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1. 19:24ㆍLiteratur/English
모더니즘과는 단절된 것이 포스트 모던은 아니다. 기억은 고정된 실체화와 같은 것이다. 이는 램과 같다. 연극에서 극작가가 만들어 낸 형식에서 어떻게 사물을 배치하는 것(미장센)으로서 고민한다. 이 미장센과 연극적 용법을 텍스트보다 더 중시 된다. 연출가에따라 장르가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결정 불가능하고 이중적이고 애매하다. 대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고상한 문화는 이제 없다. 대중을 끌어들여야만 산업이 되기 때문이다. 문학이나 예술이 특권적 지위를 누리다가, 이제는 대중을 무시하고 엘리트 주의를 추구하면 살아남기 힘들게 되었다. 여기서 포스트 모더니즘이 등장하게 된다. 문화와 물적 토대의 결합으로 대중의 시대가 등장하게 되었다. 근본적으로는 다른 예술의 양상이다. 산업, 투자, 소비 그리고 통하지 않는 엘리트 주의가 대중의 힘으로 작용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대중의 힘은 환상적이지만 말이다. 기술 발달에 따른 재생산으로 청중들 듣는 그 자체에 있다. 이는 모더니즘과는 반대된다. 타자에 의해서 영향 받는 것이 없다는 의식이다. 자기 자신 안으로 현존성이 몰입되는 모더니즘으로서 말이다. 연출가 또한 텍스트 처럼 억압을 할 수 있다. 수행성 드라마는 자기만의 몰입이 된다면 모더니즘이 될 가능성이 있다. 형식주의적 전통을 확고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사조는 자유롭다. 지적은 하면서도 접어 놓아 자기자신을 전유한다. 아르또는 이에 반복에 대한 거부를 지니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결코 파생적이지는 않다. 예술은 특권적이다. 이는 돈의 힘에서 나온다. 주관적 진리의 순간 포착을 중시하여, 역사적 흐름을 뛰어 넘는 무시간 성을 지니고 있다. 유일 무이한 현존으로 차이가 없으며 반복도 없다. 애초 모든 예술은 반복적이다. 현존에 대해 인간은 욕망한다. 어떤 말과 생각 그리고 시간은 그 자체로서는 현존하고 있지 않다. 독창적 권위가 축소되며 복사본 사이 구별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원본에 대한 욕망은 점점 커지고 있다.
작품 그 자체의 재해석은 연출가의 자의식 표출을 통해 드러난다. 이는 아르또 적이다. 현장성과 미학은 아닌 여러 층위와 일차적이로 즉각적 현존성으로서 수행한다. 여러의미가 사용가능하며 동시에 미학적일 수 있는 논의가 가능하다. 다양한 의작용으로 텍스트는 다시 쓰여진다. 따라서 작품과는 달라진다. 아르또 이후의 트랜드다. 건축에서 먼저 시작되어 ㅆ으며 하나의 문화현상에서 두드러 진다. 전위적인 아방가르드는 계속되는 보더니즘으로서 역사되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스스로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자기 반영적이면서 자기 지시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 수용자 참여적도 들어있는 특징을 지닌다. 텍스트에서의 수행은 수용되고 재현되는 상황과 존재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공연을 통해서 생명을 가진다. 해석의 지펻은, 늘 역사적이고 문화적 상황 및 맥락에서 해석되어 진다. 이러한 연극은 정치적이다.
중요하지 않던 인물이 포스트 모더니즘에서는 중심이 된다. 그러나 그 주요인물이 되지는 오히려 못한다. 여전히 마이너로서 존재되고 거기서 증인으로서만 세계에 놓여있다. 잠재적 상태이다가 필연적 우연이 나타나야한다. 데리다와 아르또의 말 중심이 잔혹극이다. 주인이 절제되는 것 그것이 빼기의 작업이다. 제도권에 있지 않았던 전사가 중심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마이너 하다. 생성이라는 것은 형태로 사유하기에서의 반대다. 형식이 없고 구조가 없다. 복사만이 있고 재현하기만이 있다. 무대에서 현재로 만들어내는 연극이 보유되지 않는 현재를 말한다. 그대로 재현될 수 없는 현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체성은 하나의 형태다. 생성과는 반대의 개념이다. 인물을 보조하는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이의 과정 중에 있다. 하나의 생선이 막혀져 있는 것이다. 권력을 뺀다는 것은 주인과 왕과 주제와 재현의 일관성이 권력의 요소에서 제외한다는 것이다. 늘 바뀌기 때문에 이러한 연극은 불안하다. 모든 것들의 존재를 비평에다가 칼날을 들이댄다. 일상적 시간 흐름과는 다른 혼란의 시간으로 바로잡을운명을 타고났지만 안을 근절 하고 나서 시간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햄릿이다. 무엇인가 한가운데 중간에서 어떤 시간이 아닌 시간으로 종말을 주장한다. 마이너의 사건과 내용들은 뚜렷한 역사적 시간을 가진다. 시간은 경험에서 빠져있는 세상의 혼란으로 생각한다. 생성에서 혁명이 중요한게 아니라 혁명적 되기가 중요하다. 무대에서 일어나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모든 시간이 될 수 없다. 배우들을 규격화하면 메이저다. 사투리 그 자체도 지역에 메여있으면 권력에 속박된 것이다. 언제나 무언가 변이의 가능성으로서 내재성의 장이 필요하다. 코드화 되기 전 상태로, 점점 하나로 굳어지기 전에 작동하고 있던 창조적인 힘이 연극이다. 그 시간 만의 고유한 의미를 빼기 위해 구조와 역사를 빼야한다. 전체주의를 부정하며 빼기를 해야한다. 언어의 장에서 새로이 만들어야하는데 제도가 만들어 내고 있다. 내재적 창조를 흐름시키기 위해서 고정된 존재를 바꿔 되기를 해야한다. 본질은 언제나 우연한 것들의 만남과 생성 그리고 조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행적이고 발화를 통해 법적 효력을 가지도록 해야한다. 불쑥 솟아난 힘으로 기존 권력을 해체시켜야하고, 편집증적 구조를 퇴행시켜야하며, 탈주선 시도해야 한다.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으로 익숙해져 있는 것을 다르게 보도록 시도해야한다. 언어를 일부러 더듬는다. 메이저로 부터 탈주한 개념과 언어로서 말이다. 개인 개인의 발화로 문법 속에 내재화 되어 있는 파롤로서 말이다. 왕이라면 그럴 수 없는 것을 수행시킨다. 잔다르크라는 인물이 클로즈업 될때, 형태를 지우게 된다. 이때 얼굴보다 가까이 윤곽마저 없애게 되는데, 이때가 비개인적인 정동을 가진다. 주체 토대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종속되지 않게 한다. 눈물이 눈물 아님으로 보게 하여 비개인적이고 어떤 정서로서 주체를 해체시키는 작용을 한다. 언어가 어조속에서 변수 사이에 오가게 한다. 지각과 정서 그것은 비 개인 적이다.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 부터 전복하여 전쟁기계를 만드는 것이 마이너 연극이다. 면이들은 계속적 변화로 양태화 된다. 아르또는 이미지로서 사유하였다. 생각이 가시적으로 된다는 관념으로서 말이다. 형태가 무너지는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이다. 물질은 모든 힘들과 싹터서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이미지와 사유로서 있다. 민중극을 경계하여, 다시 권력화 되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가 메이저 체계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욕망의 자유롭게 하는게 아니라 한정된 자유를 주고 환상을 주체로서 주는 것이 자본주의다. 자유롭다기 보다 편집증적인 것이다. 새차,, 새옷 같은 광고에 따른 우리는 소비를 하는 것 처럼 말이다. 자본주의는 많은 것을 생산하고 욕망시킨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에 대한 어느 하나에 집중된 욕망이다. 이는 편집증적인 것이다.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들을 형태로 코드화 시켜 가두어 놓는다. 구조는 중심적이고 ㅁ본질적이다. 이것의 현실에 대한 재현은 확고한 불변 및 갈등구조를 띈다. 익어져 있는 문학 그 자체가 오이디 푸스이다. 유희 및 생성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적인 내용과 형태를 가진 형식은 오이디푸스를 재현할 필요조차 없다. 남아있는 것을 생성이 되게 하고 계속적으로 변이하고 흐름이 되게끔하는 것이 연극의 목표다.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은 편집적으로 자본주의가 만들었기 때문에 분열증적인것이 욕망이 될 수 밖에 없다. 욕망은 편집증을 탈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으로 부터 취약성에 그 원인이 있다. 욕망이 자유로운 흐름인가에 대한 것이다. 때 아닌 때에 우연으로서 잠재적 본질이 실현된다. 이는 미래를 만들수 있다. 시간성이 벗어나서 본질이 된거소 차이로 거슬러 올라가 진정한 생성으로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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