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 – 사회적 상징행위로서의 서사』 제목 따라가면서 생각하기

2012. 8. 23. 20:07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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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 사회적 상징행위로서의 서사』 제목 따라가면서 생각하기

201180142 석사과정 박형락

 

           이 책의 서문 앞 부분에서 나오는 역사화(Historicize)는 일반적인 역사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는 막시스트다. 지나갔던 인간의 삶을 어떤 수단을 통해 기록하는 그러한 작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헤겔이 주목하는 변증법(dialectic)에서 바로 끝을 향해 달려가는 절대 정신으로의 운동 과정을 모티프로 삼았다. 여기에 역사화하는 과정을 두 가지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대상의 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체의 길이다(Jameson ). 제임슨은 문화의 영역에서 이 두 가지의 길 중, 역사적 기원을 찾는 것이 아닌 하나의 대상을 이해하면서 이에 따르는 개념과 범주의 역사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점에서 제임슨은 변증법적인 운동에 주목하였다. 기록들은 이미 우리에게 놓여져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이 능동적으로 독자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독자는 이미 읽혀진 것으로서 오기 때문이다(Jameson ). 이것을 읽혀지는 것에 대해 독자는 이미 배우고 학습되어 있는 관습문화에 학습되어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텍스트를 받아들인다. 그것을 해석(interpretation)하는데 이미 기준이 그 스스로에게 세워져 있고, 이를 통해 새로운 것과 부딪치면서 자신의 관습에 적용시키고 학습해 가거나 사유하는 것이다. 문학이라는 것이 독자의 금이 있는 관습문화에 비집고 들어가 깨뜨리고 변화를 줄 수 있다. 따라서 제임슨은 그 텍스트에 주목을 하였다. 사회주의를 대표했던 소련의 붕괴 속에 그 뒤를 대표하는 중국마저도 이미 내부는 등을 돌린 현실에서, 아직까지도 자본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 즉 부르주아의 착취에 대한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과 함께 숨겨져 있는 구조들을 들춰낼 수 있는 작업에 대하여 그는 인문학적으로 고민을 한 것이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말하는 경제 원리를 따른다면 생산과 소비는 일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들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마치 누구나 노동을 한다면 충분히 그만큼 먹고 살만큼의 가치가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한가지 노동에 의하여 혹은 생산에 의하여 소비가 이루어 진다는 것은 하나의 모순이 생긴다. 자신의 노동 하나만으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환을 해야만 한다. 청년 맑스(Karl Marx)가 주장했듯이, 이 세상은 정말 로빈슨 크루소의 경제 시스템에서만 아담 스미스의 경제론이 일치 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욕망(Desire)이 있으며 타자를 통해 의존하는 주체가 있는 것 같은 주체일 뿐 이다. 특히 기술의 발달은 더욱더 그러하다. 우리가 유적 존재라면,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 내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창조를 해내는 그 문명의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다양한 발달은 그 자체 하나의 사회 구조가 된다. 이 구조 속에 복잡한 다름이 경제 관계에서도 비롯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쓸모를 위해 교환을 하기 시작한다. 그 교환에 대한 기준이 필요했고 그것이 가치 기준의 필요성이 생기면서 점차 이러한 발달은 자본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청년 맑스는 유럽의 쓰여진 역사를 회고하면서 전쟁과 기근의 역사를 고찰하였다. 이에 대한 배경으로 인하여 좀더 발달된 기술로서 높은 계급의 후원아래에 더 큰 생산력을 창출하려는 노력과 흔적들을 상기한 것이다. 이러한 생산력이 수요를 넘치게 되면, 더 많은 잉여가치 창출과 가변자본의 필요로 인해 식민지 침탈이 시작된 것이라고 그는 서술하였다. 여기에 발생하는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를 잇는 삼각무역이 산업혁명의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모순이 발생했었다. 노동력에 따른 분배가 생산이 곧 소비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 맑스는 『포이어바흐 테제』(Thesen über Feuerbach)를 정리하면서 유물론적 인식과 더불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Über die Differenz der domokritischen und epikureishen Naturphilosophie)[1]를 통해 깊은 사회 문제의식에 따른 고전으로 돌아가 유물론의 변화과정을 고찰하였다.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 사이에 있는 분배와 교환의 관계를 맑스는 들춰내면서 가변자본의 착취로 인한 잉여가치를 어떻게 자본가들이 다시 더 큰 축적과 집약을 이루는지를 고발함으로써, 우리들이 알지 못했던 생산력과 생산관계(relation of production)에 따른 생산 양식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였다. 이러한 생산양식이 곧 토대(base). 토대에 따른 여러 법과 정치 그리고 예술과 같은 상부구조(superstructure)가 여기에 영향을 받는다고 청년 맑스는 주장하였다. 물론 훗날 레닌과 엥겔스가 지적하듯이, 이는 자칫 모든 것들을 경제적인 양식으로 설명해 버리는 경제적 환원주의에 대해 경고를 하였으며 이는 마치 기계론적인(mechanical) 구조라고 꼬집기도 하였다. 제임슨의 사유는 이러한 기계론적인 매개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경계하고 있다. 청년 맑스에서 제임슨은 위와 같은 사유에 큰 영향과 함께 소외(alienation)와 총체성에 영향을 받았다. 생산 양식에서 맑스가 각자 관계에 따른 요소들이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하나의 큰 유기체로 이루어져 있듯이 말이다. 이러한 총제적인 시각에서 제임슨은 하나의 사회를 보았다. 이 사회들은 파편화된 사회로서 국부적인 방법”(local ways)으로, 수 많은 상부구조(superstructure)의 요소들을 봉쇄의 전략”(strategies of containment)으로 살펴 보면서 부분적 타당성들을 최소시키면서도 보존하는데 주력하였다(Jameson ).[2] 이는 봉쇄적 전략에 대한 무조건 적인 비판이 아님을 그의 책 서문에서 알 수 있다. 단지 어느 하나의 이론에 대해 우리의 세계를 읽어내는 것에 대한 경고이며 무수히 파편화 되어있는 사회에 대해 마치 생산 양식에서의 총체성처럼, 드러나지 않으면서 여러 봉쇄되어 있는 것 같은 요소들에 대해 매개(mediation)를 이끌어 하나의 유기체가 되는 총체적인 사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서의 상징계는 하나의 질서된 세계이다. 이미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적 존재에 의해서 결정되어지고 조건되어 진다. 이미 정해져 있는 세계에서 인간은 맑스의 시각에서 본다면 욕망과 계급은 경제적 생산 관계 속에서 토대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과 사회간의 관계를 다시 한 사람의 개인으로 좁혀서 해석하는 프로이트의 사유를 빌리자면, 무의식(unconscious)이라는 것은 의식이 분열이 일어 날 때 신경증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결국 의식내부 자체는 다른 층들이 존재한다는 말인데, 이를 정신과 의사가 증상을 통해서 관찰한다고 하였다. 증상자체는 반드시 해소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인데,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한 개인이 무언가에 억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억압(repression)은 여러 형태로 전환되어 있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하였다. 제임슨의 사유와 차이점이라면 바로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슨은 억압의 형태들이 위의 맑스의 사유와 프로이트의 사유를 빌려서, 두 개의 인과 관계에 따른 매개의 관계가 아니라 다양한 억압적 장치들이 서로가 매개되어 총체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유를 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에서 텍스트로 나아가는 데에는 프로이트의 사유가 더 필요하다. 정치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억압된다는 개인은 결국 자기가 가장 하고 싶어하는 근본적인 그 무언가의 이드작용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프로이트의 근원적인 사유는 아니지만 좀더 맑스와 함께 정치적인 것으로 이끌어 나가면서 생각해 본다면, 이 이성이라는 것이 자기 주체에 의해서 그 스스로가 억압하느냐이다. 결국은 자아자체는 현실원리에 지배되어지는 것이다.[3] 하지만 이 자아에서 소위 말하는 오이디푸스의 법에 무의식적으로 통제로 파생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의 결말은 질서의 재정립인데 이를 놓고 보자면, 질서 그 자체가 우리를 통제하는 것인데 그것이 근원인 마냥 인간의 무의식을 억압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마치 문명 속에 언제나 죄책감과 불안을 도사리고 있다고 보게 만든다(김석 101). 따라서 정신 장애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면서 그것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무의식을 탐구할 것을 요구한다(김석 29). 이러한 해결책이 정신분석의사가 환자의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처럼, 제임슨은 텍스트를 통해 해결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작가가 텍스트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있는 하나의 기록이다. 그것이 환상문학이건 간에 설령 상업을 목적으로 작성되어도 그것은 하나의 기록이다. 자신의 기록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글쓰기를 한다 하더라도 그 목적과 대상은 명확하기 때문에, 오히려 거기에 맞게 글쓰기를 해야만 한다. 의도적일 수는 있지만 설령 그러지 않더라도 정치와 사회와 역사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하고 고려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 구조에 이미 습관되어 있기 때문이고, 학습되어 있지 않더라도 작가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ideology)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환상문학의 특징은 말 그대로 실제와는 다르다. 작가 자신의 환상 속에 녹아 있는 사건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구조와는 다르게 비추어 질 뿐이다. 잠시 여기에 대한 특징을 살펴 보면서 제임슨의 사유를 생각해 보면 흥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 소설의 특징에서 가장 두드러 지는 것은 내면성과 외부세계에서의 이원성을 들 수 있다. 적대적이고 공격성에 대한 주체의 고집으로 내적 정신세계는 추상화되고 이것이 대립됨을 뜻한다.

 

                           내면성은 갈수록 자율성과 품위를 무기력 속에서나마 입증했던 자신의 고유한 이상과 가치를 상실                      해간다. 내면성이 지닌 영혼의 풍요로움은 메말라버린다. 자신의 가치를 현실에 접근시키거나 자신                      의 이상을 현실 속으로 투사하려던 의미있는 내면성으로부터, 외부세계에서든 자기 회상에서든 모든                    소여적 사실을 수동적으로 기록하거나 재생산하는 순수 수용적 의식(rezeptives Bewußtsein)’이 점차                           형성된다. (위르켄 슈람케 89)

 

           환상이라는 것은 외부세계의 인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자신의 끊임없는 내면화는 역설적이게도 하나의 외부 희망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위의 행동 그 자체가 작가 자신 하나의 개별적인 역사성을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전통과 현대와의 차이점이다. “내면성은 조밀하고 풍부하게 마련된 자족적 소우주(Mikrokosmos)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르고 균열적인 성격을 띠면서 희미하고 빛바랜 영적 실체의 냉담한 용기인 것이다(위르켄 슈람케 104). 그 이유는 이미 자신이 외부의 문제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것에 대한 내면의 집착이 계속 될수록, 쉽게 말해서 이 모든 것 과정들이 글쓰기로 작성되면서 자기 만의 개별적인 내면 그 자체가 무너져 버린다. “외부의 객체를 포기하는 의식은 스스로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고, 그럼으로 해서 그것은 자신의 동일성을 확신하는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이 되어버린다”(위르켄 슈람케 106). 쉽게 생각하자면, 글쓰기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내면적인 것을 글쓰기로 가져가게 되면, 그 자체가 작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외부의 세계에 따라 해석해 나가는 텍스트가 된다. 그런데 정말로 자신의내면의 표상을 외부의 세계로 투사하지 않으면 그 자체의 글쓰기는 객체없는 내면성으로서 집단적이고 법칙적 메커니즘에 따라 흘러가는 영혼의 표준화된 삶이 생겨난다”(위르켄 슈람케 106).

           바로 이 지점에 개인적인 개념이 될 수 있는 무의식에서 집단적인(collective) 문제를 통해 확장 가능한 정치성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사유를 찾을 수 있다. 무의식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성에 의해 억압이 되어 있지만, 그 무의식 자체가 이미 고대적부터 쌓여온 내용들이 비집고 들어간 유산이라고 하였다. 또한 보편적 자산으로서 개체발생학(ontogenetisch)도 이에 포함된다. “집단적인 것은 활동적내지 개체발생학적으로효력을 미치는 메커니즘을 통하여 영혼의 내부로 유입되며 충동 억제의 형식들이라든가 사회규범의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다(위르켄 슈람케 109). 따라서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이미 집단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들마저도 쓰여진다. 텍스트는 비개인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점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바로 전지적인 서술 태도에서의 글쓰기이다. 이러한 내면의 글쓰기에 전지적 서술 태도는 어떻게 적용 시키느냐 를 고민 할 수 있다. 여기에 따른 해결책이 바로 이로니’(ironie). 물론 이는 내면의 세계에서도 포함이 된다. 작가관이든 또는 텍스트든 혹은 그것의 의미(meaning)든지 간에 그것들이 표층화되어 있는 것과 심층화되어 있는 것과의 간극이 발생할 때, 우리는 이로니라고 한다. 이 이로니를 통해 외부와 내부를 느끼며, 이 둘을 구분함으로서 객관화되고 둘의 관계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균열을 중재하고, 추상적으로 절대화된 두 영역의 상호조건을 제시하기도 하며, “내용적 통일이나 와해된 세계에서의 의미관계에 관한 한 무지를 드러내지만, 윤리적 충격을 받아서 자신의 단순한 부정성(Negativität)을 뛰어넘는다”(위르켄 슈람케 157). 텍스트는 결국 작가가 만들어 질 때, 그가 그것을 창조하는 순간 순간 마다 수없이 많으면서도 스스로 의도된 것과 의도되지 않지만 그것이 항상 내재되어 있는 부재이면서 실제인 것을 작성한다.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이 단순한 사실과 혹은 현존과 대립을 이루고 있는 텍스트에서는 결국 상징화되어 질 수 밖에 없다. 서사에서 현존 하지 않은 의미들은 수많은 파편화되어 있는 구조들과 생산양식들 그리고 집단 무의식 속에서의 유산들과 활동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은 것들을 현재화 시키거나 들추어 내야만 한다. 이 작업[4]을 위해서 방금 기술했던 과거들과 현재들 그리고 이러한 분석에 따른 혹은 간극에 대한 기대 또는 불안의 미래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사에는 동시성(Stimultaneität)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제임슨은 구조주의자의 사고를 바탕하고 있다(Dowling 115). 그에게 있어 서사라는 개념은 엄격하고 정확한 응집되어진 의식의 역사적 모순들의 압력을 통한 구체적 메커니즘으로 구성된다(Dowling 115). 서사에서의 이원성에 드러나는 모순에는 비가시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거기서 바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제임슨이 말하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근원적인 혹은 다른 것의 밑에 있는 하부텍스트(subtext)의 단계로 모순이 발생된다(Dowling 122). 그런데 이 모순에서 상상과 상징의 세계를 지켜 볼 필요가 있다. 환상 그 자체의 서사라면 혹은 작가 내면성을 추구하는 그 서사 또는 형식적인 면에서의 이로니를 추구하는 서사라면, 그 자체가 현실적인 것들을 그 세계에서 침투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동시에 이러한 생각들을 현실적인 세계를 부정한다는 것이다(Dowling 123). 따라서 상상적인 것에 대한 상징적인 행위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하나의 이면을 띄고 행동(act)한다는 것이다. 제임슨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deological state apparatuses)를 빌려 비억압적인(nonrepressive) 시스템을 통한 헤게모니(hegemony)에 따른 통합적이면서 관계적으로 억압에 기여하고 있음을, 모순에 대하여 청년 맑스가 생각했던 생산양식의 그 모습을 들춰내면서 하나의 담론(discourse)으로 형성해 내었다. 체계화되어진 구조들을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모순을 파악하고, 이 구조에 의해 침투해 들어간 존재들을 통해서 이데올로기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생산양식을 통한 생산관계는 그 자체 만으로도 노동력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사물화(reification)가 된다. 왜냐하면 자본가의 입장에서 착취대상인 가변가치를 바라보는 관점은 사회적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면서도 그것을 하나의 숫자의 수치로 인식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관계를 들춰볼 때에도 노동의 수요와 공급에 따른 결정, 즉 하나의 상품(commodity)으로 보게됨으로서 시장의 관계로 인간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배가 큰 역할을 할 수 있겠다. 또한 포디즘을 통한 하나의 생산 과정은 지극히 합리적인 입장에서 수행된다. 이러한 구조를 바탕으로 제임슨은 최종심급(in the last instance)에서의 경제에 의한 역사와 이 역사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경험하는 세계로서 어떻게 개념이 정확하게 설명되는지를 원한다(Dowling 28). 여기에서 말하는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나아가 절대정신(absolute spirit)으로 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모순의 지평 속에 존재한다. 그런데 변증법적으로 향해가는 과정을 고찰해 본다면 말 그대로 정신들이 하나씩 단계를 거쳐서 절대정신으로 가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과정들 속에서 분명히 내재되어있고 드러나있지 않은 그것들에 대한 의미가 바로 역사(History)라고 생각되며 내재된다. 이 정신에는 민족, 시대뿐 아니라 국가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실재(the Real)이다. 따라서 정신이라고 말하는 것 그 자체가 순수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들이 함께 침투해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이는 시대정신(Zeitgeist)과도 같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표현적 인과성(expressive causality)처럼 숨겨저있는 본질들이 서로가 연관되어 하나의 시대 정신으로, 총체적으로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알튀세르가 말하는 매개로서의 상부구조에 있는 요소들로서의 혹은 정신들로서의 그 사이에 맞딱드릴 수 있는 동일한 것들을 연관 시켜주며, 루카치가 말하는 전형의 사유일 수도 있고 또한 제임슨이 가장 좋아하는 경제 속으로 모든 것들을 궁극적으로 다 접어넣을 수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음을 잠재하고 있다(Dowling 65). 이렇게 생산양식으로서 설명하려는 막시스트에게 파편화 되어 있는 상부 구조 속에서의 요소들은 모순을 이룬다. 여기에 제임슨은 하나의 전체적인 구조로서 설명 가능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었다. 그것이 바로 역사라는 개념의 입증 작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계론적인 경제 구조의 생각 혹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base structure)의 관계는 그 자체로도 한계를 보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수히 잠재되어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구조들이 모든 것을 경제 결정론 적으로 해석되는 것 그것이 비판된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최종심급(in the last instance)의 사유를 제시했으며 이것이 제임슨의 결정적 역사 사유가 될 수 있다. 정치, 문화, 경제 등등 이러한 구조들은 각기 다르게 사회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서로가 유기적으로 영향을 끼치면서 각각의 요소로서 사회가 존재한다. 이것에서 서로가 동일한 능력으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의 영향은 우위의 판가름 을 하면서 서로가 흡수하기도 하고 모순되기도 하는데, 각기 다양한 우위가 상성 속에서 결정된다. 이것의 총체적인 설명이 중층결정론(overdetermination)이다. 그런데 이것은 환상이다. 동어반복하자면 구조는 유기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임슨의 사유를 찾는다면 바로 상대성과 구조에서 부재(absent)하다는 것은 그것이 내재하고 있다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는 상대성에서 상동관계(homology)를 통해 막시스트이며 총체론적인 입장에서 상반된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차이와 유사성이 서로 의지하는 용어들이며 각자가 의미심장하게 타자로만 분석적 중요한 지점으로 배경이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의해, 막시스트 분석의 구별되는 표식으로서 매개를 유지하기 원함에서 비롯된다(Dowling 74).

           제임슨은 이러한 상동관계를 그라이마스(A.J. Greimas)의 기호적 사각형(semioric rectangle)으로 떠올렸다. 기호적 사각형은 4개의 요소들이 서로 모순을 이루고 대립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사로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위의 문단에서도 이러한 개념의 유사성을 느낄 수 있지만 결국 다양한 인식들의 관계에 의한다. “층위들은 기호적 사각형에 의해 조직되어지고 모두 교차되어져서 그라이마스의 이론에 상동한다”(Jameson 31). 단순히 관계의 도식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의미작용을 통해 설화 혹은 신화의 차원에서의 변형을 파악하게 된다. 좀더 나아간다면 생산, 억압, 전치, 보상 그리고 투사를 가리키는 매우 다양하고 동적인 가능성들에 따라 연관되어 질 수 있는 하나의 관계를 가리키는, 부재와 현존 사이에서 긴장의 관계 속에 강력하게 재구성되어진다”(Jameson 33). 이것은 하나의 재생산 적인 움직임이다.[5] 단순히 사각형 속에 놓여져 있는 상동관계가 다양한 층위들 사이에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이론들을 복합적으로 자기화한 제임슨은 그것을 이론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다시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해 나간다. 생산양식으로부터의 구조 그리고 역사는 실제 상황에서 그것의 이야기 형태로 우리에게 온다는 사유다(Dowling 97). 정신 분석 상담가가 마치 환자의 독특한 이야기 혹은 꿈을 통해 실제 그녀가 원했던 무언가, 억눌렸던 의식이 아닌 다른 어떤 것 또는 과거의 일들이 압축과 전치가 되어진 것을 분석하는 것과 같다.

 

                           모든 서사는 세계를 동시적으로 재현하고 현전한다. , 동시적으로 실제를 창조하거나 만들며 동일                     한 현실에 대한 독립에 서있는 것에 대해 단호히 주장한다. 또한 서사는 세계의 환상 또는 감추어진                     것 그리고 숨겨져 있는 것 또는 그것을 왜곡한 것을 바로 보이게 한다. . . . 해석을 요구하는 의미의                     복잡하고 뒤얽힌 의미의 왕국을 다룬다,

 

                           Every narrative simultaneously presents and represents a world, that is, simultaneously creates or                                  makes up a reality and asserts that it stands independent of that same reality. . . . that narrative                                    seems at once to reveal or illuminate a world . . . and to hide or distort it . . . dealing with a complex                           and tangled realm of meaning that demands interpretation. (Dowling 98-99)

 

           서사는 해석이 필요하며 드러나있는 것과 드러나있지 않은 것으로 구별 시켜서 포함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드러내고, 이전에 내려온 이야기들이 포함되어진 것들을 다른 문제로 연관 시켜낸다. 이 작업을 제임슨 말하는 역사와 텍스트의 관계에서 설명하자면 역사의 억압과 부정으로부터 그것을 구원하는 것이고 해석은 그것을 이해하는 형식이며 실재에 직면하는 정신의 다양한 형태로서, “역사가 서사 형식에서 약호되어 우리에게 온다”(Dowling 99-100).

 

           생산양식을 드러내는 작업이 바로 자본가들의 착취를 수반하여 구성되어 있듯이, 지배형식 그 자체도 역사적인 지배방식을 수반하고 있다. 여기에 정치적 요소를 벗기기 위해 해석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글쓰기는 이미 정치적 무의식으로부터 상징적 행동을 했으며 거기에 따른 초월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불평등한 사회는 언제나 존재했고 그것은 계속 이어졌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누구나 동등하게 대우 받는 듯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불평등하다. 그것이 끝임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불평 불만없이 평등한 세상 또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성취할 수 있다는 그 믿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소시민의 삶을 살고 있다. 이 소시민들은 하나의 전복적인 사유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 대해 구체적인 이유없이 인신적이고 간단한 논리를 펼쳐 도발을 한다. 이에 대해 피해를 받는 자들은 수많은 실패를 이제 한세기 넘게 이어가고 있다. 생산양식에 대한 이해는 풍부한데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없는 것이다. 신용과 금리와 뱅크런에 자본가들마저도 여기에 대한 구조의 모순을 잘 알고 있고 벌벌 떨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자나 반자본주의자나 여전히 진행 중이고 있는 비상사태에 대해서 뚜렷한 대안은 없다. 제임슨도 마찬가지다. 제임슨은 명확하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는 않고 있다. 그는 이유있는 어려운 글쓰기를 추구하고 있지만 그 이유를 통해 더 나아가 대중에게 이어지는 일치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물론 그가 대중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좀더 다가가려고 상당히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저서 『정치적 무의식』은 하나는 우리가 기존 통념을 가지고 있는 강인한 전복적인 사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실천(Praxis)과 전복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그토록 주장하는 역사처럼 내재되어 있다. 그는 하나의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려고 내새운 것이 아니라 생각의 전환을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읽기를 통한 그 자신의 생각을 변환시켜보고 적대적인 사회감을 가지게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기 내부의 수많은 구조들 속에 생산의 방법으로 긴장하고 충돌은 하기를 독자들에게 원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시위가담자 : 구조는 모순뿐이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오로지 구조의 존속을 위한 특정 계급의                                   희생이었다. 희생.

                           윤제휘 :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향한 동경은 극단적으로 현실적인 이러한 세상에선 불필요하며 제거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 행한 수많은 왜곡과 만행을 알고 있는                               ? 인간은 신의 실패작이다. 자신들의 존재자체가 자신들이 만들어내어 배척하는 악이며 위                             선인 것이다. 인간의 정의. . . . 

                           이영헌(공안 2부 부장) : . . . 박명택과 자네가 교전중에 끼어들었던 이진철 27사단은 바로 나였어.                                   리 부대가 위장한 것이었지. . . . 이진철이 배신한 것으로 오인되자 예상했던 대로 수방                                     2,3군의 남윤기와              임국형의 29사단과 싸우더군. 인간들이란 너무 뻔한 동물이야. . . .                                     내분은 예상되었고 원했던 결과야.

                           김창기(공 안3부 특장과장) : 동정심조차 생기지 않는군요.

                           이영헌 : 나에게 말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말인가.  그 이후로 그 때 일을 자주 생각해봤지. 우리가                                실수한 것이었어. 위선을 증오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건 두 명의 배우가 펼친 위선의 연극                               이었어. 동기와 상관없이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궁극적인 출발점은 동물적인                                본능이야. 인간들은 이를 추하다고 하고. 우린 단순히 진급을 위해 상부의 명령에 따라 그                                 를 죽인거였어. 그는 살아 남기 위해 바둥댄거고. 그 위선은 인간이 버릴 수 없는 자신 자                                체지. . . .마침 윤제휘를 비롯한 군부 급진파에서 구테타에 관한 의견을 조심스럽게 들고나                               오더군. 인간적으로 절친한 동료였지만 유제휘와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은 위선자일 수                               밖에 없었지. 군부에 정부의 숙청에 관한 거짓 정보를 줬고. 예상대로 급진파는 온건파를                                   축청하고 일을 벌렸고. 결과또한난 나를 포함한 인간의 상징적인 공개처형을 끝낸 것이                                . 그 때도 지금과 아주 비슷했어그 정의를 짓어대던 자는 나처럼 앉아있고나와 윤제                              휘는 자네처럼 서있고. 다른 점은

(Jacobin Studio. Deicide 3 –Distorted Existence. Bisco. 1996. PC)

참고문헌

 

김석. 『프로이트 & 라캉 무의식에로의 초대』. 파주: 김영사. 2010.

위르겐 슈람케. 원당희, 박병화 역. 『현대소설의 이론』. 서울: 문예출판사. 1995. 83-224

Dowling, William. Jameson, Althusser, Marx: An Introduction to the Political Unconscious. London:                  Methuen. 1984.

Jameson, Fredric. The Political Unconscious – Narrative as a socially symbolic act. Abingdon:                          Routledge. 2002. -88



[1] 독일어는 이텔릭체 표기

[2] 그의 주장은 미국과 유럽을 비교해 가면서 미국 중심으로 사용하였다.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 39페이지의 주석에 따르면, 실제에서 거대한 부분과 전지구적인 관점에 대한 존재의 억압적 관점으로서, 종교 자유나 여성의 해방에 따른 미국은 국부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유럽과는 다르게 미국의 현실은 여러 문제에 대한 저항과 운동들이 다양한 반문화와 선택 가능한 생활 방식들 때문에 실제에서 이론적으로 연합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층위에 있다고 하였다. 이론들이 미국 문화에서는 딱 들어 맞지 않는 것이다.

[3] 여기서 말하는 자아는 이드를 적대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아는 이성과 상식으로서 이드를 적절하게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4] 제임슨은 문화적 텍스트의 구체적인 연구의 지평에서 고려하기 전에 문제가 발생할 것을 염두해 두고 있다. 따라서 생산양식의 개념이 공시적인 것인지 아닌지 관련시키고 수많은 나누어진 칸들에 문화적 텍스트들이 단순하게 빠지는 유형론 또는 구분하는 작동에 대한 다양한 생산양식을 이용하는 유혹에 대한 고심을 고찰해야한다고 한다(Jameson 75).

[5] 15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E-Sports의 스타크래프트 1 리그가 2012년 중순을 기점으로 종료하게 된다. 사실 가장 상업적이고 마치 유행에 편승되는 순간적인 대중문화로 비추어 질지 모르지만 최근 다시 와서 재구성되고 있다. 경기를 시작하기 앞서 항상 짤막한 50초 분량의 오프닝을 보여주는데, 여기에는 16강 본선에 진출한 프로게이머들이 1~3초씩 메탈이나 록음악 풍의 배경음악으로 소개가 된다. 그런데 이번 스타리그에서는 가수 박완규씨가 직접 재능기부를 해서 국내 음악로 ‘Here I am Stand’라는 주제로 시작한다. 3개 종족 별로 선수들이 하나 둘씩 스쳐지나가는데 우승 출신자 경우에는 다른 선수와는 다르게 3초 정도의 상대적으로 긴 장면을 연출해 낸다. 프로토스 우승자 출신은 철길에서 높이 뛰며, 저그 준우승자 출신은 옷을 벗어 던진다. 각 각 선수들이 소개를 끝마칠 무렵 갑자기 선수들이 사라지고 15년 전 이제 30 후반에서 40대가 되어버린 선수들이 하나의 삼각형인 형태로 서서 각자 서로 모순되고 상호적인 선이 그려지게 된다. 이들은 지금 다이나믹한 인터넷 문화에서 그리고 기성세대들에게 숱한 공개적인 공격을 받았으면서 각자 상업적으로 사양되어 버린 게임을 대채하는 종목에 각자 감독으로 지내고 있다. 이들이 흘러간 역사는 KESPA와 블리자드 간의 지적 재산권 소송문제, 프로리그 승부조작 사건, 인터넷 보급 이후 최초의 한류, 세계 1위 인터넷 보급, 게임 중독, 결승전 10만명 관람, E-Sports 병역 특례 프로팀 구성, 임요환 선수 강제 은퇴 등등 수많은 일들에 대해 대표하는 세 명이고 세 종족이었다. 이들은 15년동안 수많은 악재들을 이겨내면서 대기업들이 주관하는 사단법인 KESPA와 좋은 관계로 끝내지 못하고 은퇴를 하게 된다. 단지 5초 분량에서 이들은 상호적 삼각형의 선으로 구성된 각에 서있는 것 밖에 없는데, 서로 언어 장벽으로 막혀있는 인터넷 공간에서 이를 놓고 서로 비슷한 주제로 치열한 대화가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다. 바로 내외적으로 15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모순되지만 3개가 있어야 경기의 배경과 게임의 서사 속의 세계관 그리고 상성의 균형을 이루게 되는 각 대표의 종족들이 지금 현재 서있는 그 자리에서 감정싸움을 그만두고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로 인터넷 문화에서의 담론을 통해 전지구적으로 상징화 시키고 있다. 15년전 10대와 20대들이 어느덧 성장하는 시대에, 상업적으로 무너져 가는 E-Sports를 대한항공 회장 차녀의 대회 스폰 이 후, 끊임없는 대안의 결과들로 새로운 종목을 찾아내었으며 다시 2012년 초부터 그 대안이 시작되면서 1세대 프로게임의 종말을 극복하고 새로운 전성기를 맡고 있다. 이들의 골 깊은 상업적 논리 속에서 점점 기성화 되어가는 과거 고통 받았던 1세대 게이머 세대들의 지원 아래에 (이제 게임을 할 수 없을지 몰라도) 긍정적 시선으로 가치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서태지의 대중 실패를 예상 하면서 혹평하고 프로리그에 대해 비판을 했던 대중문화 평론가 이상벽의 과거와 최근 행적을 바라보고 추억 팔고 있는 모습을 유추해볼 때 전형적인 억압의 상징으로 비추면서 위의 내용들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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