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을 가다.

2014. 1. 11. 23:43Culture/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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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는 조선시대 상당히 큰 행정 도시였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인구수 급격히 줄어들면서 지위에 타격을 입은 지역이다. 그러나 여전히 진주는 한때 잘살았던 도시 한때 영남권에서 큰 행정도시 였었던 추억이 여전히 남은 곳이다. 



          진주에서 진주성과 논개는 지금 관광산업에서 주력 이미지로 사용된다. 물론 여러 반론도 있지만 임진왜란때 진주성은 한강 이남에서 군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일본은 판단한 곳이다. 그래서 진주성은 조선에서는 일제 침략 때 한강이남 최후의 수비 거점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당연히 일본입장에서도 진주성만 함락하면 적어도 조선 경상권 일부를 휴전을 통해 영토를 뺏을 수 있다는 카드로서 진주성 전투에 임했을 것이다.





          역사라는 것이 솔직히 말해 민족성과 그 때 당시 글을 썼던 주류의 성향에 맞게 글을 쓸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후손들 (우리들) 에게도 그렇게 느끼고 거기에 맞춰서 읽고 감동을 받고 싶어한다. 따라서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수비하여 장렬히 전사했던 장군들을 우리 후손들은 높이 떠받들 수 밖에 없다. 2차 진주성 전투때 함락 당시 끝까지 수비 항전에서 반대 그리고 회의적인 입장이었던 진주 목사는 나쁜 이미지로 그려질 수 밖에 없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이건 아직까지도 후손들에게 논쟁이 있지만... 어찌되었든 일본에게 결국 2차에 걸쳐 수비하다 진주성은 함락당하고 만다. 그리고 일본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다시말하지만 우리들이 원하는 느낌과 그 감동을 받고 싶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객관적으로 비춰본다면, 진주성 전투는 일본군에게 북진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게 했고 조선은 수비 실패에 대한 진주 시민들의 학살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임진왜란 이후 진주는 행정구역이 개편된다. 진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박살난 상태였고 인구도 확 줄었다.<-정확한 인구 수치를 밝힌 기록이 필자가 알기론 없다고 한다. 전부 역사가의 주관전 추정치일 뿐이다. 즉 객관적인 자료는 행정구역 개편 이거 하나 뿐이다.)





          지금의 진주는 과거의 진주 처럼 화려한 도시는 아니다. 그러나 역사의 기억이 현대와 잘 공존하면서 절묘하게 도시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 이미지 컨셉을 끝까지 유지해서인지 낯선 사람이 가도 불편하지 않다. 앞으로의 진주는 계속 진주성과 함께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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