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9. 20:05ㆍLiteratur/English
읽기와 반응하기 (Reading and Responding)
석사과정 201180142 박형락
모든 장르의 역사는 창안의 역사다. 창안(invention)은 예술사조에서 혁신적인 역할을 해왔다. 문학도 역시 그러하다. 문학은 시대를 증언하기도 하고 하나의 새로운 생각들을 생산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유용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이해하기 힘들고 복잡하고 모순되는 것을 그 자체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엄청난 힘들을 부여 시키게 한다. 이러한 힘들을 부여시키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선 독자는 책을 읽어야 하며 거기서 새로운 인식을 부여 받아야 한다. 책의 텍스트 그 자체는 머물러 있으나, 그 텍스트의 읽기 와중에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는 갈라짐 속에 파고 들어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독자 자신은 수많은 정치 또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교육에 의해 체계화 되어있고 관습화 되어 있다. 이 숨어있는 갈라짐 속에 읽기를 통해 타자를 수용하고 만나게 된다. 이는 모든 체계의 전복의 가능성을 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힘인 것이다.
창조적 읽기 (Creative reading)
오늘날까지 지구상의 많은 곳은 시간보다는 기후 상황에 의해 지배받고, 그와 더불어 수량화 할 수 없는, 직선적인 균등을 알지 못하고 항상 진전하는 것이 아니라 소용돌이 속에서 움직이고 정체와 돌연한 흐름에 의해 결정되며, 지속적으로 변하는 형태로 되돌아와서 어디로 향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크기에 의해 발전되는 것은 아닐까요?
(제발트, 벨헬름 게오르그. 안미현 역. 『아우스터리츠』. 서울: 을유문화사. 2009. 114)
타자는 사유, 이해, 상상, 감정, 지각을 위해 문화가 제공하는 지평의 외부에 있는데, 익숙한 것을 구성하는 똑 같은 작업에 의해 생산됨으로써 접근 가능한 소재와 함께 발휘된다. 이 타자는 개인의 정신세계의 존재하는 구성요소들에 충격을 가하도록 하거나, 그렇게 허용하는 것으로서, 고유한 개인에 내재한 특수한 문화적 장에 충격을 가하는 것을 언어적 창조라고 한다. 기존의 이해방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완전한 새로운 존재자를 함의하는 타자성은 창조의 사건을 글쓰기로나 과학적, 수학적 또는 철학적 사유, 정치적 실재 그리고 그리기 또는 음악을 통해서 세계 속에 제공된다. 이는 여러 분야에서 특이한 창안들에 반응으로 알릴 것이다. 이러한 반응들 가운데에 읽기가 있다. 읽기를 하면서 해당 분야를 향해 텍스트를 분석하게 될 것이다. 텍스트로 인쇄 되어있는 표식들뿐 아니라, 함축과 연관성도 고려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 와중에 작품에서 타자성과 창안성 그리고 특이성에 반응하는 것을 시도 할 수 있다. 창조적 읽기는 기존 관습들을 넘어서는 읽기다. 이러한 방법으로의 읽기는 필연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외도적인 읽기일지 몰라도, 작품과 맥락에 의해 전체적으로 독자들의 심리학적 성격을 포함한 프로그램 되지 않은 상태다. 이렇게 창조적으로 읽는 것은 다른 작품을 읽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 계속 다시 생각 한다. 모든 읽기는 행동 못지 않는 사건이다. 창조적 읽기의 사건은 타자성의 경험을 통한다. 이는 특이한 종류의 수동성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수동성은 언어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열어 두는 타자와의 대화다. 작품의 특이성에 반응하는 것은, 특이한 반응에 개별성을 단언하는 것이다. 독자와 책 사이의 일반화 할 수 없는 관계가 페이지에 있는 단어들의 잠재적 의미하는 것을 열어둠과 함께 일어난다. 창조된 독립체는 최소한 부분적으로 추론되고 복사될 수 있는 규범들과 규칙들에 의해 구성된다. 이는 재설정된다. 대상은 이해하기 힘들고 해석 불가능으로 남겨지지만 과거로 거슬러가서 타자로부터 동일자로 이행하는 객관화를 한다. 그리고 실체화는 수정 가능하게 남는다. 반응의 중요한 부분은 새로운 부분에 맞닥뜨린다. 이는 의미화된 독립체로서 작동하는 작품에 따라 옮길만한 규칙들의 정확한 이해를 성취하는 작품 방식 절차를 헤아린다. 명확하고 수정된 경계지들에 동종 독립체라는 뜻에서의 문화는 전혀 없다. 문화적 토대와 습관들과 관례들 그리고 산물들이 있다. 거대한 것으로 합쳐지거나 작은 그룹들에 나누어 질 수 있는 집단들이 이질적이고 서로 내부에 흘러 들어가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변하는 조건으로 있다. 사람마다 그리고 순간마다 다른, 맞물리고 겹치고 때로는 모순되는 문화적 체계의 변화하는 질서에 의해 매개되는, 세계에 대한 개별자의 독특한 특이문화에 거주한다. 이 문화는 논쟁의 맥락에 따른 특정 장소와 시간 그리고 모든 형태에서의 인간적인 그리고 비인간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중요한 부분으로 한다. 불명확하고 충돌하는 문화적 분류들의 참가자들처럼 우리 개인적 역사의 유산에 각자가 중복시키거나 끼워 넣게 된다. 몇몇의 사람들을 우리가 마주치듯이 우리는 본문을 독특한 문화적 생산물을 읽는다. 읽기의 과정은, 문학을 포함한 것들을 자기 자신이 소유하는 독특한 특이문화에, 형성하는 문화적 장을 종속하는 과정이다. 그것들은 역사와 구역 그리고 언어학적으로 포괄적인 인습들의 문학 제도에 형성된 것들을 내 주변의 문화적 재료로 흡수해간다. 그래서 더욱더 많은 마주치는 것들이 있게 된다. 반응에는 다른 독자나 읽기가 없는 동일한 문화적 모체까지 구성될 수 있어서 불가피한 독특함이 있다. 이는 친숙함과 이타성, 인식과 낯섦 둘 다 찾을 것이다. 작품과 나의 문화적 분야들 둘 다 내부적으로 비논리적이며, 작품의 문화적 분야들의 몇몇 부분은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창조도 마찬가지로 타자의 환영에 문화가 긴장들과 사회적으로 배제 되어 구성되는 문화에 일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창조적 읽기는 독자의 특이문화에 균열 되고 압박 받아지면 타자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놀라움과 경이 (Surprise and wonder)
만약 그의 아들이 도둑처럼 밤에 찾아온다면 그리고 그가 도둑이 부르는 소리만을 기다린다면 그는 아들이 부르는 소리를 결코 듣지 못할 것이다. 기대하지 않을 걸 기대한다면 그가 기대하지 않는 것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가 기대하지 않는 것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모순 안의 모순, 어둠 안의 어둠이다.
(쿠체, 존 맥스웰.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서울: 책세상. 2001. 106)
타자성으로 충분한 반응으로서의 창조적 읽기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있다. 능동적 양상에 집중하여 느끼고 생각하는 습관적 방식들을 중단하는 것과 타자의 특이성으로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한다. 놀라움은 놀라움을 예상할 때에 내다 볼 수 없게 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적 이해하기와 진정한 배우기 그리고 진정한 가르치기는 타자에 의해서 놀라움으로 오직 존재에서만이 성취될 수 있다. 놀라움은 그 스스로에게 있는데, 사고와 감정의 습관적 양태들의 재 배열하는 경험을 의미한다. 습관적 양태들에 의해 등록될 수 없는 원인이 될 수 없는 감정과 형태와 사유와 단일체로 마주쳐서 일어나는 경험이다. 이해하려고 고심하기 전에 작품에 의해 놀라움을 받는 것은 이미 그것으로 반응 된 것이다. 단어의 일상적 내포에도 불구하고 단일의 사건 또는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점차적으로 변화하기 쉽고 많은 다른 반응들에 섞여지기 쉽다. 작품에서 첫 마주치는 것은 매우 작은 충격을 만든다. 일반적인 규칙과 체계를 발견할 수 없는 특이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느낌은 자신과는 다른 것과 관계할 때 드러난다. 놀라움과 경이 사이에는 강한 접속이 있다. 그것은 미학적 창안의 특징인 모순으로 지속적인 놀라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이함(thaumazein)은 미학적 기쁨의 중요한 요소로 놀라움과 경이 둘 다 실제적으로 의미 한다. 경이는 예술에서 숭고의 전통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예술 작품의 창안성으로 대답하는 구성요소로 간주된다. 그것은 모든의미에서의 창안을 반응하는 것으로서 경이를 한다. 창안은 우리 이전에 지금 그리고 창조자들 또는 창조자의 창안성에 있는 곳 그리고 그 가운데에 드러나 있는 남아있는 것에 창안되었었다. 읽기는 감정적인 연속적 사건들처럼 의식적으로 인지하는 어떤 심리학적 용어들에 전체적이고 창조적인 이해되는 것으로서의 잠재적인 오독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으로의 사건은 주체가 전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나, 이것이 변화들로 스스로 느끼는 마주침으로부터 초래되기 이전 의식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의 오랜 시간이다. 작품은 새롭고 창조적인 개입(engagement)을 다른 사건이 작동하는 이전에서 놀라운 존재를 위해 잠재력 없이 장황한 기간 동안의 기억에서 열린다. 이러한 문학적 놀라움은 예측 불가능 해야 하며 습관적인 기대 혹은 타자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부추김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습관적 이다는 것이 놀라움으로서의 반대는 아니다. 작품의 가까움에 의해 놀라워 질 수 있다. 낯섦(strangeness)은 실제로 찾는 것을 기대했던 친숙한 곳에서 경험하기도 한다.
문학적 읽기 (Literary reading)
우리는 그것을 사실에 입각한 보고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 작품은 구체적인 사항은 모두 피하고 있다. . . . 크리스타 볼프와 SED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테러와 억압이 현실로 존재하고 있음을 갑자기 알게 되고 몸소 체험한다. 마치 낭독회가 통제를 받고 독자와 작가가 괴롭힘을 당하며 무고한 시민들이 감시받고 체포되었다는 것을 그전에는 몰랐기라도 한 듯이. 그러나 이처럼 뒤늦게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깨달음을 사방팔방으로 떠벌리고 다니라고 그 누구도 그녀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가 원한다면 실로 손쉽게 서방세계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남아 사회주의 계획을 고수하였다. 그것은 분명 잘못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그녀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이덕형, 김수정, 송윤희 공저. 「통일 뒤에 남는 것 – 크리스타 볼프 논쟁」. 『독일, 통일 이후가 문제였다』.
대구: 경북대학교출판부. 2007. 159-94. 189. 울리히 그라이너. “섬세함의 부족”. 차이트 1990.6 재인용)
문학은 각각의 음소들이 단어가 되고 그 단어들이 문장이 되면서 텍스트로 쓰여지고 이루어진다. 그런데 진정으로 그 텍스트가 문학이라는 말로 지칭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건들이 필요하다. 문학에는 끊임없이 미끄러 질 수밖에 없는 의미가 있고 의도가 있다. 그리고 독자는 바로 그 텍스트에서 텍스트의 가치를 판단하며 의미를 인식하는 사건으로 문학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독자는 경험한다. 이 인식은 단순한 인식의 변화가 아니며, 새로운 열림으로 도전받고 새롭게 구성되며 타자성에 대한 초대에 관한 것이다. 언어 그리고 다른 기호 시스템들을 포함하는 생각들과 논증들의 특이성, 창안성 그리고 타자성에 반응한다. 문화에 삽입되는 문학적인 작품에 반응한다는 것은 문학 형식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문학적 규율의 관습적인 일상들에서의 친숙함이라는 효율적이라는 것을 사용한다. 반응되는 읽기가 성취된다면 인고의 노력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동일자의 궤도에서 작품을 불러 일으킨다. 대상의 짜임들을 객관적으로 수행되고 보고될 수 있다. 그 문학적 작품은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독특한 대상이 두드러지는 절차를 밟는다. 감각에서의 독특성은 소리의 울림, 리듬적 특성들, 타자 작품들을 넌지시 암시, 보고된 사건들, 장소들, 날짜들, 문법적 분류들, 단어의 의미들 같은 상당수의 접속된 요소의 독특한 짜임으로 엄숙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는 습관적 체계를 요구하지 않으며 판단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문학적 작품에서 읽기를 할 때, 접속된 요소들의 특별한 개 이상의 단어가 함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들의 덩어리 보다 많이 있다. 그것은 분석할 수 없는 특이성으로의 반응이다. 독창적으로 쓰여진 저작물에 대한 읽기의 행위는 오독하기 이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독립되는 독자들이 반응하는 이전에 존재하는 대상이다. 특이한 주체가 부분적으로 작품의 읽기에 생산한다. 독자는 그럼으로써 존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읽기는 특별한 맥락에서 특별한 독자를 위해 존재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서, 작품을 구성하는 쓰기의 타자성과 특이성의 수행이다.
다시 읽기 (Re-reading)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이미 완성되어 새겨진 그림들을 다루는 것으로, 진리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 그 누구에 의해서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그 그림들을 응시한다는 거에요.
(제발트, 벨헬름 게오르그. 안미현 역. 『아우스터리츠』. 서울: 을유문화사. 2009. 82)
다시 읽는 다는 것은 문학에 대해 재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다. 읽기 경험의 반복은 강하고 그 이상의 힘이 있다. 반복하며 읽는 다는 것은 그 만큼 다시 읽기를 고조시키는 것이며 풍부하게 이해하는 느낌에 완전히 친숙하게 된다. 창안적 작품에서 다시 읽기는 첫 번째 읽기와는 다른 새로운 존재가 들어온다. 이 들어오는 것은 독자의 경험이 변형된 초기의 읽기 경험에 대한 기억과 그 이전에 읽었던 존재가 작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비교적 하찮은 것들을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를 읽음으로써 매우 신선한 보상을 계속해서 제공받는다. 창안적 작품이 처음 등장했을 때 창안성이 없었을 지라도 나중에 창안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처음에 강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 나중에는 덜 충격을 가지고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읽었던 작품은 친숙하다. 그 친숙함이라는 것은 참신함을 계속해서 나의 마음속에 몰아 치는 것이고 잠재적 도전을 열어 놓는다. 새로운 것의 도래가 낡은 것의 특별한 재 형성일 수 있기도 하다. 이러한 꼼꼼한 반복이 독자들에 끊임없는 변화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적 맥락과 읽기의 도움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반복되는 긴장(suspense)의 현상을 설명한다. 긴장은 문학적 긴장과 단순하지 않은 반응이 사건으로 언어로서 재현될 때 일어난다. 이러한 읽기는 상당히 가치가 있으며, 설령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달리 새로운 것을 얻지 못할 지라도 그 행동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며, 처음 새로움을 얻었던 것을 다시 알게 해줄 수 있다.
반응으로써 읽기 (Reading as response)
마치 절망에 찬 한숨 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들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마치 사진 자체가 기억을 가지고 우리를 기억하며, 살아남은 우리와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이 이전에는 어떠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아. (제발트, 벨헬름 게오르그. 안미현 역. 『아우스터리츠』. 서울: 을유문화사. 2009. 201)
기존의 교육에서는 보통 다른 사람들의 반응들을 중개로 경유하여 문학적 작품을 통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가르침 받는다. 미리 형성된 시선들과 감정들은 특별한 현상들과 연관되어 있어 확실한 단어들과 구문들에 의해 작동함으로써 작품에서 충분한 관계함을 억제한다. 이러한 보통 인지되어있는 거 보다 반응과 반응성의 개념들에서 더 큰 문제를 지니고 있다. 바로 신비평 때문이다. 독자들의 개인적이고 독특한 독자성(identity)을 반응성으로 강조하고 있다. 만약 누군가 다른 사람의 반응을 복제한다면 질책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반응들을 발달 하는 것에 독려 받고 있으나, 정확히 작품의 정수를 나타내어도 존재하는 비평 작품을 반복했던 것에는 좋은 평을 듣지 못한다. 이러한 요구들은 계획적인 주관주의적 그리고 기계적인 표절을 조성할 수 있다. 작품의 독특성으로 반응하는 대부분의 충분한 방법은 읽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읽기가 모순되어 해명하고 실패에 대해 질책 될 수 있을지라도, 반응의 개념의 복잡한 암시는 아니다. 반응은 반영(reflection) 또는 메아리는 아니며 오직 반복의 회피를 해야만 한다. 역설적이게도, 재현은 독창적 활동을 발생하며, 반응 할 때 마다 다르게 발생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독자의 반응이 관계하여 타자에게 반응하는 것이라면, 작품에서 독자의 반응은 자기 자신의 작품은 아니다. 읽기로 부 터 존재로 다가오는 사건에 타자로서의 작품이다. 항상 다르겠지만 존재 없이 그리고 결말 없이 오직 반복 가능한 사건이 포함되어 있다. 독자의 이해의 창조적 활동 그리고 한계들의 인지를 통해 일어남으로써 작품의 창안적 타자성은 특이성을 발한다. 반응이 읽기의 특별한 행위의 바깥으로 자라나기 때문에, 작품의 특이성이 특이적 반응에 의해 단언하고 확고히 할 수 있다. 독자는 문화적 표상처럼 반응할 것일 뿐 아니라 특이성을 문화의 결정들에 의해 마찬가지로 소진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답으로부터 존재 속으로 가져와서 창조적으로 반응한다. 창조적 읽기는 전후 그리고 안팎의 대립을 쫓아낸다.
창안으로써 읽기 (Reading as invention)
여러 개로 복합된 독일어 단어들로 이루어진 명칭과 개념 들을 마침내 파악하게 되면, 나 자신이 재구성하고 추정한 의미를 모든 단어와 다른 맥락 속에 배열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힘들게 노력해야 했지만 항상 그 맥락을 놓칠 위험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단 한 장을 읽는 데 밤중까지 걸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고, 그같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가운데 많은 것을 놓쳐 버렸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는 사회생활의 미래주의적인 변형을 보여주는 게토 제도가 내게는 비현실적인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러가 지극히 세부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었어요. (제발트, 벨헬름 게오르그. 안미현 역. 『아우스터리츠』. 서울: 을유문화사. 2009. 259)
독창성의 완전한 의미는 외적, 내적 압력의 결합이 개인이나 집단으로 하여금 새로운 지반을 개척하는 것이다. 동일자에 대한 타자의 난입을 야기하는 예술작품을 창조하도록 만들 때 성취된다. 이와는 대비되게, 창안은 모방되는 동시에 창안적으로 전개되고 개작되며 도전 될 수 있는 재료의 새로운 배치이다. 창안은 항상 타자의 창안이다. 그리고 타자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서 경험된다. 왜냐하면 창안은 의식적 개인의 의지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매우 독창적이고, 기존 규범을 넓히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는 작품을 써낸다는 것은, 문화적 틀 속에, 현재의 규범과 관행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들여온다는 것이다. 자료들을 뒤흔들어 내적 모순들과 모호함들을 강화하고 성향들을 과장하면서 틈과 긴장을 이용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문학적 규범에 낯선 것을 도입하거나 모순을 극대화 시키는 방법이라 하겠다. 이러한 수용방식인 읽기는 단어에 있는 표현에서 움직인다. 이러한 반응에서 새로운 작품이 요구된다. 쿠체의 경우 『점수를 배가하기』에서 카프카의 단어 미로를 통해 단계적으로 그를 따라 자신의 길을 쓴다고 하였다.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와 읽기를 다른 독자들에 의해서 특이적 반응들을 통해 스스로 창안적 기능을 한다. 창안적인 작품이 주는 창안적인 반응들로 일어나는 과정은, 모든 창안적인 발생들이다. 창안을 위해 결코 무에서의 창조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항상 문화적 상황으로의 반응에 있다. 신선한 창안들이 발생하는 작품들에 반응을 하는데, 이러한 창안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다소 어렵다. 창안적인 반응에서 독자는 그 또는 그녀의 형상(shaping))에 의해 언어의 작품 형상에 답변을 시도한다. 몇몇 강도로 문학의 성질을 차례대로 성질을 띌 것이고, 동일적인 창안적 종류의 반응에 독자들에 요청된다. 이 반응들의 끊임 없는 사슬의 전망은 경종을 울릴지 모른다. 문학은 어떠한 본문의 결핍에 의해 정확히 특성화 된다.
요약한 문헌
Attridge, Derek. The singularity of Literature. New York: Routledge. 2004.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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