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힘을 들춰내는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방문』과 소피 트레드웰의 『기계적인 것』

2012. 8. 25. 20:08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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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힘을 들춰내는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방문』과 소피 트레드웰의 『기계적인 것』

201180142 석사과정 박형락

 

           수렵과 채집을 통한 자급자족 및 교환의 시스템은 부의 축적과 더불어 생산과 소비가 일치했다. 자신이 생산하고 사용가치(use value)에 따른 잉여(surplus)는 그것이 곧 교환가치(exchange value)가 된다. 이는 개별적이고 고립된 사냥꾼과 어부로서 비유할 수 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51). 그러나 이렇게 고립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생산과 소비가 일치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계급이 있는 로마시대와 중세시대에도 이러한 경제체제에서는 쓸모에 의해 다른 형식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쓸모를 우리는 효용이라고 한다. 바로 어떤 매개가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매개에 대한 가치는 비가시적이다. 교환을 하려면 쓸모가 있어야 하면서 가시적이어야만 소비로서 효율적인 경제 체계가 성립된다. 등가물로서의 가치기준이 필요한 이것은 생산과 소비 사이의 교환에서 수요와 공급에 의한 가변적인 기준으로 성립된다. 이것이 바로 화폐이며, 인적 요소와 물적 요소를 이루는 생산력(productive force)에서의 요소들이 생산수단과 소유관계에서의 관계 즉, 생산관계(relation of production)에 따른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으로 이룬다. 이에 대한 단위는 상품(commodity)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가 될 수 있고 그것이 하나의 가치를 이룬다. 이 가치기준은 상업이 발달하면서 두드러졌다. 바로 쓸모를 이용해서이다. 소위 말하는 대항해 시대(the age of exploration)에서의 교역은 수요와 공급의 차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으며 그에 따른 개척으로 노예라는 노동력을 약탈하기도 했다. 유럽이라는 나라 자체가 오랜 역사 동안 기근과 질병 그리고 전쟁 때문에 수요에 따른 공급을 늘리려면 기술이 발달해야만 했고 순수한 인간의 노동에 따른 농업으로는 수많은 위협 속에서 수요를 맞추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을 제작하는 장인과 길드가 처음에는 귀족 계급에서 부의 증대를 위한 후원으로 서서히 발전해 나가게 되었고, 이는 곧 중상주의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신대륙 개척과 기술의 발달 그리고 노예라는 인적 요소가 증대하게 되고, 여기에 덧붙여 다른 나라간의 교역이 활발해 지는 것은 생산과 소비간의 수요가 서로 증가하는 일로서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뒷받침해줄 공급요소로서 기계가 등장하게 된다.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의 시대에서의 배경이기도 하다. 산업혁명의 전개는 바로 미국과 영국과 아프리카에서 나오는 요소들의 삼각무역에 따른 엄청난 이익을 남기면서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피그말리온(Pygmalion)에서 나오는 일라이자(Eliza)와 같은 계급이 런던 시내에서 귀족들과 혼재하는 모습, 그리고 그것이 사는 위치에 따라 계급에 대한 경계지가 나타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방언을 통해 어느 출신인지 히긴스(Higgins)가 맞춤으로써 그녀가 런던이 아닌 다른 지방 사투리를 사용한다고 언급하듯이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그 뒤 몰락한 수많은 농업인들과 귀족들이 새로운 삶 그리고 기회를 얻기 위해 도시 중심부로 뛰어 들었는지를 유추 할 수 있다. 다시 18세기 초로 되돌아가서 당대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산업 혁명에 대해서 상당히 낙관론을 가졌었다. 칼 맑스(Karl Marx)[1]는 이들이 소비와 직접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의 생산, 생산과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서의 소비를 생산적 소비로 부르며 경제 체제를 생산과 소비의 일체성으로 분석하였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59). 그런데 과연 생산이 소비와 일치가 되는지 맑스는 의문을 가졌다. 왜냐하면 이 둘의 일체성은 타자의 수단상호 종속으로 이루어지고, 소비가 결국 생산으로 이행되기 때문이다. 생산은 곧 노동인데, 결국 노동을 많이 하게 되면 생산은 그만큼 늘어나게 되고 이는 소비를 할 수 있는 부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산업혁명에서는 결국 그러하지 못했다는 것에 문제가 생긴다. 소위 말해서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어야 하지만, 당시 산업혁명의 부작용은 여전히 자본가들의 부만 축적되고 노동자들은 개별적 소비(individual consumption)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맑스는 여기서 분배를 주목하였다. “생산과 소비 사이에 생산물 세계에서 생산자의 몫을 사회적 법칙들에 의해 규정하는 분배가 생산자와 생산물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64). 그는 역사적으로 생산보다 분배가 선행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예를 중세 봉건제도에서의 정복자가 피정복자를 공신들에게 분배하는 그 과정과 가치들을 세습적 특권에 제공함으로 들었다. 여기에 유통에서의 교환과정은 자본가와 자본가 사이에서 벌어지며 그것은 노동시간과 비례되지 않는, 생산으로부터 독립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으로 현상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69). 따라서 맑스는 생산과 소비의 관계에서 분배와 교환, 이 모두가 분절된 것이 아니라 총체성의 분절들로 이루어져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교환은 상당히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확장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아직까지 존재하는 계급은 임노동과 자본에 상당히 큰 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요소들이 교환, 분업 그리고 가격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70). 결국 산업혁명은 기존의 중농주의 사상과 유사한 생산과 소비의 일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에 따라 이 모든 임노동과 자본의 요소들이 추상화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은 감각에 따른 외부 존재를 인식하면서 표상될 것이다. 그 외부 존재를 실체화 시키는 것 그것이 과학이다. 따라서 맑스는 생산양식을 과학적으로 비판하는 작업이었다.

           기계의 발달은 산업혁명에서 지대한 공을 세웠다. 생산이 증대되고 그만큼 소비도 이루어 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특히 비자본가들은 말이다. 노동자들이 가지는 생산력은 노동시간을 넘어 잉여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 가치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을 부유하게 만든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314).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된 상품 가치는 상품의 평균 가치일 뿐이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114). 여기에 따른 모순과 앞으로 설명할 공황의 원리는 지금 소개할 두 작품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ürrenmatt)의 『방문』(The Visit)[2]과 소피 트레드웰(Sophie Treadwell)의 『기계적인 것』(Machinal)[3]에 잘 나타난다. 이 두 작품에서 시대적으로 앞서있는 트레드웰의 작품은 표현주의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해주면서 당대 사회의 현실을 잘 드러나게 해준다. 필자가 이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는 뒤렌마트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자본의 힘과 거기에 따르는 주인공, 공동체 그리고 자본가의 사이에서 나타나는 희비극을 보여주는 하나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분명 표현주의 사조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표현주의적인 요소는 있다. 그리고 이것이 목표로 하는 사회적 배경과 힘들이 물화된 관계와 화폐를 근거하기 때문이다.

 

           표현주의는 기존의 예술에 대해 반동하는데, 왜냐하면 특히 극심하고 삐뚤어진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세상의 객관적인 관점에저항하려 했기 때문이다(A Study of Expressionism in American Drama 180). 따라서 외부의 사물을 자신의 내면에 감각으로 받아들여 인식을 하게 될 경우, 왜곡된 마음에서 생기는 그 무언가를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특히 표현주의 문학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1920년대 물질 문명에 대한 주제로서 이루어졌었다. 시인 고트프리트 벤(Gottfried Benn)『시체공시장(Morgue)에서는 인간을 사물화소외시키고 기존 사실주의 시에 대한 저항을 거칠고 이해할 수 없는 표현으로 써졌다. 이 시가 독일 표현주의 문학 사조에서 대표적이라면, 희곡에서는 시대는 다르지만 선구자 격인 프랑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의 『눈 뜨는 봄』[4](Frühlings Erwachen)와 영미권에서 잘 알려진 게오르그 카이저(Georg Kaiser)를 독일 표현주의 희곡 대표자로서 소개 할 수 있다. 미국에서도 이러한 독일 표현주의 사조에 대해 영향을 받긴 받았다. 그러나 전체적인 특징들을 서로 나열해보면 미국 표현주의가 기존 표현주의와는 다르게 살짝 변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시에서 미국 표현주의와의 차이점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소위 말하는 메시아주의적 표현주의’(messianischen Expressionismus)의 성향이다. 당시 독일은 루카치의 말처럼 물질 문명에 따라 사회 및 경제 전반의 변화로 인간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역사적 선험적인 것들이 무너지면서 고향상실’(Heimatlosigkeit)이 진행되고 있었다. 작가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타계하기 위한 방안으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였고 심미적 인간의 틀을 벗어나서 사회적 인간, 사회적=니힐리즘적 인간 혹은 혁명적 인간, 신앙심이 깊은 인간을 가장 절실히 요구하였다(이영주 294. 재인용). 따라서 이는 물질적 사회에서 인간의 기계화와 비인간화에 대한 반응이었다(A Study of Expressionism in American Drama 180). 미국의 표현주의 드라마는 독일의 표현주의를 수용하면서 메시아주의적 표현주의를 수용하지는 않았다. 독일의 표현주의적 기법을 부분적으로 차용하는 데 있어서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사건들 사이에서의 인과관계를 구성하기보다는 모티프와 주제 그리고 발상을 통하여 드라마를 구성하였으며, 주인공은 예수 같은 형상화로 대개 물질주의에 희생되어지며, 다른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을 위선으로 위협에 처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태도들과 인간 형태들의 전형성을 지니고 있다(A Study of Expressionism in American Drama 180). 그리고 대사들이 전보문적(telegraphic)이고, 대상(object)들이 모든 사실적인 일상생활의 모습과는 떨어져서 왜곡을 강조시켰다(A Study of Expressionism in American Drama 181). 

           이러한 미국 표현주의 특징을 좀 더 현실화 시켜서 사회의 문제점 시사해주고 있는 작품이 소피 트레드웰의 『기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전문 극작가가 아니라 기자다. 당시 미국에서의 표현주의 연극이 가장 성행했던, 그 정점에 서 있었던 1928년에 공연되었다. 따라서 표현주의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물질사회를 경계하는 그 모습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자 출신인 만큼 그녀의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던 루스 스나이더(Ruth Snyder)의 살인사건에 대하여 사회적인 문제를 치밀하게 인식하면서 표현주의적 특징으로 극작하였다. 물질 시대에서의 직장관계와 가족관계 그리고 결혼관계를 그려내었으며, 불과 극작이 완성되기 1년 전 사건인 남편의 살해에 따른 죄로 남자 세계에서의 법에 의해 전기의자로 사형당하는 루스 스나이더의 최초 전기의자 사형 실화를 연상하도록 하면서 표현주의와 사실주의의 혼합을 이끌어내었다. 당시에는 상당히 인기를 끌어서 영국에서 『생명기계』(The Life Machine)라는 제목으로 공연했으며 러시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Machinal ). 또한 “1954년 텔레비전 방송으로 적용하여 방영한 적이 있었다”(Machinal ). 이 작품은 1980년대 들어서야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90년대 영국국립극장(Royal National Theatre)에서 다시 재공연을 가지고 다음해 로렌스 올리비에 상(Laurence Olivier Award)을 작가가 죽은 지 24년 만에 수상하였다. 이렇게 재평가를 받게 된 이유는 예술의 미학적인 구조를 떠나서 마치 표현주의 그 자체의 효과를 무대장치화 한 것이 아니라, 70에서 90년이 지나간 시대에서도 드러나는 역사로서의 비극에서 비롯된다.

 

                           속기사. 만약 걔가 허락을 하면!

                           문서 정리원. 그 여자가 부사장을 허락할까요?

                           전화부서 소녀. 부사장님은 얼마나 벌까요?

                           계산 사무원. 엄청나군! – 5,000 - 10,000 - 15,000 - 20,000 - 25,000.

                           문서 정리원. 굉장해!

                           속기사. 그녀가 허락할 거 같애? 그녀가 말이지 허락할 거 같아? 이 합의서의 첫 부분은 이 당사자                             에게 두번째 부분은 이 사람에게 그녀가 말이지 허락할 거 같아?

                           전화부서 소녀. 글쎄요, 저는 부사장님과 침대 들어가는 거 싫어요. (친숙하게 마음을 녹이는 목소리                                       ) 여보세요 으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럴래 . . .

 

                           STENOGRAPHER. If she’ll have him!

                           FILING CLERK. Do you think she’ll have him?

                           TELEPHONE GIRL. How much does he get?

                           ADDING CLERK. Plenty – 5,000 – 10,000 – 15,000 – 20,000 – 25,000

                           FILING CLERK. Hot dog.

STENOGRAPHER. Will she have him? Will she have him? This agreement entered into – party of the fi                     rst part – party of the second part – will he have her?

TELEPHONE GIRL. Well, I’d hate to get into bed with him. (Familiar melting voice.) Hello – humhum –                                    hum – hum – hold the line a minute – will you – hum hum . . . (Machinal 7)

 

           위의 제시된 인용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포함하여 에피소드 2에서 나오는 젊은 여자(Young Woman)의 어머니(Mother) 그리고 에피소드 3에 나오는 남편(Husband) , 부사장의 모습도 이와 같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남편과의 관계에 따른 아픔에 젊은 여자, 즉 자신의 딸을 쉽게 결혼하지 못하게 하려 하지만, 그 남편 될 사람이 부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급 심정과 태도가 변하고 결혼을 딸에게 부추긴다. 그 이유는 자신을 부양할 정도가 되고, 딸과 자신이 부양되기 때문이다. 호텔에 투숙하게 될 손님을 위해 짐을 운반하는 일꾼(Bellboy)부터 자본가인 부사장인 남편까지 전부 화폐에 얽혀 있다. 각각 에피소드로 나눠져 있으면서 그 사이의 과정 없이 젊은 여자의 중요 사건 지점, 단 그것만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언어 역시 주된 주제 하나 밖에 없다. 다만 이러한 하나의 응축된 것들이 인간 외면에서 내면으로 들어가 다시 밖으로 표출될 때 왜곡되는 그 세상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듯하다. 이들이 이러한 교환 수단으로서 사용되는 화폐에 집착하는 이유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이를 물신성(Fetishism)이라고 한다. 생산을 하면 그것이 바로 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생산하고 그것이 단지 소비가 된다면 이는 사용가치를 지닐 것이다. 결국 타자와 교환을 하여 자신의 쓸모와 가치 기준에 따라 유통이 진행된다. 이 교환의 매개를 가시해주는 것이 화폐다. 이 화폐의 가치 기준은 유통에 따라서 결정된다. 따라서 화폐의 역할은 상품이 교환가치로 실현되는 척도가 될 수 있고 교환 수단을 지닌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173). 이러한 소비할 수 있는 매개로서 교환하는 가지적 척도가 화폐일 수 있다. 작품에 나오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이 화폐의 역할이 드러난다. 젊은 여자, 속기사, 전화부서 소녀 그리고 문서 정리원의 대화관계는 단순히 돈과 업무 내용에서 짤막하게 그치는 정도의 한정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계적인 표현주의적 대사를 통해 생산물의 사회적 형태, 개인의 생산 지분뿐만 아니라 활동의 사회적 성격은 개인들에게 낯선 것, 물적인 것으로서 현상함을 보여준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138). 왜냐하면 노동 이후에는 상품 가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를 은행에서 받게 된다. 한마디로 생산물과 활동이 교환 가치로 분해되는 것을 의미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136).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는 고정적이고 역사적인 예속관계 보다는 상호의존 관계를 전제로 한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들은 교환가치를 위해 찾게 될 것이다. 이들이 생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타자들의 소비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부사장이 생산 관계의 우위를 다른 직원에 비교하여 크게 점하고 있다. 또한 교환관계 속에서도 이들 직원들에 비해 사회적으로 압도를 한다. 자본가는 노동자들과의 생산관계에서 하나의 가변가치이자 생산력으로 판단하는 인간의 능력이 사물의 능력으로 본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138). 부는 곧 사회적 권력인 것이다. 교환수단이 크고 작음은 곧 사회의 영향력의 차이와 소비의 차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부에 집착하고 생산관계 속에서의 독립관계, 즉 소외(alienation)[5]가 나타나는 것이다. “노동자가 아니라 인격화된 생산 조건, 즉 자본에 속하는 것, 사회적 노동 자체를 자체의 계기들 중의 하나로 마주 서게 한 거대한 대상화된 권력에 속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거대한 신체가 아니라 유기적인 사회적 신체로서 형태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2 234-5). 부사장은 젊은 여자에게 호감이 있어서 다른 여직원들에게 그녀가 회사에 들어오면 자기 사무실로 들여보내라고 시키거나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기도 한다. 이에 젊은 여자를 제외한 나머지 여직원 동료들은 그것에 대해 불쾌하다기 보다 한편으로는 부럽고 질투심이 뒤섞인 발언들을 서슴없이 젊은 여자에게 표현하고 있다. 노동의 위치와 사회적 권력 사이에서 사회적 활동으로 정립을 하며 젊은 여자를 동등한 인격적 신체로서 보지 않고 생산 양식에서 자본가가 바라보는 가변가치의 유적존재(Gattungswesen) 탈취를 그는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젊은 여자에게 자신의 생각과는 분절된 그녀의 노동 또는 몸이 부사장에게는 자본주의 사회적 권력 앞에서의 도구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물질세계에서의 소외다.

           물질 사회에서의 화폐는 사회적 권력자 앞에 어머니의 오랫동안 쌓여온 삶의 기준을 흔들고 젊은 여자에게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 하게하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함을 알 수 있다. 뒤렌마트의 『방문』은 『기계적인 것』과는 다르게 사실적인 사건보다는 자본의 힘에 대한 영향과 그 과정을 기괴하게 묘사하면서도 무언가 우스꽝스럽지만 그것이 마치 관객들에게 사실일 수 있다고 암시되어지고 느끼게 만든다. 귈렌(Güllen)이라는 도시에서 살았던 클레리 베셔(Kläri Wäscher)라는 여성이 일(Ill)이라는 옛 남자에게 버림받고 쫓겨나 뱃속의 아이가 기형으로 죽는 아픔을 겪고, 창녀로 함부르크(Hamburg)에서 생활하다 자본가를 만나 클레어 자하나시안(Claire Zachanassian)으로 개명한 뒤 일약 갑부의 여자로 생활하다가 남편이 죽고 비행기 사고로 의족과 의수로 생활하면서 수많은 남편들을 갈아치우면서 잘나가는 남편들의 재산을 자본의 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인수하기도 한다. 이 극은 그녀가 다시 마을에 돌아오면서 일(Ill)에 대한 복수를 자본으로서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다. 이미 모든 복수의 준비는 극이 시작하기 전에 철저하게 계획된 상태로 등장하며, 자신의 복수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모두 자본으로 해결해 버린다. 마을에서 쫓겨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부장판사(Butler)는 돈이 좋아 그녀의 비서가 되었으며, 거동이 불편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는 가마와 두 하인(Toby and Roby)은 자본의 힘 앞에 국가의 법마저 무시되는 이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승무원. 부인,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클레어 자하나시안. 보비, 이 사람에게 1000을 줘요.

                           일동. (웅성거린다) 1000이래. . . .

                           승무원. 여사님, 궐렌을 돌아보시는 동안 기차를 기다리게 할까요? 철도 관리국도 당연히 허락할 겁                            니다. (뒤렌마트 23-24)

 

                           TICKET INSPECTOR. You’ll pay for this, Madam. Dearly.

                           CLAIRE ZACHANASSIAN. Boby, give him a thousand.

                           ALL. (murmuring). A thousand. . . .

                           TICKET INSPECTOR. Does Madam require the Racing Roland to wait while she visits Guellen? I know                                      the Railway Management would be only too glad. (The Visit 18-19)

 

           사실 그녀는 파산된 도시를 살려주는 대가로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인 일(Ill)의 목숨과 인간으로서의 정의를 팔고 시와 시민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돈을 주겠다고 일종의 내기를 하였다. 그녀는 상당히 치밀한 사람으로서 이미 예전 재판 때 일(Ill)에게 매수되어 거짓 진술을 한 두 사람(Koby and Loby)의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고 성 불구자로 탈바꿈시켜 함께 도시에 데리고 왔으며 각자 전형화(stereotype)되어 있는 인물들에게 해당되는 직업의 윤리를 어겨 본적이 있거나 할 수 있는 지에 대해 대뜸 질문을 건네기도 한다. 후술하겠지만 도시 파산의 장본인은 바로 클레어 자신이다. 그녀의 제안 이후 사람들이 점점 자본의 유혹과 앞으로 예상되는 기대에 빚을 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를 희화화 하면서 기괴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돌발적인 기차소리, 기타로 치는 장송곡 그리고 유일하게 저당 잡히지 않은 종소리 같은 음향효과를 작가는 삽입하였다. 그뿐 아니라 관과 총과 도끼가 나오는 장면은 주인공이 물질 사회에서 자본의 힘에 억눌려버린 상징계를 대표하는 질서 구성원들에게 희생당함을 암시한다. 웃음과 비극 사이에서 주인공은 모든 시민들의 생활 전체 구원자이다. 주변사람들의 직간접적인 압박과 함께 가족들마저 점점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인정하는 행동 그리고 시외로 탈출할 수 없음을 느껴가면서 그 스스로 모순되는 규칙들 사이에 개인적인 희생의 영웅으로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희생은 절대 숭고하지만은 않다.

 

                           다 함께. 우리를 보호하소서.

                           신부. 한 분뿐인 신께서

                           다 함께. 요동치는 시대에.

                           시장. 우리의 유복함을.

                           다 함께. 보호하소서 우리의 신성한 재산을, 보호하소서. 평화를 / 보호하소서 자유를. / 밤은 멀리                                두시고 / 다시는 어둡지 않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도시, / 새로이 소생한 화려한 도시, /                               리의 행운을 행복하게 즐기도록 하소서. (노부인의 방문 153-54)

 

                           ALLE. Es bewahre un saber

                           DER PFARRER. Ein Gott

                           ALLE. In stampfender, rollender Zeit

                           DER BÜRGERMEISTER. Den Wohlstand

                           ALLE. Bewahre die heiligen Güter uns, bewahre / den Frieden / Bewahre die Freiheit. / Nacht bleibe                        fern / Verdunkele nimmermehr unsere Stadt / Die neuerstandene prächtige / Damit wir das                                          Glücklich genießen. (Der Besuch der alten Dame 134)[6]

 

           귈렌 시민들은 주인공을 살해함으로서 정의를 팔았다. 그러나 그들이 새롭게 정의를 형성하였고 모두 동의 했다. 한 사람의 자본가에 의해서 희망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엄청난 돈을 대가로 받았으니 그것으로 다시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빚을 갚으면 된다. 그 빚에 대해 갚아야 할 대상은 클레어지만 말이다. 또한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극에서 나올 법한 공동체의 대표자 혹은 연장자 또는 대변자로 구성되는 코러스 역할을 한다. 이들의 사회관계 체계는 대표로서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인격적이지 못하다. 맑스가 지적하듯이 이들 공동체는 겉모습만이 민주주의다. 이들의 관계는 독립적이고 무차별성을 띄고 있다. “화폐 관계, 발전된 교환 체계에서는 사실 혈통 차이와 교육 차이 등 인격적 예속의 끈이 끊어지고 찢어졌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145). 이러한 독립적인 분배 생산 체계 속에서, 개인 스스로가 독립적이고 자유롭다고 느껴질지는 모르나, 극에서 나오는 주인공처럼 결국 자기 마음대로 공동체 사회를 벗어날 수 없듯이 자유는 단지 큰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람들의 관계는 여전히 의존적 관계를 지니고 자본가에 의해서 복속되어지는 것 뿐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극의 플롯에 따라 단순히 주인공이 희생되어질 수 밖에 없고, 자유를 위해 혹은 생명을 위해 뛰쳐나가려고 하는데 기차역에서 사람들이 그를 둘러 쌓아 막는 그들의 단체 행동에는 이러한 물질적 경제구조와 생산양식에서의 분업화 그리고 그 이면에 놓여있는 추상으로 된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해석하자는 것이다. ‘물적 의존 관계에서 정형화 되어 있고 각자가 시의 한 일부분으로 직업을 맡고 있는 이들에게 일(Ill)은 그 전체 공동체의 부품일 수도 있으며, 그의 희생을 통해 다시 시의 공황을 극복하는 유일한 희망적 희생의 도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거대 자본가가 시의 경제를 쥐었다 폈다 할 수 있으면서 사람들의 행동마저 변화하게 함을 보여주고 있다. 클레어는 자신 스스로 노동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계속 소비만 극에서 한다. 그러나 중개인을 통해서 끊임없이 사고파는 행동을 단지 대사 한마디로 해결해 버린다. 돈이 돈을 낳는 것이다.

 

                     남편. 시장 상황 안정 - . . . 종신 재산 소유권 매입 . . . (전화기에서) 여보세요 오 여보세요, A.B.                              모든 게 결정되었어? – 전부 사인했고? 좋아. 아주 좋아! . . . 좋았어, 다 결정됐어. 그들이 사인                           을 했어! – 당신 흥미롭지 않아? 안 물어 봐?

                           젊은 여자. (기계적으로) 해냈어요? . . . 잘 해냈어요? . . . 완수했어요? . . . 그들이 사인했대요? . . .                                 식으로요? . . . 자산은 당신거에요?

                           남편. 자산은 내 꺼야. 첫째 저당 설정하게 될거구, 그리고 두 번째 저당 설정하게 되면 자산은 내꺼                          . 행복해?

 

                           HUSBAND. Market trend steady –  . . . Owns a life interest . . . (In phone.) Hello – oh hello, A.B. It’s                                 all settled? – Everything signed? Good. Good! . . . Well, it’s all settled. They signed! –                                                  aren’t you interested? Aren’t you going to ask me?

                           YOUNG WOMAN (by rote). Did you put it over? . . . Did you swing it? . . . Did they come                                                    through? . . . Did they sign? . . . On the dotted line? . . . The property’s yours?

                           HUSBAND. The property’s mine. I’ll put a first mortgage. I’ll put a second mortgage and the                                                      property’s mine. Happy? (Machinal 53-54)

 

           『기계적인 것』에서 나오는 자본가를 통해 보면 클레어처럼 전화 한 통화로 자본을 증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투기라고 한다. 투기가 자본주의에서 생기는 이유는 화폐가 교환가치로서 실재의 부를 상징하게 됨에 따라 생긴다. 이러한 교환가치는 소비의 목적을 둘 수도 있지만 축적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화폐 그 자체의 특징이고 그것이 부 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정말로 남편이 가족의 주거를 위해서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투기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 축적임은 틀림없다. 물론 맑스가 말하는 축적은 생산관계에서의 잉여가치에 대한 재생산 확대를 의미한다. 고정자본을 특별잉여가치를 통해 차후 생산력을 드높이고 이에 따른 가변자본의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축적한 것을 통해 노동력 생산을 확대시켜 생산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도 있다. 부사장이 행동하고 있는 것은 생산관계에 따른 자본 축적은 아니다. 하지만 그 원리는 비슷하다.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회수하는 사이에 그에게 감당해야하는 몫은 생산확대이다. 이 생산 확대에서 신용이 생겨난다. 은행에서 대부하게 되면 그것으로 재생산을 하고 거기에 따른 잉여가치의 일정 부분을 은행에 갚아야 한다. 부동산 및 주식 그리고 토지의 시장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담보다. 담보를 통해 자신의 재산을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은행과 기업 그리고 개인 및 국가 이 모든 관계 사이에서 생기는 신용과 가치에 대한 거품이 발생하게 된다. 대부분의 숙주소득은 이러한 매매 차액에서 이윤이 발생하게 된다. 이 과정들은 개인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친다. 투자와 투기는 엄연히 다르다. 자본가의 투기는 개인의 자산과 기업의 주식 그리고 은행의 투자 또는 대부와 국가의 세금과 재정 및 채권 사이에서 서로가 이득을 보려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투기는 자칫 잘못하면 기업과 국가 그리고 개인에게 있어서 소비침체를 우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 가치 기준에 맞지 않는 상품에 대해 수요와 공급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데 기업의 자본 증식은 그만한 신용과 함께 투기 되거나 투자 되어진 것에 따른 이익 분배를 위해 생산량을 늘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요가 제한되어 있어서 이윤율은 낮아진다. 또한 담보로 인한 투기는 과열에 따른 경기 침체가 이어질 경우 신용에 대한 손해가 이어지고 거기에 대한 연쇄 도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교장. 저희의 평생 기다림이 헛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희는 적선을 부탁하지 않습니다. 사업을 제                          안하는 바입니다. . . .

                           클레어 자하나시안. 단지 내가 할 일이 없네요. 나는 행복 성공 제련 공장을 구입할 수 없어요. 그건                                          이미 내소유니까. . . . 역시 내 소유예요. 모든 공장, 퓌켄리트 저지대, 페티네 헛                                          , 이 소도시, 거리거리, 집집, 전부 내 중개인들을 시켜 이 잡동사니들을 몽땅                                                사들이게 했지. 공장은 패쇄시켰고요. (뒤렌마트 98-99)

 

                           SCHOOLMASTER. Don’t condemn us to a lifelong struggle in vain. We haven’t come begging for                                                     alms. We’ve come to make a business proposition. . . .

                          CLAIRE ZACHANASSIAN. Only it can’t be done. I can’t buy Sunshine Square, because I own it                                                         already. . . . I own those too. And all the factories, Pückenried Valley,                                                          Petersens’ Barn, the entire township; street by street and house by house.                                                 I had my agents buy the whole ramshackle lot and shut every business                                                                down. (THE VISIT 65-66)

 

           클레어의 복수심에 따라 의도적으로 도시를 파산시켰다. 이는 자본가가 해당 공장 주식 혹은 소유권을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보유하여 경영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생산량이 늘어나고 자본이 점차 확대 되는 동시에 이에 따른 경쟁도 그만큼 커진다. 따라서 개인 혼자 소유하는 기업으로서는 경쟁하기 버거워진다. 여기서 생긴 것이 주식회사(joint-stock company)이다. 잉여가치에 대한 분배에 욕망으로 수많은 자본가들이 참여하게 되고 그 참여의 성격에 따라 경영권을 행사하기나 이율은 더 챙겨 가기도 한다. 기존 은행의 예금에 비해 수익률이 높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가치 상승을 기대하고 주식을 사들이게 된다. 이렇게 불변가치가 증가하게 되면 자연스레 생산량은 늘어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상품이 시장에 내놓아지고 그것이 수요와 공급에 의해 수익률이 결정되기 까지, 이 분배에 따른 이윤은 아무도 모른다. 클레어의 행동은 일종의 적대적 인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자본가가 인수를 위해 상대방의 방어를 무릅쓰고 자신의 소유를 위해 엄청나게 자본을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경영권을 박탈하면서 자신의 주식회사를 폐쇄 시킨 것이다. 시민들은 자본가가 마치 공장을 강제로 뺏고 폐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일들은 합법적이며 공장의 존폐 유무에 대해서는 사적 소유이므로 자유주의 시장 논리에 따라 경영자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 이것이 자본의 힘이다.

           거대한 자본의 논리는 개인에서 기업으로 그리고 국가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국가의 재정을 위해서 결정하는 경제 제도는 국내 뿐 아니라 국외끼리의 외교관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지금 현대의 이야기 인 것 같지만 이미 19세기 이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전쟁에서 승자는 패자에게 전쟁배상금을 물고 심지어는 국가 경제 정책에 까지 간섭하게 된다. 국가가 재정 부실이 일어나면 그것은 곧 파산이다. 귈렌시도 마찬가지다. 귈렌시가 스스로 파산한 것이 아니다. 외부에서 온 자본가에 의해서 파산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 정의마저 간섭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독일은 1차 대전의 전범이 아니다. 강대국끼리 국내에서 생산되는 무차별적인 상품들을 소비시키기 위해 식민지를 개척해 나갔음을 과거에서 알 수 있다. 다시 임노동을 늘려 더욱더 확대 생산하는 과정에서 국가끼리 한정된 수요를 어떻게든 늘리려다 보면 서로가 부딪칠 수 밖에 없다. 이 원인이 다는 아니지만 1차 대전의 원인 중 하나였으며, 독일은 패전하여 프랑스에게 전쟁배상금을 물려주는 과정에서 심각한 경제난과 인플레이션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승전국과의 조약에 명확한 규정이 없어 정부가 화폐를 무차별적으로 찍어대었다. 여기에 전쟁 과정에서 생기는 위조지폐 전략과 전후 재건 비용이 한 몫을 했다. 2차 대전의 원인을 여러 가지 들 수 있지만 독일 국내 이러한 경제 침체 상황과 더불어, 미국과 영국 중심으로 기계 발달로 인한 대량 생산과는 다른 정해진 수요에 의해 결정되는 자본가들의 이윤율이 떨어지자 그에 따른 기업 악화 그리고 전체 계급의 소비수준 하락에 따른 문제도 컸다. 1929년 일어난 경제 대공황의 실질적인 탈출구는 모순적이게도 세계 2차대전이었으며 인류는 원자폭탄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극작가 뒤렌마트는 생산양식에 따른 자본가들의 자본 축적과 그에 따른 자본 투자 분배와 이윤을 위한 무차별적인 상품 생산이 이윤율 하락에 따른 공황 발생과 끔찍한 전쟁을 떠올렸던 것이다. 화폐의 논리에는 자본가들의 보이지 않는 힘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극작가는 보이지 않는 힘을 들춰내기 위해 비극적 코미디(tragicomedy)를 쓴 것이다. 시장 경제의 모순에 의해 많은 시민들이 경제적 고통을 겪었고, 이로 인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반면 시장질서의 다시 회복됨은 더욱더 사람들에게 사물화(reification)와 물신화를 부추기고 모순의 해결을 폭력에서 해결책으로 무의식중에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 다는 점이고 자본의 논리로 극의 세계에서 중심이 되는 주인공이 공동체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는 점이다. 젊은 여자의 경우는 우리의 방식대로라면 아무 죄도 없는 남자를 죽인 것이고 일(Ill)은 코비와 로비를 매수까지 해가면서 자신의 아이를 가진 클라라보다 더 좋은 여자와 만나 살기 위해 법정에서 창녀로 내몰아버렸다. 그러나 두 작가들은 이들에게 영웅적인 주인공의 옷을 입혔다. 마치 비극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젊은 여자는 자본의 생산 양식에 환멸을 느끼지만 가족부터 시작해서 동료까지 자본이 많아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예상을 당연히 점칠 수 있는 부사장과의 결혼과, 그가 그녀에게 대하는 자신의 소유자로서 대하는 태도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심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머러스한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는 『기계적인 것』이 그렇다고 해서 희비극이라는 장르로는 논할 수 없다. 뒤렌마트의 극과는 다르게 결말부로 갈수록 비극적인 요소들이 더해진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말하는 비극이라고는 할 수 있는 질서회복과 서사사적인 것, 격정적이고 카타르시스 적인 것들은 도저히 찾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 뒤렌마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계적인 것』과는 달리 『방문』은 희비극을 통해 명확히 비극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관객들에게 안타까움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씁쓸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주 속에서 절대적이고 명확하게 도덕적 옳고 그름 없이는, 비극과 비극 영웅들은 불가능하다”(What Is Modern Tragicomedy? 13). 어느 누구도 정의와 도덕을 깔끔하게 절대적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세계를 극작가는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에는 항상 딜레마가 생기기 마련이고, 그것에 대한 철학자들이 논하는 가설들에는 실제를 통해 적용해 나가 보면 항상 선택의 불확실성 속에서 이다라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물질세계를 극작가들은 매우 어둡고 비참하고 희망이 순수한 비극보다 없는 생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What Is Modern Tragicomedy? 13).

           서로 다른 형식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작성된 작품이 서로 대화하는데 있어서 전체적인 극의 구조에는 어긋날지 몰라도 자본의 힘으로 이 둘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까지도 뒤렌마트의 이론은 논할 수 있고 냉전시대가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자본가의 힘은 여전하며, 분명 모순되어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에 대해 드러내주고 고발되었다는 그 한계에서 그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공동체에서의 하나의 일원인 존재인 우리는 울고 웃는 세계에서 한 세기를 또다시 보내고 있음을 작품과 관객은 서로 대화시켜 주면서 씁쓸함을 다시 한 번 알면서도 작품을 통해 곱씹는다. 트레드웰의 작품은 한낮 옛날 여성이 가부장제에 핍박 받고 자유스럽지 못하며 남자들의 법정 속에서 인간이 만든 상품인 전기의자에 사형당하게 되고 자신의 딸에게 이 모든 어긋나 보이는 진리들을 알려주고 싶지만 끝내 말하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타 죽어버리는 비극적인 여성에 대한 인생을 보이고 있다. 이미 구식의 논리가 될지 모르지만 이를 생산양식을 통한 시각으로 재구성함으로서 분배와 물신성 그리고 자본가를 들춰 내며, 뒤렌마트 극의 자본의 힘을 논할 때 충분히 뒷받침 되고 고찰 시킬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에 틀림임없다. 맑스의 저서는 복잡한 경제 공황의 해결책을 끝내 제공해 주지 못했다.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자본주의 선을 유지한 채 경제 모순의 해결책을 타개하고자 아직까지 노력하고 있다.  결정적인 대안이 나올 때마다 노벨 경제학상이라는 최고의 명예를 그들은 수여 받게 된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해서 현실에 적용시켜보면 모순의 모순에 맞서게 되고 다시 이 상의 새로운 주인공을 찾게 되며, 경제 이론이 등장하는 무한 반복 같은 루프(loop)세계에 우리는 서있는 것이다. 모든 사건이 해결이 되어도 해결된 것 같지 않으며 불안이 뒤를 엄습하고 있는 새로이 정립된 질서 그 자체가 아직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만, 쓸모로서 교환가치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자본과 함께하는 씁쓸한 우리의 이야기를 돌아보게 해주는 두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왕주. 표현주의 시의 현실 수용에 대한 비교 고찰. 독어교육 44 (2009). 293-312

칼 맑스. 김호균 역.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서울: 백의. 2000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2. 서울: 백의. 2000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3. 서울: 백의. 2000

프랑크 베데킨트. 김미란 역. 『눈뜨는 봄. 서울: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1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김혜숙 역. 「노부인의 방문. 『뒤렌마트 희곡선』. 서울: 민음사. 2011. 1-176

Dürrenmatt, Friedrich. THE VISIT a tragi-comedy. Trans. Bowles Patrick. London: Jonathan cape,                                    1962.

Hwa Young, Yoon. “A Study of Expressionism in American Drama”. 人文論叢 22 (1982). 179-98

                 ---. ”What Is Modern Tragicomedy?”. 영어영문학연구 3 (1983).

Treadwell, Sophie. Machinal. London: Nick Hern Books. 1993

Dürrenmatt, Friedrich. Der Besuch der alten Damen – Tragische Komödie. Zürich: Diogenes. 1980



[1] 기울임 꼴은 독일어

[2] 독일 원문 제목은 Der Besuch der alten Dame』로 직역하면 『노부인의 방문』이다. 희곡의 경우에는 독일 원문을 직역한 제목을 사용하고, 영화에서는 영어 제목을 직역한 것을 사용한다.

[3] 프랑스어 형용사로 기계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제목을 번역한 책에서는 마시날이라고 하였다.

[4] 베데킨트는 카를 슈테른하임과 게오르크 카이저 같은 표현주의 드라마 작가들의 본보기가 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룰루처럼 광적으로 생을 탐하는 바알을 보여준 바 있고, 베데킨트의 사실적이고 간결한 발라드 어조를 자신의 서정시에서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베데킨트에 대한 브레히트의 고백은 매우 열렬하다. “그것은 이 사람의 대단한 활기였다. 폭소와 조소가 깔린, 인간성에 대한 불굴의 찬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에너지 말이다. . . . 그는 톨스토이와 스트린드베리와 함께 신유럽의 위대한 교육자에 속한다. 가장 위대한 걸작품은 그 자신의 개엇이다.” 뒤렌마트의 그로테스크한 비유극들에서도 비극성은 씁쓸한 소극으로 변하는데, 이 역시 베데킨트의 극작론이 계속 발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베데킨트 135-36)

[5] 소외라는 용어에 대해 수많은 맑스주의자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음을 참고하라. 단지 물적 관계 혹은 생산 양식에서의 소외로 절대적으로 명확히 단정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소외라는 말 그 자체가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그 외부와의 행함 또는 어떤 사건에서 차이가 발생 함으로서 생기는 개인적인 의미에서의 글자 그대로의 소외의 효과가 발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물질 사회의 고향상실이 아니더라도 소외는 자기 스스로의 결과에 의해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발생되는 사건 또는 자연에 의해서도 발생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외는 현대적 생산수단을 근거로 하는 생산에서의 소외를 근거로 설명하였다.

[6] 연구자료로 사용된 The Visit 텍스트의 내용과 원문과 달라 독일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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