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간주나무"의 동화이론을 통해 본 "스크라이커"의 정치학

2012. 12. 12. 09:43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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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영어영문학 30호에서 발췌~

 

"노간주나무"의 동화이론을 통해 본 "스크라이커"의 정치학

박형락

 

 

20세기 연극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라고 할 수 있다. 사무엘 베케트가 추구했던 심오한 철학적인 면에 숨어 있는 정치성과 예술성은 수많은 유사한 작품들을 탄생시켰을 정도로 여파가 컸다. 바로 부조리극(Absurd Theater)이 탄생한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가 공연된 1955년경에 영국에서는 또 다른 충격을 일으킬만한 연극이 소개되었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Epic Theater)이었다. 이는 ‘소외효과’를 무장하여 정치적 목적성에 대한 추구였다. 엄밀히 따지면 영국 연극사의 영향은 아일랜드 작가와 독일의 연출가에 의해서 새로운 전환기를 이루어 내었다고 할 수 있다. 68운동이후 학생들과 소수자들 특히 여성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었으며, 이 때 두각을 드러낸 극작가가 카릴 처칠이었다. 카릴 처칠(Caryl Churchill)은 ‘소외효과’를 통해 복장, 인물 그리고 인종 전환을 시도했다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영국의 대표 극작가 헤롤드 핀터(Harold Pinter)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여성 극작가로서,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이론가가 아니다.’라고, 그의 연극들 도입부에 열어놓은 헤롤드 핀터와는 대조적으로, 처칠의 극작품들은 분명하게 이론과 친숙하다”(Buse 111). 그만큼 그녀의 극작품은 장면 장면마다 심각한 목적성을 띄고 있고 관객이 쉽게 이해하는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스크라이커"(Skriker)에서만 보더라도 춤추는 사람, 무대 조명 그리고 신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연극 내용에서 구성한다. 거기다가 배경설정은 사회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 소외되는 비참한 주인공을 내새운다. “차별은 역사주의, 역사적 이해의 지배적 모델에서 떨어져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잔인하다”(Buse 112). 따라서 페미니스트였던 카릴 처칠의 작품들은 대부분 여성과 소수자에 초점이 맞춰 기괴하거나, 일반적인 생각과 시각에서 벗어난 연출을 통해 배우나 관객 모두에게 하나의 충격을 던져 주고 있다. 이는 사실 브레히트의 소외효과와 유사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적성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의 실험성과 이론은 좋았으나, 실전에서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시즘, 노동자, 혁명, 교육 또는 감정 몰입 방해 등 여러 가지 목표를 잡고 시도를 하였으나, 대부분 관객들의 반응은 오히려 더 몰입이 되어버렸다는 일화가 존재한다. 심지어 극에 대해 문화적 이유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관객들이 해석해서 브레히트가 여러 번 작품을 수정했던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실험적 연출기법을 통해 수많은 아류작을 양산하였다. 사실 현대극에 있어서 베케트과 브레히트의 환영에 대부분 벗어날 수 없었다. 여기에 카릴 처칠도 마찬가지여서, 그녀의 극을 소개하면 브레히트가 따라 나온다. 하지만 극작품은 그녀의 의도대로 분명한 이론을 가지고 목적성을 관객들에게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살아생전 이루지 못했던 브레히트의 이상적인 연출을 향한 꿈을 이루어 내는데 다가서고 있다.

이미 페미니스트 작가로 알려졌던 그녀가 자연스럽게 넌지시 언급했었지만 그녀의 극 평소 특성상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드러내지 않았던 전쟁 그리고 환경에 대해서, 대사에다가 관객에게 깊이 지시하는 작품을 90년대 이후로 쓰기 시작했다. 바로 "스크라이커"는 아주 모호한 포스트모더니즘 극을 대표하고 있으나, 그 목적만큼은 대사와 상황에다가 명확하게 부여하고 있다. 전반적인 극의 내용과 설정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설화, 동화와 전설에서 많이 모티프를 따왔다. 특히 차용한 동화 설화 중 그림형제의 "노간주나무"(The Juniper Tree)는 이 연극 분석에 있어서 여러 가지 해석 공식을 제공해 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또한 이 동화는 그녀의 연극에서 어떻게 브레히트의 꿈에 다가가고 관객에게 작가의 의도를 지시할 수 있는 가에 대한 해답은 순수한 동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화처럼 사람들이 이상한 이야기라고 현실적인 기준이 아닌 시각에서 바라보며, 어릴 적 수많은 꿈과 희망들이 쉽게 이루어질 거 같았던 상상을 현실로 또다시 비추어서 정말 현실에는 동화처럼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가능성에 대해서 적어도 고민 할 수 있는 자기 내면의 용기를 꿈틀 게 할 수 있는 동화의 이론을 카릴 처칠의"스크라이커"를 통해 어떻게 적용 되었는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정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스크라이커"는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아도 관객들에게 최소한 주제 정도는 어필이 가능한 극이다. 조시(Josie)와 릴리(Lily)의 상황을 통해 고민 있게 생각되는 부분 보다 상대적으로 요정인 스크라이커(Skriker)가 말하는 대사에서 금방 핵심 키워드를 금방 짚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자연이 인간에게 감정을 싣고 말하는 듯하다. 스크라이커가 말하는 전쟁 혹은 인간 또는 자연과 관련된 단어가 나오는 대사에서 증오하고 화가 나는 감정을 지닌 자연의 입장에서 인간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더욱더 그 부분만이라도 몰입이 가능할 정도로 잔인함이 서려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난해하다. 방금 전에 언급한 요정의 직접적인 인간에 대한 경고가 요정의 모습과 여러 관련된 장면에서는 관객이 해석하기가 곤란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평소 카릴 처칠의 극을 이전의 작품처럼 단순히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내용으로 생각하다가는,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전쟁 그리고 환경 문제를 릴리에게 말하는 스크라이커에게 다시 뒤통수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스크라이커"를 조시와 릴리의 미혼모 문제로만 지엽적으로 생각하다가는 극 전체를 바라 볼 수 없는, 처칠이 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작품에 칼집을 해 놓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90년대 중반 이후 자연과 환경, 그리고 인간의 생존 문제라는 보다 포괄적인 주제”로 영역을 넓혔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면 더욱 심화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서다(권혜경 29). 그렇다고 지엽적인 부분을 무시한 극은 아니다. 하나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과 함께 공감하고 소통을 위함이 목적이다. 다 같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혹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가기 위해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각각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이다. 전 인류적으로 가져와 입에서 입으로 내려와 축적되어 있고 지금도 어떻게 된 것인지 하나의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가 반대편 지구에서 마저도 비슷한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현실의 이데올로기 속에 갇혀있는 기성세대마저 어린 시절 간직해 왔던 동화와 설화를 이 극에다가 적용시킴으로서 카릴 처칠의 또 하나의 실험극이 탄생한 것이다.

동화와 신화 풍의 이야기는 “공동체 사회에 대한 희곡을 통해 권력 관계들의 하나의 네트워크로 계급과 인종과 젠더 그리고 성 정체성을 연결키는 광범위한 시도들을 내포하고 있다”(Reinelt 188). 요정의 세계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나오는 켈피(The Kelpie), 브라우니(Brownie), 그린레이디(Green Lady), 블루디본스(Bloody Bones), 헤그(Hag), 블랙 애니(Black Annis) 그리고 블랙독(Black Dog) 과 같은 스크라이커의 조연들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알만한 신화 속의 동물 혹은 요정이고 지금도 판타지 소설 또는 대중문화에서 끊임없이 이용자들이 그 근원을 모르는 사이에 특징들을 학습하는 친숙한 존재다. 여기엔 켈트와 게르만 신화가 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요정들의 대표인 “스크라이커는 현실 세계로부터 그녀에게 피해를 주어서 상처를 입었다. 그녀의 이미지는 피폐해진 자연, 파괴된 어머니 그리고 무너진 꿈이다”(Reinelt 188). 사실 이것은 어느 한 요정만의 문제는 아니다. 관객이 극 중에서 상상하고 있는 파괴된 모든 것들을 역사적으로 본다면 상당히 인간에 의해서 점점 목적에 맞게 인위적으로 바뀌거나 만들어진 것뿐이다. 이들을 대표할 수 있고 극의 배경, 인육, 마녀, 약자, 여자, 아이 그리고 자연을 대표 할 수 있는 것이 동화이고 그 중 하나 연상시킬 수 있는 작품이 "노간주나무"다. 이 글의 목적은 "노간주나무"와 "스크라이커"를 서로 비교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노간주나무"에 담겨 있는 동화의 이론을 통해 "스크라이커"를 바라보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림형제의 동화전집 "아동과 가정 동화"(Kinder und Hausmärchen) 47번째에 수록되어 있는 "노간주나무"는 전집 중에서 “가장 잔인한 민담”가운데 하나다(이혜령 292). 그림형제의 동화전집은 무수히 많은 개작과정을 거쳤는데, 수정을 여러 번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사회 환경 및 여러 불가피한 의도에 맞서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우선 전승 과정 자체는 민족, 부족 혹은 가정 내에서 구전으로 내려져 온 것을 그림형제(Grimm Brother)와 아힘 폰 아르님(Achim von Arnim)이 편집한 것이다. 카릴 처칠의 해당 극에서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세계관과 행동묘사들과 상당히 유사한 그림형제의 "노간주나무"만 보더라도, “괴테는 그가 자신을 "원 파우스트"의 감옥 장면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이미 어린 시절부터 "노간주나무"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주종연 15). 그림형제가 편집할 당시,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의 프로이센(Preußen) 침공 상황에서 생겨난 민족성과 교육성이 복합적으로 가미된 것이 동화의 편집 제작을 한 시대적 계기 중 하나였다. 어른과 어른 사이에서도 필요했었고 어른이 필요했기에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여러 차례 수정을 가미하면서까지 동화는 이용되어졌었다. 따라서 동화에 대한 역사적인 근원을 찾기는 상당히 힘들지만, 편집되어 졌던 동화 전집의 작품마다 배경을 살펴 볼 때, 각양각색의 제작 배경이 고스란히 담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각 작품 마다 그 뿌리는 다르기 때문이다. 귀족들 간의 사교를 위해서 혹은 어른이 어릴 적 들었던 이야기를 이용하여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교육적으로 또는 오락거리로서 이리저리 현실에 맞게 바꿔서 이야기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화를 말하거나 쓰는 과정에서 인간의 가장 깊은 뿌리, 내면 혹은 자신의 역사 또는 선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사유를 담아 상대방에게 각기 다른 목적으로 글자로 기록하거나 말로 전달할 가능성이 높다.

고대 그리스 시대 플라톤(Plato)은 “동화가 아동에게 끼칠 수 있는 교육적 영향이 지대하다는 인식”을 했고 중세시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자신들의 종교철학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동화를 활용”했으며 계몽주의 시대 대표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와는 다른 입장을 지닌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는 “아동들의 정신과 마음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동화”라고 생각했고 “1800년 전후가 되면 독일의 귀족이나 상류 시민계급조차도 동화를 아동 교육에 활용했다”(김정철 25-28). 대개 작품을 해석할 때 신앙과 이론을 통해 인간의 사유를 분석하듯,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왔던 민족성과 역사와 사유가 인간에게는 잠재되어 왔던 것을 동화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벼운 거 같아 보여 단순히 아이들의 오락거리로 이용한다고 극단적으로 동화를 치부할 지라도, 인간과 인간이 계속해서 전래되면서 위에 언급했던 요소들이 함축되고 더해지고 변형이 되는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금기와 선과 악을 정해 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리고 다른 장르보다 순수한 자세로 마음의 문을 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읽는다. 이를 비추어 보면 "스크라이커"의 모든 전설과 신화와 동화는 남녀노소, 사회지위 상하 관계없이 관객들에게 공통된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도구로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관객들의 잠재를 끌어 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요정 스크라이커는 사회에서 낙오되어 있고 연약하며 무언가에 휩쓸리기 쉬운 존재인 미혼모 조시와 릴리에게 접근을 하였다. 조시는 영아 살해 미혼모로서 그리고 릴리는 영아 생산 미혼모로서 사회의 관리가 필요한 대상들이며 약자들이다. 요정 스크라이커는 굉장히 인간들의 물질성과 이기심에 피폐해있다. 그녀가 분명 인간에게 복수하려는 이유는 이해가 되지만 관객은 그녀가 왜 하필 미혼모들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고, 어떤 존재이며 어디서 왔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단지 추측만 하게 한다. 처칠이 관객들에게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상당히 현실세계와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처칠은 극단적으로 중심 내용만 언급하고 구체적인 것은 넘겨 버린다. 이에 대해서 더 언급하자면, "노간주나무" 맨 처음 부분에서 한편으로 생각 할 수 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옛날 옛적에’다. 장소 및 시간적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장소도 없으며, "노간주나무"처럼 아예 주인공이 태어나서 새엄마와 만나는 사건이 시작되기 전은 거의 한 문단 선에서 간단하게 마무리 지어버린다. 결론 부분에 설명하겠지만, 이 극에서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시간이라는 차원은 중요하지 않다. 만약 동화와는 다르게 신화나 전설을 차용하면 구체적인 극의 배경이 생겨서 곧바로 관객은 과거의 시기, 현재의 시기 그리고 미래의 시기를 나눠버리기 때문이다. 처칠에게 극에서의 시간은 당분간 이들 만의 세계에서 혼재의 차원이다. 그리고 관객이 앉아있는 현실의 지금 사태 만 따로 지정해 놓은 것이다.

몸이 망가져 있는 요정은 세상에서 가장 약자인 이 둘에게 복수를 가하려고 한다. 그런데 복수의 대상은 인간의 미래, 즉 아이들이다. 인간에게 미래가 없으면 희망도 없다. 또한 미래가 제거 되는 것은 인간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요정은 이 둘에게 환심을 사기위해 갖가지 다양한 변신들을 일삼는다. 그리고 물질까지 준다. 스크라이커는 릴리에게 인류 역사상 최고의 문명 중 하나이자, 이제는 생존에 필수적인 돈으로 환심을 사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경제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정신적인 부분만 놓고 보더라도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서 돈이 생겨나지 자급자족한다고 해서 돈이 그냥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일을 하지 않고 마법에 의해 돈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은 아주 매혹적이고 동화에서도 아주 해피엔딩이 이뤄질 법한 일이다. 그러나 악의를 가진 선한 행동은 자칫 주인공을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 사과에 의해서 머리가 잘려 나가는 거처럼 말이다. 그리고 중대한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릴리와 스크라이커의 직접적인 만남으로 아주 가까이 관계를 맺는 계기는 그게 본의 아닌 상황일지라도 결국 현실 세계에서나 동화의 세계에서 가장 소망하면서도 삶의 필수요소에서 시작된 것이다.

 

릴리: 그런데 왜 여기에 당신이 있나요?

스크라이커: 나 여기서 좋은 일 하려해. 나는 착해. 너, 의심하는 것처럼 보 이네.

릴리: 아니요, 물론 그런 건 아니에요.

스크라이커: 난 착한 요정이야.

릴리: 당신은 좋은 마법을 쓰나요?

스크라이커: 내가 하는 게 바로 그거야.

릴리: 그러면 당신은 저한테도 그렇게 할 거에요?

스크라이커: 너 돈이 어디에서 나왔다고 생각해?

릴리: 제가 감사할 줄 모르는 건 아니에요.

 

LILY: And why are you here?

SKRIKER: I am here to do good. I am good. You look as if you doubt that.

LILY: No, of course not.

SKRIKER: I am a good fairy.

LILY: You do good magic?

SKRIKER: That's exactly what I do.

LILY: And you'll do it for me?

SKRIKER: Where do you think your money comes from?

LILY: I'm not ungrateful. (257)

 

일반인이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인간과 요정이 대화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이다. 요정이라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인간과 관계를 하고 서로 영향을 직접적으로 주고받기 때문이다. 비현실세계의 존재는 극작품에서는 자연일 수도 있고 우리 조상들에 의해 끊임없이 전승 되어온 그 함축적인 것들의 근원일 수 있다. 이 대화의 순간은 과거와 현재와의 만남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인간들이 실재 역사에서 짓밟아 놓은 모든 것들의 드러내지 못했던 진실의 마주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가능 했던 전제이자 조건은 바로 등장인물의 ‘무감각성’을 들 수 있다. "노간주나무"에서처럼 마를렌(Marlene), 금수선공(Goldsmith)과 새(Bird)와 만나서 대화를 하고 아무 의심 없이 대화에서 받아들임은, 이야기의 결말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하나의 전제다. 다른 여러 정황과 의심 그 자체가 순수를 해치고 왜곡된 삶속에서 계속 가려졌다면 진실을 마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무감각성’은 일반적인 선험적으로 교육 받아온 현실적인 이해와 판단을 가진 관객들에게 한편으로는 어색함 때문에 강한 현실 거리감과 의문을 가지는 동시에, 작품 안에서 전제되는 마법 같은 모든 요소들을 모순되게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진실은 만났지만 불쌍한 주인공들은 이해하고 지각한들, 그 진실들을 역사에 쓸 수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스크라이커에게는 자신이 모든 것의 근원이기에, 인간이 알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말해주어도 주인공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반응이 없다. 하지만 스크라이커의 대사들 “대부분의 언어가 불가해하며, 논리 있는 서사를 알아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다른 극적 형태들이 통합적 표현의 부분을 구성하는 어떤 이야기들을 통해 말해지지 않는 거 같다”(Adiseshiah 202). 이들의 만남으로 인해 무대의 배경은 지극히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의, 아니면 저세상에서 이 세상으로의 공간 이동도 아무런 문제없이 이루어진다”(김정철 55). 즉, ‘일차원적’으로 변모하면서 조시와 릴리는 스크라이커의 계획에 말려들어간다. 상반되는 두 차원을 마치 하나의 차원으로 변화한 것으로부터 인간인 주인공은 스스로 왕래하기도 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 만약 그러지 못할 경우, 스크라이커처럼 동물 혹은 요정이 주인공에게 닥친 사건으로 진행이 막히면 초능력을 발휘하여 원만하게 이끌어 주기도 한다. 이 등장인물을 ‘조력자’라고 부른다. “현실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능력과 어마어마한 힘 그리고 기동력을 함께 소유”한 ‘조력자’가 있는 이상 차원으로의 이동을 아주 쉽게 왔다 갔다 하게 된다(김정철 58). 조시는 요정이 사는 세계로 가게 되고 인육의 축제에 참가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상당히 현실과 동화는 확연히 구분을 하고 있다. 문제는 현실세계에 사는 조시마저 동화의 세계에 참여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역겨워 하지만 차츰 무덤덤 해져가고 결국에는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관객은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육의 현장에서 조시는 ‘평면적’인 행동을 취하기 때문이다(김정철 61). 이 부분이 아니더라도 관객들은 거리를 계속 극과 유지하고 있는데, 더 강하게 거리를 두게 하는 요소다. 대개 동화의 세계에서 잔인한 요소는 현대에 들어와서 대부분 검열되어 있는 상태다. 하지만 중세와 근대에는 그러지 않았다.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강한 무서움 혹은 인상을 남기게 했다. 처칠은 21세기 현대에 사는 관객들에게 좀 더 확실하게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동화의 세계와 전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이상한 공간을 가지고 있는 극과는 구분해서 보도록 원했다. 바로 마녀 때문이다.

 

조시: 뭐에요? 무슨 일이에요?

헤그: 그들이 내 몸을 조각조각 잘라 저녁으로 끓였어요. 내 머리 어디 있는 거야? 저거 내 어깨 아냐? 저건 내 발가락이고.

 

JOSIE: What is it? What's the matter?

HAG: They cut me up. They boiled me for dinner. Where's my head? Is that my shoulder? That's my toe. (269)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면서 유행한 마녀사냥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성행했을 때 저술된 "마녀 망치"(Malleus Maleficarum)에 따르면 마녀의 특징 중 하나에 인육이 포함되어 있다(김정철 103 참고). 이전만 하더라도 마녀는 “인간들을 보호하는 야간에 이동하는 선량한 여자”였다(김정철 102). 하지만 기독교와 민속신앙과의 충돌로 인해 인간에 의해 다시 새롭게 마녀를 정의 내리고 좋지 않게 저술한 것이다. 자연과 친숙했고 한 때 인간들의 민족 사상을 대표했던 주술사가 기독교 관련 사제들의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논리로 인해 ‘만들어진 악마’로 변모된 것이다. 또한 여성을 역사상 가장 잔인하게 박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카릴 처칠은 "스크라이커"를 통해 전쟁과 여성과 환경 문제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정치성은 “동시대적 자본주의 발달 뿐 아니라 포스트모던 관전들의 정치적 정체위에 놓인 아이러니컬한 논평을 내미는 종말론의 경고를 근본적인 환경 담론”으로 담아놓은 것이다(Adiseshiah 203). 수많은 전쟁들 가운데 인간의 이기심과 또 다른 이기심이 서로 부딪쳐서 인위적으로 싸우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인간과의 인간, 신념과 신념, 사유와 사유 혹은 신앙과 신앙의 대립가운데 더욱더 여성의 인권은 착취되어진다. 전쟁에서 약자는 ‘대학살’만이 존재 할 뿐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감춰진 역사들에서 더러 존재한다. 마녀로 낙인찍히기 이전의 자연성은 이젠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이들은 점점 인간들의 사고방식 속에서 자연과 함께 피폐해저 가는 것이다.

 

지진. 화산. 가뭄. 종말이 다가오는 기상현상. 질병의 증가. . . . 만약 내 가없어도 봄은 돌아 올 거야. . . . 이것(자연)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위로 받을 수 있어.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 유감스럽게도 말이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태양이 날 죽이려 들지. 봄이 돌아 올 건데 아무도 자라지 않을 거야. 몇몇은 걱정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우리가 아는 세상이 끝날 때 나는 그 주변에 있을 거야. 전례 없는 재앙을 목격하는 거지. 나는 고속도로 연쇄충돌 좋아해. 최근에 일어난 전쟁도 좋구. 스너프 영화 좋아해. 하지만 이번에는 가장 중요한 거야.

 

Earthquakes. Volcanoes. Drought. Apocalyptic meteorological phenomena. The increase of sickness. . . . Spring will return even if it's without me. . . . This has been a comfort topeople as long as they've existed. But it's not available any more. Sorry. Nobody loves me and the sun's going to kill me. Spring will return and nothing will grow. Somepeople might feel concerned about that. I'm going tobe around when the world as we know it ends. I'mgoing to witness unprecedented catastrophe. I like a pileup onthe motorway. I like the kind of war we're having lately. I like snuff movies. But this is going to be the big one. (282-83)

 

자연스럽게 인간도 결국 자연의 한 일부분이기 때문에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생태계적인 순환 고리를 역행하려하지만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부메랑처럼 자폭하게 되는 인간의 모습이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인간들을 복수 해 나간다. 자연이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연에게 복수 당하기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노간주나무"에서 나오는 새엄마는 마녀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인육과 죽음으로 인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새엄마도 인간이지만 인간이 인간을 마녀로 만들어 버린 설정이며, 그 잔인함을 통해 교육받는 아이들에게 자연과 민간신앙의 근원에 대한 경고와 함께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따르도록 충실히 요구하는 것이다. 카릴 처칠은 인위적인 것들, 인간에 의해서 강제로 나누어진 것들을 모두 거부하고 있다.

극의 마지막은 결국 릴리가 자신의 증손녀를 보게 됨으로써 끝을 맺는다. 증손녀는 그의 딸과는 다르게 아주 절제되어 있는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조시의 경우, 릴리와는 다르게 스크라이커의 정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진실들을 알았지만 자신은 인간으로서, 친구 릴리의 아이를 탐하는 스크라이커의 행동에 대해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조시는 요정들이 사는 차원에서의 경험이 오히려 현실세계의 성숙과는 전혀 무관했다. 그녀는 스크라이커의 만족을 위해 더욱더 살인을 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질서 속에서 소외받는 자로서 자신이 인간의 현실 세계에 타협한다면 자신 뿐 아니라 릴리마저도 스크라이커와 인간 질서 어디 하나에 머무르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는 ‘이중 구속자’가 될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는 “조시와 릴리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 네트워크 바깥에 위치해 있다.” 이는 카릴 처칠 초기의 일하는 여성과는 다르다(Adiseshiah 205). 요정 스크라이커에게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그것이 인간 현실 상황이다. 거기에 자신도 몸이 문드러지고 있다. 조시와의 계약으로 스크라이커는 분명 릴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리고 릴리의 아이에게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릴리와의 계약 때문이다. 릴리와 스크라이커는 함께 아이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요정의 세계에 가버렸다. 그리고 릴리가 현실세계로 돌아 왔을 때는 끔찍한 일이 발생하였다.

‘아 씨 나는 속고 계속해서 파멸되었어,’ 우리의 히로인은 고통스럽게 울었다. ‘나는 세상을 구하기를 희망 했었는데, . . . ‘아, 그들은 무력 할 수밖에 없었어.’라고 증손녀가 말했지. 저들은 멍청하고 얼빠졌지 매우 악랄한 악마는 아니야. . . . 늙은 여자는 먹을거리를 내밀었고 릴리는 그것을 가져가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Oh I was tricked tracked wracked,' cried our heroine distress, ‘I hoped to save the worldly, . . . 'Oh they couldn't helpless,' said the granddaughter,'they were stupid stupefied stewpotbellied not evil weevil devil. . . . The OLD WOMAN holds out some food and LILY puts out her hand to take it. (290-91)

 

릴리는 조시와는 다르게 현실세계와 타협하려는 ‘이중 구속자’ 중 하나의 부류로써 이 극에서 충실히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시스템을 알고 요정에게 진실을 알고 심지어 괴상한 마법으로 자신이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수동적인 행동을 취한다. 스크라이커가 더 이상 계속해서 인간을 잡아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릴리와 함께 현실세계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 왔을 때는 자신의 손녀인 늙은 여인과 증손녀(Great-Great-Granddaughter)인 기형소녀를 만나게 된다. 스크라이커가 인간을 괴롭혀서 인간을 파멸 시킨 게 아니었다. 다름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인간을 파멸로 만든 것이다. 스크라이커의 세상 또한 인간이 마치 마녀라고 지칭하고 세계관을 전부 억압해온, 조시와 릴리와 같이 사유 속에서의 ‘이중 구속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지구는 그대로다. 우주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주었지만 인간은 그러하지 못했다. 서로 전쟁과 환경파괴와 이익을 위한 소수자의 핍박 그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 그렇게 파멸해가고 과거를 원망한다. 그리고 과거와 만나는 그 순간, 그 진실 속에는 후회 뿐 아니라 영원한 파멸과 다시 새로운 희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릴리의 미래는 이제 현재이며 현재에 살고 있는 증손녀는 모든 인간이 행한 진실들을 알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재생을 위한 모색의 방법으로 과거의 릴리를 현재 속의 인간으로 받아들이면서 극이 끝난다.

"노간주나무"에서 남자 소년이 죽은 후, 가족들은 그를 먹었고 마를렌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루 종일 울었다. 그러나 마치 중세 시대 형벌 중 박살형을 연상 할 수 있듯이, 죽은 소년의 남은 흔적이 노간주나무 밑에서 날아다니는 새가 되어 사람들의 도움으로 새엄마를 잔인하게 머리를 맷돌로 ‘박살’내어 버린다. 그리고 그 새가 다시 소년이 되어 행복하게 다시 행복하게 살게 된다. 이 나무를 통해 소년은 태어났고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하였다. 여기서 아버지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크로노스(Kronos)의 신화처럼 “남자의 몸으로 자식을 환생시키고자 하는 신화적 아버지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이혜정 296). 따라서 자연이 소년을 잉태하고 다시 재 잉태를 거듭하고 식인으로서 다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주는 당연히 실재가 아닌 상징적인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몰락이후 자연은 다시 인간과 함께 새롭게 태어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모색하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모든 극의 등장인물들의 정체를 다시 재구성할 수 있고 극작가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스크라이커 요정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파괴의 요정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요정들의 식인 행위 그 자체를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정화와 재탄생의 수단이다. 필리핀 부족 중에서는 사람의 시체를 먹는 행위는 자신이 시체를 먹음으로서 그 사람의 기억을 오래토록 기억하는 행위라고 한다. 또는 현대의 수목장에 사람들이 일련의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시체를 땅에 묻게 되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다. 요정들의 세계는 오랫동안 인간의 의식 속에 순수하게 자리 잡혀 있었지만 어느 순간 이도교의 상징으로 낙인이 찍혔다. 근원의 그 자체 자연은 인간에 의해서 파괴되어지고 다시 인간을 잡아먹는다. 따라서 “환경, 사회와 정치 책임의 복합적 퇴보를 이 세계에서 이 위기를 생산했다. 20세기 후반에 환경에 인간 활동의 유해한 영향과 죽음을 이 세계는 시사한 것과 , 비인간 자연세계의 밀접한 관계와 신화 속에 나오는 원형의 복합체 속에 인간과 비인간 자연 세계들을 녹이는 것처럼 이 세계는 보여 진다”(Adiseshiah 207-08). 인간의 이기심은 자연 파괴에서 그치지 않고 제도를 통해서 소수자를 억압하고 이중 구속을 통해 그들의 역사를 철저하게 은폐시켜버리면서 전쟁을 일삼는다. 예컨대, 세상의 기술은 발전하면서도 정작 사람을 위한 최적화는 생각지도 않으며 광고라는 수단을 통해 감쪽같이 모르지만 진실이 아닌 것을 아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게 인간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경고하면서 인간이 인간 스스로 파멸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 의해 변모되어 잡아먹고 있다. 릴리와 조시는 인간의 제도 속에서 마를렌처럼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사실상 현대의 마녀로서 몰리는 억울한 가해자로 낙인이 찍혀있다. 조시의 경우 진실을 앎으로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저항이, 릴리의 경우에는, 무엇이 자기 자신을 인간의 제도 속에서 왜 소수자로 낙인이 찍히는 가에 대한 원인을 모른 채 진실을 감싸 안으려고 한 것이, 오히려 계속해서 사건을 몰고 가듯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는 격이 된다. 작가는 이점에서 인간에게 경고한 것이다. 바로 소수자를 포함한 인간 전체에게 말이다. 바로 친엄마의 무책임한 말 한마디와 아이를 낳고 죽은 것 그리고 새엄마의 이유 없는 살해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박살 형이 그것이다. 그들이 바로 그녀의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들이었다. 동화는 전설과는 다르게 비극이 아니라 희극으로 끝난다. 이것을 어기게 되면 특별하게 잔인한 동화로 인식해버린다. 이러한 것들은 전승되어진 자연스러운 구전동화보다는 목적을 위해서 임의로 만들어진 내용이 많다. 또한 일반적으로 동화는 교훈을 주며 희망을 준다. 이러한 과거의 것들이 현재의 우리와 만날 때, 잠시 계속해서 달려 나가는 거침없고 반성 없는 인간들의 시간을 거스르고 요정들의 세계 혹은 소수자의 세계 또는 과거에서 지금 이순간의 인간 세계를 바라다보는 교훈을 이 작품은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림형제의 동화 "노간주나무"에 담겨 있는 동화의 이론을 통해서 카릴 처칠의 "스크라이커"의 정치성을 찾아보는데 주력하였다. 그런데 사실 동화의 이론만 놓고 본다면, 이 작품을 해석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음을 경고하는 바다. 왜냐하면 처칠의 극작품 마지막에서 모든 것이 맞아 떨어 질것 같았던 동화 세계의 법칙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바로 ‘선택받은 자’의 최후 때문이다. 조력자는 선택받은 자를 올바른 길로 혹은 진실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행복한 결말을 이끌어 나가야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이 극의 마지막을 알고 있다. 완벽하게 행복한 것이 아닌 열린 결말로서 말이다. 우리가 이루어 나가고 싶어 했던, 그토록 간절하고 싶어 했던 것을 이뤄주는 동화의 세계를 처칠이 해피엔딩에 스스로 방해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동화이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전설과의 차이점이다. 본문에서 이미 수차례나 언급한 부분이 있다. 바로 신화와 설화에 나오는 요정과 동물과 괴물이다. 이미 이들을 극작가는 텍스트 면전에다가 배치해 놓은 상황이었다. 동화의 세계가 관객내면을 자극 하는 문학이라면, 전설은 왜 현실세계에 말도 안 되었던 일이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남아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해명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처칠은 바로 현실과 과거, 전설과 동화와 현실, 모든 문제들에 대한 모순 및 해결방안, 소수자가 포함되어 있는 모든 인간들 그리고 난해함과 이해 가능함을 융합시켜 놓고 차이들 속에서 서로 논의를 이끌어 나가기 위한 정치적인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관객들은 "스크라이커"를 통해 끊임없이 동화의 세계와 현실세계와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진행하면서, 작가는 직접적으로 목적이 담겨 있는 대사와 알 수 없는 난해한 대사를 함께 집어넣어주었다. 알 수 없는 배우들의 행동들은 수많은 동화와 전설의 등장인물, 배경과 행동들이 정치적인 논쟁거리를 자연스럽게 생산하고 있다. 이미 관객들에게는 카릴 처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어와 이해하기 힘든 여러 극 중 장면들이 친숙한 동화와 신화에 대한 충격적인 요소들에 부합되어서, “관객들의 불이해와 혼란을 강화해서 정치적 논쟁거리로 이끌었다”(Adiseshiah 204). 그리고 어색하고 이해할 수 없는 장치들과 함께 은폐되어지고 환상이라고 치부했던 과거의 어린 시절 순수했던 이야기들, 자연적이고 민족적인 요소들을 끌어내면서 관객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들에 대한 정치적 저항성을 깊이 빠지게 함을 이용해 그녀는 브레히트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뤄가기 위한 단계에 한 발짝 조금씩 올라서고 있는 것이다.

Works Cited

 

김정철. "그림형제의 동화". 대구: 경북대학교출판부, 2008.

권혜경. 현대 영국희곡 연구동향 베케트, 스토파드, 처칠을 중심으로. "지금 영어영문학은 어디에 서있나? 영어영문학의 최근 연구 동향" 새한영어영문학회특별학회 발표집 (2011.1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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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류 마사오.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2 Vols. 서울: 서울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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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mm, Brothers. "The Juniper Tree." Grimms' Fairy Tales. New York: Penguin(USA), 1996. 274-82.

Reinelt, Janelle. "Caryl Chruchill and the Politics of Style." The Cambridge Companion to Modern British Women Playwrights. Ed. Elaine Aston and Janelle Reinelt. Cambritdge: Cambritdge UP, 2000. 174-93.

 

 

 

 

 

 

 

 

 

 

 

 

 

 

 

 

 

 

 

 

 

 

 

 

 

Abstract

The Politics of Skriker: Its Reading based on

the Fairy-tale Theory in The Juniper Tree

Park Hyeong-rak

Hidden behind the fairy-tale exist special implicit rules. Readers of the fairy-tale, however, involuntarily absorb these laws. The strange part of the tale is that humans speak to animals or elves that they can easily travel in and out of dimensions and that several types of brutality sometimes exist in the story. The characters do not have a particular response to the inhuman situation because of the implicit rules. They can sometimes solve insuperable problems from these rules. Readers are attracted to whatever direction the writer wants to lead them. They will learn about taboo and recognize good and evil after reading fairly-tales. In the middle ages and through to the modern age, the target of its writer has been adults as well as children. Therefore, fairy-tales could be a social, national and political phenomenon. Caryl Churchill's Skriker is not a fairy-tale but she borrows the sets and structures from many fairy-tales and myths. She write many experimental plays, but Skriker is very different from the others, in that it is based on the aesthetic theory and the fairy-tale plots. The main elf in the play, named Skriker, occasionally refers to current political and environmental problems. Even if the audience does not fully grasp the theme in Skriker, some of the concepts in the play go to the root of the audience’s subconscious though well-known myths and stories of the past. Finally, they clearly see the politics of Skriker, but become seriously concerned with fairy-tale and esoteric parts of the 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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