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또(Antonin Artaud)의 잔혹극(The Theater of Cruelty) 강의록

2012. 8. 9. 18:29Literatur/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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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복이라는 것 자체가 차이의 생성이다. 삶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하면서 파괴적이다. 일자와 타자는 상반되어 있다. 일자는 이속에 이미 타자가 들어있는 상태다. 그리고 타자는 저열하다. 이것이 기원이 고 우열이 되기도 한다. 대리 보충하고 상호보충한다. 어둠과 빛 처럼 말이다. 개념이 나오는 것은 상반되는 것이다. 서로가 빚을 지게 되어 있다. 상호 보충이기 때문에 기원은 없다. 다시 끝내고 다시 시작하지만 있을 뿐이다. 파롤이 랑그보다 먼저인데 이미 내재속에 랑그가 있기 때문에 빠롤이 생성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상호 보충의 개념이다. 잔혹극이 시작하더라도 재 탄생이고 그것이 스스로 있음이다. 차이있는 반복에서 재현은 하지만 다른 재현이다. 재현의 경계가 있다. 재현과 비 ㅈ재현이 만나는 장소에서 말이다. 자아는 하나의 안과 밖에서의 자아가 있다. 경계로서의 자아로 말이다. 개념이 수정은 된다. 파동은 물질이 대부분을 구성하게 된다. 진동들 자체가 우리의 존재다. 팀파니의 막이라고 할 수 있다. 안 이기도 하고 밖이기도 하는 그 지점인 경계에 진동과 생성이 이루어 진다. 개인이라는 유기체적 삶은 없다. 태어나기 전이든 살고난 후이든 어떠한 경우든 죽음을 맞이한다. 근본적으로의 생의 긍정인 것이다. 인간화 되어진 그리고 인간 위치에 한계된 인간은 신에 의해 생을 빼앗긴 인간이다. 동양연극은 아르또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사가 주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일어남을 통해 선인과 악인 등의 특징을 느끼게 한다. 양식화 라고 하는데 이는 실제적이지는 않다. 상당히 실제 하다고 믿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탈주적이다. 생의 초월적 원리를 알수 있게 하는 것이 예술이고 연극이다. 세잔의 그림에서 감자, 흙 그리고 빛은 생의 힘을 포착한다. 들뢰즈의 초월의 힘은 잠재적이라고 하였다. 오이디푸스의 스핑크스 수수께끼의 정답은 인간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이 있다. 실제가 있으면 재현과 연구와 파악이 가능하다. 해체에서 현재가 있는 가에 대한 의문은 시간들이 점들의 연속으로 이루어 져있다는 것과 상반된다. 현재는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발현되는 순간 현존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신의 입증은 나의 입증이다. 지각 된다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입증한다. 자아속에 이미 타자가 있다. 보유 된다는 것은 재현이 되는 거다. 해체하기 위한 조건은, 현상학적 시간 개념으로 데카르트로 부터 우리가 사유하는 주체에서부터다. 의심하는 나가 있다는 것으로 현재 그리고 현존 속에 내가 있다. 현재 나의 현존성을 보존함으로서 나의 존재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서구의 알파벳은 차이의 체계다. 이는 음성 언어 차이 체계이다. 그러나 상형문자는 형상을 본따서 만들었다. 기호가 가지는 대상 밀집으로 시각적이다. 잔혹 한 것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잔혹하다. 작동하고 있지만 반복되고 차이의 글쓰기가 된다. 차이와 지연에 의해서 말할 수 있다. 부정신학은 저 너머에서의 신의 응답이다. 결국 어떤 분인지 신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말을할 수 있는데 어떤 분인지는 모른다.;;;

          잔다르크 영화는 아르또가 출연한 영화다. 이는 표현주의적이다. 삶은 유기체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나에 대한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더하거나 뺄것이 없는 하나이다. 이를 해체한다. 타자가 함께 되기를 이루어내는 그것 발이다. 하나의 삶을 생각한다. 이 속의 다양성에서의 타자를 사유하는 것이 목표이다. 존재라는 것은 다른 것과의 생성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변화한다. 나는 다른 것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문제가 이때 생긴다. 백인이 일자면 흑인은 타자다. 이항대립적이고 이분법 적이며 중심이 생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서 사유를 해야만 한다. 존재의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 저 너머의 근원이며 정수이다. 사무원과 노동자를 지정하고 질서에 동작하는 그것으로 말이다. 유기체를 토대로 사융하는 체계가 대단히 억압적인 것이다. 일자는 제도에 의해서 주체에 있는 한 자본주의는 억압하기 좋은 존재로 편리하게 이용된다. 앙띠오이디푸스는 유기체적 통일성에 벗어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언어말고 무대효과를 통해 인물과 대사의 동일시를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브레히트는 무대와 객석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였다면, 아르또는 무대가 관객을 둘러 쌓는 것으로 연출하였다. 무대가 관객에게 직접적 영향을 주게 하기 위해서다. 모든 요소에 불구하고 잔혹극이 아니라고 비판될 수 있다. 연출가의 연극이고 체제와 제도로 부터 저항한다. 연출가가 작가에 벗어 놓아도 결국 자신이 배우 등등을 옳아 메기 때문이다. 신학적 연극은 연극의 기원이 있고 유럽연극의 기원이 있다. 이는 디오니소스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미에서의 원시 부족 사이에서는 행해지고 있다. 제의에 가까운 형식으로서 말이다. 신이 없는 질서가 지켜지지 않을 때 혼란이 발생한다. 희랍비극은 신의 존재이며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아는 것으로 시작된다. 신적인 힘이 우리를 관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망각한다. 통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성한 연극으로 가야하는 것은 자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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