 듯 한 추측일지라도, 막상 역으로 되짚어 보면 또다시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다. 거기에 자본은 계속되는 예외를 만들어 준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과 인간간의 고귀한 윤리적 가치, 인간으로써의 가치 혹은 사회적 절대적 가치를 논하기가 불가능하다. , 현대 사회를 애초부터 조화라는 단어에 적용시키기가 힘들다. 한 사람이 고귀한 죽음으로 희생된다 할지라도 사회에서는 통계에 그치고 만다. 또한 하나의 가치관을 가지고 용기 있게 아니, 현대적인 시각에서 완강하게 고집스럽게 융통성이 없다면 인간관계에서나 사회생활에서의 비극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모두의 행복을 논하려면 하나의 개인을 논할 수 없고,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면서 다른 것들에 대한 목적을 배제하기에는 너무 힘들다. 민주주의가 일어나고 자유주의가 생성되며 시장주의가 중심으로서 새롭게 생겨난 이상, 인간의 행복과 미덕과 자유와 도덕에 대한 이 요소들의 가치기준들이 저곳에 맞춰 질 수 밖에 없다. 자유시장주의 자체의 논리에서 요소들과는 끼워 넣으면 넣지 결국 선택이라는 순간에서는 고지식한 것들이 전부 무너지게 된다. 뒤렌마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어떻게 문제들을 재현 할 수는 있어도 너무 복잡해지고 은폐되어 있는 시장체제 때문에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 나름 웃겨야 하는데, 베르그송의 웃음에 대한 생각처럼, 감정이입을 주지 않기 위해 그로테스크한 것들을 집어 넣으면서도, 단테가 이야기 하듯 몇몇 역경의 상황들에 시작되지만 행복한 결말을 맺는 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무언가 기표할 수 없는 고민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렇다고 비극처럼 고귀하고 숭고한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말로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 아니지 않기 때문일 수 있겠다.

 

참고문헌

 

김종대. 「뒤렌마트의 희비극」. 『독일 희곡 이론사』.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94. 150-63

노르베르트 아벨스. 인성기 역. 「노부인의 방문. 『클라시커 50 연극』. 서울: 해냄. 2003. 272-79

뒤렌마트, 프리드리히. 노부인의 방문. 『뒤렌마트 희곡선』. 서울: 민음사. 2011. 7-176

박건용.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에서의 죄와 벌의 문제」. 『독일현대문학의 이해』.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215-44

아리스토텔레스. 로즐린 뒤퐁록, 장랄로 주해. 김한식 역. 『시학. 서울: 펭귄 클레식 코리아. 2010

한일섭.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노부인의 방문」. 20세기 독일 문학의 이해』. 서울: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8. 357-91

Dautel, Klaus. "Zwei Tafelbilder zur Tragischen Komödie." Friedrich Dürrenmatt - Der Besuch der alten Dame Unterrichtsideen und Arbeitsvorschläge. Zentrale für Unterrichtsmedien, 2009. Web. 29 Apr. 2012. <http://www.zum.de/Faecher/D/BW/gym/duerrenmatt2/mats4.htm>.

Dürrenmatt, Friedrich. Der Besuch der alten Dame – Tragische Komödie. Zürich: Diogenes. 1980

---. Theaterprobleme. Zürich: Arche. 1955

Sucher, Bernd. “Dürrenmatt, Friedrich”. Henschel Theater-Lexikon. Henschel. 2010. 177

 

* 『노부인의 방문』 등장인물, 소도구 그리고 음향효과 관련 논문 요약자료 *

1. 등장인물

             작품 속에서의 집단적 소속감에 따라 등장인물들을 배열했다. 클레르 짜하나시안과 알프레드 일만이 개인적인 이름을 지닌 체 소개되며, 이후 작품 속에서도 책임 있는 개체로서 취급된다. 그 외의 다른 인물들은 7,8,9 호 남편과 같이 단지 번호로 표시되거나, 시장, 목사, 교사, 의사, 경찰관 등과 같이 익명의 기능 수행자로 취급된다.

 1) 방문자들 : 클레어 짜하나시안

             붉은 머리, 진주 목걸이, 거대한 황금 팔찌, 짙은 화장 등 요란한 치장을 한 채 등장한다. 그녀의 사지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인해 의족과 의수로 고정되어 있다. 보비에게 의족을 건네달라고 명령하고(52), 이를 조립(54)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로테스크 분위기를 연출한다. 임신을 하고 알프레드 일로부터 버림을 받고 고향을 떠났었으며, 일의 딸이 사망한 후, 창녀로 살아갔다. 그러다가 부자와 결혼하여 부자가 되었다. 집사 보비라고 부르고 다른 남편들도 애칭이 이와 유사하게 만들어 데리고 다닌다. 이 남편들은 전부 동일 배우들이며, 그녀와 이혼을 하면 재산을 전부 빼앗긴다. 당시 친자 소송 때 부장 판사였던 호퍼를 집사장으로 삼았으며, 그 당시 일에게 술을 받고 클라라와 동침했다고 거짓말을 한 두 명의 위증자를 그녀에 의해 고자가 되고 장님이 되었다. 또한 범죄자 두 명을 빼내어 앵무새 처럼 대한다. 두 명의 고자는 그녀에게 쓸모 없게 되자 홍콩 아편 굴에 폐기처분 시킨다. 그녀는 비상 신호기를 당겨 급행열차를 세우며, 식당칸에 있는 기자들을 남겨둔 채 기차를 출발시킨다. 이에 경고하는 기관사에게는 1천 그리고 철도종업원 미망인들을 위한 자선기관에 3천을 내어 입막음 한다. 또한 농장주 7 호 남편에게 깊이 생각할 것을 그리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 9호에게 생각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2) 피 방문자들 : 귈렌 시민들

             시장은 처음에는 노부인의 청부살인 제의에 거절하는 용기로 시민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다(50). 그러나 클레어는 시민들의 마음이 바뀔 때 까지 호텔에 머무르게 되고, 그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 2장에 고급담배와 값비싼 술을 마시고 새 넥타이를 매면서 새 구두를 주문한다. 그리고 시청 사무실에 새로운 레밍톤 타자기를 들여놓으며, 청사 벽에는 신청사 설계도를 걸어놓는다. 노부인의 표범이 탈출할 때는 제일 먼저 통으로 무장하여 사냥에 나선다. 일이 살인교사죄로 체포해 달라고 요청할 때는 인문주의와 법치국가의 전통을 들먹이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목사는 공포에 질린 일에게 모든 일들을 긍정적으로 보라고 권고한다(74). 목사는 귈렌에서 배반의 종소리가 울리고 있으니 사람들을 시험에 들지 말고 어서 속히 도망치도록 일에게 사정한다. 그의 말 의미는 공포를 극복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가정하에 행동하고 있다.

             경찰서장 한케는 근무 중에 비싼 필스너 맥주를 마신다. 일이 클레어의 살인교사혐의로 체포해 달라는 말에 거절한다(62). 일이 그가 신고 있는 노란색 새 구두와 그의 얼굴에서 번쩍이는 금니를 보고 돈의 출처를 캐묻자, 경찰서장은 그에게 총구를 든다.

             교사는 인문정신이 투철하다. 20년동안 교사로서 근무하고 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는 있는 인물이지만 살인극을 저지하지 못한 채 술이나 퍼 마시고 공범자가 된다(103).

             이러한 타락 현상은 나머지 귈렌 시민들에게도 나타난다. 가장 사랑 받고, 가장 중요한 인물이기에 돌아오는 봄에 시장으로 추대될 것이 확실하다고 일을 안심시킨다. 그러나 갑자기 고급담배를 피우고, 수입 양주를 마시며, 라디오, 세탁기, 텔레비전 등 비싼 가전 제품들을 마구 사들인다. 비싼 식료품들을 사들이기도 한다. 도덕적으로 타락함을 강조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이 외상으로 사들인다. 모두가 노란색 새 구두를 신음으로서 이를 더욱 강조한다.

             일의 식구도 마찬가지다. 부인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아들 카알은 일하러 가봐야겠다는 핑계로 그와 식사도 하지 않고 가족 간의 대화는 단절된다. 카알은 비싼 가죽 잠바 차림에 운전면허를 취득한 후 오펠 올림피아 자동차를 구입한다. 딸 오틸리에는 직업소개소엔 갈 생각을 않고 테니스 레슨을 받으러 나가면서 불어와 영어 상급과정에 등록한다. 일의 부인도 밍크코트를 장만한다. 일의 가게 마 저도 새롭게 단장하였다. 또한 부인은 일에게 한심하다는 핀잔 마저 놓는다(104). 부인은 300의 값에 외상으로 일의 초상화를 주문한다.

귈렌 시민들이 외상을 지기 시작하면서 속죄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 의식이 그들을 범죄자로 몰아간다. 노란색 구두를 신고 총기로 목사를 포함하여 전부 무장하기 시작한다.

2. 소도구

             껌을 씹으며 황금가마를 클레어는 탄다. 원래 전기의자 형을 언도 받았던 토비와 로비다. 이 가마는 원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것인데 프랑스 대통령이 선물했다고 한다.

             관과 조화는 일의 죽음을 암시하는 도구이며, 이 관에 일을 담아 카프리 섬으로 노부인은 떠난다.

             노부인이 처음에 귈렌에 들어갈 때 선두에 등장하는 것이 맹수 우리다. 표범은 일이 젊었을 때, 그녀에게 붙여준 애칭이다. 우리에 표범이 탈출하자 사살되는데, 이는 일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암시한다. 표범은 시민들로 하여금 총기를 장전하고 추격하는 빌미를 제공해 준다. 이 총기는 경찰서장이 일에게 겨눌 때, 일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다.

             기자들이 일의 가게로 나타나 사진을 찍을 때, 일이 살인도구인 도끼를 파는 모습을 찍는다(100).

3. 음향효과

             귈렌 시민들은 시장의 진두지휘 아래 노부인을 위한 환영 준비에 들어간다. 현수막을 들고 역전에 연도하고 청소년 혼성합창과 취주악 연주, 체조협회에서 준비한 피라미드 체조 공연 그리고 이어지는 황금사도정에서의 성대한 만찬 준비 등등 시 전체가 분주하다. 재정 형편상 야간조명은 켜지 않았다. 여기에 파산한 귈렌 시에서 아직 저당 잡히지 않은 유일한 물건인 화재경보용 종소리는 행사 때는 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노부인이 시내 호텔로 향한 직후와 시민들이 표범을 잡기 위해 총을 들고 무대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직후 소리가 난다.

             모닝 가운 차림으로 의족과 의수에 맞춰 클레어는 기타소리를 듣는다. 표범이 사살 될 때 이 기타는 장송곡으로 연주하도록 그녀는 명령한다. 일의 죽음이 임박했음이 암시되는 장면이다. 표범이 죽을 때는 장송곡이 흘렀지만, 일이 희생물이 되었을 때는, 그녀는 무표정하게 사무적인 태도를 보인다.

             기차 소음은 중요한 순간마다 돌발적으로 울려 퍼지면서 연극의 흐름을 수 차례 단절시킨다. 시장은 시민들 각자에게 클레어 부인 환영 준비를 지시한다. 그런데 기차의 급 브레이크에 그 지시가 제대로 전달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시장이 클레어하고 대변하고 인사를 하는 찰나에 다시 기차소음이 난다. 이러한 단절되는 현상은 환영 연주 장면에서도 일어난다. 예견될 수 없는 우연에 갑자기 최악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요약한 문헌

봉원웅.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한국 하인리히 뵐 학회지』 5 (2005) 13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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